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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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금산 전투
錦山戰鬪

1차
1592년 8월 15일 ~ 8월 16일 (음력 7월 9일 ~ 10일)
2차
1592년 9월 23일 (음력 8월 18일)
장소
전라도 금산
원인
용인 전투 패전 후, 조선의 전라도 방어.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1차
지휘관

의병장 고경명
전라도 방어사 곽영
유팽로†
안영†
고인후†
강희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타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나오츠구
츠쿠시 히로카도
2차
지휘관

의병장 조헌
승병장 영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타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나오츠구
츠쿠시 히로카도
1차 병력
6,700 명[1]
15,700 명[2]
2차 병력
1,500명 ~ 1,700 명[3]
10,000 명
1차
전투 피해

최고 지휘관 전사
피해 규모 불명
2차
전투 피해

의(義)군 전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금산 탈환 실패
1. 개요
2. 제1차 금산 전투
2.1. 대중매체에서
3. 제2차 금산 전투
3.1. 일본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4. 결과


1. 개요[편집]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년)에 전라도 금산[4]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2. 제1차 금산 전투[편집]


파일:8400_8290_453.jpg

이 전투는 용인 전투의 대패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용인 전투의 패전 이후 전라도는 사실상 방어 병력이 괴멸되었고, 잔존 병력들이 각 지역에 할거하는 수준이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6군 약 2만 병력이 전라도 확보를 위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경상우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의병들에게 방해를 받았던 고바야카와는 병력을 2로로 나누었다. 1군 병력은 자신이 이끌고 금산으로 나아갔고, 2군은 핵심 참모였던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줘서 무주를 점령하게 했다. 용인 전투의 패장인 전라 감사 이광이 이 두 지역의 요지인 팔량치에서 막으려고 했으나 결국 뚫렸다. 이후는 파죽지세로 금산과 무주도 역시 함락된다. 이 다음 목적은 전라도의 요충지인 전주.

무주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인 웅치에 정담, 이복남, 변응정, 황박, 황진이 방어선을 쳤고 7월 7일 웅치 전투가 벌어진다.[5] 웅치 고개에서 조선군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패했으나 이복남이 겨우 군을 수습해 안덕원에서 재차 적을 막았고, 때마침 도착한 황진의 원군에 힘입어 겨우 방어에 성공했다. 이때 조선군은 굉장히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다. 난중잡록에 기록된 곽재우군과 안코쿠지 에케이군의 교전기록으로 안코쿠지 군의 규모를 아주 거칠게 추정해 볼 수 있는데(병력이 배 18척에 나눠탔다.) 이걸 감안하면 웅치에서 적을 맞은 조선군은 2천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경명은 서인의 일파로 동래 부사로 재직하다가 정철의 건저의 사건 이후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지역으로 내려온 전라도의 유력자였다. 선조가 피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일대를 돌면서 의병을 모았던 고경명은 용인 전투 이후 최대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용인 전투 이후 전라도 지역민들은 관군보다 고경명의 편을 들었다. 원래 고경명은 김천일과 함께 한양 진군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전라도로 공격해오면서 전략을 변경한다. 같은 서인인 조헌의 병력, 그리고 관군인 전라 방어사 곽영의 병력까지 합류해서 일본군의 본거지인 금산을 노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고경명의 병력이 금산성에 당도한 것이 웅치 전투 바로 다음날인 7월 9일이었다.

전투는 조선군이 금산성을 포위한 상황에서, 일본군 병력이 성밖으로 나와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9일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이날 저녁 곽영은 고경명에게 철군을 권유한다. 어차피 이치 전투로 전주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고 따라서 일본군이 철수할 것이기 때문에, 금산을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6]. 하지만 고경명은 곽영의 말을 듣지 않고 금산 공격을 강행했다. 10일, 이번에는 고바야카와가 곽영이 이끌던 지역으로 공격을 했고, 소수이고 급하게 모았던 곽영의 군대가 버티지를 못하면서 붕괴된다. 곽영은 몸을 피했고, 고경명은 병력을 후퇴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하다가 전사하면서 병력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때 고경명의 아들인 막내아들 고인후도 같이 사망했다.

그리고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남은 병력을 추스러서 다시 금산성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일본군은 후퇴한 다음이었다. 결국 고종후가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뤘으며 고종후도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게 된다. 그리고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고경명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대표적인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인 임진사충신[7]의 대표격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고경명이 서인이었던 것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이야기도 존재[8]하며, 전주 방어전에는 불참하면서 필요없는 전투를 강행해서 괜히 없는 병력을 분산, 괴멸시켰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1. 대중매체에서[편집]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는 21화에 나온다. 이치전투와의 연관성과 금산성공격 같은 설정은 모두 배제되고 고경명군이 왜군이 진치고 있는 지역으로 이동해서 야전에서 왜군과 사투를 벌이다가 궤멸당하는 설정이다. 모든 전투가 처절하게 묘사되는 이 드라마의 특징 그대로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차로 궤멸당하면서도 처절하게 저항하는 고경명(조형기 扮)과 의병들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직접 전투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이치에서 권율과 사투를 벌이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금산성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철군하고 그걸 지켜보던 권율이 고경명이 시간을 맞춰서 다행이라며 간접적으로만 언급된다.[9] 다음 장면에서 고경명군이 금산성을 공격해서 고바야카와군이 후퇴했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고경명군이 진격하는 모습이 짤막하게 나오는데 뜬금없이 고경명이 30대정도의 젊은 인물로 등장한다.[10]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내레이션은 금산에서 싸웠다고 하면서 화면상으론 권율이 싸우고 있는 이치와 동일한 장소에서 죽는다...


3. 제2차 금산 전투[편집]


파일:조헌 의병장의 금산전투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금산 전투 순절도[11]

8월 조헌(趙憲)과 영규가 거느린 의병과 고바야카와 군의 전투.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공동 탈환한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는 이 당시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일단 영규대사는 병력이 700에 불과하니 관군과 합동 공격을 하자고 하였으나, 조헌이 거부하고 단독 출전해 버린다. 이에 승장 영규도 자기 휘하의 병력 800을 이끌고 함께 따라나선다.[12]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에선 영규의 만류도 무시하고 공세에 나선 것에 대한 변명으로 관군과 연합해서 금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관군 측에서 기한을 변경했고 그 사실이 미처 조헌에게 전해지지 못했다고 적었다.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13]은 의병들이 조헌에게 합류하지 못하게 의병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자 의병은 대다수의 병력이 해산되어버리고, 청주성을 탈환[14]한 후 금산에 도착하니 남은 병력은 고작 700명 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규의 승병은 합산되지 않은 숫자인 듯 하다. 영규의 승병은 약 800명 ~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도합 1,500여 명이 금산에서 전투를 벌인 듯 하다.

이에 마주한 적군인 일본군은 거의 3배 ~ 10배에 달하는 숫자로,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다. 게다가 후속 부대가 없는것을 알자 고바야카와 군이 후방을 막아 퇴로를 점거하고 포위 진형을 갖춰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재사초에서는 비가 오는 와중에 조헌 군은 진영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영규가 이대로는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다시 지적하자 조헌이 이 적은 본래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내가 속히 싸우려고 하는 것은 오직 충의의 격동으로 사기가 한창인 이 때를 이용하려는 것이오.라고 답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튿날 새벽 왜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영규 군은 대강 진영을 꾸렸으나 조헌 군은 들판에서 왜군과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조헌 군이 무너지고 영규의 진영 쪽으로 퇴각했는데 왜군이 그대로 육박해오자 영규의 진영까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조헌은 전사하고 난전 중에 누군가 영규에게 지금이라도 도망칠 것을 권했으나 영규는 거부한 채 싸우다 죽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일록 3) 애초부터 질적, 수적으로 압도적인 일본군에게 포위당해 퇴로를 차단당하여 난전을 벌이던 참이라 퇴각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이 전투 다음 날 조헌의 동생 조범이 와서 시체를 수습하였으며, 4일 뒤인 22일에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모여와서 장례를 치뤘는데 시체를 수습해서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표시하였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칠백의총이란 표현은 당대도 아니고 즉각 나온 표현이라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왜 700인가라는 것이다. 앞서서 언급한 것처럼 2차 금산 전투의 조선군은 1,500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서 급히 조헌의 병력만 수습해서 칠백의사총을 만들었고, 나머지 승군들은 방치했다는 민담이 존재한다.[15]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이 700의총을 1500의총으로 바꿔야 된다고 수시로 주장하는 중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긴 이유는 조선 왕조 정권의 불교 천시 사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죄없는 스님들을 천하게 보고 무시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임진왜란 때는 조선 사신들도 불교를 까긴커녕 오히려 비불교도들을 디스할 정도로 불교가 그나마 대접받았던 때로, 특히 광해군이 사명 대사에게 약을 지어줄 정도로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이 올라갔다. 다만, 이것은 정말로 급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전란 당시의 중앙 정부 관료들이나 직접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한 지역의 유지, 그것도 서인으로 이름을 알려서 지방관을 부하로 부릴 수 있는 위치 정도 되면 영규 정도는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영규가 진군을 멈추고 기다리자고 주장했으나 무시당하고 같이 진격해야 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선조에게 직접 임명을 받은 8도 도통관 사명당 정도라면 몰라도 영규는 무시해도 되는 수준이 충분히 된다. 특히 일본군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사한 명예를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3.1. 일본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편집]


1차와 2차 금산 전투에 있어서 조선군의 전과는 사실 완전히 불명으로, 일본군 사상자 5천명 같은 드립이 근거 없이 추가되곤 한다. 난전이라서 가능하다, 전력을 다해서 싸워서 큰 피해를 입혔다. 같은 이야기가 난무하는데, 유럽이나 아프리카 어느 나라 전투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보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승패 자체를 뒤집지는 못하니까, 상대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3일 운운하는 기록의 출처는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이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확정할 수 없지만 만취당실기와 쇄미록, 죽봉황공유적의 기록을 신뢰해 이치 전투의 개전 시점을 2차 금산 전투로 이후로 본다면 더더욱 신뢰성이 떨어진다.

당장 전투 끝나고 2일 후에 조헌의 동생이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는 장면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둘이 양립한다면, 조선군과 일본군은 같은 날 같은 전장에서 화목하게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장을 이탈하였고 시신 수습은 후방으로 시신이 이동 중임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는 이미 일본군은 전장에서 이탈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심지어, 적을 전멸시킨 일본군은 시신을 다 수습하지 못하고 전장을 떠나고 오히려 조선 측이 본격적으로 모든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역사서의 기록을 볼 때, 일본군은 당일로 자군 시신을 수습하고 전장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조헌의 동생 조범이 병력도 없이 와서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전장이 텅 비어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4. 결과[편집]


두 차례의 금산 전투에서 일본군은 모두 승리했다. 이 전투들은 각 전투의 순서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1차 금산 전투는 일반적 시각대로라면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 이후이나, 이치 전투 항목의 시간적 재구성을 통해서라면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 사이에서 벌어졌고, 2차 금산 전투는 이 모든 전투 이후에 벌어졌거나 혹은 1차 금산 전투와 이치 전투 사이에 벌어졌다.

이치 전투의 개시 시점이 명확치 않아 생긴 문제인데 전자라면 웅치와 이치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전라도 점령이라는 본래 목적 달성은 물건너간 상황이 되었고, 가만히 금산을 유지하고 있자니 상대의 공세 대상이 되는 상황이라 전략적으로 실익이 적다는 판단 아래 금산성을 포기하고 경상도 지역으로 후퇴한 것이다.

후자라면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낸 다음 이치 방면으로 재차 공세를 가했다 실패하고 물러난 것이 된다. 참고로 이치 전투 참전자인 황박의 기록을 담은 죽봉황공유적(竹峯黃公遺蹟)에선 이치 전투와 황박이 전사한 시점을 8월 28일로 기록했다. 지휘관인 권율의 행장과 행적을 담은 만취당실기(晩翠堂實記)에 실린 이치주첩서(梨峙奏捷書)에도 고경명과 조헌이 이미 순절했다 적어 2차 금산 전투가 벌어진 8월 18일 이후의 일로 기록했다. 만일 이치 전투 이전이라면 정말 갑갑해지는데, 조헌과 영규 연합군이 2차 금산 전투에서 손해를 본 병력만 고려해도 이치 전투를 치른 관군 병력 숫자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고, 1차 금산 전투는 2차 금산 전투와 이치 전투에 참여한 조선군 전부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많다. 만일 이치 전투에서도 패전해서 전라도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면, 양차 금산 전투는 용인 전투와 함께 전라도의 병력 자원을 다 털어먹은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양차 금산 전투 이후 한동안 의병 역량마저 일시 소진되어서 의병모집마저도 급감하기 때문이다.[16]

또한 저 두번의 금산 전투 외에도 1592년 8월 9일 관군 일부 병력이 금산을 공격했다 패해 물러나기도 했다. 제반사항을 다 감안하면 조헌이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 물러나게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표에 나온 영규, 즉 의병승장인 영규대사 역시 이곳에서 순국하였는데, 영규대사와 의병들의 극락왕생을 기리기 위해 청주 고령산에 '안영암(安靈庵)'이라는 사찰이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현재 안영암은 절터만 남았고, 주변 노인들의 전래되는 전설에 따라 그 위에 1966년 새로이 풍주사가 지어졌다.

[1] 실록에 기록된 의병의 병력수이다. 곽영의 이끄는 관군의 병력수는 불명.[2] 단 웅치 전투 이후, 안코쿠지 에케이 병력이 무주로 후퇴했다면 약 1만 정도로 추정.[3] 조헌의 의병과 영규의 승병을 합친 수이다.[4] 현재의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이 일대는 원래 진산군 일대였다.)을 제외한 현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와 전라북도 무주군의 부남면, 안성면 일대.[5] 동북현감 황진과 의병장 황박이 홍길동 마냥 분신술을 익히지 않은 이상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는 동시에 벌어질 수 없다. 자세한 건 이치 전투 항목 참조.[6] 다만 이치 전투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시기 상으로 웅치 전투 이후이고, 이치 전투 이전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금산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는 고경명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 된다. 다만, 적에게 피해를 거의 주지 못해서 해당 병력들은 다시 이치로 나아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7]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8] 임진사충신이라는 이들 중에서 곽재우를 제외한 고경명, 김천일, 조헌이 모두 호남 서인이다. 이에 대항해서 경상도 및 동인 쪽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을 임진왜란 3대 의병장이라고 추앙한다.[9] 이치전투가 먼저 벌어지고 고경명 의병군이 금산성을 공격하면서 고바야카와군이 이치공략을 포기하고 후퇴했다는 설정을 사용했으며 마치 고경명군의 금산성 진격이 권율과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묘사된다.[10] 고경명은 당시 우리 나이로 60세이다.[11] 본문의 문서와 함께 보면 의미심장하다. 그림에서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우측에 보인다.[12] 원래 조헌은 1차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합류해 싸우기로 했지만 병력을 빨리 모으지 못해 참여하지 못했다. 대쪽 같은 그의 성격상 고경명과 합류하지 못했던 죄책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13] 1543년 ~ 1611년. 문신으로 자는 선각이라 윤선각으로도 불린다. 전투의 조선군 지휘관 중 하나로 여러 번 패배를 당하여 파직되기도 했던 인물. 그래도 정치적인 눈치는 있어서인지 재등용되어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조 판서가 되었다. 보통 조헌이 공적을 쌓는 걸 시기하여 막았다고 알려졌는데(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 사이에는 갈등이 꽤 많았었다. 이수광은 의병들을 전쟁이 끝나고 아예 무시한다고 저서인 지봉유설에서 조정을 까기도 했을 정도다. 그나마 경상도는 학봉 김성일이 김수와 곽재우의 갈등을 중재하고 의병을 지원해 갈등이 봉합되었지만 다른 지역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보다는 임진왜란 시기 자주 보이는 관료와 의병 지휘관 다수를 구성한 지역 유림의 충돌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특히 조헌은 윤선각이 경내의 방어에만 힘쓰고 왕을 위한 행동이 없음을 비난한 적이 있어 둘의 사이가 굉장히 안좋았다. 또한 윤선각은 조헌이 거느린 의병을 공주로 오게 하여 의병을 그의 관군에 편입하고 자신의 지휘를 받도록 했는데 이때 조헌이 거부하다보니 윤선각도 협조하지 않는 조헌에게 분노하여 갈등이 커졌다. 조헌과 윤선각의 대립은 경상도에서 나타난 곽재우와 김수의 대립과 유사한데 문제는 전라도에 김성일 같은 유능한 중재가가 없었던 것이다.[14] 청주성 탈환에 있어서 주력은 영규로 추정하기도 한다. 선조 실록에서는 영규가 800 승군을 이끌고 '조헌(趙憲)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비변사에서도 '중 영규(靈奎)가 의(義)를 분발하여 스스로 중들을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는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 명의 중들이 돌진, 제군(諸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 무공만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와 재기도 심상치 않으니 우선 상을 주고 환속하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올려서 포상했다는 기사가 있다. 하지만 갑자기 공주 목사 허옥이 영규를 시켜서 병사를 만들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선조 수정 실록에서도 허욱이 영규를 얻어서 조헌과 함께 공격하게 하였다는 짧은 기록으로 변한다. 이를 보아 억불숭유 사상이 쩔었던 조선 시대에 영규를 낮추고, 대신에 조헌과 관군인 허옥의 공로로 돌려버렸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윤선각은 문소만록에서 조헌이 영규의 말을 무시해 군사들을 죽게 만들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15] 이에 따르면 승병들은 인근 지역 주민들이 매장해준 듯하다.[16] 만일 이 역사선이 존재했다면, 이순신은 비운의 패장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한산도 대첩이 웅치 전투와 같은 음력 7월 8일에 있었는데, 정작 수군의 배후지인 전라도가 털려버리면 피로스의 승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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