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r5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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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임진왜란의 막바지인 1598년 12월 벌어진 조선-명 연합군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순신의 생애 마지막 전투이자 그가 전사한 전투로서 유명하다. 또한 임진왜란을 사실상 마무리짓는 전투라는 의미도 갖는다.[5] 하지만 조명 연합군과 왜군 양측 모두에게 절반의 성공이라는 의미가 있다. 조선 측에선 전쟁에선 이겼으나 주변에서 달려온 일본군 구원 병력과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전투의 가장 큰 목적은 달성하지 못해 절반의 성공이라 할 것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왜란에서 벌어진 해전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긴 했으나, 어쨌든 자신들의 기본 목표인 주요 장수의 철수에는 성공했기 때문에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명량 해전 이후[편집]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왜군을 격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 결과 왜군은 육군과 수군이 합동으로 진격해서 한양을 공격한다는 수륙병진 전략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수군은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가로막혔고, 육군은 직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가로막힌 탓이었다.
이로써 왜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진행할 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에 왜성[6] 을 쌓고 되려 수비에 치중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일본군들의 군수보급은 정말 처참한 수준이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기가 그동안 타고 다니던 말을 도축해서 그걸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였다.
이순신 또한 도원수 권율,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육군 제독 유정 등과 함께 수륙 합동으로 순천 왜교성을 공격했다. 목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6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불구하고 왜교성의 함락에는 실패했다. 명나라 육군이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인 탓이었다.[7] 결국 이순신은 고금도로 물러나 고니시의 동태를 감시했다. 일본 수군에 대한 선제 공격을 명(明)군에 제의하는 의미가 담긴 ‘간찰(簡札·한문 편지)’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2.1.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군의 철수[편집]
이런 가운데 1598년 8월 18일, 일본군의 총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결국 사망했다.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위임받은 고다이로(五大老)와 고부교(五奉行)들은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의 철수 작업에 착수했다. 이미 장기간의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 전쟁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던 다이묘들은 알음알음 집결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대로 일본군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실익적으로는 적의 전력을 온전히 보내줬다간 재침략의 불씨가 될 수도 있거니와, 감정적으로도 7년 동안 조선 곳곳을 잔악무도하게 유린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순신 휘하 군졸과 장수들 역시 일본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8][9]
그렇게 퇴로를 봉쇄하고 적을 섬멸하려는, 복수심에 불타는 조명 연합군과, 목숨을 걸고 퇴로를 뚫어 도주하려는, 지금만큼 절박할 수 없던 일본군 모두에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3. 전투의 전개[편집]
이에 이순신은 계책을 써서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결심했다. 1598년 11월 18일, 일단의 병력을 순천 왜교성 앞으로 보내 조선 수군이 다시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했다.[10] 절박해진 고니시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1] 그러자 시마즈는 고성에 주둔한 다치바나와 남해에 주둔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군대와 함께 3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순천 왜교성으로 향했다.
이 분이 쓴 행장을 보면 도요토미의 죽음에 따라 왜군에 철수령이 발동되었는데, 이 정보를 입수하고 조명 연합군이 수륙으로 포위망을 구축해서 유일하게 순천 왜교성만 수륙으로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포위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육군은 별로 전투에 의지가 없었고 수군만 유일하게 분전하고 있었지만 왜교성 전투에서 진린의 무리한 작전 수행으로 뼈아픈 피해를 입어야했다. 이후 진린은 가급적이면 왜군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회유도 하고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갖은 수단을 썼지만 이미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의 태도를 바꾸기는 어려웠다.[12] 그래서 고니시와 진린과의 화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수시로 연락선들이 오고갔다. 그렇지만 이순신 장군의 강경한 반대로 인해 진린의 뜻대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로 요청해서 포위망에서 한척의 배만 통과하게 했다. 구원군을 요청하는 배였다. 사천의 왜군 구원군과 왜교의 왜군까지 합세하면 반대로 조명 연합군이 포위당할 위기에 놓이고, 결국 고니시의 작전은 성공해서 사천에서 500여 척의 구원군이 출동을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순신은 왜선 1척이 포위망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고서[13] 협공당할 것을 우려, 물목이 좁은 노량해협으로 출전할 것을 결심한다. 진린은 출전이 내키지 않았으나 이순신이 그냥 두고 떠나겠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따라 나선다.[14]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조선군이 출동해서 명군이 마지못해 따라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이다.
명군 입장에서 남의 나라에서 싸우는 군대가 과연 내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싶어하겠는가? 그들로써는 왜군을 격퇴하여 명나라 본토로의 침입을 막기만 해도 그로써 전략적 임무 완수이다. 백성들이 도륙당하여 복수심에 불타는 조선과는 입장차가 존재하였던게 당연하다. 명군이 왜군과 몰래 협상했던 것은 당시 상황과 명군의 입장을 고려하면 납득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군이 진린의 명 수군을 이끌고 마지막 대해전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순신의 왜적을 상대로 거둔 무패의 장군이라는 명성과 함께 뛰어난 통솔력과 외교력에 기인했다. 압도적인 장군의 명성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진린은 이순신이 항상 수급과 전리품을 챙겨주는 데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순신의 완벽한 군 통솔력은 진린이 그를 신뢰하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왜교성에서 진린은 자칫 전사할 뻔했으나 조선 수군 덕분에 생존했다. 이러한 일들로 진린은 이순신을 예우했고 내키지 않는 전투에도 참여 해줬던 것.
그렇게 최후의 결전이 임박했다.
3.1. 양측의 병력 규모[편집]
<임진전란사>에서 정리한, 노량 해전에 참가한 조선군 장수들은 다음과 같다.
조선 측
- 삼도수군 통제영
- 당진포만호 조효열
명나라 측
- 도독 진린
- 부총병 등자룡
- 참장 왕원주
- 부총병 진잠
- 유격장 허국위
- 유격장 계금
- 유격장 심무
- 유격장 복일승
- 유격장 양천윤
- 유격장 마문환
- 유격장 장량상
- 파총 이천상
- 파총 심리
- 중군장 도명재
노량 해전에 투입된 각국의 병력과 함대 규모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왜교성 전투 직전 조명 연합 수군의 병력은 조선군 7,328명, 명군 10,000여 명 내외로 추정된다. 이덕형의 발언[15] 을 참고하면, 명군에서 실제 전투에 참여한 인원은 진린과 등자룡 휘하의 일부이고 상당수는 뒤쪽에서 성세만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상촌집』에 따르면 등자룡 휘하의 병력은 3,000명, 진린 휘하의 병력은 10,590명이다. 그러나 진린의 병력만은 다소 부풀려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실록[16] 과 『행록』에 기록된 5,000명에 왕원주의 병력을 더한 최대 7,000명 수준일 것이다.[17] 일본의 경우 노량 해전 참전 무장들의 군역장에 따른 총 병력은 시마즈 10,000명, 다치바나 5,000명, 소 1,000명, 데라자와 1,000명, 타카하시 500명의 도합 17,500명이다.
그러나 당시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군의 병력은 7000명 ~ 8,000명 수준이었고,[18] 남해에 주둔한 소의 병력이 800명 ~ 900명 수준이었다[19] 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저런 병력 손실로 실제 노량 해전에 참전한 인원은 군역장의 수치에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데라자와는 뒤쪽에서 관망만 하다가 달아났다고 하니,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최대 14,000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일본 함선의 탑승인원은 기록이 없지만 정유재란 당시의 배는 상당히 커졌다고 한다.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은 선조가 비변사와 회의를 하면서 적선의 크기가 대단히 커졌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니 김응함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
한편 조선군 7,000여 명이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략 60척 가량의 판옥선이 필요하다.[20] 전후 나대용은 정유재란 직후 삼도의 판옥선 숫자를 60여 척이라고 했는데,[21] 노량 해전으로 인한 전선의 손실과 복구를 감안하면 당시 투입된 판옥선을 60척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반론] 다만, 판옥선은 더 적고 협선과 방패선이 상당수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충청수사 권준은 참전하지 않았기에 충청수군은 참전한 일부 증원 병력을 제외한 본대는 높으신 분들의 판단이나 이순신 제독의 판단에 따라 예비대로 후방에 대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 측 전선의 경우 기록에 따라 300척 ~ 500척가량이 언급되고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명군의 왕원주, 복승, 이천상의 배가 1백여 척이라고 했고[22] , 「상촌집」에 기록된 이들의 병력이 6,200명이니 1척당 62명이 탑승한 꼴이다. 또한 왜교성 전투에 참가한 명군이 19,400명이었고 일본 측 기록인 『우도궁고려귀진물어(宇都宮高麗歸陣物語)』에 이때 명군의 배를 300여 척이라 했으니 1척당 64명이라는 얼추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이를 보아 비록 노량 해전 자체를 기록한 『정한록(征韓録)』,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 명군(혹은 조명연합군)의 전선을 500척이라 했지만, 이는 과장이고 300척 정도의 규모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23] 일본 측 전선 역시 기록에 따라 300 ~ 500척가량이 언급되고 있는데, 우선 명나라 측 노량 해전 결과 보고는 사천, 남해, 고성에서 합세한 배가 300여척인데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200여척을 불태웠고 100여 척을 나포했다는 내용인데 순천의 고니시가 가진 배를 합산한다면 300여척+@로 볼수 있다[24] 조선 측 결과 보고는 200여 척을 부수고 100여 척이 남해로 도망갔다고 하고 있다.[25] 그 외에 일본 측 함대가 500척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3.2. 최후의 전장, 노량[편집]
창선도에서 출발한 300척의 전선에 1만 5천여 명의 정예 군사를 태운 일본 함대는 서서히 노량 해협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때 이순신은 이미 노량 근처의 섬에 복병을 숨겨놓고 왜군 선단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이항복의 백사집에 기록된 이순신의 맹세
결국 노량 근처에 진입한 일본 선단에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이 기습을 가하여 노량 해전이 시작되었다. 노량 근처에 복병한 삼도 수군 복병장의 함대가 기습을 가하자 노량 해협을 안전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왜군들은 크게 당황하였으며 수척의 왜선이 격침되자 그제서야 기습당했다는 것을 안 시마즈는 즉시 우세한 함선의 수를 이용, 조선 수군 복병장의 함대를 포위하려고 한다.[26]
그러나 이미 죽도 부근에 매복하여 있던 진린 함대가 도독기를 높이 올리고 북을 치며 진격을 하고 있었다. 원래 명군 전선인 사선, 호선들은 왜군의 전선인 세키부네에 비해서도 전투력 면에서 열세에 있었으나 진린과 등자룡이 탄 배는 판옥선으로 왜선들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고, 등자룡이 불랑기포와 호준포를 쏘며 일본 함대에 돌격해 들어가자 때에 맞추어 삼도 수군 복병장의 함대도 그에 호응하여 왜선을 침몰시키기 시작했다. 삼도 수군 복병장 함대의 역할은 왜군을 기습하는 임무 말고도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 수군 및 진린을 호위하는 임무 또한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함대의 움직임에 맞추어 공격하였다.
노량에서 기습을 당한 일본 수군은 그대로 퇴로를 찾다 관음포까지 유인당했고, 관음포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이순신의 삼도 수군 본 함대가 공격을 시작하였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함대는 왜 수군의 중앙을 돌파하려 하였고, 어린진을 펼친 상태에 있던 왜 수군 함대는 졸지에 앞에서는 명 수군, 우측에서는 조선 수군 복병장의 함대, 좌측에서는 이순신의 본함대에 의해 삼면 포위된 형태가 되어 버렸다.
이때, 마침 부는 북서풍을 이용하여 조명 연합 수군은 불화살과 신기전, 불 붙은 짚섬으로 화공을 가하였으며[27] 순식간에 왜군의 함대는 불타기 시작하였다. 이는 매복 기습 후 삼면 포위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가한다는 이순신의 전술에 왜군 함대가 완전히 말려든 것으로써 이미 왜군의 승기는 사실상 꺾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첨자찰진을 펼친 이순신의 본함대는 경상 우수사 이순신(무의공)을 선봉장으로 하여 돌격하였다. 화공에 큰 피해를 입은 왜군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중앙을 돌파당하고 만다.
그러나 왜군 지휘관인 시마즈는 과연 사천 왜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명장다운 빠른 판단을 하여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군 함대를 공략하기로 한다.[28][29] 큰 피해를 입은 왜군 선봉대는 전투 불능에 빠진 상황이었으나, 선봉대 뒤에 있는 중위, 후위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은 상황이었다. 왜군 함대는 명군 함대를 향해 빠르게 돌진[30] 하였고, 이때 등자룡의 판옥선에 명나라 함대의 엉터리 포격술[31] 로 인해 불이 났고, 돌진하는 왜군에 의해 결국 등자룡이 전사하고 판옥선이 불타버리고 만다. 명군 파총 심리가 등자룡의 배를 구하러 달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왜 수군은 즉시 진린의 대장선으로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의 함대가 근처에 와서 진린의 함대를 구하였고 조명 연합 수군은 일종의 포위진을 펼친 후 다가오는 왜군 함대에 포격을 하였다. 야간이었기에 평소의 화포 사정거리보다 훨씬 짧은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때문에 근접전[32][33] 이 벌어졌으나, 북서풍을 이용한 화공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던 왜 수군은 전력이 급격히 감소한다.
명 수군을 공격하여 중앙을 돌파하여 활로를 뚫는다는 왜군의 계획이 이순신의 빠른 구원으로 인해 무산된 상황에서, 노량에서 여수 방향으로 흐르던 물이 방향을 바꾸어 여수에서 노량 방향으로 일기 시작하자 관음포 앞바다의 파도는 관음포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왜군은 퇴로를 찾다 관음포로 잘못 찾아들어갔다. 관음포는 퇴로가 막힌 만으로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줄긴 했으나 그 포구가 넓어 야간에 보면 그냥 먼 바다로 보일 정도다. 조명 연합 함대는 왜 수군을 관음포 입구에 정렬하여 입구를 철저하게 봉쇄, 포위 섬멸을 시작하고 왜군은 거센 저항을 시작한다. 포구에 갇힌 왜군 입장에선 죽기살기로 관음포를 빠져나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보니 치열한 전투가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거둔 해전을 검토해 보면 대체로 전장의 환경이 조선군에게 유리했고 철저하게 적들의 의도대로 해주지 않는 전략으로 백전백승을 거두었지만 이번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장이 이번엔 왜군에게 나쁘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싸워서 수전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 다만 얼마간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동안 도륙당하고 짓밟힌 조선의 민중들을 위하여 반드시 왜군을 섬멸시켜야 하는 전투였고 이순신 장군도 그를 충분히 감안하고 감내하여 전투에 전력으로 임하였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 전체 사상자에 비하여 지휘관급의 전사 비율이 매우 높은 것도 그들이 얼마나 앞장서서 절실히 싸웠던 것인지를 보여준다.
3.3.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편집]
오전 8시경, 이순신은 일본 수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35] 이때 적 함대에서 쏜 총탄 한 발이 이순신의 몸을 꿰뚫었고, 충무공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이순신이 어디에 탄환을 맞았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엇갈린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가슴을 관통하여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적고 있고, 안방준의 은봉전서에는 '겨드랑이 아래(腋下)'에 맞았다고 적혀 있다. 각종 매체나 위인전 등에서 노량 해전을 묘사할 때는 징비록의 기록을 따라 흔히 가슴에 탄환을 맞는 것으로 묘사된다.[36]
탄환에 맞은 이순신은
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조명 연합 수군은 이순신의 죽음을 모른 채 남은 적들을 소탕하며 정오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戰方急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매우 유명한 유언이지만 그래서인지 뒷이야기도 많다. 이순신이 남긴 이 유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이다. 그런데 정작 징비록보다 약간 뒤에 초판이 간행된 행록에서는 별 이야기가 없다가, 나중에 재간에 재간을 거듭하면서 어느 사이에 유언이 첨부되었다. 이에 몇몇 연구자는 해당 유언이 없었거나 다른 내용이었을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순신과 교분이 있었던 이원익이 인조에게 해당 유언을 그대로 전하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려 있어, 정확히 같은 문구는 아니더라도 이런 유언을 남긴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李元翼曰, 舜臣之子䓲, 方爲忠勳都事, 而此不易者也。倭亂時, 舜臣將死, 䓲, 扶抱而泣。舜臣曰, 與賊對陣, 愼勿發喪云云, 則䓲, 故不發喪, 擊督戰如常矣。
이 유언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굉장히 많은데, 원문을 보면 알겠지만 '적에게'라는 표현은 일언반구도 없다. 애초에 적에게 총사령관의 죽음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37] 오히려 아군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수병들이 자기 장수가 죽었다는 걸 알면 사기가 극도로 떨어질 테니까.[38]
그리고 이순신의 죽음이 전투 중에 알려지지 않았다곤 하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분전하다가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인물들의 기록도 꽤 나온다. 이순신과 동승한 송희립도 부상을 입었고 유형은 탄환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끝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잔적을 소탕하다 전사했다.
이 노량 해전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는 당대 사료는 실록에 있는 이덕형의 보고인데 그것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지휘관이 전사한 탓에 확실한 장계가 없기 때문이다.[39] 그래도 그의 보고 덕분에 전투의 전개가 상당히 알려졌지만 정말 자세하게 보고한 충무공의 장계를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특히 장수급이 다수 전사한 건 임진왜란 해전 내 없었던 일인데 이것으로 그 날의 전투가 얼마나 혈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보면 조선 수군은 부족한 함선과 병력의 규모를 우월한 화력과 사정거리의 우위로 극복하고 있었기에 포격전 위주의 전투를 행해왔다. 하지만 노량 해전의 경우에는 적의 섬멸을 목표로 하였기에 근접전의 양상까지도 띠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전에 비해 엄청난 사상자가 나오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군의 사상자가 일본군의 사상자보다 훨씬 적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깡패수준이던 판옥선의 체급 때문이다. 실제로도 일본 수군은 판옥선까지 접근한다고 쳐도 크고 아름다운 판옥선의 상층부까지 올라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의 화살과 승자총통 등의 불세례를 받는 것은 덤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바로 조선군의 근접전 능력 향상인데,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군의 근접전 능력 자체가 세조의 군제 개악 및 오랫동안 이어져온 평화 탓에 엄청나게 쇠퇴하여 사실상 명나라에 의존하다시피 했지만, 정유재란 때는 임진왜란에서의 경험 및 항왜들의 뛰어난 근접전 능력에 힘입어 조선군의 전반적인 근접전 능력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노량 해전 당시 일본군 병사들은 근접전에서 결코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는 조선군을 상대해야 했으며, 여기에 앞서 말한 판옥선의 깡패수준 체급까지 더해지면서 일본군 사상자는 더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접근에는 성공했으나 판옥선 상층부까지 올라가기엔 판옥선의 크기가 너무 크고, 여기에 조선군의 강한 군사력까지 더해지면서 판옥선 상층부로 올라가다가 전사하는 일본군 병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에,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냥 닥치는대로 베고 도망가는 게 최선이었다. 무조건 살아서 도망가려는 자와, 한 놈도 살려보낼 수 없다는 자의 의지가 맞붙었으니 엄청난 난전이 일어났고 노량 해전에서 유례없는 조선 수군 장수들의 전사는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듯하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운용한 화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의외로 일본 장수들의 전사율은 높지 않았다. 조선군의 장수들이 조정에서 임명한 군인 관료의 성격이라면, 왜군의 장수들은 각각 별도의 영지와 백성을 거느린 봉건 영주들이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대기업의 부장급이랑 협동 조합의 조합원 정도로 비교할 수 있다. 때문에 조선군은 장수가 죽어도 사후검토를 통해 부하들에게 무능 정도로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의 큰 잘못이 없었다면 보직 이동이나 부대 재편성 등으로 직위를 이어갔고, 실제로 최고지휘관이 전사한 전투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부하들이 전투를 회피하기 위해 고의로 지휘관을 버리고 달아나서 죽은 것이 아니고 또 부하들이 최선을 다해 싸운 게 입증되면 죄를 묻지 않았다.[40] 그러나 일본군은 평시에도 다이묘가 사망하면 순사라는 명목으로 가신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구조였다가 에도 막부에서 금지하면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만약 다이묘가 전사했다가는 가신들도 모조리 로닌. 즉 실업자가 되기 때문에 자기가 죽어도 다이묘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4. 충무공의 전사에 대해[편집]
4.1. 저격설과 그 실제[편집]
일본군이 충무공을 정확히 노려서 맞추었다는 설이 존재하지만 전근대 시대의 조악한 명중률의 화승총으로, 야반의 난전 속에서, 호버링하는 헬기보다 더 흔들리는 전근대 시대의 배에 탑승한 상태로 변변한 조준도구도 없이 사람을 온전히 맞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전근대 시절 전쟁에서 장수가 눈먼 화살 등에 맞아 전사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일단 전쟁터 자체가 워낙 위험한 곳이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에 장수라고 특별히 보호막이라도 있지 않는 한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 총알, 포탄이 장군만 피해가란 법은 없다. 실제 역사를 봐도 무수한 이름 난 장군들이 전쟁에서 그 명을 달리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지휘관이 직접 최전선에 섰기에 근현대 시대의 전쟁보다 지휘관급의 희생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국시대에 일본군이 조총수들을 경보병처럼 운용,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지휘관들을 노리고 쏘는 전술을 자주 했고 육상전에선 조선 장수들이 저격당한 것처럼 보이는 정황들이 기록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노량 해전은 배가 격하게 요동치는 상황에서 전근대적 화기를 발사하는 엄연한 해전이다. 그게 조선 측 명나라 측 일본 측 어디에도 관련 기록은 없다.
하지만 앞뒤 정황만을 따져 볼 때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비록 해상전에서의 저격은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시마즈군은 분명 저격 전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며 수하에 정예 총병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시마즈군에는 가신인 타네가시마씨[41] 가 함께 종군했는데 이들은 당시의 최정예 총병대로 이름높았다. 또한 시마즈군에는 후퇴하며 자살적 후비대를 남겨두어 적장을 저격하는 전법인 '스테가마리'가 존재했는데, 저격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전술이 해상전에서 사용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에 노량에서 충무공의 주적이었던 시마즈군에 유독 적장에게 치명적인 이 두 비밀병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 특기할 만한 점이다.
물론 해상전에서 전근대적 화약무기를 가지고는 저격이 거의 불가능하며[42] 충무공을 저격했다며 포상을 받은 자도 없고 정확히 노려서 쏘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참고할만한 하나의 특기사항으로 남을 뿐이다. 사료의 기술로 미루어 보면 난전 중에 유탄에 맞았다는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4.2. 이순신 자살설 및 은둔설[편집]
이순신은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전사했으며, 그가 전사하면서 길고 긴 전쟁이 끝났다. 이렇게 너무나 극적인 상황 때문에 일각에선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자살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이 왜군을 추격하면서 갑옷을 벗고, 지휘관실에서 벗어나 적군의 사거리에 들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왜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왜 이랬냐는 물음에는 이순신이 전쟁이 끝난 뒤에 선조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전란 후를 생각했을때 모두를 위해서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예 자살로 위장한 뒤 은둔했다가 나중에 생을 마쳤다는 설도 있다.
아주 헛소리는 아닌 것이, 전쟁이 끝난 후에 큰 공을 세워 유능하고 명망 높은 장수가 집권층의 질투와 두려움을 사서 토사구팽당하는 예는 적지 않다. 선조 역시 이순신을 증오하여 전쟁 중에도 그를 잡아들여 고문을 하는 등 이순신을 제거하려 한 전적이 있으니 충분히 합리적인 추측이다. 게다가 이순신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나며 공적이 알려지면 인기는 더욱 늘 것이고, 그를 억압한 조정에 대한 반감은 급증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이런 고금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군주인 선조의 의심병적인 성질로 미루어 볼 때 노량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후에 못볼 꼴을 당하지 않게 하였고, 그의 명예를 위해서 가장 잘 된 일이라고 생각은 하곤 한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 도독직을 받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자살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해당 논란에 관해서는 이순신/의문점 항목 참조.
4.3. 이순신 자살설 및 은둔설의 반박 의견[편집]
이순신 자살설은 비단 현대뿐만이 아닌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심각하게 논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숙종 때의 영의정 이여는 "충무공이 총탄에 맞기를 자처했다"라고 말하고 있고 신료인 이민서도 "당쟁으로 김덕령 장군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김덕령의 죽음을 논하면서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이순신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라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43] 또한 이후의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도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이이명은 "공이 아무리 앞에 다가올 화를 걱정했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벼히 여겼겠는가?"라며 자살설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44]
사실 이순신 자살설이 수면에 오른 건 남천우 박사가 역사 비평에서 간행한[45] 이순신 전기에서 다시 들고 나왔다. 문제는 남천우 박사가 자살설을 지지하는 게 아니고 자살설이 있으나 강하게 부인하면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순신은 죽은 게 아니라 부하들과 짜고 변복해 숨어 소실집이나 본가의 다른 방에 은거하다가 20년 후에 진짜로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는 이야기.[46] 꽤 많은 사람들을 낚았으나 근거가 전혀 없다.
남천우 박사는 이순신의 자서전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그 자서전이라는 게 이분의 충무공 행록이다. 원래 숨어살면서 "나는..."이라고 쓴 자서전을 이분이 3인칭으로 바꾸었다는 이론이다. 물론 낚이지 말자.
사실 이러한 자살설이 나온 큰 이유는,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과 노량 해전의 처절함이 어쩐지 자살하기에 딱 좋은 배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맥락을 조금만 안다면 노량 해전은 생각 만큼 (조선 입장에서는) 처절한 전투도 아니었고 이순신이 처한 상황 또한 자살하기에는 택도 없는 상황이었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노량 해전의 경우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작전에 말려들어 두들겨 맞기는 했으나 여전히 명군과 합세하더라도 150대 500척의 군사적 차이가 있었고 관음포로 도망간 상태에서 입구가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수진을 둔 일본군의 상황은 이순신에게 더 이상 겁먹은 일본군이 아니었다. 이곳을 뚫지 못하면 어차피 모두가 죽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자살설이 이순신 장군의 군인 정신을 한편으로는 폄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자. 노량 해전은 이순신 스스로가 그토록 원하던 전투였다. 이순신 본인이 일본군에게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라 전투에 큰 심리적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도 이순신은 조선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투 현장에서 전 수군을 지휘하고 명나라 군의 말도 안 되는 행동과 명령을 중재하고 더 나아가 이의제기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막중한 권한과 임무가 있는 것을 알면서, 스스로가 원했던 해전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살을 하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행한 행적과 군인 정신을 폄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순신 입장에서 이 노량 해전은 최후의 전투도 아니었다. 시마즈는 고니시 군을 구원하러 온 것이었기에 격파했을 뿐, 이순신의 가장 큰 목표는 시마즈가 아니라 고니시였다.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자가 뒤에서 살아남아 버렸는데 그 책임감 강한 이순신 장군이 자살 같은 걸 하려 할까? 만약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살았다면 곧바로 고니시를 부산까지 추격했을 것이며, 아예 부산 근처에 돗자리 펴 놓고 왜군이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제2차 부산포 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47] 노량 해전 이후 조명연합군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군사력이 격렬하게 소모된 것도 있지만 이순신의 죽음으로 인해 사기가 떨어진 게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48]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순신 자살설 및 생존설을 주제로 다큐를 만들다가 문중의 항의로 내용을 바꾸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이를 명량이 흥행했을 때 MBN 프로그램인 아궁이에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학자가 이런 설이 나도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 즉 위대한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적군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살아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 한 것이라 평했다.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5. 전투의 결과[편집]
死舜臣破生倭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기사
군선 100여 척을 포획했고 200여 척을 분멸하였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셀 수 없다.
선조 실록 권 106 선조 31년 11월 을사. 진린의 보고
왜군선 200여 척을 격침하고 사상자가 수천 명.
선조 실록 권 106 선조 31년 11월 무신. 좌의정 이덕형이 전투가 끝난 현장을 조사하여 올린 보고
위와 같이 노량 해전의 전과 보고는 명나라 측과 조선 측에서 따로 이루어졌는데, 조선 측 보고가 3일 늦게 조정에 전해졌다. 그 이유는 조선 측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이 전사한 상태에서 육군에 종군하고 있던 이덕형이 별도로 종사관을 파견하여 전투의 결과를 조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진린의 보고와 이덕형의 보고는 세부적인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한결같이 막대한 규모의 일본군을 격파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다만 후일 이덕형이 재차 확언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50] 조선 측의 보고가 좀 더 진실에 가깝고, 명 측의 보고에 다소 과장이 섞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사망한 일본군의 수는 무수히 많을 것으로만 짐작될 뿐 '셀 수 없는', '수천 명' 등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수치를 알 수는 없다. 일단 진린의 보고에는 일본군의 총 병력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이외의 문헌에서 언급되는 최대치가 보통 500척 규모니 이를 기준으로 하여도 전체 병력의 60%,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 전체 병력의 66%를 궤멸시킨 셈이다. 대략 6할 정도의 병력을 궤멸시킨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대형선보다는 소형선의 피해가 컸을 테니 실제 일본군이 이 정도로 처참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기는 힘들고 대략 절반 정도인 6000명 ~ 7000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본 측 기록인 『정한록(征韓録)』에서는 노량 해전의 피해 규모에 대해 이름 있는 자 26명 및 다수가 사망한 것을 전할 뿐 별다른 언급이 없다.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 언덕에 옮겨 쌓아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 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 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49]
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 106권, 31년(1598년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27일(무신) 5번째 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한편 조명 연합군은 10여 명의 장교급 인사가 전사한 것과 등자룡이 타고 있던 판옥선 1척이 소실된 것이 확인될 뿐 그 구체적인 병력의 피해 상황이 전하지 않고 있지만, 노량 해전이 야간에 이루어진 육박전인 것과 다수의 장교가 사망한 것을 참고하면 격렬한 전투의 와중에 기록되지 않은 병력의 피해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정한록(征韓録)』에 명군 200여 명을 살해한 것, 조선 배 4척, 명나라 배 2척을 포획한 소소한 전과가 전하고, 『사천어재진기(泗川御在陣記)』에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조선 배 60척을 포획하여 철수에 이용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판옥선 4척이면 500여 명 정도, 명나라 측도 최대 400명 ~ 5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조선군의 피해 정도를 짐작케 하는 또 다른 참고 자료는 전후 조선수군의 전선 증강 양상이다. 앞서 제시했지만, 나대용의 1606년의 상소에는 정유재란 뒤 삼도의 판옥선이 60척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동일 기록에 1599년 전선 25척[51] 의 건조 작업이 언급되고, 1600년 1월에 삼도의 판옥선이 80척[52] 인 것을 보면, 삼도의 판옥선이 60척이었을 시점은 노량 해전 직후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노량 해전에 투입된 판옥선이 60여척이었을 테니 조선군이 노량 해전으로 판옥선 수척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기는 매우 힘들다. 이쯤되면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이룩했다는 전과는 신빙성이 아예 없는 전설의 영역으로 보아도 좋다.[53] 18세기 말에 작성된 호남의절록에 이순신의 동순참좌제공(함께 싸우거나 전사한 선비들)은 144명이고 동순제공(함께 전사한 선비들)이 58명인데 그중 21명, 약 38%가 노량에서 전사했다.
일본측의 과장 가능성이 높지만, 기록된 조선 수군의 손실은 판옥선의 피해가 아니라 협선과 방패선 승조원들의 피해였을 가능성이 있다. 부산포 해전도 92척의 협선이 74척의 판옥선과 함께 출격했고, 1593년에는 250척에 달하는 규모였다. 명량해전 역시 협선 32척이 함대에 포진해 있었다. 물이 얕은 바다에서는 판옥선 대신 잔적 소탕에 투입되는 등 전투임무도 수행했다. 세키부네에 비해 우월한 체급이 아닌 협선과 방패선이라도 노량해전에서는 뒤에 둘 상황이 아니었다. 방패선과 협선은 정원이 50-32명으로 추정되는 만큼 노량에서 판옥선의 엄호를 기대하기 어려운 밤에 정말 처절한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판옥선에 승선한 장수들도 전사하는 상황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게 야간전이라는 것이다.[54] 현대에 들어 레이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기 전까지 야간전이란 것은 주간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1598년에 야간전에서 유인 포위 전술까지 사용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전사와 난전 와중에 또 다른 당초의 목표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및 왜군 장수들을 잡는 일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55] 고니시는 자기를 구하러 온 지원군이 실컷 두드려맞고 얻어터지는 해전의 혼란을 틈타 몰래 부산으로 도망쳐서 일본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일전에 진린이 뇌물을 받고 고니시 측 연락선이 통과하게끔 용인해 주지 않았다면 고니시를 잡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알 수 없는 거다.[56][57]
그렇지만 이순신은 조선의 장수로서 조국을 유린하고 침탈한 왜적이 고이 철수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왜군을 최후의 순간까지 격멸함으로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줬다는 점이 뜻깊다. 실제로 왜군이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대한 침공을 실천하지 않은 건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부터가 (이에야스를 평화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과 별개로) 조선 정복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선 게 가장 크지만,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군이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혀 일본의 조선 재침공 의지를 꺾은 것도 한 몫 했다.
5.1. 일본군의 피해[편집]
선봉이자 주력군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사천 왜성에 주둔한 시마즈 군은 기록에 따라 7천 ~ 8천에서 1만까지 나오는데 보통 7천으로 추정한다. 선두를 맡았기에 피해가 매우 컸으며 휘하 부장의 함대와 단절, 이들은 남해도에 상륙했고 시마즈 본대는 그대로 해협을 돌파, 이름 있는 무사 계급만 26명이 전사했고 그 외 다수가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탄 대선이 큰 피해를 입어 다른 선박에 구해져서 작은 배로 옮겨타서 탈출했다.[58] 또한 시마즈 소속의 군선은 121척으로 기록돼 있다. 그 외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병력 오천여명[59] 도 있었다.
임진왜란, 세키가하라가 끝난 지 약 10년 후인 1609년에 오키나와 원정군으로 3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갔는데 도쿠가와의 침공에 대비해 역시 최소 3천 명 정도는 남겨둬야 했을 테니 그렇게 큰 피해를 입고 최소 6천 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도 근거인데, 이때는 막부에서 직접 시마즈가에 류큐를 복속시킬 것을 계속 명령했을 때로, 오히려 가진 걸 다 쥐어짜서 최대한 빨리 류큐를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는 시마즈가의 이익에도 연관이 되는 것으로 이후 류큐를 혹독하게 쥐어짰다. 또한 류큐 원정은 불과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5만 석 정도로 평가되는 대마도의 소 요시토시가 5천 명을 동원했고, 상술했듯 13만 석이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도 5천여 명을 동원했다. 농민들뿐 아니라 잡병들을 고용한 것이다. 빨리 안 하면 자기가 토벌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잡병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여기에 10년 동안 성인이 되었을 장정까지 생각해야 된다.
이에야스가 시마즈를 토벌하려 할 때 시마즈에게 병력 1만이 있다면서 부하들이 말렸다 하는데. 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미가타가하라 직후 코사카 마사노부는 시간을 끌면 노부나가가 8만을 이끌고 올 거라며 후퇴를 주장했는데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가 투입한 병력은 3만이었다. 그리고 설사 7천 명이 정말 다 죽었다 해도 쥐어짜면 1만이 안 나오는 건 아니었다. 보통 석고 1만 석당 250명으로 계산하는데 시마즈가는 70만 석이었다. 이 250명은 말 그대로 보통일 뿐 여유로우면 덜, 필요하면 (힘들겠지만) 더 동원할 수 있었고, 조선처럼 바다 건너 멀리가는 게 아니라 방어전인 상황이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많아야 천육백 정도만 동원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60] 주로 한국에서 얘기되는 설로 일본의 경우 소설가 시바 료타료는 그 이유를 시마즈식의 동원 체계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그 외에 요시히사와의 갈등으로 요시히로가 직접 모은 병력만 이끌고 갔다는 것, 내부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 등이 있다. 이에 관해서는 시마즈의 퇴각 항목도 참고하자.
결론을 말하자면 시마즈 군의 (혹은 구원군 전체의) 9할이 전멸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시마즈 군의 피해가 적었다고 하는 것 역시 무리이다. 다이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세키가하라에서도 다 죽어도 영주 요시히로만은 살려보내는 게 당시 왜군이고 시마즈 군이었다. 그런 시마즈 요시히로가 휘하 함대 하나는 아예 전멸해 남해도에 상륙해야 했고 자신도 다른 배에 구조돼 겨우 달아난 상황에서 피해가 적을 수 없다. 또한 시마즈 가문의 영지였던 가고시마의 무형 문화재인 상부연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들이 명복을 비는 것으로 그 배경은 다름 아닌 노량 해전이다. 정확한 피해는 알 수 없어도 이런 상황에서 피해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시마즈 군의 상황을 세키가하라 전투의 시마즈의 퇴각과 비교해 봐도 흥미롭다.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요시히로만큼은 살린 점, 장수를 저격하는 식으로 나선 점 등이 비슷하다. 계획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61] 요시히로만은 살려보내겠다는 목적은 같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난중잡록의 한 구절을 일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왜군이 승리했다고 문장이 기록되어 있다.#
- 원문
- 일본 측 왜곡 해석
- 정식 해석
아군과 명군이 갑자기 튀어나와 좌우에서 덮쳐 화살과 돌을 던지고 횃불을 어지러이 던져 왜선 태반이 불탔다.
(문단이 바뀌어) 적병이 목숨을 걸고 혈전하였으나 세가 지탱할 수 없자. 이에 관음포에 퇴각하였고. 그때가 날이 이미 밝았을 것이다.[62]
이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올라 추격하며 죽였다
적의 포병이 배 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하여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6. 노량 해전의 무용론과 반론[편집]
일본의 극우파나 일부 임진왜란의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노량해전을 두고 무용론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산케이 신문의 서울 특파원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이미 전투 의지를 잃은 적을 기어코 추격하다 전사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순신을 떠받드냐고 비판한 바 있다. 사실 이것은 노량 해전에 관한 일부 국까들의 평가이며 평화롭게 후퇴하는 건데 왜 기어코 공격하냐? 괜히 공격하다가 죽었으니까 니 잘못이다. 식의 발언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굳이 반론을 달자면, 노량 해전 무용론은 이순신과 당시 조선의 사정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 일단은 멀쩡히 잘 지내고 있던 조선을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안 빌려줬다는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침공한 것이 일본이다.[63]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국력상 보복하러 쳐들어 갈 수도 없으니 이들을 섬멸하는 것만이 7년 전란에 대한 일본을 징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64]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종전과 퇴각은 엄연히 다르다. 노량해전 당시 그 뒤 일본이 조선 땅을 완전히 떠난 후에도 몇 년간 조선, 일본, 명나라의 정부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아직 끝난 전쟁이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쟁을 포기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당장 조선 측이 알 리 없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으면 전대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재개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내전에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임자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후대의 눈으로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그에게 조선과의 전쟁을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의 누가 그런 미래를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정식으로 끝난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정식으로 종전을 위한 국서가 오고 협상한 뒤인 광해군 1년인 1609년 기유약조를 맺은 후이고, 그 사이 약 10여 년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휴전조차 아닌 대치 상태에 가까웠다. 철군 약속은 명나라 장수들이 뇌물이나 개인적 이유로 불법 합의해준 거지 조선이나 명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은 사로병진책이라는 초대형 포위섬멸 작전을 진행해 일본군을 섬멸시키는 중이었고 노량해전도 이 작전의 한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대해 일절 침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인 건 맞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골수 도요토미 히데요시 빠돌이인지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이겼을 경우 진짜 큰일날 수도 있었다. 주인님이 해보지 못한 것을 이뤄 드리려고 도전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65] 설령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끝내 재침공에 실패했다 해도 한민족계 국가와 일본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건 그로부터 더욱 먼 미래에나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북방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이 조선과 명을 압박해 오기 시작하는데, 만일 왜군이 노량 해전을 치르지 않고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으로 퇴각했다면 조선으로서는 자칫 북으로는 만주족, 남으로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야 하는 골때리는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만주족과 일본이 손잡고 조선을 나눠먹을 위험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조선 측 입장에서 일본의 철군은 종전 이후 철군이 아닌 전략적 후퇴에 가까웠고 이렇게 후퇴한 대규모 병력이 다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었다. 구로다 가쓰히로의 말대로 후퇴하는 적을 고이 보내주는 것은 전쟁을 장기화하고 미래의 위험을 만들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현대전을 포함해 모든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고 퇴각이나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것은 문제될 거 없다. 현대에 와서도 노량 해전처럼 후퇴하는 적을 얼마나 잘 섬멸시키는지, 반대로 후퇴하는 측은 얼마나 적은 피해로 잘 후퇴하는지의 여부가 전쟁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괜히 전쟁 전술에 추격전술과 퇴각전술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히려 송양공의 사례처럼 고이 보내주는 게 호구짓이다. 결국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어 향후 전쟁 의지를 꺾어야 했고, 그래서 노량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군이 입는 피해의 정도와 무관하게 단순히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게 목표였던 이전 전투와 달리 왜군을 최대한 섬멸하는 게 목표였을 것이고, 야간전이라 평소보다 근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66]
결론적으로 보면 이는 일본군은 전략적 후퇴가 아닌 완전 철군을 했고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가문이 망한 뒤 흥한 도쿠가와 가문은 다시 재전쟁을 할 마음이 없었고 그리고 진짜 그랬다는 것을 아는 현대인 관점에서의 평가고 당대에는 노량 해전은 필수불가결적이었다. 더군다나 일본군 측은 항복/강화/철군과 관련된 그 어떤 공식 문서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조명연합군 측은 일본군을 믿고 싶었다 한들 일본군을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군은 그럴 보증이 하나도 없었고 보증 없이 믿었다고 뒷통수 당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노량해전이 없었더라면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장병들이 더이상 죽진 않았겠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다.
7. 기타 매체[편집]
워낙 유명한 전투이고 임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의 전사를 다루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선 꼭 등장하는 편이며 상당히 많이 극화되었다.
7.1. 칼의 노래[편집]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의 서문 마지막 문장은 노량 해전을 앞둔 이순신의 독백이다.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마지막 전투이니만큼 소설의 대미를 장식한다. 싸움 직전 퇴각하는 일본군을 뇌물 비스무리하게 받고 그대로 놓아준데다, 대놓고 싸우기 싫어하는 진린을 바라보며 '이 자식 죽일까'라고 독백하는 충무공의 모습은 안습.[67] 전투에 앞서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라고 독백하며 면사첩을 불태우는 충무공의 모습은 비장미의 절정이다. 이순신이 총탄을 맞고 서서히 숨이 끊어지며 되뇌는 독백도 진국인데,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것은 자연사와도 같다며 자신의 죽음에 오히려 안도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동시에 난중에 죽은 여인 여진과 아들 이면의 냄새를 떠올리는 묘사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면모도 눈물겹다.
7.2. 성웅 이순신[편집]
김진규가 주연 및 감독을 맡은[68] 성웅 이순신에서는 벌건 대낮[69] 에 전투를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상당히 개념찬 명장 진린[70] 이 나오는 것이나, 일본 측 장수로 고니시 유키나가[71] 만 나온다.[72]
7.3. 조선왕조 500년[편집]
조선왕조 5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마지막 회를 빛내는 전투로 유명하다.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각오로 하늘에 기도하는 이순신을 연기한 김무생의 연기는 전율할 정도. 김무생은 그해 연기 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순신의 최후도 적의 구원군[73] 이 온다는 소식에 그것을 보러나가다 총에 맞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유언은 유언대로 하고 방패로 가렸을 뿐 아니라 지휘를 하는 것처럼 앉아서 서서히 사망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부하들도 마지막에야 장군이 사망한 것으로 알게된다. 진린은 이전부터 찌질이로 나오는데, 진린을 연기한 배우(국정환 씨)가 초반에 1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전한 명나라 장수 조승훈을 연기한 배우와 같다. 다른 작과 달리 왜군이 진린이 탄 함선에까지 도선해와서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이 연출되며 이를 본 이순신이 진린을 구하는 충실한 고증이 여기에서는 나온다.
7.4.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편집]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당해 왜성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그동안 조선에서 노략질한 금은보화를 탈탈 털어서 뇌물로 주고 자신들을 몰래 빼내달라고 사신을 보내 협상하지만 이순신이 엄청나게 빡돌아서 "우리 조선을 이 지경까지 망가뜨린 놈들은 절대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게 된 탓에 협상이 결렬되었다. 이에 열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들이 잡아두고 있던 명나라 병졸 포로 중 2명의 손목을 잘라서 진린에게 그 4개의 손을 보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러 왔고 이순신은 이런 시마즈 요시히로를 완전히 박살냈다. 특히 이순신은 휘하 병력들에게 그동안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자제하고 있었던 백병전까지 허락해가면서 왜군을 모조리 도륙할 것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한밤 중에 해변에서는 조선군들과 왜군들이 각자의 군함을 옆에 두고 패싸움을 벌이게 된다. 무기를 든 병력도 있고 주먹질로 싸우는 병력도 있다. 이 전투에서 일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가 제대로 묘사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조하러 가는 왜군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조하지 못하게 막는 조선군 간의 현피였다. 결국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구조한 병력보다 전사한 병력이 훨씬 많았다.
여기서,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 마치 열린 결말 급으로 여러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다. 뭐가 옳다고 딱 잘라 주장한 것은 아니고 그냥 여러가지 가설을 내놓았을 뿐이다.
- 이순신은 진두지휘를 하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 이순신이 이 전쟁에서는 희한하게 갑옷이 아닌 구군복을 입고 참전했다가 조총에 맞고 전사했다.
- 이순신이 전사한 것은 조총탄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다.
- 사실 이순신은 전사한 게 아니다. 이 전투가 끝난 이후 15년 뒤 아무 이유없이 이순신의 무덤이 800m나 이장했다.
이 씬의 엔딩은 해가 뜰 무렵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들과 같이 뛰어서 도망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식량이 다 바닥나서 군마를 도축해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맨 마지막에 허리와 다리에 큰 중상을 입고 엎드려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두 팔로 기어서라도 도망치려고 발악하는 왜병의 모습이 보인다.
7.5. 불멸의 이순신[편집]
노량 해전(1598년 11월)
세상의 끝에 선 투쟁
스스로 피흘려 부르는 희망
불멸의 승리를 향해
오라, 아득한 적이여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전문]
7년 전쟁의 끝
노량해전
이겨서 지켜내리라
내 칼의 마지막 울음
칼날 사이로 열리는 세상
불멸의 역사가 온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4회 ~ 5회 초반, 마지막회(104회)에서 나왔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치열한 전투신, 김명민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4회는 칼의 노래를 많이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 설정으로 비난이 많았던 부분, 도자기 운운하는 도자기 덕후 왜군 일당,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동귀어진하는 이영남[75] , 고질적인 파열탄 등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회(104회)는 4회와는 비슷한 부분이 일부 있으나 4회 방영 이후 설정 변경 등으로 인해 대사, 장면, BGM이 4회와는 다르게 나왔으며 새로 촬영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4회와는 달리 역사상의 전투 기록과 대부분 비슷하게 나왔으며 파열탄, 동귀어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문제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등자룡이 전사한 장면도 나오지 않았다.[76]천지신명이시여, 이기게 해 주소서.
적을 무찌른다면 저 노을을 따라 오늘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들의 피로 물들였던 바다일세.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진린을 설득하여 고니시를 구원하러 오는 일본군 지원군에 맞서기 위해 출전을 한다. 매복을 하고 있다가 사거리 내에 왜군이 접어들자 시원하게 포를 쏘는 것으로 전투의 서막을 알린다. 야간전투인 것을 제외하면 여느 이순신의 해전처럼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다. 불멸의 이순신 자체가 마지막에 전사+자살설을 절충한 거라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스스로 벗어 전사한 이영남에게 덮어준 후 직접 북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한다. 붉은 철릭 차림에 조총 사거리 내에 대장선이 들어섰고 결국 조총에 맞게 된다.[77]
이순신이 총탄에 맞자 역사대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한 후, 송희립이 울부짖음과 더불어 독전고를 두들기면서 돌격하라고 소리치며 이완 역시 돌격을 명령하게 되자 명나라 측의 진린과 모든 조선 장수[78] 들이 칼과 활을 빼들어 공격하는 모습과 이순신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참다가 송희립의 승전 보고를 듣자 마침내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고, 주변에 있던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이 우는 장면은 드라마의 마지막편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 최후를 그린 전투답게 비장한 OST와 배우들의 연기가 어울려져 많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영웅이라 이름하기에도 너무나 큰 인간, 이순신.
우리는 그를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 묻는다.
그러나, 우린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
왜적을 맞아 전승을 기록한 위대한 군인으로만 그를 기억코자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자기 자신임을 깨달을 때, 원칙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할 용기가 있을 때, 백성을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79]
, KBS
7.6. 노량: 죽음의 바다[편집]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의 시퀄(후속작) 격으로 마지막으로 제작 예정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노량 해전이 될 예정이다. 가제는 노량 : 죽음의 바다[81] 이순신 역에는 김윤석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한산, 명량, 노량 모두 각기 다른 세명의 배우가 이순신을 연기하게 된다.# 이후 12월 고니시 or. 시마즈 요시히로 분으로 보임 백윤식, 등자룡 허준호, 진린 정재영의 캐스팅이 확정되었다. #.
동시 촬영으로 흥행한 신과 함께의 전례를 보아 이순신 특수로 천만관객을 코로나 시기에 할 수도 있을 가능성이있다.
7.7. 징비록[편집]
징비록에서는 50화에서 묘사된다. 이순신이 총탄에 맞는 장면이 발 CG인 것,[82] 또한 불멸의 이순신의 칠천량 전투씬 장면 일부를 재활용해 뜬금없이 거북선이 등장하거나 판옥선이 포격을 맞는 장면이 나온 것, 그리고 실제로 전투에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 소 요시토시, 타치바나 무네시게 대신 노량 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으며 노량 해전이 발발하기도 전에 일본으로 퇴각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나온 것이 흠이다.
그래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이자 드라마의 마지막 화인만큼 치열한 전투의 분위기는 잘 살린 편.
7.8. 임진왜란 1592[편집]
임진왜란 1592 5회에 나온다. 예산상의 문제로 대부분 징비록, 불멸의 이순신 장면을 재활용하였다. 그래서 전투 장면의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못 받으나 이전의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들과는 달리 노량 해전의 고증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는 역사 왜곡을 저지른 이전 사극과는 다르게 고증대로 시마즈 요시히로가 조명 연합군의 주적으로 나오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아예 노량 해전 장면에 나오지도 않는다.
7.9. 타임슬립 쓰시마 해전[편집]
1994년 영 챔프 창간준비호에 실렸던 단편으로 글, 그림은 김은기. 1994년 당시 남해에서 해상훈련을 하던 대한민국 해군함정 2척이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16세기 말로 타임슬립을 하게 되는데,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노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해군 함정 지휘관은 역사에 개입할 수 없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노량에서 빠져 나가는 시마즈군의 잔존 함대는 20세기 무기들로 전멸을 시켜버리고 다시 원래 시간대로 귀환한다는 이야기.
7.10. 임진록 시리즈[편집]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답게 당연히 등장. 임진록과 임진록2에선 조선 진영의 마지막 캠페인으로 등장하고 임진록 2의 확장팩 조선의 반격에선 첫번째 미션으로 등장한다. 차이라면 조선의 반격에서는 이순신이 죽지않고 부상당했으며 이후 시나리오에서 전장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7.1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편집]
단편 캠페인 모음인 역사적인 전투에 포함되어 있다. 실제 역사와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게 단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정복자/캠페인 공략/역사적인 전투 항목 참조.
여담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의 캠페인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간대의 미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