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즉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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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덕수궁의 건물이다.
2. 이름과 현판[편집]
'즉조(卽阼)'는 '즉위'와 같은 말로, 인조가 이 곳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 단락 참조.
현판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즉(卽)'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광무구년을사칠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이란 작은 글씨가 있다. 즉 1905년(을사년) 7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썼다는 의미이다. 즉조당 대청에는 '경운궁(慶運宮)'이란 편액도 걸려있었는데 역시 고종이 직접 쓴 것이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 및 전시 중이다.
3. 역사[편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불탔다. 1년 뒤인 1593년(선조 26년) 한양 수복 후 환도[4] 한 선조는 지낼 곳이 없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렀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불렀고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복구한 후 임금들은 그 곳에서 거처했고, 인조 재위 초반에는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경운궁을 사실상 해체했다. 하지만 이 때 정릉동 행궁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건물 2채를 남겼다.#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했던 명례궁으로 사용했다.
비록 간신히 흔적만 남았으나, 임진왜란 때 선조가 고생한 것을 상기하려 조선 후기 임금들이 경운궁을 이따금씩 찾았다. 그 중 가장 많이 관심을 보인 왕은 영조였다. 1769년(영조 45년) 영조는 선조가 거처하고 인조가 즉위한 건물에 '양조개어(兩朝皆御)' 및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란 글씨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양조개어'는 '두 임금이 거둥했다'는 뜻이고 '계해즉조당'은 '(인조가) 계해년(1623년)에 즉위했다'는 의미이다. 그 때부터 즉조당으로 불렀다.# 1773년(영조 49년)에는 선조의 환어 3주갑[5] 을 맞아 왕세손과 함께 즉조당을 찾아 추모했다.# 그리고 즉조당에 '예전(昔)에 임금(御)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昔御堂)' 현판을 써서 걸었다.[6]
영조 승하 이후에도 왕들은 즉조당을 때때로 찾았다. 1893년(고종 30년) 10월에 고종과 왕실은 선조의 환궁 300주년을 맞아 즉조당에서 기념 행사를 했다.#
3.1. 아관파천 이후[편집]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고종은 장차 돌아갈 곳으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에 경운궁을 수리, 중건하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이 때 경복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을 즉조당으로 옮겨 모셨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7] 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위에 언급했듯 즉조당 포함 2채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말이 중건이지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짓는 것이었기에 제대로 모습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식 침전인 함녕전 역시 아직 완공 전이었기에 신하들이 즉조당에 머물 것을 권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8]
정전으로 쓸 전각 역시 없었고 그래서 1897년(광무 원년) 8월 경부터 즉조당을 임시 정전으로 사용했다.#[9] 그 해 10월 7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며칠 전에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바꾸었다.# 제국의 정전이니 이름 역시 제일 높은 급인 '전(殿)'으로 올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각 앞에 넓은 월대를 설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이고 여러 국가의 중요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만들었다.
3.2. 대한제국 수립 이후[편집]
태극전에서 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할 것을 반포했다.# 즉 태극전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탄생 장소였던 것이다. 제국 수립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으며# 황실 가족들에게 옥책과 금보를 내리고 책봉식[10] 을 거행하는 등# 정전으로써 태극전을 활발히 사용했다.
고종은 태극전의 이름을 1898년(광무 2년) 2월에 다시 중화전으로 바꾸었다.# 중화전으로 개칭한 후에도 이곳에서 국가와 황실의 주요 행사를 꾸준히 열었다. 태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 황실 제사와 관련된 행사를 주로 행했으며## 1900년(광무 4년) 8월에는 황자 의화군 이강과 이은을 여기서 각각 의친왕, 영친왕으로 책봉했다.#[11] 같은 해 10월 경운궁 선원전이 불타 그 안에 있던 어진도 사라져 다른 곳에 있던 어진들을 옮겨와 모사할 때 여기에 어진을 보관했다.#
그러나 중화전(구 즉조당 - 태극전)은 정전으로 쓰기엔 너무 좁았다. 그래서 1901년(광무 5년)부터 새 정전 공사를 시작하여 1902년(광무 6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정전 형태를 갖춘 새로운 중화전을 완공했다. 그에 따라 1902년 5월에 기존의 중화전을 원래 이름인 즉조당으로 환원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 경운궁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복구했다. 이 때 옛 모습 그대로 짓되, 칸 수와 규모는 간단하게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 곳에서 서거했다. 1933년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4. 구조[편집]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을 3세트 두었다. 기단의 서쪽 측면은 기단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으나 동쪽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뒷면의 외관은 앞면과 꽤 차이가 있다. 기단부터 다른데 지형의 특성 상 뒷면 기단은 장대석 1벌대이다. 그리고 동, 서 온돌방 바깥 칸에 각각 가퇴를 설치했으며 양 가퇴 사이에 쪽마루를 설치했고 마루의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15] 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으로 양쪽으로 각각 10개 씩 있다. 난간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빈 공간이 있으며 이 앞에 2단의 댓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