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방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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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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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음력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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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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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독성산성 전투[朝]
1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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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상주 전투[朝] · 행주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강화협상 · 휴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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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15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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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석주관 전투[日]

12월

사로병진책 ·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2차 울산성 전투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경상도 방어선
慶尙道防禦線

시기
1592년 5월 23일[1] ~ 1592년 6월 7일[2]
장소





조선 경상북도경상남도충청도 일부지역.
원인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과 부산진 전투 이후 일본군의 북진.
피해
최고 지휘관 전사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를 포함한 지역에서 22,420명 이상 전사
경상도 지휘부 붕괴
경상도 방어군 궤멸.
경상도 병영수영 함락.
일본군 890여명 사상자 발생
결과
충청도 함락 및 방어실패.
일본군에 의한 경상도 지역 조선군 무기 탈취
영향
조선, 한양 방어 포기. 선조의 몽진.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의병항쟁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도순변사 신립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이일
박안민
부산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
이각
박홍
조영규
이언성
홍윤관
-서예원[3]-
-이유검[4]-
송빈[5]
김득기
이대형
류식
이령
김해
김수
권길
박지
그 외 의병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소 요시토시
마츠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
102,000여 명
165,600여 명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임진왜란 직후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지역에서 일어난 전투(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와 의병항쟁을 포함한 경상도 지역을 둘러싸서 한양으로의 진격을 막기위해 구축된 방어선을 말한다.


2. 상세[편집]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직후 경상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부산진 첨사 정발이 왜군과의 첫 전투를 치르었다. 이를 부산진 전투 라고 하며, 이 전투의 패배로 경상도 전역이 위험에 처하였다. 이후 동래성 전투마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사실상 경상도 방어는 확대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첫 의병[6]이 발생한 김해성 전투를 비롯해서 상주 전투 등을 거치며 계속된 패배를 겪었지만, 이러한 전투들을 거치며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는데 어느정도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도순변사 신립을 보내어 경상도 방어선의 수비를 부탁하였다. 이때 1차로 조선군이 막고 있었던 길목은 아래와 같다. 이 위치는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를 어느정도 예측한 까닭도 있었다.

당시 "영남대로"구로다 나가마사"추풍령"을 넘어서 진격하려고 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조령"을 통해서 한양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죽령"을 넘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고모산성을 1차적으로 방어하고 죽령과 추풍령을 2차적으로 방어하려던 본래 조선군의 계획대로라면 어느정도 일본군에게 피해를 줄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신립은 기마부대가 움직이기에는 평지가 더 좋다고 판단하여 모든 조선군을 탄금대로 모이게 하였다. 그 결과는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 나오듯, 대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하여 경상도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1] 음력 4월 13일[2] 음력 4월 28일[3] 김해성 전투 당시 달아남.[4] 김해성 전투 당시 달아남.[5] 임진왜란 당시 첫 의병장[6] 사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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