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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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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곽재우가 일으킨 의병 50여 명이 일본군 6군의 선봉대를 정암진에서 매복해있다 기습하여 일본군 6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시킨 전투이다.
2. 전투 전야[편집]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은 일본군에게 당시 주요 곡창지대인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일명 하삼도) 중 전라도를 제외한 지역을 모두 빼앗긴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조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곳이었고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키 위하여 6군을 의령으로 이동시킨다. 그러자 앞서 의령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6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강 정암진 부근의 갈대밭에 의병 50여 명을 매복시켰다.
3. 전투[편집]
음력 5월 24일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 惠瓊)[1] 는 2000여 명의 선봉대를 정암진 인근으로 보내어 도하 지점을 골라 푯말을 세워두게 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곽재우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늪지대로 옮겨 세워두도록 하였고 이를 몰랐던 안코쿠지의 주력군은 푯말을 따라 진격하였으나 결국 늪지대에 빠지게 되어 미리 매복하던 곽재우의 의병에게 일제히 기습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4. 결과 및 영향[편집]
결과는 그야말로 대승. 곽재우 군은 불과 50여 명에 불과한 의병으로 2000명이 넘는 일본군 선봉을 패주시켰으며, 일본군 6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였다. 이 전투 이후 곽재우의 의병은 불과 50여 명에서 오운과 박사제의 병력 등이 합세하여 3000명이 넘는 군세를 갖추게 되었다.
5. 여담[편집]
현재 정암진에는 의령군에서 조성한 의령관문공원이 있다. 의령대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정암진의 암벽 중간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의령관문을 지었던 것에서 더 나아간 것이다. 더불어 남강을 가로지르는 의령대로 다리 아래로는 지금까지도 이 구간의 얕은 수심을 나타내는 하중 사구를 볼 수 있으며, 공원 옆으로는 지명의 유래가 된 정암(鼎巖)이라는 이름의 바위가 강변에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로 인해 정암진의 천연 장벽 역할을 했던 암벽이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관문공원만이 아니라 남강로 건설을 위한 불가결한 선택이었을 터이며, 역사 기록에 따르면 실제 전투가 있었던 곳은 이 암벽이 아니라 암벽 건너편의 갈대밭이므로 정암진에 얽힌 전사(戰史)와 암벽의 보존 여부 사이의 관계성은 거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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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국사라는 절의 혜경이라는 법명의 중이다. 즉 안국사 주지스님인데 일본 전국시대에 큰 절의 주지는 거의 다이묘나 마찬가지였던 위치였다. 나중에 안고쿠지는 도요토미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의 편을 들었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 후, 참수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