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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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 孝定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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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헌종의 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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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헌왕태후 | 明憲王太后


대한제국 고종조 태후
명헌태후 | 明憲太后



파일:경릉 헌종릉 효현왕후릉 효정왕후릉_MG_6735 (38).jpg

경릉 전경
출생
1831년 2월 22일(음력 1월 22일)
조선 전라북도 함열현 관사
(現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사망
1903년 12월 20일(음력 11월 15일)
(향년 73세)
대한제국 한성부 경운궁 수인당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경릉(景陵)
재위기간
조선 왕비
1844년 11월 15일 ~ 1849년 7월 13일
조선 대비
1849년 7월 16일 ~ 1857년 9월 15일
조선 왕대비
1857년 9월 27일 ~ 1894년 12월 17일
대조선국 왕태후
1894년 12월 17일 ~ 1897년 10월 14일
대한제국 태후
1897년 10월 14일 ~ 1903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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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남양 홍씨[1]
부모
부친 익풍부원군 홍재룡
(益豊府院君 洪在龍, 1794 ~ 1863)
모친 연창부부인 죽산 안씨
(延昌府夫人 竹山 安氏, ? ~ 1883)
형제자매
2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헌종 성황제
자녀
없음
종교
유교 (성리학)
전호
효혜전(孝惠殿)
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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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헌숙경예인정목홍성장순정휘장소
(明憲淑敬睿仁正穆弘聖章純貞徽莊昭)
단희수현의헌강수유녕
(端禧粹顯懿獻康綏裕寧)

휘호
자온공안(慈溫恭安)
시호
조선: 효정왕후(孝定王后)

대한제국: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24대 국왕 헌종 이환의 계비. 성은 홍씨(洪氏)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2. 생애[편집]


1831년(순조 31년) 돈령부영사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죽산 안씨[1]의 딸로 태어났다. 헌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효현왕후 김씨가 사망하자 1년 만에 헌종의 왕비가 되어 가례를 올렸다. 헌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승하하여 철종이 즉위하자 효정왕후는 대비가 되어 존호 '명헌'을 받았다. 철종 즉위 후 '왕대비 → 대왕대비'에서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로 바뀌었기 때문에[2] 이 당시 대비는 왕대비의 줄임말이 아니었다. 1857년(철종 8년) 대왕대비였던 시할머니 순원왕후가 사망하자 왕대비가 되었고,[3] 그러다 1890년 시어머니이자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사망한 뒤에도 철인왕후가 일찍이 사망하여 왕대비 자리를 누가 대체할수 없어서인지 대왕대비로 승격하지 못하고 왕대비로 그대로 남아있다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칭호가 왕태후로 올라갔다.

을미사변 당시에는 60대 초반으로 그 때 기준으로는 다소 노쇠한 나이고, 본인도 일단 가만히 있어서 일본군과 낭인들이 딱히 건드리진 않았다.[4] 사실 왕비인 명성황후의 처소와 효정왕후 본인이 있는 대비전의 처소가 서로 거의 위치가 달라서 운좋게 피해간것이지, 궁녀들이나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등의 참사를 최소한 눈앞에선 못봐도 그 참사가 나는 소리까지 피할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을미사변의 충격을 분명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개창할 때 효정왕후를 황태후로 격상시켰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약간 와전된 것으로 정확히는 '황태후'가 아니라 그냥 '태후'였다. 일단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효정왕후가 황태후 책봉을 받은 기록이 하나도 없다. 고종은 왕태자, 왕태자비, 을 황제국 예법에 맞게 황태자, 황태자비, 친왕으로 승격시켰고 그 기록이 현재까지 다 남아있다. 그런데 황태후 책봉 기록이 없다는 것은 격상을 안시켰다는 것이다. 《독립신문》에서 제국 개창을 보도한 기사에 효정왕후를 '황태후 폐하'라고 칭하긴 했으나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왜 황태후로 격상시키지 않았냐면, 남편 헌종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이었다. 헌종은 '대'인데, 그 왕비인 효정왕후가 '황'자를 쓸 순 없기 때문이다.[5] 다만, 황제국에서 '왕태후'라고 하긴 뭐했던지, 제국을 개창하면서 고종은 존호를 붙인 '명헌태후'를 아예 공식 칭호로 정했다.#

1904년(광무 8년) 1월 2일[6] 덕수궁 수인당에서 73세의 나이에 감기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승하 1개월전부터 감기를 앓았고 어의를 통해 치료한 기록이 있으나 워낙 노쇠한 탓에 버티지 못한 듯하다.

능호는 경릉(景陵)이며, 남편 헌종과 그의 첫째 왕후인 효현왕후와 나란히 묻혀있다. 1908년(융희 2년)에 순종이 헌종을 헌종성황제로 추존하면서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로 같이 추존했다.

한국사에서 '태후' 호칭이 붙은 마지막 인물이다. 다음 대의 왕비인 철인왕후 김씨, 명성황후 민씨는 제국 개창 이전에 사망했으며 순정효황후는 본인이 마지막 황후로서 웃어른의 지위를 갖지 못하고 제3공화국 때까지 생존했기 때문이다.

3. 여담[편집]


  • 1844년(헌종 10년) 5월 효정왕후를 간택하던 날,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순조의 적3녀 덕온공주[7]가 경사를 치르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에 들어갔다가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급체하여 사망하는 참변이 발생했다.[8] 덕온공주는 죽기 직전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곧바로 사망했고, 공주 역시 아이를 매장한 지 약 2시간 정도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 어진 성품을 갖고 처첩 간에 우애있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41년 3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정미년(1847)에 경빈(慶嬪)이 입궁(入宮)하여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태후는 더욱 화색이 넘쳐 근시(近侍)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빈의 자태에 아름다움이 넘치고 덕스러운 얼굴에 그윽한 빛이 도니 나라에 왕자가 많아지는 경사가 생기고 후손들이 백 대에 이르도록 번창해질 것이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가 더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순원 성모(純元聖母)가 듣고서 칭찬하기를, ‘왕후(王后)가 이처럼 어지니 태임(太任), 태사(太姒)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근간에 경빈(慶嬪)이 본궁(本宮)에 나가서 살며 명절을 축하하는 이외에 혹 이따금 대궐에 들어와 살 때면 태후는 기뻐하며 옛일을 이야기하느라 저녁이 되어도 싫증을 몰랐으며 막상 그가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하면 그리운 심정을 금치 못해 눈물을 뿌리며 보냈다. 색다른 음식이나 맛난 과일이 생기면 아무리 적더라도 반드시 나눠주어 먹였다.

선왕(先王)에게서 은총을 받은 궁인(宮人)에 대해서는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는데 그 사랑은 갈수록 지극하였다. 이것은 모두 태후의 성대한 덕이며 역대 왕후나 왕비들에게서는 드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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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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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효정왕후

2001년 ~ 2002년 KBS2 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김정하[9]가 연기했다. 왕실 어른 1로 대비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위주로 등장했다. 가끔 왕실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시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김용림)에게 한소리 듣기도 했다. 다른 대비들과 달리 20세기 초까지 장수했기 때문에[10] 후반부에서는 조선 말기의 온갖 막장 상황을 모두 겪는 비운의 태후로 나왔다. 드라마 최후반부인 을미사변 당시 건청궁에 칼을 휘두르며 들어와 명성황후(최명길)를 찾던 일본 낭인들이 왕태자(백승우)의 머리채를 잡고 왕태자비(이유리)와 같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만행을 보고 실신한다.[11] 또한 아관파천 때도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을 한탄하며[12] 명성황후의 장례 때 슬프게 통곡한다.[13] 참고로 드라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오래 출연한 인물 중 하나이다.
[1] 죽산 안씨 가문은 세종대왕의 차녀 정의공주가 시집간 가문이기도 하다.[2] 왕실에서 상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왕실에 대비가 동시에 3명이, 그것도 성종과 연산군 때처럼 같은 항렬에 동서지간인 2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의 조카, 종형제(헌종에서 철종으로의 계승은 항렬 역진이었다), 백숙부모 뻘마다 한 명씩 있게 되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되었다.[3] 왕대비였던 시어머니 신정왕후는 같은 날 대왕대비가 되었다.[4] 일본의 최우선 목표는 왕비인 명성황후 민씨였고, 국왕인 고종조차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5] 후술하겠지만, 헌종은 1908년(융희 2년)에야 황제로 추존받았다.[6] 음력으로 11월 15일이라 사망년도를 1903년으로 적은 경우도 있다.[7] 이복언니 영온옹주를 포함하면 넷째 딸.[8] 현재는 급체가 심각한 질병이 아니나, 당시엔 급체로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9]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이영애(김현숙)의 어머니로 출연.[10] 대비인 철종철인왕후임오군란갑신정변 전인 1878년에 승하했고 대왕대비인 익종신정왕후 조씨동학농민운동을미사변 이전인 1890년에 승하했다. 사실 신정왕후 조씨만 하더라도 대왕대비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임오군란이라는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역대급 사건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장수한 쪽인데 효정왕후는 아예 궁궐에 자국군이나 청군도 아니고, 일본군과 낭인들이 들이닥쳐서 내명부 수장인 왕비를 찾아 죽이고, 그와 함께 궁녀들까지 서슴없이 죽이는 만행을 보고도 어찌 못하다가 장수한 쪽이라 더욱 불행하다. 그나마 1904년 1월에 승하하여 외교권이 강제로 빼앗기고 나라가 아예 빼앗기는 대참사까진 보지 않고 주권 국가의 왕대비(태후)로 생을 마감한게 불행 중 다행인셈.[11] 이 때 의화군(강성민)이 효정왕후에게 할마마마라 하는데 고증오류다. 효정왕후의 남편 헌종과 의화군의 아버지 고종은 같은 항렬이며 족보 상 형제지간이기 때문. 그래서 의화군에게 효정왕후는 큰어머니가 되지만 큰어마마마(...)란 말은 없기에 그냥 (왕)태후마마라 부르면 됐다.[12] 실제 역사 상에서는 이 때 태자비와 함께 경운궁으로 갔지만, 드라마에서는 고종(이진우), 순종(백승우)과 함께 러시아공사관에 간 것으로 나온다.[13] 효정왕후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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