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부(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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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산하 기관
4. 소속 관원
5. 복장
6. 청사
7. 매체에서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元帥府

대한제국원수부.
통수권 기관으로, 대한제국 황제의 직속 기구였다.


2. 상세[편집]


대한제국에는 이미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 군부가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직후 독립협회의 부상, 수차례의 쿠데타 모의, 독살 미수 사건 등 고종과 황실을 위협하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 요소가 많았다. 그래서 고종은 군사 조직을 황제를 중심으로 모을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불안 요소들을 정리한 후인 1899년(광무 3년) 6월 2일에 원수부 관제를 반포하여 군부를 능가하는 황제 직속 군령 기관인 원수부를 창설했다. 그리고 고종 스스로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육, 해군 가릴 것 없이 대한제국군 전체를 통솔했다.

유사한 기관은 비슷한 시기 프로이센 왕국군독일 제국군군사내각(Militärkabinett)이다. 1814년 설립된 프로이센 군사내각은 프로이센 국왕/독일 황제에 군사적인 조언을 하는 황제 개인 직속의 부서인 내각시스템[1]의 하나로, 프로이센 전쟁부나 참모본부와는 독립된 존재였다. 군사내각장관(Chef des Militärkabinetts)은 군사 관련 주요 부서들 중 유일하게 황제를 주마다 여러 차례 만나 논의할 수 있었으며, 참모부나 전쟁부 같은 다른 부서를 거치지 않고 황제와 독대가 가능했다. 독일 황제는 군사내각과 함께 군 문제를 비밀리에 처리했다. 군사내각은 갈수록 거대해져 빌헬름 2세 시기에 가서는 군사권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만 이 프로이센의 군사내각 시스템이 대한제국의 원수부 시스템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명이다.


파일:대원수 예복.png

파일:대원수복 고종 원수복 순종.png
대원수 예복
대원수 예복을 입은 고종(왼쪽)과 원수 예복을 입은 순종(오른쪽)
파일:대원수 상복.png}}}
파일:대원수 상복 고종.png}}}
대원수 상복
대원수 상복을 입은 고종
대원수가 국방과 용병, 군령을 장악했고 군부와 서울 및 지방 각 부대를 지휘, 감독했다. 이는 군권 전부를 황제가 직접 가진다는 의미였다.# 모든 군령은 황제가 직접 원수를 경유해 하달했다. 원수는 황태자가 역임했다.

원수부 설치 후 군대편성, 교육기관, 충원계획 등 군부 권한 대부분을 원수부에서 가져갔다. 따라서 군부는 힘이 약해져 일반 사무행정의 군정권만 가지게 되었다. 또한 도성을 방어하는 친위대시위대, 궁궐을 지키는 경호대를 원수부 소속에 두었고, 이밖에도 헌병, 포병, 공병, 치중병, 군악대 등을 만들어 완전한 근대식 군대 편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중이던 1904년(광무 8년) 9월에 일제는 군제개혁을 실시하여 원수부를 이름뿐인 기관으로 전락시켰고 그해 말에는 완전히 폐지해 황제의 군권을 약화시켰다. 이후 일제는 원수부의 권한을 군부로 넘겼다. 원수부가 폐지된 후 촬영된 순종의 군복 차림 사진을 보면 팔소매 계급장을 대장 계급장으로 착용하고 있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원수부 폐지와 함께 대원수, 원수 계급 자체가 없어지고 황제와 황태자의 계급이 대장으로 격하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산하 기관[편집]


원수부에 속해있던 주요 관서 및 업무들이다.

  • 군무국(軍務局)
    • 인보(印譜), 상장(尙藏)
    • 군사에 관한 조칙 및 공문을 각 부대에 발포
    • 국방 및 동원, 평시 및 전시의 군대 편성
    • 전투 준비 및 군비 지급
    • 육해공군 대학 및 육지와 바다의 측량
    • 군부와 각 부대의 일기 및 보고서를 접수하여 개략 초록

  • 검사국(檢查局)
    • 군사에 관한 포상, 승서, 천전, 징계
    • 각 병학교(兵學校) 교육
    • 서울 및 지방 각 부대 장교의 성실성 심사

  • 기록국(記錄局)
    • 군사 조칙 및 문부, 도서 보존

  • 회계국(會計局)
    • 군사경비 예결산
    • 회계, 조사 및 인가, 퇴환


4. 소속 관원[편집]


무관만 될 수 있었다. 각 국마다 국장(장성급), 부장, 국원, 하사가 있었다. 국장은 대원수(황제)의 뜻을 받아 내각의 각 부 대신들에게 지령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국장 명칭은 1900년(광무 4년)에 총장으로 바뀌었다.#

군무국에는 부장 2명, 영관 국원 6명, 위관 하사 10명을 두었고, 검사국에는 부장 1명, 영관 국원 4명, 위관 하사 8명을 두었다. 기록국에는 국원 2명, 위관 하사 4명을, 회계국에는 부장 1명, 영관 국원 3명, 위관 하사 8명을 두었다. 군무국장과 검사국장은 모든 보고를 원수(황태자)를 통해 대원수(황제)에게 전달했다.#

또한 원수부 사무직에 본 부 직원 정원말고도 각 부대의 현직 무관 중 25명을 선별하여 각 국마다 배치하여 대부분의 임무를 겸임시키되 사무의 번간에 따라 종사하게 했다. 이들은 영관 4명, 정위 5명, 부위 6명, 참위 10명이었다.#


5. 복장[편집]


대한제국 원수부 관제 제4조에서 원수부 무관들의 복장을 규정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자는 어용(황제용) 모자와 동일한 양식으로 하되 품계 표지 만 계급에 따른다.

2. 견장은 어용 견장과 동일 양식으로 하되 위관은 수가 없다.

3. 식대는 장관은 황색에 은사로 이화를 가식하고 영위관은 황색만 쓴다.

4. 식서는 장관, 영관, 위관이 일체 패용한다.

5. 본조에 규정한 것 외에는 육군 복장 규칙에 의한다.#

대한제국 원수부 관제 제4조


황제(대원수)와 동일한 디자인의 군모와 견장 등 복제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6. 청사[편집]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덕수궁 원수부
德壽宮 元帥府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건축시기
1899년 (창건) / 1912년 (철훼)


파일:원수부 청사.png

대안문(왼쪽)과 원수부 청사(오른쪽)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대안문 옆 북쪽 담장에 걸쳐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사진에는 대안문 바로 옆에 있는 건물만 보이지만, 호머 헐버트가 쓴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는 건물이 두 쌍이며 그 사이에 작은 문이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파일:원수부 지도.png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에 나온 원수부. 32번이 대안문이다.
원래 군부 기관은 궁궐 밖에 있었는데 궁 안에 둔 것은 군을 직접 관리하여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고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벽돌로 지었으며 2층 건물이었다. 지붕굴뚝이 있던 것을 보아 실내에 난방 시설을 설치했던 듯 하다.#

원수부 폐지 후에도 건물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철거했다.


7. 매체에서[편집]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시대극 촬영장 선샤인랜드에서 대안문과 함께 재현해놓았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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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이센의 내각시스템은 비밀민간내각(Geheimes Zivilkabinett), 군사내각, 해군내각(Marinekabinett)로 구성되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대통령비서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군사 부문까지 관장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