동북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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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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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의 2차 북벌
1928년 6월 8일
북양정부 멸망
탕산회의
1928년 7월 6일~7월 12일
신중국의 질서 논의
동북역치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의 항복
편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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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사건
1929년 2월 21일
루디핑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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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3월 26일~1929년 6월 27일
리쭝런바이충시의 1차 반란
1차 장풍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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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위샹의 1차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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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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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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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만주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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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쿠이의 반란
2차 장풍전쟁
1929년 10월 11일~1929년 11월 20일
펑위샹의 2차 반란
장당전쟁
1929년 12월 5일~1930년 1월 14일
탕성즈스여우싼의 반란
중원대전
1930년 4월 5일~1930년 11월 4일
옌시산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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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장쭤린의 죽음과 장쉐량의 집권
2.2. 장쉐량의 딜레마
3. 전개
3.1. 장쉐량과 국민당의 접촉
3.2. 일본의 반발
3.3. 역치의 합의
3.4. 역치의 연기
3.5. 일본의 군사적 위협
3.6. 최종협상
3.7. 역치 선포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28년 12월 29일, 중화민국에서 관동군의 음모로 암살된 안국군 대원수 장쭤린의 뒤를 이어 동북지방의 지배자가 된 '소원수' 장쉐량이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을 선포함으로 북양군벌의 마지막 세력인 봉천군벌중국 국민당에 합류하여 중국통일이 완수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편집]



2.1. 장쭤린의 죽음과 장쉐량의 집권[편집]


국민당의 2차 북벌황고둔 사건 문서 참조. 펑위샹, 옌시산과 연합한 장제스의 2차 북벌에 베이징을 중심으로 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은 베이징을 내주고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1] 그런데 만주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고 있던 관동군은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을 심양 인근 황구툰(황고둔)에서 기차를 폭파시킴으로 암살했다. 중상을 입은 장쭤린은 병원에 실려가다가 숨졌다. 우선 봉천 군벌들은 장쭤린의 죽음을 비밀로 부치고 그저 상장군이 부상을 입었다는 발표만 하였다. 관동에 있던 장쉐량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봉천으로 귀환한 다음에 봉천의회의 추대에 따라 6월 20일[2] 봉천군무독판대리에 취임하였다. 장쉐량은 취임하면서 난징 정부와 회담할 의사를 밝히며 당장 통일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독립할 뜻도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장쉐량이 우려하고 있던 것은 국민당이 화북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만주까지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장쉐량은 여러 계파로 사분오열된 국민당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국민당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장제스를 대화 파트너로 선택하여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 정부가 동북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일본 제국의 이권을 저해하는 행위로 간주, 장쉐량과 접촉하여 장제스와 관계를 가지지 말 것을 요구했다. 6월 25일과 6월 26일 양일에 걸쳐 일본의 봉천총영사 하야시 규지로가 장쉐량을 만나 일본의 뜻을 전달했다.

"지금 서둘러 남방에 대해 영합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얼마동안 현상을 유지하고 보경안민책으로써 형세를 관망하라."


6월 30일 장쉐량은 봉천독판대리에 취임, 장쭤린의 죽음을 발표한 다음에 내전의 정지, 우방과의 친목, 대내방침을 발표한 후 일본에 자신들의 방침이 친일이며 남방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 장쉐량은 일본에 자금 지원을 대가로 일만 협력을 제의했다. 만약 일본이 4억엔의 차관을 제공한다면 만몽의 철도를 만철에 합병해주겠으며 일본과 전면적인 정치, 경제 분야의 합작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만철과 관동군은 이 제안에 매우 긍정적이었으나 다나카 수상은 4억엔이나 되는 돈을 주었다간 장쉐량이 먹튀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장쉐량은 일본에 합작 중지를 통보했다. 7월 3일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난징 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며 동북 3성 보안사령관의 자리를 내주었고 이에 장쉐량은 장제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장쉐량은 봉천을 찾은 국민당 인사들에게 자신이 국민당에게 복종할 뜻이 있음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치의 수단이 국민회의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2.2. 장쉐량의 딜레마[편집]


"나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동으로도 갈 수 있고 서로도 갈 수 있는데 아침에는 이쪽으로 기울고 저녁에는 저쪽으로 기운다."

장쉐량


흔히 아버지를 죽인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에 불타던 장쉐량이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는 식으로 쉽게 설명되지만 실제론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쉐량의 영지인 만주는 압록강만 건너면 바로 일본제국령 조선과 맞닿아 있었고 일본은 러일전쟁 이래로 만몽 지역에 대한 이권 확보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었다. 인접한 열강인 일본을 그리 자극한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만주의 여론도 분열되어 있었다. 장쉐량의 경쟁자인 만주 신파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대항하기 위해 청천백일기를 게양함으로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과 민족주의의 대세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장쉐량의 지지층인 구파는 만주의 자치를 주장하고 있었다. 솔직히 장제스와는 얼마 전까지 전쟁을 하던 사이였고 일본은 반공을 빌미로 만주의 반공 군벌들을 회유하고 있었다. 장쉐량의 입장에선 장제스를 전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대책없이 의존하는 것 역시 불안하기 그지 없는 선택이었다.[3] 당시 중국의 여론이란 청일전쟁 이래로 중국을 침탈해온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섣불리 친일 정책을 취했다간 정권에 위협이 갈 정도였다. 만약 장쉐량이 일본과 손을 잡았다간 만주는 물론 전 중국의 민중의 비난과 반발을 사는 것은 물론, 만주의 반일 인사들에게 정권을 찬탈당할 결정적 계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 고심 끝에 장쉐량은 장제스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장제스라고 마냥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장제스에 대한 접근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거기에 일본을 지지하던 만주 구파에 대한 배려 역시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다.


3. 전개[편집]



3.1. 장쉐량과 국민당의 접촉[편집]


일단 장쉐량은 역치 쪽으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섣불리 방침을 발표하진 않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에겐 불리했다. 일본을 선택했다간 민족주의적 광풍과 남방의 대규모 반발을 부를 것이고 남방을 선택했다간 일본을 자극할 것이었다. 이에 장쉐량은 역치를 즉시 시행하지도, 그렇다고 독립도 하지 않는 방침을 결정하고 신중한 행보를 밟았다. 7월 2일 장쉐량은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탄옌카이, 리례쥔 등 국민당의 거물들에게 화평통전을 보냈고 국민당과 대치 중인 봉천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7월 6일 국민당의 최고 거물인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4인의 탕산회의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4군장은 군사 문제와 동북 문제를 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자극했다간 국민혁명군이 베이핑을 함락한 여세를 몰아 만주로 몰려올지도 몰랐다. 따라 장쉐량은 4군장에게 봉천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측근들을 급파, 봉천이 삼민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나 공산당,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아직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역치를 시행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하지만 국민당에 거스르지 않는다는 표시로 산해관 안쪽의 봉천군은 모두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탕산회의에서 4군장은 중국의 모든 군대는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병력을 80만으로 감축, 동북 삼성 문제는 중앙의 결정에 따라 처리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장쉐량에게 국민당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편견회의라 한다. 장쉐량은 7월 15일에 회의를 열고 동북지방 보안위원회에게 국민당의 요구를 전달한 다음에 7월 17일에 수뇌회의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했다. 만주의 수뇌부들은 중국의 통일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으나 열하성의 만주 귀속, 국민혁명군의 만주 불침을 요구했다. 이에 난징과 베이핑에서 동시에 국민당과 접촉이 시작되었다. 베이핑에선 장제스와 남북타협이 시작되었고 난징에선 동북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였다. 동북 문제에 대해선 펑위샹이 특히 강경하였는데 펑위샹은 만주의 확실한 복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3.2. 일본의 반발[편집]


장쉐량과 남방의 접촉이 급진전되자 일본은 크게 불안해했다. 하야시 봉천 총영사가 7월 9일에 다시 장쉐량을 찾아 우려를 표했다 이에 장쉐량은 역치를 해도 국민혁명군이 산해관 쪽으로 조금 오는 것 뿐이라면서 일본을 안심시키려 하며 그간의 진정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우선 모든 교섭 자체는 톈진을 점령한 펑위샹 일파가 북평을 떠난 후에 재개할 것이며 이후의 문제는 국민당과 차근차근 교섭을 통해 결정될 것이란 것이었다. 당시 장쉐량과 장제스의 합의는 대략 이 정도였다.

  • 1. 만주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한다.

  • 2. 역치는 통일의 대의에 합의한 것이지 국민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회의를 열어 결정해야 한다.

  • 3. 열하를 봉천파에 귀속시킨다.

  • 4. 산동군을 남군으로 개편하면 봉천군은 탕산 동쪽으로 이동한다.

허나 분치합작에 불과하다는 장쉐량의 설명에도 일본은 7월 12일 장쉐량의 남방과 어떠한 형태로든 접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7월 16일 국민당의 외교정책과 일본의 이익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라면서 국민당이 만주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 경기를 했다. 일본은 남방과의 합작은 일본에 대한 반기로 알겠다고 경고했다.


3.3. 역치의 합의[편집]


이때 장제스도 상당히 관대한 조건으로 동북 삼성을 다시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 국민당을 설득하고 있었다. 펑위샹과 국민당원들은 동북 삼성을 사실상 별개의 자치구역으로 놔두는 역치에 대해 반발했으나 장제스와 국민정부 수뇌부는 동북 삼성의 국방상의 중요성과 만주에 대한 일본의 오래된 침략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북 삼성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반대파들을 설득했다. 자칫했다간 만주가 동아시아 전체를 태울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현재 중국이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일본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치를 이룩하고자 했다. 7월 17일엔 장쉐량이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타협이 상당히 진전되었으나 구체적인 문제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면서 삼민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굴복하느냐 굴복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과 공존공영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을 설명했다. 장쉐량은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이 중국의 적이라고 지적하며 장제스와 타협하고 일본을 안심시키려는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려 했다.[4]

7월 중순 장제스는 왕수한, 형사렴 등 4인의 동북의 대표단과 베이핑에서 회담을 가졌다. 봉천 측은 만약 봉천군벌이 국민정부에 복종하게 된다면, 동삼성에서 청년 1백명을 난징에 파견하여 당무를 실습시킨 뒤, 동삼성의 당부의 사무를 개시할 것, 동삼성의 정부직원이 되었던 자의 생명과 재산을 모두 보호해줄 것 등을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모두 수락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삼성은 국방의 중요한 변경이다. 일본의 세력이 침입한지 오래이므로 우리의 처치방법도 신중하고 용의주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동아에 있어서 전화의 도화선이 될 것이고 일단 불이 붙으면 수습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총리의 이른바 평화통일에 입각하여 우리는 지성으로 봉천측 장령이 기꺼이 중앙으로의 귀속을 결정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이에 대표들은 중앙과 국민정부에 복종할 것을 표시했고 장제스는 "진심으로 본당에 복종하고 중국을 통일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쁘다. 그러나 억지로, 형식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라면, 참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라고 대답하며 의심을 표했고 대표단은 장쉐량에게 딴 마음이 없다고 해명했다.

장쉐량은 7월 16일 봉천 총영사에게 역치의 결정을 통고하며 일본과의 친선관계 유지 의사를 전달했다. 장쉐량은 동북삼성의 관민이 모두 지쳐 장제스와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설명하며 만주의 주민들이 순박하며 일본과의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 남방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삼민주의를 실시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장쉐량의 방침은 7월 24일부터의 역치의 시작이었는데 장쉐량은 시범적으로 7월 19일 열하성에서만의 역치를 시행했는데 이는 열하성에 대한 봉천파의 지배를 확고히하고 역치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하야시 총영사가 다나카 수상에게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문의하자 다나카 수상은 청천백일기와 삼민주의는 그것이 형식적인 것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다나카 수상은 자신들이 만주에 대해 너무 호의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장쉐량이 자신들을 물로 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나카 수상은 하야시 총영사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며 일본의 무서움을 알게 해주라고 강경한 대응을 지시했다. 허나 장쉐량이 다시 보경안민의 정책과 난징과 일본 사이의 중립을 고수한다면 일본이 장쉐량을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3.4. 역치의 연기[편집]


7월 19일 하야시 총영사가 다나카 총리의 훈령에 따라 다나카의 편지를 전하며 장쉐량에게 남북타협 중지를 권고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 난징정부는 공산색을 내포하고 있고 더구나 그 지위는 아직 불안정하니, 동북이 특별히 제휴할 필요는 없다.

  • 2. 가령 난징정부가 무력으로 동북을 압박하는 일이 있으면 일본은 희생을 아끼지 않고 힘을 다하여 원조하고자 한다.

  • 3. 동북의 재정에 어려움이 발생할 경우 일본의 은행이 충분히 구제한다.

편지를 받은 장쉐량은 하야시에게 "일본이 중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의 간섭으로 인해 동북은 역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난징에 보고하려 하는데 그래도 좋은가?"라고 물었지만 하야시는 대답하지 못했다. 장쉐량은 다시 "동삼성의 정치는 민의의 의해서 결정한다. 인민이 개변을 주장하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의 압력을 무시할 순 없으므로 장쉐량은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7월 20일에는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가 장쉐량을 만나 역시 남북타협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장쉐량에게 당신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했는데 이는 협박이 아닌 일본의 말을 잘 들으면 일본이 장쉐량 정권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우호적 제스처에 가까웠다. 장쉐량은 남방과 일본 사이에 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역치가 자신의 뜻이 아닌 부하 장령들과 민의에 따른 것이라며 자신이 하야할 수도 있다며 일본을 설득하려 했다. 장쉐량은 7월 20일 국민당과 접촉, 일본의 압박이 너무 거세다고 어려운 사정에 대해 호소했고 장제스는 이에 대해서 7월 20일 오후, 상당한 불안감을 드러냈다.

"한경에게는 성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동삼성의 평화통일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만 일본이 이것을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한경의 인품을 보니, 아직 위난을 경험한 일이 없고, 의지도 약하다. 대임을 맡아 위험한 국면에 대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를 도울 생각이다."


7월 21일에는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대표들을 파견하여 일본이 정식서면으로 보경안민책의 실행 요구와 삼민주의 실행 반대를 전해왔다고 알리며 역치를 당장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할 것에 대해 청했다. 그리고 역치의 진행 방법에 대해 8월 8일에 열릴 5차 국민당 대회 이전에 다시 한번 사람을 보낼 것이라 말했다. 이에 장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각오를 굳혀야 할 일이다. 외국인이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다시금 중국이 우롱당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일본과 정식으로 교섭할 때 정의에 입각해서 하면 외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중앙의 방침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대답하면 된다. 왜노의 공갈에 굴복하지 말고, 결연히 중앙에 대한 복종을 표시하는 통전을 발신하라고 장쉐량에게 말하라. 그것이 동북을 구하고 중국을 구하는 일이다."


실제로 일본 측은 장쉐량이 역치를 하지 못하게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었으나 장쉐량에게 일본의 압박은 단순한 장애물만이 아니라 장제스에게서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 협상카드로도 적용했다. 장쉐량은 일본 측에서는 자신의 하야 문제를 거론하며 역치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여 일본의 압박을 약화시키려 했고 장제스에게는 일본의 압박 문제를 내놓으며 동북 삼성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기민하게 행동했다.

장쉐량은 장쭤린 사망 직후의 혼란한 상황과 일본의 압박으로 인해 삼민주의 준봉, 청천백일기 게양 등이 즉시 시행하긴 어려운 문제라고 양해를 구했고 이를 장제스가 수용하면서 논의는 진전되었다. 7월 22일 양측은 역치 실행에 완전히 합의하고 7월 24일에 역치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장쉐량은 동북 삼성과 열하의 통치권을 보장받았으며 동부정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국민당으로부터 열하의 지배권과 동북 삼성의 자치를 보장받는다는 안건을 확실하게 처리했다.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구실로 동북과 남방의 통합은 점진주의 방침에 따라 천천히 하게 되었으나 장쉐량의 기반과 자치는 매우 안정적인 것이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일본의 압박 때문에 역치를 시행하면 아무래도 자신이 사퇴해야겠다면서 장제스를 압박했고 이를 통해 역치 시행의 연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장쉐량은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보안위원회를 열고 역치 연기를 결정한 후 이를 장제스와 하야시 총영사에게 통보했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크게 한탄하며 장쉐량에게 역치를 포기하지 말 것을 다짐시켰다.

"동삼성은 내일 역치를 통전하여, 중앙에 대한 복종을 표시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인의 횡포로 저지당해 계획은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아직도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 중국의 쌓이고 쌓인 무력함은 이와 같다. 생각만 해도 참혹하다."


7월 26일, 장쉐량은 형사렴 등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 의사를 드러내며 역치의 연기가 외교상의 문제 때문임을 강조했다.

"개석 공은 나에게 지성을 가지고 대하고, 또 국가를 위해 합작 제휴하는 일의 이로움을 자주 전해왔다. 나로서도 대단히 감격하고 있다. 즉시 개석 공에게 나는 최후까지 국민정부에게 복종할 뜻을 가지고 있고, 개석 공에게 진력할 생락이라는 것을 전해주기 바란다. 다만, 목하 외교면에서의 상황은 중대하다. 개석 공은 이미 가슴 속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외적으로 원만한 방법이 있기만 하면, 동삼성 자체에는 전연 문제가 없다."



3.5. 일본의 군사적 위협[편집]


한편 다나카 내각은 민정당을 비롯하여 대중국 외교를 비판하는 내부 움직임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 민정당은 다나카 내각의 중국에 대한 호전적 외교가 많은 피해를 불러오고 있으며 다나카 내각이 장쉐량의 역치를 저지하려 한 것은 일본의 외교방침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야시 총영사를 비롯한 만주의 일본인들도 장쉐량이 역치를 시행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하며 실리외교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지만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 괴뢰정부로 삼은 후 소련과의 완충지대로 쓰려던 다나카 내각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다나카 내각은 만주에 대한 강경한 외교 방침을 고수했다. 한편 장쉐량은 다나카 내각이 정치적 공세를 받는다는 걸 알고 다나카 내각의 붕괴를 원했고 섣부른 역치가 다나카 내각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걱정하여 역치를 미루는 것에 더 확신을 두었다. 하지만 역치 연기와는 별개로 국민정부와의 협상은 계속되어 7월 27일 길림성 의회에서 삼민주의와 국민정부의 외교정책을 계승한다는 방침이 발표되었다. 장제스와 바이충시는 각각 자신들의 대리인을 장쭤린의 장례식에 보냈고 장쉐량도 난징에 사람을 보내어 협상했다.

8월 4일 장쭤린의 장례식이 거행될 무렵, 일본 민정당이 분열되어 국내의 반대파가 없어진 다나카 내각은 장쉐량이 남방과의 협상을 지속한다는 걸 알고 장쭤린의 장례식에 전 주중공사 하야시 곤스케 등을 대표단을 보내 압박했다. 마침 일본은 난징 정부와의 중일통상조약 연장 문제 때문에 충돌하던 시점이라 강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일본 대표단은 장쉐량에게 보경안민을 하면서 8월 4일부터 9일간 4차례 만남을 가지고 남방과 단절될 것을 요구했다. 본격적인 회담은 8월 8일부터 시작되었으며 하야시 곤스케는 하야시 규지로 총영사를 대동하고 장쉐량을 찾아 국민정부와 단절할 것을 요청했다. 다음날인 8월 9일 오전 9시, 장쉐량이 왕가정을 데리고 일본 총영사관을 방문하였다. 총영사 하야시 규지로, 사토 안노스케 소장 등이 장쉐량을 맞이했다. 장쉐량은 하야시 곤스케에게 장쭤린의 장례식에 찾아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존공영의 취지에 따라 일본과의 친목 강화를 꾀하고, 서로 제휴하여 동삼성에 평화적인 경제정책을 실현하고 싶다."


이에 하야시 규지로(=하야시 총영사)가 하야시 곤스케를 대신하여 매우 위협적으로 발언했다.

"제국정부의 남북 타협에 대한 반대의사는 여러 차례 전했고 귀 총사령도 이미 양해하고 있을 터입니다. 요컨대 제국정부는 현재 내부의 통제가 결여되고 더구나 공산적 색채가 남아 있는 국민정부와 동삼성이 타협하면, 자연히 일본의 기득권과 특수한 지위가 침해당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동삼성이 일본의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청천백일기를 내건다면 일본은 단호히 결심을 가지고 자유행동을 취할 것입니다. 요컨대 귀 총사령관이 의연하게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서 행동하고 부언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만일 불온분자가 나타난다면 무력탄압에 호소해도 좋습니다. 일본은 전력으로 원조하겠습니다.


이는 장쉐량이 말을 듣지 않고 국민정부와 타협하면 일본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경고였으며, 더 나아가 친일적인 만주 구파를 중심으로 한 신정권 수립까지 은유하는 것이었다. 장쉐량은 상당히 분격해서 대답했다.

"하야시 특사와 하야시 총영사의 거듭되는 충고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야시 총영사의 발언은 묵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 따라서 저의 생각도 당연히 중국인 본위입니다. 제가 국민정부와의 타협을 바라는 것은 중국의 통일을 완성, 분치합작을 실행하고 이로써 동삼성의 일반 인민의 열망을 실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디부터 내 개인에게 벅찬 일입니다. 저는 금후의 외교를 위해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일본 정부의 경고를 고려하겠습니다. 그러나 국제관계라는 점에서 볼때, 일본 정부가 내정간섭을 무릅쓸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일본 정부가 여러가지에 대해 불필요한 공포심을 갖고 중국의 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장쉐량의 발언이 상당히 강경했기 때문에 통역사가 겁에 질려 잠시 통역이 중단되기도 했다. 장쉐량의 발언을 들은 하야시 총영사가 대답했다.

"이미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국정부는 동삼성이 남방과 타협하는 일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정간섭이라 일컬어질지라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귀 총사령관의 숙고를 바랄 뿐입니다."


장쉐량이 다시 대답했다.

"제 판단은 동삼성 인민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저는 동삼성 인민의 의향에 반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사토 안노스케 소장이 끼어들었다.

"다나카 수상의 의중은 이미 확고합니다. 귀 총사령관이 만일 다나카 수상의 뜻을 거역하면 중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하야시 곤스케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네의 아버지는 나의 친구였네. 그래서 자네가 내 자식처럼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네의 생각은 위험하다는 점일세."


하지만 장쉐량은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저는 귀국의 천황과 같은 나이입니다. 각하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 뿐입니다."



3.6. 최종협상[편집]


"동삼성 인민은 오랜 세월 동안 군사적인 고통을 받아온 외에, 양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아왔다. 이 상황은 말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다. 사실상 동북은 타협하지 않으면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민의에 입각하여 조속한 통일을 꾀하고 국세를 유지하고 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일본이 간섭하므로 신중히 하자는 데 불과하다. 동삼성은 사실상 정신적으로 이미 중앙에 복종하고 일체화를 표명하고 있다. 남은 일은 깃발을 내단다고 하는 현식상의 문제 뿐이다."

난징에 주재하던 봉천대표 형사렴의 기자회견.


총영사관에서의 회담 이후 장쉐량은 동삼성 보안위원회를 소집했다. 장쉐량이 일본 측 인사들의 발언을 그대로 전하자 보안위원들은 모두 격분했고 역치의 실행에 찬성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의 위협에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역시 두려워하여 장제스와의 화의를 3개월 연기하기로 하였다. 8월 13일, 장쉐량은 하야시 총영사에게 국민정부와의 화의결정을 3개월 미뤘다는 것을 알렸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일본의 모든 양보를 끌어내어 마찰없이 역치를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장제스에게선 얻어낼 걸 다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매우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일본 민정당이 외교문제로 탈당사건이 터져 와해되면서 일본의 내부 사정의 변혁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에 굴복하는 것은 장쉐량의 정권이 유지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결국 장쉐량은 역치로 완전히 가닥을 잡고 일본과의 최악의 선택만은 피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봉천에 주재하던 국민정부 대표 방본인은 철수했으나 형사렴이 난징에 있었기 때문에 남북협상은 재개되었다. 과거 장쭤린과 한편이었던 장쭝창과 저옥박의 직로연군이 문제가 되었다. 1928년 8월 25일 장쉐량은 총사령부 회의에서 9월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하고 장쭝창의 처분을 장제스에게 맡겼다. 장쉐량은 장쭝창을 말로 해결하여 국민당에 예속시킬 것을 청했지만 장쭝창은 관외로 이동하지 말라는 봉천군벌의 말도 듣지 않고 자유 행동을 선언하여 봉천군벌을 공격했고 장쉐량은 양위팅을 파견하여 바이충시와 함께 장쭝창의 직로연군을 공동으로 토벌하게 했다. 국민혁명군과 봉천군의 연합작전으로 장쭝창은 9월 23일 궤멸되었고 장쭝창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장쉐량은 직로연군의 해체와 장쭝창 토벌이 삼민주의와 통일의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며 장쭝창에게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10월 8일, 중국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장쉐량이 역치를 아직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쭝런이 만주 토벌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장제스가 이들을 설득하여 강경론을 진정시켰고 장쉐량은 국민정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편견회의 때문에 국민당 내부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장제스가 동북의 역치를 이끌어내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 한 것이기도 했다. 국민정부는 즉각 장쉐량의 국민정부 위원 선출 소식을 장쉐량에게 전보로 통보했고 다음날인 10월 9일 또 한통의 전보를 보냈다.

어제의 전보는 도착되었다고 생각됨. 국민정부위원의 건은 이미 발표했으므로 이 시기를 이용하여 기치를 바꾸어 취임선서를 하고 쌍십절을 이 통일을 완성한 기념일로 삼기 바람. 회답을 바람.

장쉐량은 즉각 답신했다.

장 총사령 귀하, 쉐량이 천학비재인데도 불구하고 중용되어 제현과 함께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데 없는 감격입니다. 또 공을 주석으로 하여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은 제가 바로 원하고 있던 바입니다. 각 위원의 취임 때 저의 이름까지도 열기해주신다면 더 없는 영광입니다.

이는 감사의 말로 차 있으나 난징으로 가서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이나 즉각 역치를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는 거절의 의사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서한을 전달했다.

1. 장쉐량은 국민정부에 복종하고 국민정부 위원에 취임하며 동북 삼성에 위원제를 실시할 것.
2. 중앙정부는 장쉐량을 동북 삼성 정부위원 주석에 임명하고 기타 위원은 장쉐량의 추천에 따라 임명할 것.
3. 동북 삼성의 정치는 장쉐량의 의견을 존중하여 행할 것.

장쉐량은 자신의 동북 삼성에서의 통치권을 완전히 보장해준 장제스의 서한을 받고 크게 만족하며 동북 삼성의 위원제를 개편하고 역치 문제를 행할 것이라 표명했다. 만주에서 장쉐량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양위팅은 장쉐량이 모든 것을 해먹을 까봐 노심초사했고 장쉐량이 정부위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크게 불만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위원이 되는 것은 만주 구파의 반대로 불가능했다. 장쉐량은 자신이 정부위원에 앉았다간 만주의 사정이 혼란해질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사임했다. 당시 양위팅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공공연하게 장쉐량을 풋내기라 비웃곤 했는데 탕성즈바이충시가 파견한 대표들이 장제스 타도를 위해 봉천군의 힘을 빌리려하자 양위팅은 이들과 단독으로 면담하고 장쉐량과 만나기도 전에 돌려보냈다. 장쉐량이 이를 알고 따져묻자 당신은 중앙노선을 걷고 나는 지방의 파벌과 연락하면 된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후 양위팅은 결국 장쉐량에게 숙청당하게 되는데 자세한 것은 장쉐량 문서 참조.

어쨌거나 장제스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낸 장쉐량은 수천장의 청천백일기와 쑨원의 초상화를 만들게 하는 한편 다시 일본과 접촉했다. 일본은 전 세계의 열강이 중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차례로 청산하는 와중에 정치, 외교적 궁지에 몰리고 있었고 이에 중국에 대한 유화적 태도로 선회하고 있었다. 일본의 정계와 언론계는 일본의 외교적 고립과 중국에서의 손해를 추론한 다나카 내각을 질타했고 전열을 정비한 민정당도 정치적 공세를 재개했다. 일본은 8월 15일 만몽 철도 문제를 재논의하기 시작했고 난징 국민정부의 존재도 인정하게 됨으로 역치를 반대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 전역의 항일 분위기는 만주에도 번졌고 민의를 따라 역치를 시행한다고 하던 장쉐량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한편 1928년 11월 10일 히로히토 덴노의 즉위식이 열리자[5] 장쉐량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반응을 엿봤다. 장쉐량 대표단은 다나카 수상과 접견했고 장쉐량 대표단이 역치의 실행을 다음해에 시행할 것이라 전하자 다나카 수상은 공산당을 막아야 하니 곤란하다고 하면서도 역치 자체는 중국 내정문제임을 인정하며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다나카 수상은 장쉐량에게 독립하라고 부추겼으나 장쉐량이 역치의 불가피함을 설명하자 그러면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만 하고 더 이상 압박하지 않았다. 장제스, 일본의 입장을 모두 확인한 장쉐량은 국민당 중앙과 타협하기 위해 난징에 사람을 보냈다.


3.7. 역치 선포[편집]


12월, 장제스는 장췬, 우톄청, 리스쩡을 보내 장쉐량을 정식으로 동북병방군사령장관에 임명했고 12월 25일,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사람을 보내 동삼성은 국민정부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1928년 12월 29일, 장쉐량은 완푸린, 장쭤샹과 연명으로 역치통전을 타전했다.

고 대원수는 임종에 즈음하여 거듭 화평을 주장하고, 통일촉진을 유촉으로 삼았다. 는 고 대원수의 유지를 이어 받아 통일을 꾀하기 위해 노력하고 화평을 관철하려 한다. 오늘부터 삼민주의를 준수하고, 국민정부에 복종하며, 기치를 바꿀 것을 선포하는 바이다.

국민정부가 즉시 답전했다.

제형이 당과 국가에 대한 지지 협력을 표시한 정신에 경복하고 감명을 받았다. 앞으로 내부를 수습하고, 외부에 대처하며 갖가지 건설을 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민생을 안정시키고 정치를 궤도에 올리기 위해 제공과 함께 노력하기 바란다. 중정.

29일 오전 7시, 봉천, 길림, 흑룡강에 일제히 공안국이 배포한 청천백일기가 게양되었고 장쉐량은 봉천성부 대강당에서 중앙에서 파견한 대표 방본인과 일본을 제외한 각국 영사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역치대전을 거행하였다. 장쉐량은 일본의 대정봉환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내가 역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은 한 선진국의 예를 본 딴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처음에 군벌이 권력을 조종하여 중앙의 통치를 방해했기 때문에 국가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 후 군벌이 각성하여 중앙에 대정을 봉환했기 때문에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나는 지금 중앙의 권력을 나누어 받는다는 따위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권을 모두 중앙에 반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통일을 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장제스는 감격에 찬 일기를 남겼다.

금년 9월 이래 일본이 이토록 강포하고 야만스런 압력을 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북 군민의 중앙에 귀속하려고 하는 단성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북벌서사로부터 3년이 못되는 사이에 드디어 통일사업이 완성을 보았다는 사실은 삼민주의가 모든 것에 승리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일본이 침략 야심에 아무리 광분할지라도 우리 중화민국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12월 31일, 국민정부는 장쉐량을 동북 변방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열하성을 동북삼성에 추가하여 동북사성으로 하였다. 이날 저녁, 하야시 규지로 총영사가 장쉐량을 방문하여 2시간 동안 회담했다. 하야시 총영사는 "돌연한 역치는 단교와 같다. 일본은 장쉐량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단호한 조치로 나올 수도 있다."라며 테이블을 치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장쉐량은 어쩔 수 없다면서 하야시의 항의를 무시했다. 이에 하야시는 장쉐량이 만몽의 철도 권익에 관해 일본에 양보함으로 일본에 대한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했지만 장쉐량은 외교 문제는 모두 중앙의 권한이라고 묵살했다. 이미 본국도 역치를 관망하기로 한 터라 하야시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4. 결과[편집]


파일:하얼빈청천백일기.jpg
하얼빈에 게양된 청천백일만지홍기

1929년 정월, 난징과 봉천의 합의에 따라 역치가 시행되었다. 장쉐량은 민족주의적 열풍, 동북의 현상유지란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는데 성공했고 일본의 만몽분리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장쭤린의 무리한 관내 진출과 1925년 11월에 일어난 궈쑹링반봉사건으로 인하여 만주의 경제적 위기가 심각한 상태였고 장쉐량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중동로 사건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가 크게 패하고 만다. 1929년 편견회의로 촉발된 반장전쟁에서 장제스를 지원하기로 선택하여 국민정부의 2인자 지위로 오르기는 했으나 일본의 침략야욕은 근절된 것이 아니었으니 역치 이후 불과 2년이 지난 1931년 나카무라 사건만보산 사건에 이어 대사건이 터지게 된다.


5. 참고문헌[편집]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서문당 편집실.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학량 정권 연구(1928~1931), 송한용 박사학위 논문.
  • 1928년 장학량정권의 동북역치, 송한용, 역사학연구 12권, 호남사학회.
  • 네이버 지식백과: 북벌의 완성


6. 관련 문서[편집]



6.1. 인물[편집]




6.2. 사건[편집]



6.2.1. 국민혁명[편집]




6.2.2. 반장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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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혁명군은 6월 8일 베이징에 입성했고 국민정부는 6월 20일, 직예성을 하북성으로, 베이징을 베이핑(북평)으로 개칭했다.[2] 혹은 6월 19일.[3] 앞서 보았듯 일본은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장쭤린을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사적으로도 부친을 죽인 원수인 일본을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4] 후일 그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상당히 모순적인 대목.[5] 다이쇼가 죽고 쇼와가 즉위한 것은 1926년 12월 25일이다.(물론 쇼와는 그 전부터 섭정하고 있었음). 참고로 아키히토도 즉위한 것은 히로히토가 죽은 1989년 1월 7일이지만, 즉위식은 1990년 11월에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