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 양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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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266호

267호

268호
대구 옻골마을 옛 담장
경운궁 양이재
서울 성북동 최순우 가옥

서울교구장 공관
서울敎區長 公館 | Bishop's Office of Diocese of Seoul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267호
경운궁 양이재
德壽宮 養怡齋 | Yangijae of Gyeongungung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21길 15 (정동)
수량 / 면적
1동 1층, 연면적 145㎡
건축시기
1905년 (창건)
2006년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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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양이재
서울교구장 공관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여담



1. 개요[편집]


양이재는 덕수궁(옛 경운궁) 소속이었던 건물로, 대한제국 시기 황족귀족의 자제 교육을 전담하던 수학원으로 쓰였던 곳이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공립 건물들 중 하나이다.


2. 역사[편집]


1905년(광무 9년)에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조선교구[1]에서 임대하여 쓰다가 1920년에 매입한 후 조선교구 주교관으로 사용했고, 이후 1965년 서울교구 설립 이후부터 성공회 서울교구장의 공관으로 사용 중이다.

문화재청에서 2006년 9월 19일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67호로 지정하였다. 지정 이후 문화재청의 보조금을 지원받아 서울교구에서 리모델링을 하였다.


3. 구조[편집]


  •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규모로, 외형상 삼군부 총무당처럼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 형태이다. 경운궁(덕수궁)에 있던 시절에는 행각과 꽃담으로 건물 주변을 에워쌓았다. 그 일곽은 홍원(紅園)이라 불렸으며 홍원 일곽은 1906년(광무 10년) ~ 1910년(융희 4년)까지 황족과 귀족의 자제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으로 쓰였다.

  • 내부에는 온돌방과 마루, 누마루가 있었으며, 지붕에는 양성 바름에 용두(龍頭)를 써서 격조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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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양이재 뒷모습.png}}} ||
함희당과 연결되어있던 복도각과 뒤편의 모습
  • 초기에는 함희당(咸喜堂)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함희당은 1960년에 헐렸고 현재는 양이재만 남아있다. 다만 양이재 뒷편에 복도가 일부 남아있어 함희당과 연결되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4. 여담[편집]


  • 덕수궁과 담장을 경계로 하고, 서울대성당 경내에 있는 이곳 주변에는 구한말 당시 세계정세를 이끌던 초강대국 영국 대사관이나 여러 서양 대사관, 개신교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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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운궁중건도감 의궤 - 양이재.png}}} ||<width=530>
파일:함희당 의궤.png
[1] 현재의 서울, 대전 교구의 전신.
《경운궁영건도감의궤》의 양이재(왼쪽)와 함희당(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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