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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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편집]
1.1. 태어나기 이전[편집]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1] ,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 그럴만도 한 것이 조부보다는 연산군의 동궁시절 스승 노릇을 했던 증조부 이거가 나와 점지하는 것이 더 권위가 높음에도 굳이 한 것은 다른 설화가 섞인 것이 아닌가란 추측도 생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3]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4]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나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눈치 없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심지어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과거도 안 치르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역적의 후손이 시험도 없이 음서의 혜택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 음서의 혜택을 받을 정도면 양반 중에서도 명문가이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5] 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이들은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고 높임을 받았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조정에서는 대신이요 왕실에서는 인척[6] 이 되었음에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가지는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존중받았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7] 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시험도 안 보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정에게 조부인 이순신의 증조부 이거는 연산군의 동궁시절 스승 노릇을 했다.
한편 위의 역적 루머와는 별개로, 이백록의 생전 평판은 영 별로였던 듯. 실록을 보면 '무뢰배와 어울려서 말썽을 피우는 일이 많다'라는 비판이 여러 번 나온다.
1.2. 임진왜란 전야까지[편집]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고, 맹인인 친구를 속여서 바로 그 친구네 집 동아를 서리하게 하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악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며 철이 난 후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군수[8] 를 지냈던 방진(方辰)[9] 의 딸 방수진과 혼인하였고[10] ,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에 무과 별시(알성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11]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4월 20일[12] 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13]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권지란 임시직 또는 실습생의 의미인데, 일종의 간부 기초 교육 과정을 이행한걸로 보인다. 그해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하여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본격적인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14]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36살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무과 병과 급제자는 종9품으로 시작하여 450일을 근속해야 자급이 올라가는데, 이순신의 급제 시기를 감안하면 만호 벼슬을 받기 충분한 품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선조의 결단 덕분이기도 하고, 이순신이 중앙조정에서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진 관사에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제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임으로 온 전라좌수사 이용이 전임자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근무 평점을 타 진포와 비교해 따져서 이순신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고쳐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군기 경차관[15] 으로 기어이 이순신과 맞닥뜨린 서익[16] 의 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에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발포 만호 시절 이순신의 상관이던 이용이[17] 함경남병사로 급히 파견되게 되었다. 이때 이용은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여기서 이순신은 여진족의 수괴 중 하나인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인 함경북병사 김우서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보고 없이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려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가 죽었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18]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함경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19] 이후 군관 이운룡,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함경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20]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21]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24] 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22]
를 입계(入啓)[23] 하자, 전교(傳敎)하였다.“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녹둔도 전투가 이뤄진 후인 1589년 1월, 비변사는 조정신료들에 불차채용[한자로는] 할 무신 명단을 천거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때 이순신은 영의정 이산해와 전 병조판서 정언신으로부터 추천을 받는다. 이산해는 직전에 우의정을 지냈는데, 우의정은 병조인사의 최종 결정권자였다는 점에서 당대 군부 내에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25] 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1591년 2월 15일)】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1591년 2월 18일)】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26]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27]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28]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29] 과 5개 전문 수군 기지[30] 소속 병력을 지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상무정신과 전투 준비는 이후 벌어진 7년간의 전란의 판도를 뒤집는 중요한 근간이 될 수 있었다.
1.3. 임진년의 맹활약[편집]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순신은 이틀 뒤에 이 사실을 고지받았다.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격침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31]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수색 섬멸전[32] 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33]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3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34] 6월 2일에는 당포로 향해 21척을 모두 전멸시키고 지휘관 도쿠이 미치유키를 죽였다. 6월 4일에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 우수영의 군대와 합류한 뒤 6월 5일, 당항포에서 26척을 격파한다. 6월 7일에 근처에서 부산으로 달아나는 일본군을 발견하여 율포만으로 몰아넣어 3척을 격파하고 4척을 빼앗아 복귀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 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로.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이 승리하면서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적의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써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의 소식이 퍼지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의병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문서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 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과 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바다에 수장되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 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일선의 적들을 고사시키기에 적 섬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 백 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 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35] 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36]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딩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손실된 병력의 보충 역시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미 한양을 넘어 진격하느라 병력 손실을 입은 일본 육군이 더 이상 병력 충원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군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스로도 보급에 대하여 경시를 하다시피 한 데다, 가토급 잠수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통상 파괴 작전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해상 보급로마저 차단당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도 애를 먹어야 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대전략 그 자체와 사기마저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와 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했다.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까닭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본진마저 두들겨맞자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부산포 해전은 전략적으로 볼 때는 빈 배 100척을 불태우고도 종전보다는 피해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한산 해전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 이후로 왜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고 촘촘히 함선을 배치해서 종전처럼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주력을 전개하고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다.
임진년의 이순신의 공적은 첫째 우선 해상에서 승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상에서의 승전이 없었다면 한 방에 밀릴 뻔한 상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침공에 왕과 양반, 무장, 평민, 노비 가릴 것 없이 도망가기에 정신없었던 상황이었는데 해상에서의 승전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서 왜군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서, 수군을 제압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알려졌다시피 수륙병진이었고 해상에서의 승리는 따놓은 것처럼 왜군 지도부는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군의 패배는 필연적으로 보급로의 단절로 이어졌고 진군한 육군은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급급한 상황에 비견될 만하다. 수군이 패함으로써 왜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셋째 호남 지역을 수호함으로써 조선군의 보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호남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추후 명군의 파병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둔전에 힘쓰고 백성들을 보호해서 인심을 얻었다.[37]
1.4. 계사년 이후[편집]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략으로 대응 방침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 작전 사령관이나 해군 작전 사령관 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 번 왜선 30여 척을 분멸하나, 담종인의 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38]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주소서"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다만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및 이원익,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내곤 했다. 그런 점에서 원균에 대한 평가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39] 개중에는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었다.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 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 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1.5. 파직[편집]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과 정유년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정유년(1597년)이 밝아오자 이순신에게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은데, 조정에서도 분명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 보고를 올려서 이를 그대로 알리다 보니 졸지에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 보고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허위 보고를 올린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막상 한양에 압송된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정말 허위 보고를 추궁하고자 했다면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압송되었어야 하는데 이들은 압송은 커녕 파직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됐을 때 선조는 자기 입으로 직접 부산 방화 사건은 안위와 김난서가 행한 일인데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순신의 부하들이 한 행동임은 인정하지만 은근슬쩍 이순신 잘못으로 몰아갔으니 사실상 허위보고 사건은 그냥 이순신을 떨어트리려는 명분에 불과하다.
2번째는 가토의 도해. 얼마 전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는데,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597년 1월 1일이다.[40]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순신이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가토가 진작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다.[41] 조정에서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했고, 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두들기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통념처럼 무작정 출전 거부만 한 것이 아니다.[42]
그러나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저라면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 있던 선조에 의해서 싸우라는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에 이순신을 파직 및 압송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한다.[43]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금부에 투옥된 후 한 차례의 고신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기록된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을 끝까지 시행하여 그 죄를 캐야 한다.고 언급할 만큼 그 분노가 컸기 때문에 고신의 강도 또한 가볍지는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이 당시 이순신에게 어떤 고문이 가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탁의 신구차에는 '이순신에 대한 한 차례의 추죄가 있었고 또다시 형을 가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언급이 있으며, 이덕형의 한음문고에서는 '이순신이 고신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멸의 이순신처럼 이순신을 역도로 몰아 가혹한 고문[44] 으로 거의 죽여놓다시피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극이야 자극적인 장면이 있으면 아무래도 좋으니 그런 것이니 그렇다 치고, 난중일기에 의하면 출옥한 4월 1일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출발해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90km 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심한 고문을 받았으면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추국할 때는 집행자 마음대로 고문하는 것이 아니고, 고신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남이의 옥사처럼 취조 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을 시 장을 일정 횟수만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45] 역모 사건 정도는 되어야 하위 절차를 거쳐 압슬 등의 강한 고문이 가해지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이순신 역시 사실 관계를 우선적으로 밝히는 양상으로 추국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의종군 직후 앓아누운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몸이 안 망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다기 보다는 나이 50에 격무로 장기간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 투옥과 고문까지 더해지며 건강에 큰 타격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중근세의 감옥은 인간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46] 비위생적인 환경에서의 감염이 죽음을 의미하는 시대이기도 했고, 재소자의 생명을 지켜주는 난방 따위는 당연히 존재하지도 않는 구조였기에 투옥되자마자 심신이 급격하게 무너져 옥사하는 경우도 실록에 적지 않게 나올 정도로 극한의 환경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음에도 적의 반간계에 (일부러) 넘어가 파직으로 화답한 선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47]
파직만 당하고 나중에 재조사로 사건의 전말과 원균의 실태를 알고 나서 전력이 붕괴되기 전에 원상 복귀 시켜주었으면 그냥 재수없는 일이 생겼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순신은 목숨만 건졌지 나머지는 다 잃었다. 출옥한 다음 몇 개월동안 백의종군을 했고, 거기에 기껏 만들어놓은 함대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죄다 꼴아박았다. 선조는 운이 없어서 졌다고 정신승리나 하다가 자신을 모함한 대신들을 처벌하지도 않고 품계는 떨어뜨린 채 복직만 떨렁 시켜놓더니 바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정도면 이순신이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다.
한편 파직과 백의종군 외에도 이순신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으니,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80대의 노구임에도 한양으로 올라오던 이순신의 모친 변씨가 병으로 배에서 객사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엎어져 몸부림을 칠 정도로 슬퍼한다.[48]
1.6. 명량 해전[편집]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다 시피했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 척[49] 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50]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2척을 수습해 장흥으로 퇴각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4품계 강등된 정3품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51] 지금으로 치면 대장 계급의 해군참모총장이[52]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53]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패전 소식을 접했을 때 초계에 있던 그는 진주로 향했고 이후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순으로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리고 7월 22일 배설을 만나 칠천량 전장에서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장흥 회룡포에 있음을 알아낸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54]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55] 그 와중에 배설은 다시 탈영하여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 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한다. 경과나 분석에 대해서는 명량 해전 참조.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써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1.7. 성웅, 나라를 구하고 노량에 지다[편집]
비록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일본군의 함대는 여전히 백 단위를 헤아렸기에 전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순신은 과감하게 함대를 물려 서해안을 거슬러 오르며 퇴각길에 오른다. 그러나 몇달 안 되어 이순신은 서해안에서 일본군을 전부 몰아내고[56]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통제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얼마 안 가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57] 패잔병 및 전선의 합류를 통해 칠천량 해전 당시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 당시 통념처럼 조선 수군의 상당수가 칠천량 및 춘원포에서 말 그대로 궤멸된 게 아니라, 의외로 적지 않은 함선 및 병력이 지휘 통제를 상실하고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는 뜻.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되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추어 바람같이 스러진 것이었다.
박종화 作 《임진왜란》 中
그 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능력은 있으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58][59] 이순신은 명 수군이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 등을 자행하자 백성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고 떠나는 시늉을 했고, 다시는 그런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할 테니 가지 말라면서 찾아온 진린에게 귀국 군사들이 또 행패를 부린다면 직접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승낙받아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일부 얻어냈다. 이후 진린에게 자신의 공로를 기탄없이 그냥 넘겨주는 식의[60]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진심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실제로 진린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에 감복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61] 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62] 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조선인을 깔보기 일쑤인 중국의 고관대작이 자신보다 나이가 2살 어린 통제사 이순신을 '통상대인'이나 '이 대인'이라는 호칭도 아니고 노야(老爺) 또는 이야(李爺)라는 존칭으로 불렀으며[63] ,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살자고 조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이순신에게 푹 빠져있던 명나라 사람 중 하나였다.[64][65]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왜교성 전투를 펼치지만, 함대는 여러대 파괴하였으나 성은 점령하는데 실패하는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후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하였으니,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일본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이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00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만이 도주했다. 역설적으로 충무공이 쓰러진 이 전투는 충무공의 모든 전적에서 최고 규모의 전과를 낸 전투였다.
노량 해전이야말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해전이다. 종전까지는 이순신이 철저한 계획과 철두철미한 전략으로 완승을 거두었지만, 노량 해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진린과 유정은 서로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본국인 명나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6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4개로에 있던 왜군은 철병을 결정했고 이에 대응해서 조명 연합군이 추격을 했는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노량 해전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어설프게 공격하다가 반격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67]
고니시는 진린과 협상하여 무사히 퇴각하려 했으나 장군의 반대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1척만 포위망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진린을 꼬여서 구원군 요청을 보냈고 왜군은 500여척에 달하는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군과 명군 다 합쳐도 130여척에 불과한 전력인 데다가 명군의 함선은 왜선보다 작은 상황, 진린도 조선 판옥선을 타고 있었을 정도니...[68] 조명 연합군은 이제 여수와 사천 양쪽의 왜 수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진린은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가려고 했겠지만 이순신이 단호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진린과 한 판 붙은 끝에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노량 해전은 쉽지 않은 해전이었다. 야간 해전에다 이미 전략적으로 역으로 포위당해 불리한 상황이었고 함선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은 좁아서 백병전을 하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이순신이 절대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잘 훈련된 조선 수군과 명의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기어코 승리를 이루어냈다. 노량 해전은 워낙 치열해서 대장선에 탄 진린과 이순신이 위급할 때 서로 구원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접전 끝에 결국 조명 연합군은 승리하고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전쟁이 끝났다.
이순신이 명나라 제독 진린과 같이 바다 어귀를 지키다가 쳐들어가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은 사천에 머물고 있던 도진의흥(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이순신이 도진의흥을 공격, 적선 200여척을 불태우고 수많은 왜군을 죽였으며, 그대로 도망치는 왜군들을 노량까지 뒤 쫒았다.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에서도 이순신은 직접 나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탄에 맞고 말았다.
총탄은 가슴을 관통하고[69]
등 뒤로 빠져나갔다.주위 장수들과 병졸들이 그를 부축해 방패로 가려놓자 이순신은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후략)
징비록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이 보여준 전략, 전술, 판단력, 철천지 원수 왜군에 대한 단호한 복수심, 민중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 그 어느 것도 모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만든 영웅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준비와 비관적으로 느낄 만큼 현실적인 판단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마음가짐이다.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3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항복,《백사집》中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에는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노야(老爺)께서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는가?” 하고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를 받으며 다른 명군과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에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공은 이제 우릴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를 옮기는 데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