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최근 편집일시 :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이순신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소속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이순신대교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파일:이순신 수결.svg

[각주]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 펼치기 · 접기 ]
임진왜란


음력
4월

부산진 전투[日] · 다대포진성 전투[日] · 동래성 전투[日] · 김해성 전투[日]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日] · 충주 탄금대 전투[日] · 여주 전투[朝]

5월

한강 전투[日] · 기강 전투[朝] ·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 · 옥포 해전[朝]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朝] · 해유령 전투[朝] · 임진강 전투[日] · 정암진 전투[朝] · 사천 해전[朝]

6월

당포 해전[朝] · 제1차 당항포 해전[朝] · 용인 전투[日] · 무계 전투[朝] · 율포 해전[朝] · 여주 전투[朝] · 제1차 평양성 전투[日]

7월

웅치 전투[日] · 안덕원 전투[朝] · 전주성 전투[朝] · 이치 전투[朝] · 한산도 대첩[朝] · 제1차 금산 전투[日] · 안골포 해전[朝] · 우척현 전투[朝] · 제2차 평양성 전투[日] · 삭녕 전투[日] · 해정창 전투[日] · 영천성 전투[朝] · 지례 전투[朝]

8월

제3차 평양성 전투[日] · 청주 전투[朝] · 제1차 경주 전투[日] · 제2차 금산 전투[日] · 영원산성 전투[日] · 장림포 해전[朝]

9월

부산포 해전[朝] · 연안성 전투[朝] · 제2차 경주 전투[朝] · 북관대첩[朝] · 노현 전투[日] · 창원성 전투[日]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독성산성 전투[朝]
1593년

1월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상주 전투[朝] · 행주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강화협상 · 휴전기
제2차 진주성 전투[日] · 송유진의 난 · 제2차 당항포 해전[朝] · 장문포 해전[朝] · 이몽학의 난 · 기문포 해전
정유재란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日]

8월

고령 전투[朝] · 남원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9월

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석주관 전투[日]

12월

사로병진책 ·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2차 울산성 전투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명량해전
鳴梁海戰

파일:external/cfs11.blog.daum.net/48192cb8f1d49&filename=0317_hot1.jpg

명량 해전도[1]
시기
1597년 10월 26일그레고리력
1597년 9월 16일음력
장소
원인
이순신의 일본군 수륙병진 전략 무력화 계획
교전 세력
조선
(수비자)


일본
(공격자)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도도 다카토라 (대장군)
참가자}}}
파일:조선 어기.svg 김응함 (미조항 첨사 중군장)
파일:조선 어기.svg 조계종 (영등포 만호 척후장)
파일:조선 어기.svg 우수 (안골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안위 (거제 현령)
파일:조선 어기.svg 정응두 (평산포 대장)
파일:조선 어기.svg 김억추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조방장)
파일:조선 어기.svg 민정붕 (회령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소계남 (발포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송여종 (녹도 만호)
파일:조선 어기.svg 나대용 (금구 현령)
파일:조선 어기.svg 이응표 (가리포 첨사)
파일:조선 어기.svg 류형 (해남 현감)
병력
800~900여 명[2]
판옥선 13척
초탐선(협선) 32척
병력 규모 불명
전선 133척
후방 200척 이상[3]
피해
10명 전사[4]
3명 부상
그 외 불명[5]
31척 침몰(난중일기)
30척 이상 침몰(현대 추측)
분멸/격침되지 않았으나 전투선으로 기능을 상실한 전선 92척
도도 다카토라 휘하 군사 절반 사상[6]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영향
조선 수군의 제해권 탈환[7]
일본군의 북상 저지

1. 개요
2. 배경
2.1.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2.2. 죽기로 싸우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3. 양측의 전력
3.1. 조선 수군 규모
3.2. 일본 수군 규모
4. 전개
4.1. 전투의 시작
4.2. 군법에 죽고 싶으냐
4.3. 기적 같은 승리
5. 전과
6. 결과
6.1. 조선 수군의 후퇴
6.2. 반전된 전황
7. 분석
7.1. 강렬한 전투의지
7.2. 엄정한 군율과 신뢰, 지휘력
7.3. 함선 스펙상의 우위
7.3.1. 반론: 일본 함선은 상당히 커졌다
7.4.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
7.5.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
8. 명량해전 관련 다른 의견들
8.1. 명량 철쇄설
8.2. 거북선의 등장?
8.3. 기타
9. 미디어 창작물
9.1. 1900년대
9.2. 2000년대 이후
10. 기타
11. 관련 단체




1. 개요[편집]


정유재란 당시 명량수도에서 벌어진 해전. 한산도 대첩, 노량 해전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의 3대 해전으로 꼽히기도 한다.

조선 수군 13척과 일본 수군 133척 이상이 맞붙어서 고작 13척이었던 조선 수군이 승리한 전투로 너무나도 기적 같은 승리였기에 역사가들이 정면에서 박살냈다고 말하는데도 대중들이 이를 믿지 못하고 왜곡된 가설들을 믿고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8] 심지어 초요기를 올려 안위의 배가 다가오기 전까지 이순신은 대장선 한 척으로 다가오는 모든 적선을 박살냈다.

어찌 보면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압도적인 참패[9] 이후 고전하던 군대가 열세인 위치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전황을 바꾸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명칭을 생각보다 잘못 쓰는 사람이 많은데, 명량(梁) 해전이 올바른 표기다. 명랑(朗) 해전이 아니다. 애초에 앞의 '명'자도 '밝을 명'(明)이 아니라 '울다 명'(鳴)이다. 이는 엄연히 잘못된 명칭이므로 잘 알아두자. 명량의 순우리말이 널리 알려진 울돌목인데, 명량은 우리말 지명의 뜻을 한문으로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다. 한자로 울 명자에 들보 량자를 썼다. 노량, 견내량 등에도 쓰이는 梁은 제방 등 좁은 수로를 표현하는 데에 쓰인다.


2. 배경[편집]



2.1.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편집]



영화 명량의 오프닝 장면이다.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에서의 처참한 대패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물론 물리적으로 박멸당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도망친 것이었기는 하나 제대로 된 통제 아래에 모여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궤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들이 이렇게 생존을 우선시한 덕분에 이순신의 복직 이후 도망쳤던 수군 병력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조선 수군이 빠르게 복원되는 데에 보탬이 되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기존 자리였던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사실 선조는 칠천량 해전 이후 대책이 이순신뿐임을 알았지만 이순신 복직을 내키지 않았다. 칠천량 패전이 보고된 이후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문제로 떠들썩했지만 결국 유일한 적임자는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언급되자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나가버렸고, 결국 남아있던 대신들이 복직을 결정했다. 나라가 절단날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을 경계하고 질투하기를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는 이름만 있는 통제사였다. 더 심각한 건 이순신을 백의종군 이전의 계급이 아니라 더 낮은 계급으로 강등한 것이다. 즉 통제사라는 보직은 같지만 이순신 개인의 계급은 오히려 하락한 것.[10] 이 때문에 휘하 수군 절도사들과 계급이 비슷해지는 바람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극상을 당할 수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칠천량 패전 이후의 위태로운 형세에서는 수군 절도사라도 하극상은 커녕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도 벅찬지라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서 팔짱을 끼며 구경만 하던 명나라 군까지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결전이 목전에 닥친 마당에 지휘계통을 어지럽히는 건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고 선조를 시원하게 깠다. 그래서 계급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역시 영감으로 백의종군 이전보다는 낮았다. 원래는 정2품 대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런 푸대접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정에서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고 있던 초계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장병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입수했다. 다행히 칠천량 해전 이후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이 남해안 장악 등에 신경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한 덕분에 시간도 어느 정도 생긴 상황이었다.

사실 일본군이 처음부터 원균을 무찌르고 진군한다고 생각했었으면 미리 진군 준비를 철저히 해놓았을 텐데, 일본군 입장에서는 칠천량 해전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였기 때문에 진군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비유하자면 집에서 옷을 벗고 자던 도중 조선군의 기습을 맞아 싸우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승리해 버렸기 때문에[11]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한참 걸린 다음 상황을 파악한 뒤에도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걸린 사이 이순신이 부활한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 이때 이순신의 행적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beforeMyeongryang.jpg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12]

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 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7월 22일

경상 수사 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 이순신은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다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았다. 조정에서 22일에 칠천량 해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삼도 통제사 복직 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保障)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禍)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大軍)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초미(焦眉)의 위급함이 조석(朝夕)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창 덤벼들던 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에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水使)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 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謨策)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而尙致今日何敗言戰哉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

이제 특히 그대를 상복(黑衰)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白衣)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수사(水使) 이하 모두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그대가 나라를 위해 몸을 잊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남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다 시험해 보아서 알고 있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많은 말을 보태겠는가. 아! 저 육항(孫陸抗)[13]

이 국경의 강 언덕 고을을 두 번째 맡아서 변방의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저 왕손(王遜)[14]이 죄인의 몸으로 적을 소탕한 공로를 세웠던 것처럼, 그대는 충의(忠義)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敎書)를 내리는 것이니 생각하여 잘 알지어다.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 자체가 파격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모자라 네 관직을 빼앗고 너에게 벌을 줬다. 미안함에 할 말이 없다.'고 한 것이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에게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한 사례는 없다.[15] 선조와 이순신 모두 그만큼 사직의 존망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기에 수군 없는 수군 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복직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하지만 선조는 전술했듯이 이 와중에도 품계를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는데, 파직당하기 전 이순신 장군의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으나 이때 돌려준 품계는 정3품 절충 장군으로 일반 수사와 품계가 같다. 현대 해군으로 가정하면 해군참모총장함대사령관이 계급이 같은 상황이다.

8월 3일

새벽에 복직 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 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 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때 배는 모두 합쳐도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다. 이는 명량 해전 당시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330척에 이르던 일본군과는 숫자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자 5번째 기사

비록 일본 수군의 주력인 세키부네들이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고는 하지만 숫자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이 전쟁에서는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왜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133척은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다는 백성들의 증언과 다르기 때문에 선발대의 규모가 133이었다고 추정한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싸움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는 의견까지 나왔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가 아닌 행록에만 등장하지만 이토록 전력이 기울어져 있으니 전략을 수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중신들은 당파를 불문하고 이미 수군에 대한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윤두수는 전선이 남아있어도 수졸이 없어서 전선을 운영하기 힘들 테니 당분간은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수사들이 관할 해역을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고, 류성룡은 남은 전선을 강화도로 모아 방어하자고 제안했는데 모두 하삼도 수운 방어를 포기한 행위였다.[16]

물론 이건 사실상 국가를 버리는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었다. 조선은 지형적, 외세적 조건[17]으로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로 행주 대첩에서도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육상전은 일본군이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지금까지 틀어막던 서해, 남해가 뚫리면 일본 수군을 이끌던 도도 다카도라, 가메이 고레노리,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키 요시다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적장들이 강화,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여 선조를 잡고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18]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어쨌든 이러한 조정의 여론 동요를 이순신은 위의 유명한 어록으로 잠재웠다. 이순신 역시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고 해도 제해권이 있어야 왜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2. 죽기로 싸우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편집]


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19]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일본군의 대함대가 임박했다는 공포가 군사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순신의 묘사에 따르면 경상 우수사 배설이 교서에 절하기를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며[20]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21]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본인도 21일부터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워 있었다.[22] 그런 와중에도 다음 날에는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정유일기』 8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 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정유일기』 8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수색대 8척이었지만, 조선 수군은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어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수색대를 물리친 후[23]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순신은 이전부터 배설을 탐탁치 않게 보았으므로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라고만 담담하게 적었다.[24] 이렇게 이순신이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의 승기를 잡자는 생각이었다.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서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를 조롱하듯 처음에는 배 13척만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25]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렇다.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 군관 임준영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즉 맑은 날에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의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은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26]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정유일기』 9월 15일[27]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KBS에서 방송했던 한국사전에서는 밤에 이상한 징조도 많았다고 언급했다. 정말로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이순신도 꿈속에서까지 승리를 바랄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조선 수군 규모[편집]


기본적으로 선조 실록과 충무공의 일기, 그리고 행장에 근거한다.


  • 전라 좌도 수영
    •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겸임)
    •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 전선 1척 (실록)
    • 회령포 만호 민정붕 - 전선 1척 (일기)
    • 발포 만호 소계남(蘇季男) - 전선 1척 (일기)
    •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 금구 현령 나대용(羅大用) - 전선 1척 (일기)

  • 경상 우도 수영
    •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배설은 회전 직전 도주.
    • 미조항 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 - 전선 1척 (일기)
    • 영등포 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28])
    •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 - 전선 1척 (일기)
    • 거제 현령 안위(安衛)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29])

  • 전라 우도 수영
    •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金億秋)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 가리포 첨사 이응표(李應彪) - 전선 1척 (선조 실록)
    • 해남 현감 류형(柳珩) - 전선 1척 (일기 / 행장)

장수 및 일반 병졸 총합 900여 명가량. 노를 젓는 격군 및 사후선 및 탐망선의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 명가량. 함선은 판옥선 기준 총 13척. 여기에는 각지에서 가담한 마하수나 오극신 등의 의병들도 포함시켜볼 수 있다.

이순신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의 내용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 이순신이 저 장계를 쓸 상황에는 배설로부터 인수한 판옥선 12척이었다. 장계를 보낸 이후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이 더 추가된 것. 그래서 명량 해전 개시 기준으로는 13척이다. 하지만 명량 해전 내내 김억추는 나머지 12척 배들보다 더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했으므로 사실상 12척으로 봐야 한다.


3.2. 일본 수군 규모[편집]


조선역진법표에 기재된 일본 수군의 규모에 따른다. 화본태합기에는 와키자카가 명량해전에 참전한 것으로 나온다. 가토 요시아키, 간 미치나가는 참전이 불확실하다. 간 미치나가의 아들 간 마사카게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아, 간 미치나가 본인의 참전 여부와는 별개로 그 군대는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방면 좌군 소속 수군

  • 이요 국
이요 국 우와지마 번 8만 3천 석 다이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 2800명
이요 국 마쓰마에 번 10만 석 다이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 24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1만 4천 석 당주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 600명
이요 국 무라카미 씨 소속 하타 노부토키(波多信時)

  • 아와지 국
아와지 국 스모토 번 3만 3천 석 다이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 120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1만 석 다이묘 간 헤이에몬 미치나가(菅平右衛門達長) - 250명
아와지 국 이와야지 번 소속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菅又四郞正陰)

  • 메츠케
분고 국 사이키 번 다이묘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의 전선 수는 난중일기, 선조실록, 행록 등 기록마다 제각각이며 심지어 난중일기 내에서도 200여 척과 133척으로 다르다.[30]

일단 이순신의 난중일기 초판본에는 전투 초반에 적선 133척이 아군을 에워쌌다고 되어 있어 최소한 전체 수와는 별개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은 133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도 다카토라 측의 기록인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과 명량해전 이후 군목인 모리 다카마사의 전투보고서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에는 명량에 돌입한 배들이 관선, 즉 주력부대는 세키부네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 결과와 이충무공전서의 기본이 되는 충무공 가승의 기록에서도 일본 전선 수는 330여 척, 직접 참전한 전선이 133척으로 나온다.

300여 척이 넘어가는 함대를 이끌고도 울돌목에 진입한 배는 133척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후방 함대가 대형 전선 아타케부네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인 듯하다. 좁고 물살이 아주 빠른 울돌목에서 대형전선 하나 컨트롤 하기도 녹록지 않은데 200여 척이 모조리 진입하면 그야말로 대형참사가 날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의도한 바였다.

해남 어란포에 집결한 왜선은 333척이 맞지만 울돌목에 직접 진입하여 싸운 배는 세키부네 함대 133척이고, 후방의 아타케부네 함대는 울돌목에서 전투가 어려워 밖에서 대기하면서 전방 함대 지원을 도모함과 동시에 세키부네 함대의 승전 소식을 기다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온전한 330여 척과 벌인 싸움이 아니라고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울돌목을 격전지로 선정한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다. 그로 인해 적함 330여 척이 분산되었다. 이순신의 혜안이 아니었으면 13척으로 330여 척을 그대로 받아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또한 울돌목의 조류가 약해서 후방함대가 진입하기 괜찮은 조건이라 가정해도 해협 자체가 좁기 때문에 일단 후방 함대는 뒤에서 대기하고 전방 함대부터 순차적으로 조선 수군을 압박하는 식으로 전투가 진행되었을 것임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후술할 영화 명량에서도 어느 정도 표현을 잘 해놓았다.

해전 이후 포로가 된 강항간양록에 '배로 무안까지 간 자'(舟至務安)라는 표현으로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해안에 나타난 다이묘를 기록하였다. 도도 다카토라와 구루지마등의 수군들과 함께 육군인 하치스카 이에마사와 나카가와 히데나리도 언급되어 있으나 이들은 정작 해전 하루 뒤 전라도 정읍에서 작전회의에 참석하므로 휘하에 편성된 수군부대가 움직인 듯하다.

결론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수군의 규모는 일본측 기록과 보고서에 기재된 순수한 수군병력은 7200명에 일부 다른 영주들의 함대도 같이 움직였다는 가정하에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지만 명량으로 거대한 함대가 출정했음은 분명하다.


4. 전개[편집]


파일:Myeongnyang_battle_map.jpg
명량 대첩의 전개도

4.1. 전투의 시작[편집]


운명의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아침, 날씨는 맑았다. 이윽고 초병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왜선들이 접근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이에 이순신은 좌선[좌선]을 포함한 13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나섰다. 이순신은 일기 기록에서 '전투원인 병사들이 왜군 규모를 보고는 겁을 먹어서 얼굴빛이 많이 질렸다고 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부드럽게 타일렀다.'고 당시 상황을 남겼다.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별망(別望)이 나아와 보고하길, "수없이 많은 적선들이 곧장 우리 배를 향해 옵니다."라 하였다. 바로 뭇 전선에 명하여 닻을 들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아군의 뭇 전선을 에워쌌다.

『정유일기』 9월 16일

울돌목 앞바다에서 참으로 보잘것없는 조선 수군의 잔존 전력과 조우한 왜군 함대는 곧장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자신하듯이 포위진을 짜고 돌격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자랑하는 유인섬멸전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은 돌격해 나아갔다. 사실 본래대로라면 조선 군선들도 이에 맞춰 함께 전진해 나가며 판옥선의 체급과 울둘목의 유리한 지형을 믿고 함께 함대를 구성해 싸워야만 했는데, 아군의 12척이 겁을 먹어 전진하지 않으므로 대장선만 적진으로 돌격하며 활과 포환을 마구 쏘아대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일본 측의 지휘관이던 도도 다카토라는 전투의 시작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すいえん(水淵)と申す所にはん舟(番船)大しやう(大小)分十三そう(艘)い(居)申し候。大川の瀬よりはや(早)きしほ(潮)のさし引き御ざ(座)候所の内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潮のやわらぎ)申し候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舟居)申し候。 それを見附け、是非ともとり申すべきよし、舟手衆と御相談にて、則ち御取懸り成され候。 大舟(安宅船)にてハいまのせと(瀬戸)をこきくたし(漕ぎ下し)候儀ハ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関船)を御そろへ成され、御かゝり成され候」。(『高山公実録』)

스이엔(수연)[주석]

이라는 곳은 대소 판옥선이 13척 있었다. 큰 강의 하구에서 빠른 물결이 들고 나다가 잠시 물 흐름이 약해진 사이에 13척이 있던 것이다. 이를 발견하고 반드시 무찌르자고 수군들이 다짐하며 즉각 돌진했다. 대선(아타케부네)로는 이 좁은 물목 사이로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판단하여 다들 세키부네로 통일해 전투에 임했다. <고산공실록>


일본 측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함대 13척을 보고 바로 승리를 확신했다는 점, 물목이 좁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비교적 작은 세키부네로 갈아탔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명량 해협의 조류에 대해 기록을 따로 남겼다는 것이다. 일본측 지휘부는 물결과 적의 규모를 보고 쉽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제히 돌격했다.


4.2. 군법에 죽고 싶으냐[편집]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이 탄 좌선은 일단 앞으로 전진하며 접근해 오는 왜선들을 족족 격퇴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중과부적인 상황이어서, 심지어 명량 해협이 한눈에 보이는 망금산에서는 백성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몰려오는 왜선들을 좌선이 홀로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망연자실하여 통곡을 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적선의 숫자와 해협의 거센 역방향 물살에 압도당한 부하 장수들은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을 품은 채로 후방에서 뭉그적대고 있었으며, 정신없이 전투를 치르던 이순신은 문득 자신의 부하들을 돌아보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31]

뭇 장선(將船)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배를 돌리려 하고 있었다.

『정유일기』 9월 16일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수마장 뒤로 물러나서 아예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며[32], 거제 현령 안위, 녹도 만호 송여종, 조방장 배흥립, 해남 현감 류형, 가리포 첨사 이응표 등의 장수들까지 후방에서 머뭇거렸다. 맞붙어 봐야 전멸이 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류마저도 왜군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이민서가 쓴 명량대첩비문에서는 "명량은 육지 사이가 좁은 데다가 때마침 밀물이 세차게 몰려와 파도가 매우 급했다. 적은 상류로부터 조수를 타고 몰려 내려오는데 그 세력이 마치 산이 내려누르는 듯하였다(地迫陿潮方盛水益急賊從上流乘潮揜之勢若山壓),"라고 서술하는데, 이순신이 묘사한 역류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링크

현대의 연구로 당시 조류를 계산한 바에 의하면 전투 개시 후 물살이 아군에게 불리한 오전 내내 좌선[좌선] 1척이 역류를 받아가며 전투에 임했음이 밝혀졌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좌선 1척을 제외한 12척들이 멀찍이 바라보고만 있었으며, 중군장 김응함[33]은 무시했고 안위는 멀리서 주저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억추는 배 한 척을 한 마장까지 뒤로 빼서 이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려 아군에게 싸우러 오라고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이순신의 좌선은 홀로 울돌목의 거센 역류를 다 받아내면서[34] 왜군 선단과 싸워 물길을 틀어 막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순신은 호각을 불며 중군영하기[35]와 초요기[36]를 걸어 중군장과 여러 전선들을 소집했다. 물론 평소라면 군령에 불복한 제장들의 목을 바로 베어버렸겠지만 이 전투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순신이 아니면 누가 봐도 의미 없는 죽음이 분명했기에 무조건 비난할 수가 없었던 데다가[37] 도망간 아군 배를 잡으러 간다면 적선이 더 전진함을 우려했다. 결국 초요기를 올려 부하들을 부르자 그제서야 장수들이 슬금슬금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중 거제현령 안위가 탄 배가 좌선 근처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순신은 안위를 향해 외쳤다.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38]

『정유일기』 9월 16일


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정유일기』 9월 16일


이에 안위는 황급히 전장에 뛰어들었고, 이순신은 뒤이어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에게도 비슷하게 위와 같이 호통을 쳤다. 특히 김응함은 중군장으로서 좌선의 호위와 지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으나 그마저도 방기하고 후방에 물러나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특별한 함대 편제상 직책이 없는 듯한 안위보다도 늦게 좌선과 합류했으므로 이순신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39]

이렇게 안위와 김응함이 전장에 뛰어들었고, 밀물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명량 해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좌선의 위세에 기가 질려있던 일본 수군은 좀 더 상식적인(...) 적을 상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른 판옥선들이 전투에 끼어들자 옳다구나 하고 그쪽으로 돌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안위의 함선이 왜선 3척에게 포위당해 발이 묶이고 접선을 당했으며 일본 수군의 장기인 백병전 공격을 받고 사상자까지 나오는 상황에 처했다. 이렇게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 만약 조선 수군이 여기서 함선을 1척이라도 잃는다면 단순히 함대가 손실을 겪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되면 일본 수군에게 판옥선을 내줘 전고와 화력의 이점을 잃고, 또한 일본 수군의 사기가 올라 박빙으로 진행되던 전황이 당장 일방적으로 뒤집힐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한 이순신은 즉시 전진하던 좌선을 변침, 선회시켜 안위의 함선에 접선한 왜선 3척을 순식간에 영거리 포격으로 격침시키면서 안위를 구해냈다. 이때가 명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으며, 그 와중에 산이 찍어누르는 듯한 기세의 물살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4.3. 기적 같은 승리[편집]


한편 함대의 숫적 차이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 판옥선과 일본 배들의 태생적 차이 때문에 임란 내내 참상을 겪어 온 것을 망각한 일본 수군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이 당시 적극적으로 도선 공격을 한 선두의 배들이 대부분 격파되고 병사와 중상급 무사들이 모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낫을 걸고 도선 공격을 가하려던 군감 모리 다카마사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포환을 견디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물살이 반대로 바뀌어 전황이 조선 수군 측에 크게 유리해졌고, 일본 배들이 역류를 맞으며 그 많은 배들끼리 앞에서 서로 엉키고 서로 부딪치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단체로 패닉과 혼란에 빠진 일본 함대는 이미 목을 가득 채운 상태라 뒤로 돌려서 빠저나가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윽고 정오가 되어 물살의 방향이 바뀌자, 아군의 처절한 분투를 지켜보고 있던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를 필두로 다른 전선들도 일제히 합세하여 왜군 함대를 공격하였고, 비로소 조선수군이 승기를 잡았다. 난중일기를 근거로 한 포스팅

비록 왜군 함대가 여전히 수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우위였으나, 여태껏 이순신의 판옥선 한 척도 제대로 상대를 못 한 데다 물살이 역방향으로 바뀌어 버렸으므로 기세좋게 전진하려던 후열의 함선들조차 좁은 해협에 밀집된 채로 거의 멈춘 채 물살에 떠밀리며 격파되는 배와 조선 수군에게 격침되는 배가 뒤섞였다.

降倭俊沙者、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在於我船上俯視曰:「着畫文紅錦衣者、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吾使金石孫鉤上船頭、則俊沙踴躍曰:「是馬多時!」云 故卽令寸斬、賊氣大挫。

항왜(降倭) 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40]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41]

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石孫)[42]

을 시켜서 갈고리로 그 자를 뱃머리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준사가 보곤 펄쩍 뛰면서

"맞습니다. 마다시입니다!"

라 하는 고로 즉시 목을 베었고 이에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9월 16일


오후 1시경이 되자, 완전히 조수가 바뀌어 물살이 역으로 빨라지면서 왜군 함대는 전장에서의 공세능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패닉에 빠져 지휘통제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판옥선이 강한 물살을 타며 포격을 계속하자, 그나마 멀쩡하던 일본 수군의 함선들도 우왕좌왕하다가 순식간에 격파되기 시작했다. 후방에 있던 함대 사령관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대장선이 격파되고 구루지마 또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수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토라가 화살에 맞고 2군데 부상을 입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 수군의 패배를 확인하라고 파견한 중앙감찰관 모리 다카마사는 선두에서 도선 공격을 가하다가 빗발치는 포환과 화살을 못이기고 바다로 뛰어들어 간신히 구조되었다.

왜 수군은 이 과정에서 추가로 격침된 전함만 11척에 달했으며, 결국 5시경 왜 수군의 잔여 함선들이 도주함에 따라 전투는 종료되었다. 조선 수군 또한 전장을 수습한 뒤 당사도로 일시 후퇴하였다.

적선 30척을 깨부수자 적선들이 물러나 도망치니, 다시는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는 실로 천행이었다.(此實天幸)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6일


이 날의 전투에서는 <일기>에서 감정을 절제하는 편인 이순신 본인조차도 "천행, 하늘이 도왔다"고 가슴을 쓸어내린 전투고 그만큼 대단한 전과였다.


5. 전과[편집]


내 배에서는 순천 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서는 조선 수군의 피해는 좌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좌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냥 왜군들이 좌선한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거라고 믿을 전과다. 실제로는 전투 중반까지 좌선 혼자서 밀려드는 적선 수십 척을 상대로 2~3시간을 싸웠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해전 전체에서 이런 사상자가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거제 전선의 격군 5명~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생각하면 사실상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날 적선 31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졌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순신이 눈앞에서 확인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가능성도 있다.[43]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고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 척뿐이었으며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 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고 기록했다. 10여 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 측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44]

결정적으로 이는 당시 일본 수군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명량 해전까지 종군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1592)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 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2월 11일 -


선조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자 기사에는 임진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무술년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렸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1597) 6월 적선 120여 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전풍상 이 사람은 칠천량과 명량이라는, 조선 수군의 극과 극을 모두 보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 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 해전과 명량 대첩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포로의 기록이 나온다. 그 포로가 증언하기를, '왜장 여럿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우수영으로 향했는데, 이순신이 전선 10여 척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왜장 내도수(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고, 민부대부(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 장수들도 죽은 사람이 여럿'이라고 했다.[45] 강항은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의 명단을 보면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사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구루지마 휘하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군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을 살펴보자.

先手の船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でき申し候。中にも来島出雲殿, 討死にて御ざ候。其の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家老のもの共も過半手負い討死に仕り候処に、毛利民部大夫殿, 関船にて、番船へ御かゝり成され候.

ばん船へ十文字の鎌を御かけ候処に、ばん船より弓鉄炮は撃ち申し候に付き、船をはなれ海へお入りなされ、危うく候処に、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し候。

朝の五時分より酉の刻まで御合戦にて御座候。港の様子、ばん船能く存じ候に付き、風を能く見すまし、其のせと口をぬけ、津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すについて、是非なく追っかけ申す儀もまかりならず、和泉様も手をニか所, 負はれ候.

선봉의 배들은 적선을 만나 부상자가 숱하게 나왔다. 그 중에 특히 구루지마 이즈모노카미(来島出雲殿)[46]

님은 전사하고 말았다. 그 밖에 선수(船手)[47]도 함께하였다. 가로(家老)[48]의 과반수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으며 모리 민부다이부 님(毛利民部大夫殿)은 세키부네(関船)에서 적의 판옥선에 십자 낫을 걸고(도선) 공격했으나 판옥선에서 화살과 철포를 퍼부어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던 것을 도도 마고하치로(藤堂孫八郎), 도도 가게유(藤堂勘解由) 두 장군이 배를 대어 적선을 쫒아내고 구해내었다. 아침 5각 반[49]부터 유시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항구의 상태는 판옥선들이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 수군이 잘 아는 항구 쪽을 피해서) 바람을 잘 파악한 뒤 그 물목을 빠져나와서 만에 배를 대고 도주했는데, (조선 수군 쪽은)어쩔 수 없이 추격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이즈미노카미 님(和泉様)[50]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 도도 다카도라는 고산공실록에서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었다. 히데요시를 대리하는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까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와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의 전투 보고서에는 모리 다카마사와 도도 다카도라 휘하의 함선이 직접 적을 공격했다가 함선이 좌초, 모리 다카마사 본인은 도도 수군의 배가 구원하여 살아났다고 서술한 점을 들어 이들도 교전 당사자로 보는 관점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다고 하겠다.

공을 세운만큼 명성과 보수가 돌아오는 일본 전국 시대의 특성상 군감일지라도 수군을 감독하지만 않고 휘하 부대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논공 행상에 참여할 다이묘에 대한 철저한 보호라는 일본 전국 시대의 또다른 특성[51]을 감안하면, '(다이묘를 보좌할)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는 말이나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가 물에 빠졌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조선 수군의 공격이 철저히 보호되는 일본 수군의 최후방까지 덮쳤다고 보는 게 맞는다.

따라서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적선의 수만 31척이고, 명량 대첩의 참패로 인한 일본군의 전체적인 손실은 그 이상으로 컸다. 침몰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승선 인원이 몰살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여 전투 불능에 빠지거나, 혹은 함선의 손상이 너무 커서 수리에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수리 자체가 불가능해서 기껏 퇴각해놓고도 폐기 처분해야 할 선박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명량 대첩 이후로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이 정면에서는 수효가 한참 부족했던 조선 수군에게 대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격침 31척이란 전과 자체만으로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이는 임진년 때 조선 수군이 기습 공격과 신무기(거북선)의 투입을 통한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교전을 벌인 옥포 해전,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사천 해전 당시의 전과와 맞먹는다. 게다가 전투의 상당 부분을 통제사 좌선 1척만으로 치른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더욱 놀랍다. 쉽게 생각해서 배를 군인으로 바꿔보면 133명이 편제된 전투 집단에서 사망자만 해도 31명이고 부관은 전사하고 지휘관도 중상으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패주했다는 뜻이 되는데 이는 당연히 전멸 판정이다.

일본군의 인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세인들의 인식과 달리 실제 미군 교범에서는 총 전투원 중 부상자를 포함하여 15~30% 가량 전투불능이 될 경우는 병력 재편성을 위해 후퇴해야 하고, 그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면 나머지 전투원 개개인의 육체적 건강 여부를 떠나서 더 이상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져 부대가 전멸한 것으로 본다. 상당수의 인원이 전사했고 거기에 더해 중급 지휘관들인 가로의 절반이 사망 혹은 부상으로 전투불능이 되었다.[52]

또한 일본의 수군은 주로 지방의 해적 세력으로 구성된 독립적 봉건영주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타격은 더욱 컸다. 일본의 수군은 몇 안 되는 해적 세력('스이군' 혹은 수군)에 의존하고 있었고, 구루지마 같은 군소 다이묘에게 도요토미 성씨를 내리는 파격적 조치를 한 것도 그 수군 세력이 바다 건너에서 싸우는 임진왜란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드물게 해전의 노하우를 가진 수군 세력의 장교단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다이묘가 죽었다.

근래 또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 녹도 만호 송여종과 영등포 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 기사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 대첩의 승전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어떻게든 이순신과 명량 대첩을 깎으려고 드는 선조의 태도가 드러나 있는데, 분명히 명량 대첩을 두고 작은 승리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이로 인해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단언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 이 시기의 선조는 명의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이순신의 명량 해전의 전과를 폄하하고 다니기 바빴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근성이다

오히려 명나라 경리 양호[53]가 선조를 타이르고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라고 이야기하며[54] 선조에게 명량 대첩 이듬해까지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끈질기게 압박하여,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게 도와주기도 했다.


6. 결과[편집]



6.1. 조선 수군의 후퇴[편집]


파일:attachment/afterMyeongryang.jpg

명량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정예수군 333척을 대파한 직후,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함대를 이끌고 금각포, 당사도, 어의도, 법성포, 위도, 고군산도로 이어지는 천릿길 수로를 통한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것은 당시 전라도를 점령, 포진한 왜군은 물론, 이미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왜군에게

서해안의 제해권이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천명, 그 예기를 꺾어버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던 왜군은 보급로 차단으로 또다시 고립될 것을 염려하여,

순천, 울산 등지로의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한편, 거듭되는 패전으로 전라도의 육지 방어선이 모조리 무너지자

인근 도서로 피신한 채 실의에 빠져있던 백성들은 크게 고무됐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불멸의 이순신 97화 中 내레이션


(중략)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 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 난중일기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미 전라도 전역에 일본 육군이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잠시 북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아무리 수군이 강해도 수군 기지는 항구에 있고 왜군이 육지 쪽에서 공격해오면 보급물자 없이는 뗏목에 불과한 조선수군이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6일 17시경에 일본수군이 완전히 퇴각하였고 조선수군은 그날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에서 가까운 해남 우수영으로 새벽에 진을 옮겨 머물다가 해류를 타고 준비해두었던 당사도로 이동해서 식수를 보급하고 숙영한다.(17일 오침) 그리고 같은날 신안 어의도(지도)로 이동했는데 이 때 현령들이 찾아와 명량의 승전을 치하하고 양식을 준다. 18일에도 어의도에 머물고 19일에는 함대가 영광 법성포로 이동 20일에는 영광 위도로 이동 21일에는 충청도의 섬인 고군산군도(선유도)로 이동해서 12일간 머문다.

10월 3일에는 다시 고군산군도를 출항해서 8일에는 어의도, 9일에는 해남 우수영에 다시 복귀해 3일을 머물고 10월 11일에는 신안 안편도에 있다가 29일에 새로운 통제영인 목포 고하도에서 108일간을 머물며 함대를 재건한다.

고군산군도에서 이순신은 명량 대첩의 승첩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27일 조정으로 올려보냈다.[55] 이에 따라 왜군도 서해로 북상하여 이 과정에서 간양록을 남긴 강항[56] 영광에서 왜군에게 잡혔고, 일부 왜장이 배로 전남 무안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겼다.[57] 즉 엄밀히 말해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는 것에 완벽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몰아쳐서 끝냈으면 조선 수군을 이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 않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일본군은 조선수군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임진년 이래로 처음 진출해보는 서해안에 신안과 무안의 수많은 섬과 갯벌을 마주쳐야 했고, 좁은 섬들 사이로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를 조선 수군의 공격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다시 전투를 해야하는데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었다.

정찰을 통한 지형 및 적의 군세 파악+각종 정보 수집+작전 계획 수립 검토+사령부의 승인+병력 및 물자 소집[58], 병력 충원[59], 보급선 유지 확보, 병장기 생산, 공격에 대비한 전술 훈련을 거쳐야 하므로 준비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연락을 사람이 직접 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느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명량 해전의 패배 1번으로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일본 수군은 당연히 12척에 불과한 수군 쪼가리들은 가볍게 밟고 진군할 것을 전제로 출정했을 테지만, 그 전제가 어그러졌으므로 다시 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수백 척 함대가 13척 함대를 못 이기고 거의 궤멸 직전이 되어 돌아왔으니 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을 것이 자명하다. 결국 궁극적 목표를 놓고 보았을 때 왜 수군은 서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서해안에 상륙하여 육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육상전력이 우세해도 해로를 통한 보급을 받지 못하면 그저 잠시동안일 뿐이다.[60] 당초 왜군의 목표였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이루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게다가 칠천량 해전 이후 숨어 있던 장수들이 줄지어 함대를 이끌고 합류하면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붙어도 이긴다고 보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61] 게다가 이순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62] 왜군은 결국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기대를 접어야만 했다. 이때 왜군 사이에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앞으로 진짜 희망이 없다며 체념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63]

,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 이항복, <백사집> 고 통제사 이공 유사(遺事)


반대로 조선군 사이에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흘렀다. 왜 수군이 육군과의 공동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군이 독립적으로 금강 하구, 가능하다면 한강 하구까지 진출해서 보급거점을 만들었어야 하지만 이것은 실패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왜 수군은 서해안 확보에 실패했다. 또한, 이때의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순신과 합류하여 칠천량 때의 3분의 2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의 전력을 회복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부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6.2. 반전된 전황[편집]


이 전투로의 승리로 남해안 일대의 조선 피난민들에게 구심점이 생기게 되었고, 수군의 건재함이 알려져 재건이 시작되었으며, 서해안의 왜 수군의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다.

일본 일각에서는 명량 대첩이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인 전투라고 주장한다.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했고 이순신이 이를 피해 북쪽으로 퇴각했으므로 명량 대첩은 전술적인 작은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9월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후퇴 이유도 단순히 월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월동이라는 이유가 아주 틀리진 않았다. 명령해전의 큰 성과 중 한 가지가 바로 월동하고자 왜군이 전방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이다.

명량 해전은 양력 10월 26일에 있었다. 이순신 부대가 고군산도에 진을 친 때는 겨울 초입인 양력 11월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만약에 왜 수군이 전라도 해안에서 원하는 만큼 활개칠 수 있었다면 전주나 남원을 점령한 왜 육군에게 겨울을 버틸 물자를 제공할 수 있었지겠만, 근처에 있을 조선 수군 때문에 위축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한 행동은 남해안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임진년에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버텼다가 손실을 입는 일[64] 을 예방하고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군이 물러난 것도 한겨울에 계속 밀려가는 양상이었음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개인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일부 일빠들의 위와 같은 주장대로라면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승리가 된다.[65]

실제로 조선은 왜군이 직산[66]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양의 주민들도 모조리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일본 측의 종군승이던 케이넨의 일기에도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하는 말이 나온다. 일본군은 한양을 재점령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0일 안성을 거쳐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직전에 돌연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케이넨의 일기에 의하면 이는 '항구'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해안을 따라서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남해안 순천에 자리잡았는데, 그들 입장에서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면서 월동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급마저도 명량 대첩 때문에 틀어졌다. 육로보급의 경우 백두대간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산지를 넘어야하는데, 그 와중에 먹을 식량과 쌀을 호위할 병력 우마지기들이 먹을 식량까지 같이 가져 가야 한다. 게다가 일본은 점-선만 간신히 장악했을 뿐 면을 장악하는 데에는 실패해 후방에 의병은 물론이고 정유재란쯤 되면 아예 조선 정규군[67]이 활개치고 다닐 지경이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왜군이 호남 평야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전 군을 먹일 수 있는 보급을 충청도전선까지 보내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68]. 이쯤 되면 육로 운송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짓으로, 왜 조선 조정이 근세 말까지도 한강 뱃길로 세수를 확보했는지 알 수 있다.[69]

수군이 금강에 진입해 공주, 좀 더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와 청주쯤에 보급거점을 확보했다면 왜군이 구태여 점령지를 다 포기하고 오로지 월동만을 위해 경상도까지 철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안정적인 보급을 받으며 충청도 일대에서 버티고 앉은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밀어내기 위해서는 더 큰 희생을 감수했어야 했을 것이다. 전라도 방어선이 박살나 호남평야가 왜군의 직접적인 보급처가 되는 것은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70]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수계까지 포함하면 오근장까지도 19세기 말엽까지 배가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문제중년의 포스팅에 따르면 센고쿠시대 사무라이들은 하루 쌀 2홉반을 기준으로 삼았으니, 60석 선박이 드나든다면 배 한 척으로 하루 식량 2만 4천 명분을 실어나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당연히 서해안 진입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이 단순히 월동 차원에서 철수할 정도로 여유로운 입장이었다면, 굳이 한겨울에 고생해가면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즉 왜군은 수군의 서해안 진입이 좌절된 시점에서 다시 봄이 온들 재북진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경상도 연안에 틀어박혀서 존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국지적인 전투라기에는 일본 수군의 피해 규모가 상당히 컸음도 사실이다. 물질적인 피해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최소 10배 이상의 전력에 내로라하는 수군 장수들과 정예병들이 총출동했는데 고작 13척의 적선에 장수들 다수가 전사하고 대부분이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친 걸로 모자라서 명량 대첩이 끝나고 얼마 가지도 않아서 원균이 말아먹은 전력에서 절반 이상이 복구가 됐다는 소식까지.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 수군들은 이순신이 버티고 있는 조선 수군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전투는 전황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전략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수군의 작전이 전황에 끼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명량 대첩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끝장내고 거점을 만들었다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못하고, 서해안에 확고한 거점을 만들지도 못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과 전략에서 완벽하게 일본의 원정 실패로 이어지는 첫 걸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7. 분석[편집]


이미 해상에서 누적된 손실이 엄청났던 일본군은 공격을 위한 급격한 기동을 강요받고 있었고, 그렇게 지나가야 하는 자리에 어쩌면 들어가면 못 나올수 있는 지형이 있었고, 그렇게 들어가면 못 나오는 상태에서 어쩌면 적을 상대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최소한의 전력[71]과 조직력[72] 남은 상태에서 조선군 또한 일본군의 북상 차단을 위해 방어를 위한 급격한 기동을 강요 받는 상태에서, 오직 어쩌면 공격자의 준비가 부실할수있고, 어쩌면 지형을 통해 공격자의 허점을 흐트러놓을 수 있을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충무공은 그나마 합리적인 싸움을 택했고, 바로 그 선택이 기적적인 행운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것은 원균이라는 논외급 재앙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피해를 집요하게 누적시켜온 충무공의 옛 활약들 덕분에 고려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바로 그 활약들 덕분에 일본군은 단 1회의 불운 만으로 공세력을 상실하였고, 그대로 전황이 뒤집히게 되었다. 만약 충무공이 어설프게 운 좋고 머리가 좋은 수준에 그치는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이런 기적이 일어날 일도 없었고, 일어나도 전황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충무공은 기적의 범주로 논해야하는 기적의 결전을 성사시켰으나, 그 기적의 결전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적 이전에 이미 누적 시켜온 여러 전공들 덕분이며, 달리보면 결국 단발적인 요행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따라 당연한 결과가 나온 것이기도 하다.

7.1. 강렬한 전투의지[편집]


이 전투는 승리할 가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반드시 싸워야만 하는 전투였다. 조선 수군은 규모가 기존의 1/10 이하로 급감해 더이상 화력으로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없었으며, 육지는 이미 일본군이 물밀듯이 쇄도하는 도중이라 편안한 정탐과 보급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순신의 장기인 정보전을 통한 각개격파도 불가능했고,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데다 시간도 많이 남지 않은 일본군이 정면 대결을 걸어왔기에 지연전도 불가능했다. 일본군의 함선이 훨씬 빠르므로[73] 도주 가능성조차도 불확실하지만 막강한 백병전 능력을 자랑하는 일본군이 서해로 보급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했으므로 애초에 도주를 선택할 수조차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순신 본인조차 전투 전에는 고뇌에 휩싸여 절망적 심기를 토로하고 있었다.

9월 3일 (신묘)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봉창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랴!


9월 12일 (경자) 종일 비가 뿌렸다.

봉창 아래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개인적인 불안감은 숨긴 채 전투의지를 잃지 않고 임금에게는 "신이 아직 살아있고 전선 12척이 있으므로 적들은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의 유명한 상소를 올리고, 아군에게는 군령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함과 동시에 적은 병사로도 중요한 길목을 지키면 대군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로 격려했다.

지치고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정예병들 이외의 모든 무기를 잃은 조선 수군이었지만, 그런데도 이순신은 끝끝내 강점을 활용하고 약점을 가릴 방법을 찾아냈으며 큰 전략적 시각에서 본인이 물러서면 전쟁이 패전으로 끝난다는 판단 하에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또한 극단적인 전장 환경을 이용해 전투 전개까지 극단적으로 몰아가 정상적인 전투가 진행되기 어렵도록 만들어 끝끝내 승리를 쟁취했다.

그야말로 이순신의 천재성과 함께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가 빛났던 전투이며, 먼 훗날 일본군바보같은 삽질 때문에 가끔 폄하되기도 하는 의지의 중요성이 가장 크게 작용한 전투였다.


7.2. 엄정한 군율과 신뢰, 지휘력[편집]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시키자는 논의가 오가고 있었고, 이순신이 가장 신뢰하는 용감한 장수들도 칠천량 해전의 패전 직후 전투를 거부할 정도로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불가능할 것 같은 전투에 참전하고 공포심에 물러났다가도 공포를 이기고 돌격명령에 다시 응한 데는 이순신의 지휘력과 리더십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평소의 군율이 바탕에 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엄정하게 군율을 세우면서도 휘하 군인들과 놀이를 즐기거나 술자리를 가지고 사이사이 의견교환을 나누는 긴밀한 소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고, 무패의 경력을 자랑하는 이순신의 절대적인 지휘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육전과 달리 도주할 곳도 없는 해전에서, 그것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도주 일보직전의 군인들이 돌진을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의 수군은 평소의 숙련도가 매우 높았고 지휘관인 이순신이 개별 함선들을 매우 정확하게 지휘했기 때문에 명량 해협의 맹렬한 물길에서도 조종, 사격 등 함선의 운용을 비교적 능란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같은 압도적 스펙의 함대를 가지고도 정보수집도 않고 무리하게 항행을 강행한 끝에 흐지부지 괴멸당한 원균과 비교하면 지휘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대형 총통들의 운용 기록을 보면 지상보다 사거리가 매우 짧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울돌목의 해류는 앞서 언급했듯 동아시아 최고로 점쳐질 만큼 빠른 곳이었고, 이런 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낸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


7.3. 함선 스펙상의 우위[편집]


조선군과 일본군은 끝내 함선의 잔인할 정도의 스펙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조선군의 함대 규모를 보고 그동안의 스펙 차이로 인한 참패들을 잊고 돌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를 무시하고 울둘목의 지형만 생각해 아타케부네를 투입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고산공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함선은 대부분 세키부네(80명 탑승)였는데, 이에 반해 조선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130명 탑승)은 해상의 성이라 불리던 아타케부네(290명 탑승)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확보하고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판옥선의 구조 자체가 철저하게 한 가지 기능, 즉 연안에서 화포를 쏘기 위한 포대 겸 장벽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된 구조였다. 애당초 물목에서 통행세를 걷기 위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목적으로 설계된 일본군의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배끼리 부딪치더라도 세키부네가 먼저 박살났다.

즉, 일본군이 자신들의 함선보다 월등히 큰 조선의 판옥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해류 위에서 난데없이 공성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화살, 창 등으로 상대하면 그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 처음 좌선 혼자 울돌목을 막았을 시점에 물살은 일본군에겐 유리한 순류였으며, 조선군에겐 역류였다.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유리한 물결을 보고 돌격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일본 수군의 전술은 고대~중세 해전에 머물러 있었다. 구조상 함포를 다는 것이 불가능해서 포격을 그대로 맞으면서 전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술도 배에 접근 후 도선해서 백병전을 치러 함선 내 인원들을 몰살한 후 빠져나오거나, 배에 불을 질러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게 다였다. 그러나 접근해도 조란환, 화살 등이 위에서 날아오고 좁은 곳에 배가 밀집한 전투 상황상 아군의 배와도 뒤엉켜야 했으므로 정상적인 교전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었다.

더불어서 조선군은 강력한 화포들을 다량으로 적재할 수 있었다. 천자총통[74]과 현자총통은 백여 개의 조란환, 혹은 대장군전을 쏴서 정면이든 원거리에서든 함선끼리의 싸움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당시부터 이미 저평가되고 있던 승자총통마저도 장대에 달아서 조란환을 쏘는 구조 덕분에 방어전에서 상당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75]

크기 면에서 판옥선의 대항마라고 할 만한 아타케부네는 편성되지 못해서 일본 수군이 더 불리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전의 안골포 해전의 예시를 보면 알겠지만, 아타케부네가 편성되었다고 해도 판옥선 앞, 그것도 독기가 바짝 오른 이순신의 기함 앞에서는 그저 덩치만 큰 목표물(...)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안택선은 주로 다이묘 계급의 상징이었기에 전력상으로 의미를 가질만큼 수효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고산공실록에는 좁은 해협을 보고 아예 편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이 장계에서 붉은 깃발과 푸른 휘장을 두른 대선을 격파했다고 하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아서는 전투 후반에 판옥선들이 후방의 대장선에 당도하여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 경우 운신이 어려운 좁은 지형에서 한두 척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으니 대함 미사일 격인 대장군전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좋은 표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 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76]

그러나 판옥선과 화력의 우위라는 이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하고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을 생각해볼 때 아무리 조건이 좋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이 변변찮으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염두해둬야 한다. 반대로 이러한 이점들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유능한 지휘관 이순신을 만나자, 사실상 전투는 대장선 혼자 하고 나머지는 그 대장선에게 학살당하는 세계 해전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수준의 일방적인 전투가 가능했던 것이다.

명량 해전 당시 조선군의 군관 비중이 이전에 비해 높았다는 의견이 있다.

7.3.1. 반론: 일본 함선은 상당히 커졌다[편집]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좋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도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封典)을 받기 위해서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金軾)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30년 7월 22일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고 선조가 비변사와 회의를 하면서 일본군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커졌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니 김응남이 그렇다고 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일본 수군은 바보는 커녕 전쟁의 베테랑들이었으므로 조선 수군에게 호되게 당한 뒤 여러 대처법을 시도했고 그중 하나가 함선의 대형화이다. 일본 수군이 진단한 패인은 화포 대응력 부족이었는데, 당시의 화포는 작렬탄이나 포도탄 같은건 없기 때문에 함선의 크기가 곧 방어력이었다. 작은 배라면 포 두세발에 가라앉을 것도 크기가 크면 계속 떠다닐 수 있고(나무니까) 심지어 여러 발 얻어맞아도 속도만 느려지고 운행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종국에는 주력 함선의 대형화는 무의미하다고 결론짓고[77] 화포대응이 가능한 초대형함 아타케부네를 만들어 세키부네 여러대와 함께 움직이는 일종의 보전합동전술과 유사한 형태의 전술을 구상했다. 참고로 원래 이 전술이 처음 그 위력을 드러냈어야 했던 칠천량 해전에서는 세키부네의 기동전만으로 원균의 조선수군이 휘둘리다 돈좌되고 모든 전투지속능력을 상실한 채 섬멸당했다.

따라서 다음 차례는 명량 해전이었어야 하는데, 사실 명량 해전에서 아타케부네는 기함 이외에는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울돌목이 너무 극단적인 전장이라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가 동시에 진입하기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7.4. 일본군의 호승심과 촉박한 시간[편집]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의 황당한 승리, 그리고 조선 함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자신감이 엄청났다. 당사자인 도도 다카토라 본인이 현장에서 13척의 함대를 보고 제장이 승리를 확신하고 격파하기로 합의를 보고 달려들었다고 했을 정도다. 정유재란(2차 침략)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병력들까지 가세했으므로, 이러한 자신감은 더욱 확고해져서 조선을 최대한 가뿐하게 밟아주겠다는 호승심에 취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가끔 돌아다니는 '진도 우회 떡밥'도 여기에서 나온다. 어째서 일본군이 진도군 남쪽으로 우회하지 않고 명량이란 좁은 통로로 왜 굳이 들어왔냐는 떡밥인데, 당시 일본 수군의 입장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판옥선이 일본의 배보다 스팩이 우월하다지만 13척과 300척은 20배도 넘는 압도적인 물량차가 있으니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그 13척에 타고 있는 병사들도 전부 직전 전투에서 지근지근 밟아준 상대들이다. 이 쉬워보이는 먹잇감을 두고, 그동안 처참하게 당해왔던 이순신이 가장 약해졌을 때 복수할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다른 길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수군으로선 울돌목에서의 전면전을 피하려 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날짜는 양력으로 10월 말, 곧 겨울로 향하고 있었고 한양을 노리던 육군은 직산 전투에서 격퇴당해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수군이 더 이상 지체하면 육군은 보급 문제로 인해 한양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서해로 진입해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 일본 수군의 가장 큰 목표였다. 아무리 상대가 그 무서웠던 이순신이라지만 고작 판옥선 13척을 정면으로 싸울 자신이 없어서 진도를 돌아 가거나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습 공격을 가해서 전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방법을 써가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도 외해로 돌아가는 길 또한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진도 외해의 바닷길인 장죽수도, 맹골수도 역시 울돌목 만큼이나 험한 물목이고 곳곳에 암초와 섬들이 널려 있다.[78] 게다가 이 섬들 사이에서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조선 수군의 기습도 고려해야 했다. 이순신 함대를 놔두고 섣불리 북상했다가는 후방 기습을 당해 단체로 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당장 서해에는 왜군이 점령한 항구나 보급 기점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명량수도에 보기좋게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정면으로 밀고 나가서 최단 거리인 울돌목을 빠르게 돌파하는 정공법이 당시 일본 수군에게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방심해서 무지성 돌격을 한 것도 아니고 남은 적선이 13척인 걸 알아낸 뒤 일부러 13척만 정찰을 보내 사기도 꺾고, 해류가 거친 명량에서 싸울 것 같자 그런 해류에 익숙한 구루시마를 선봉으로 내세우는 등 전략 준비도 철저히 했다. 상대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략 병기가 아닌 이상 승리가 보장된 셈이었다.

한 마디로 일본군 최고의 불운은 그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전략 병기가 하필 자신들의 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7.5.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편집]


사실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무엇도 아닌 지형에 있다. 울돌목은 폭이 약 300 m 정도로 매우 좁아서 이순신 휘하의 십수척의 판옥선으로도 일자진을 펼치면 완전히 틀어막는 게 가능할 정도다. 이런 식으로 틀어막아서 병력 수의 불리함을 가능한 줄이고 들어오는 왜선을 오는 족족 박살내자는 게 기본 전략이었다. 유사한 예시로 좁은 협곡에서 300명의 병사로 페르시아 대군을 막아낸 테르모필레 전투가 있다.

물론 이 지역의 조류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기존의 판옥선의 선회 능력을 사용해서 한번 쏘고 반대면에서 한번 더 쏘는 식으로 포의 발포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강한 화망을 형성하는 전략은 쉽지 않았으며, 휘하 장수들이 뒤로 물러나서 왜선이 좁은 울돌목을 돌파해버리면 가뜩이나 조류의 흐름이 불리한 상황에서 함대의 진형을 회복할 수 없고 그대로 각개격파당해서 무너지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순신은 이 점을 잘 알고 근접전의 위험을 감수하고 제자리에서 왜선을 맞아서 싸운 듯하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는 휘하 장수들의 행동을 막지는 못했고, 간신히 초요기를 세워서 불러들이는 식으로 휘하 전선들을 불러와 제자리에서 진형을 유지하게 해서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류가 바뀌면서, 조선 수군의 공세로 인해 과하게 밀집되어있던 왜선들이 밀려나게 된다.

결국 명량 대첩의 기적을 일으킨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일본군의 방심이나 혼란도 아니고 기적도 아닌 지형적인 이점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진형을 필사적으로 유지하면서 유리한 때를 기다린 이순신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8. 명량해전 관련 다른 의견들[편집]



8.1. 명량 철쇄설[편집]


명량 철쇄설이란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 쇠사슬(철쇄)를 깔아서, 울돌목의 급류에 밀려 쇠사슬에 걸린 일본의 전선들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1971년에 상영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 이미 철쇄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1999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방송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 2005년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철쇄...도 아닌 밧줄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조류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끈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이래로 철쇄로 적선을 부수었다는 설 자체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대신 철쇄를 전투에 보조하는 형태로 사용하여 전투의 효율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들도 아래의 이유등으로 많이 반박되면서, 2010년대 후반부 이후로는 역사 연구 반영이 늦은 일반 대중매체에서도 철쇄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 기록된 근거는?
    • 김억추의 행적을 기록한 호남절의록(1799)과 현무공실기(1914)에 '충무공께서 공에게 철쇄를 설치하게 하셨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 철쇄를 설치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할 실무자는 전라 우수사인 김억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호남절의록과 현무공실기의 과장된 묘사[79]와 함께 김억추의 이런 중요한 공적을 이순신이 기록하지 않은 점에서 의문스럽다. 오히려 김억추는 명량 해전 당시 가장 후방에서 전황을 관망하며 각을 재고 있었다고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친히 적어주셨다. 무엇보다 현무공실기는 1900년 물건으로 후손들이 쓴 행장류에다가 당대에서 한참 뒤에 쓰인 것이므로 신빙성이 낮다.
  •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으므로 적어도 1795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해남현지'를 보면 '공이 철쇄로 물속을 가로질러 막았는데, 양변 바위 위에 철삭을 박은 자국이 지금도 완연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충무공께서 철삭을 쳐서 왜군을 죽인 곳(李忠武設索殺倭處)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일단 해남 현지 자체는 당시 국가 관청이 남긴 실사 확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전히 구전에 의거하였고, 철쇄가 아니라 철삭(鐵索)이라 하고 있어 철쇄설을 방증하는 다른 자료들과 상충된다. 또한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어디에도 명량 해전의 철쇄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 영조 27년(1751)에 편찬된 택리지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뻗쳐놓고 기다리니 왜선 5백 척이 걸리고 물살에 휩쓸려 모두 가라앉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미 해전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의 사료인 것과, 왜선이 5백 척이라는 표현 등 정확도가 떨어져서 그대로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만들었다는 근거는?
    • 이전부터 조선 수군이 철쇄를 설치하여 항구를 봉쇄했던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중종 실록 5년 5월 24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는데,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밑으로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려 넘어오지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며, 중간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합치되는 나무들이 진해와 통영 등지에서 발굴되고는 하며,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에 앞서 철쇄 공사를 한 기록들을 남겼다.[80] 이러한 노하우가 명량 해전의 철쇄 제작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구를 봉쇄하는 철쇄와 명량을 가로지르는 철쇄는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섬 사이를 가로막아 배의 진입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단순한 방어시설이었고, 그것도 전함이 정박할 소포 인근에 간략히 설치된 임시 구조물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명량에 설치되어야 할 철쇄는 시속 14 km에 달하는 급류에 말려든 배 수십 척 배을 저지해야 한다. 이외에도 오만가지 문제가 있어 현대 사학계에서는 설득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설이다.(다만 당시 철이 부족하다는 것은 동철(구리)이고, 철은 풍부했다)
해남 우수영관광지의 기념관에서는 철쇄설을 소개하고 있다. 다만 사료라고 현무공실기를 제시한 것도 아니고 우수영 입구에 방어용 쇠사슬을 걸었다는 기사를 가져다가 명량해전 철쇄 사용의 근거라고 보여준다.

8.2. 거북선의 등장?[편집]


철쇄설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가끔 등장하는 떡밥으로, 명량 대첩 당시 거북선이 있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거북선은 일반인들에게는 조선 수군의 결전병기 수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명량 대첩이라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거북선이 등장했다는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철쇄설과 마찬가지로 해전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거북선 자체가 판옥선을 보조하는 함선으로 중요성이 낮은데다[81], 이전부터 건조한 거북선들은 모두 칠천량 해전 당시 손실하였고, 명량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및 실록의 보고서 등에는 거북선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거북선이 있었다고 해도 문제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상 거북선은 원거리 지원 세력이 든든하게 뒷받치는 가정하에 맨 앞에서 날뛰는 돌격선 용도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20척도 안 되는 전 병력에서 거북선 전술을 사용하기란 무리였다. 게다가 이언량, 나대용 같은 뛰어난 귀선 돌격장이 없는 이상 거북선은 있다 해도 사용 불능이다. 단, 명량의 좁은 해협을 생각해보면, 거북선이 있었다면 대단히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키부네는 거북선을 제대로 공격할 수단이 전무했고, 거북선은 적들이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지 않는 한 적진을 휘저으면서 화포를 쏘고 충각도 가할 수 있는 위협적인 돌격선이었기 때문이다.

명량 대첩 당시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기록 중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내용은 이순신의 행적을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 행록'에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기록에선 회령포에서 이순신이 잔여 함대를 인수한 뒤, 장수들에게 전투선을 거북선 모양으로 꾸미도록 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선 실제로 판옥선 중 한두 척을 거북선으로 개조했다는 설과 해당 내용 자체가 후대에 가필[82]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외에 명량 대첩에 대한 일본의 기록 중엔 조선 수군의 전선이 모두 거북선이라서 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문헌 비교에서부터 전형적인 아군 추태 가리기 식의 적 전력 과대 평가라는 것을 입증할 근거가 충분하기에 신빙성이 없다. '대쥬신제국사'로 유명한 유사 역사학자 김산호는 '대제독 이순신'을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두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이 명량에서 사용한 판옥선은 일반 판옥선과 거북선의 중간 형태의 개량형이라는 주장을 하였으나, 근거는 전혀 없다.


8.3. 기타[편집]


명량 해전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83]에 의하면, 이순신이 왜군과 싸울 때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개발되는 면제배갑이 떠오르는 장면이긴 한데, 솜이불을 뱃전에 걸어봐야 어차피 조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은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84] 따라서 3층 상갑판에서 아래로 이불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만약 일본군의 입장에선 이불이 걸려있는 조선군의 배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고, 더욱이 현장 지휘관인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의구심을 품게 한다.[85]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박의 일종)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또 이순신의 어릴 적 일화가 떠오르는 장면. 즉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9. 미디어 창작물[편집]


임진왜란의 전투 중에서도 대단히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혈전이었으나 이 전투만을 소재로 한 창작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유명한 것은 영화 명량. 창작하는 사람들, 아니 이순신 본인이 난중일기에 '이건 천행(기적)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로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전투라서 오류도 많다. 그래서 역덕 사이에서 명량을 평가할 때 나오는 표현이 있다. 만약 명량 해전이 존재하지 않는 평행 세계에서, 명량 해전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 창작물이 만들어진다면 '개연성과 핍진성이 한참 부족한 메리 수식 창작물'로 혹평을 받을 것이란 표현.[86]

당장 명량 대첩 이후 이순신이 맨 먼저 한 일은 승리를 자축하는 것도, 재공격에 대비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흩어진 판옥선과 수군 병력을 다시 모으는 것이었다.


영화 "명량"은 영화를 만드는 당시에도 역사고증을 위해 부른 전문가들이 점점 고증과는 상관없이 한국판 300을 만드는 판에 질려서 도중하차한 만큼, 아직까지도 역사고증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쓴 소리를 듣는 중이다.

9.1. 1900년대[편집]


  • 1970년대 나온 김진규 주연, 감독의 성웅 이순신에서는 강강수월래로 적을 교란하고 철쇄로 엎어뜨리는 식으로 승리를 설명한다. 말 그대로 90도 롤링하는 왜선의 압박이 심한 작품.

  • 1980년대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48화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아예 시작 전에 내레이션으로 거북선이 없었다라고 시작한다. 백병전 대신에 포격전과 울돌목의 조류를 이용한 승리로 묘사하는데 유명한 "안위야. 네가 군령에 죽고 싶으냐"라는 대사가 나온다. 다만 <불멸의 이순신>의 그 찌질한 모습과는 달리 우렁찬 구령으로 답례를 하는 나름 박력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 드라마의 일본군 수장들이 다 그렇듯 자막 표기도 안 되어 있는 일본군 수장이 등장하는데, 임진년에 나왔던 일본군 수장과는 다른 인물인 만큼 구루시마 미치후사로 추정되며 초반에 "겁내지 마라! 조선 수군은 겨우 12척뿐이다." 라면서 자신있게 나섰다가 울돌목의 조류에 걸려 결국 당황하면서 갑자기 날아온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그냥 퇴장한다.[87] 다만 전투 초반에 조선군이 조총에 맞는 모습을 너무 많이 비췄기에 조선군의 사상자가 극히 적었던 이 전투의 통쾌함이 너무 희석된 면이 있다. 원균 명장설이 슬슬 물들어가고 있었음을 보이는 영상 자료로 칠 수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다.

  • 1992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선 도표와 파워 포인트 등 그 당시의 기술력을 총동원해서 설명했다. 컴퓨터 그래픽 지도까지 동원해서 이순신 함대와 왜군 함대의 그림까지 그려가며 상세히 묘사했다. 조선 수군은 왜군을 물살이 엄청나게 센 울돌목에 몰아넣었는데 왜군은 쪽수만 믿고 방심하다가 그 울돌목의 거센 물살에 문자 그대로 깡그리 씻겨 나갔다. 그렇게 이순신은 대승을 거두었다.


9.2. 2000년대 이후[편집]


  • 2001년에 출간된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역사 전쟁 소설 '격류'에서 명량 대첩의 전말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절판된 지 오래고, 대신 그 내용은 김경진, 안병도 공저의 '임진왜란'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명량 대첩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등장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묘사가 고증에 합치된다.





  • 2005년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5회와 96회에 나왔으며 96회 전체를 명량 대첩을 묘사하는 데 할애하였다. 다른 전투들은 한 회에 여럿 다루어지거나 조선 육군이나 조선 조정 등 전혀 관계없는 장면들과 함께 나온 데 비해 한 회가 온전히 전투 묘사에 바쳐진 것은 96회가 유일하다.



KBS DRAMA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올린 주요 장면.

다만 고증 오류가 여럿 되는데, 먼저 당시 조선 함대는 이순신의 좌선을 제외하면 모두 도망갈 생각에 전전긍긍했지만 본작에서는 (상단 표 지휘관 란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명량 대첩에 참가한 바도 없는) 권준, 이영남, 우치적 등이 이순신의 행동에 동조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되었고,[88] 철쇄설을 답습한 한편 이순신이 직접 백병전을, 그것도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문구가 새겨진 칼을 들고 벌였다. 이 검은 실제 길이가 2m에 가까운 검인데[89] 아무리 소품으로 경량화를 시켜도 검술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가 다루기엔 힘든 까닭에 실제 검보다 대폭 축소된 검을 소품으로 사용하였다. 이순신은 수군 최고지휘관이었던 만큼 직접 적과 검으로 교전한 기록이 없지만 작품 내에서는 검으로 적장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포함하여 33명의 적을 베는걸로 표현되었다. 또한 안위가 겁에 잔뜩 질린 모습은 그럭저럭 잘 고증되었지만, 문제는 그 부분만 잘 되었다는 것.[90] 그 밖에 권준은 해전 당시 수도를 지키는 것이 주 임무인 충청 수사였으므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91] 그리고 김억추의 판옥선이 진격한다. 실제 김억추는 물살이 바뀌었어도 끝까지 진격하지 않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참전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92] 무엇보다 저 문제투성이 철쇄설로도 모자라 무려 밧줄로 해협을 봉쇄하는 도저히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문제가 나온다.

이렇듯 문제가 적지 않기는 하지만, 이순신 이하 조선 수군의 처절한 전투 신은 상당히 훌륭하다. 그 이전까진 조선수군은 백병전에서 왜군보다 약하다는 언급이 자주 나왔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창이나 칼을 놓친 상황에서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조선낫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적들을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 반복해서 찔러 죽이고 얼굴에 피가 튀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잔인함보다는 처절함이 느껴진다. 특히 일본 무사에게 어깨를 한 번 베여 쓰러지고 다시 칼 맞아 죽기 직전 성한 팔로 무사의 발을 잡아 넘어트린 다음 낫을 뽑아들어 악 받친 비명을 지르며 무사를 마구 찔러 죽이는 조선 수군 졸병의 모습은 극에 달한 처절함을 잘 연출하고 있는데, 졸병이니만큼 단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들만큼 훌륭한 장면을 연출했다.[93] 또한 초반 다른 전선들이 물러나 있는 동안 혼자 한참동안 전투를 치르고 있는 대장선의 묘사라던가 그 휘하 병졸들은 다른 장수들과 다르게 적선의 숫자에 당황하거나 겁을 먹지 않고 그동안 훈련한 대로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전투를 수행하는 모습도 잘 그려진다. 대장선버프 애초에 이순신의 대장선에 탈 정도면 이미 정예중의 최정예

또한 처절함 이후 시작되는 조선 수군의 역관광 세리머니에서는 절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일본 수군 무장들이 그와 대조적으로 집단 멘붕하는 모습도 감상 포인트. 특히나 와키자카(김명수 분)가 주저앉은 채 "어찌, 어찌 이~ 이런... 일이..." 라며 한탄하는 것과 "퇴각해..... 퇴각↘하란↗말이야아아아아아!!!" 라며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 도도(최동준 분)가 나자빠진 채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 하아하하핳-!!" 하며 절규하는 장면[94] 등은 당시 일본군이 맛봤을 절망을 조금이나마 간접 체험하게 해 준다.[95]

와키자카(김명수 분)가 고양이를. 그것도 터키시 앙고라를 던지면서 '미시(未時: 13시~15시)야, 미시...!!!' 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함선에 고양이를 데리고 탄 것은 눈의 동공을 보면 시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96] 그러니까 이 장면은 단 한 척의 판옥선도 격파하지 못한 상태서 일본 수군에게 물살이 유리한 시각마저 끝났다고 한탄하면서 그 분노를 고양이한테 화풀이하는 장면인 것. 한편 조선군은 앙부일구를 보며 시각을 확인하고 신기전으로 시각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며, 자막으로도 오후 1시라고 나온다.

그 밖에 이순신이 임지로 향하는데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됐어도 전선은커녕 소수의 부하들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통상이 돌아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따라나서는 모습이나. 출전 직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들에게 대장선이 선봉이 될 것을 선언하며 전투 의지를 북돋는 장면도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위엄과 휘하 병사들의 충성심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명장면이다. 연설 직후, 병졸들도 어쩔 줄 몰라 하고 그걸 보던 배설이 실실 비웃는데 다른 병사들 사이에 있던, 하반신이 불구가 된 정대만이 창이나 칼도 아닌 돌을 내리찍으며 이순신을 따라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자 다른 병사들과 하급 군관들도 사기가 올라 창을 찍으며 함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꼭 한 번 볼만할 명장면. 해당 영상

명량 해전.

이것은 단 13척의 배

적선 333척을 물리친 실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이 날 분멸한 적선의 수는 모두 31척,

분멸, 격침되진 않았으나, 전투선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92척에 달했으며,

물리친 적의 수는 모두 18466명에 이른다.

당시 일본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패전으로 인해

한산에서 여수까지 제해권을 확대하고,

수륙병진(水陸竝進)을 통한 도성 장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명량 대첩은 바로 그 일본군의 전략을 모조리 무산시킨 일전(一戰)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 이름없는 군사들과 백성들. 그들의 강인한 투지와 저력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또한 이후, 정유년에서 무술년으로 이어질 수군 재건과,

23전 23승 이순신의 빛나는 전승 신화.

그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

불멸의 이순신 명량 해전 편 내레이션.


  • 2005년 영화 '천군'은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4년 전에 대해서 다룬 영화인데, 에필로그엔 이순신 장군이 성공적으로 급제한 뒤 명량 대첩 직전 상황을 비춰준다. 4년 전 한심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순신이 역사 속의 멋진 모습으로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칼을 뽑는 간지나는 장면이 연출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나오는 음악은 그야말로 장관.

  •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회랑의 전투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이 명량 대첩과 다소 흡사하다는 주장이 있다. 조류와 기타 장애물로 인해 함대 기동이 어려운 전장에서, 해당 함대가 진영의 마지막 전력이라는 점 등이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전투들은 명량 대첩과는 달리 방어 측에게 별다른 전술적 우위[97]가 없는 상황에서 전술적 우위가 아닌 전략적 행동을 통해 벌어졌으며, 명량의 경우와는 반대로 패전한 점 등이 너무 다르다. 이는 오히려 테르모필레 전투를 참고했다고 보아야 할 듯.

  • 2014년 7월 30일 명량 대첩을 다룬 영화 명량이 개봉하였다. 기존 국내 박스 오피스 기록을 아주 압도적으로 갈아치운 영화. 감독은 최종병기 활김한민이 맡았고, 최민식이 이순신, 류승룡이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연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다만 이것도 고증 오류가 꽤 있는데 이는 명량/역사 탐구 문서 참조.

  • 징비록에서는 49회에서 짧게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었다. 애초 명량 대첩을 다룰 의도 자체가 없던 작품인 만큼 명량 대첩 대신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 비중을 뒀으나 불멸의 이순신 영상을 짜깁기해서 내보내거나 거북선이 나오는 등 기대에 못미치는 연출을 보여준다.

  •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 하하송민호가 부른 곡 <쏘아>는 바로 이순신과 명량 대첩을 주제로 만들어진 곡이다. 당시 무대 위에 올라선 사람도 명량 대첩 직전 판옥선 수를 따라 12명이었으며, 가사에 이순신이 해전 직전에 올린 장계의 구절인 상유십이 미신불사가 숨어 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2017년 무렵의 시국빗대는 내용도 들어 있다. 마침 이게 방영된 2017년 역시 명량 대첩이 벌어진 1597년과 마찬가지로 간지정유년이라는 것도 소소한 포인트.

  • 소설 못다 부른 명량의 노래에서 김억추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명량 해전이 묘사된다.

10. 기타[편집]


  • 2005년부터 (재)명량대첩기념사업회, 전남 진도-해남군은 명량 대첩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명량대첩축제'를 매년 개최 중이다. 하지만 이들 지역의 명량해전 관련 컨텐츠의 질은 그야말로 한심한 수준.... 해남 우수영국민관광지의 명량대첩기념관에서는 철쇄설을 버젓이 전시하고 있고, 그나마도 근거라고 제시하는게 현무공실기도 아니고 수영 입구에 말뚝과 쇠사슬을 설치해놨다는 것인데 이건 명량해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도군도 진도타워 3D영상관에서 명량해전 영상을 보여주는데, 영상 자체는 그럭저럭 봐줄만한데 안내원들이 이 전투로 300척(!)이 격침되었다는 소리를 당당하게 늘어놓는다(...)

파일:attachment/GunofMyeongryang.jpg
  • 2012년 11월 29일에 울돌목 부근 해저에서 명량 대첩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소소 승자 총통 3점과 대연자 탄환이 발굴되었다. 소소 승자 총통은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길이 57.8㎝에 무게 2㎏이다. 3점에 모두 "만력 무자년 4월에 전라 좌수영에서 만든 소소 승자 총통. 무게는 세 근 아홉 냥. 장인 윤덕영."이라는 동일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만력 무자년은 1588년으로 명량 대첩에서 사용되었다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첫 발견은 도굴꾼이 했지만, 잘했다 현재는 국립 해양 연구소가 후속 발굴 중이라 기대해 볼 만하다.

  • 해전 직후 떠 밀려온 일본군의 시신을 100여 구를 진도 주민들이 거두어 묘지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곳을 왜군에게 덕을 베푼 산이라하여 왜덕산이라고 한다. 진도군 고군면에 있는 이 왜덕산은 현재 100여 기의 무덤 중 반절이 소실되어 50여 기 정도가 남아있다고한다.[98] 2006년 8월 15일에 명량 해전에 일본군으로 참전한 후손들이 왜덕산에 시신을 거둔 것에 감사를 표했으며 지금까지 진도의 주민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다만 원래 자리에 건물(노인정)이 들어선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직선 거리로 1km 내에 있던 학동리에 옮겨 세우다가 61년이 지난 2011년에 와서야 원래 자리(예전 자리 발굴 관련 기사)로 이전하였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이후에는 1964년 학동리에 건립했던 '충무사(忠武祠)'도 명량대첩비 인근으로 확장 이전했다.(관련 기사)
명량대첩비의 전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민서(1633년(인조 11) ~ 1688년(숙종 14))가 썼으며, 정조 때인 1795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 명량 대첩이 있던 정유년 9월 16일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모든 일기 중에서 가장 길고 상세하게 쓴 일기다. 아마 이순신 장군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하루가 평생 가장 긴박하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전술을 구사해 이겼는지 대신에 '단지 천운이었다'고만 기록해 놓아서 현재까지도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 명량 대첩에서의 패배로 제대로 빡친 왜군은 앙갚음을 하기 위해 이순신의 생가가 있는 아산을 습격했다. 이때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은 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를 상당히 애통해했다.[99]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도 임진왜란이 구현되어 있어 전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Europa Universalis III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있었던 수전 중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고 13척 대 133척 설을 채용하고 있으며,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13척 대 333척 설을 채용하고 있다. 당연히 플레이어가 조종하면 역사대로의 결과는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다.[100]

  • 이로부터 345년, 347년 후인 1942년 6월 7일, 1944년 9월 16일, 태평양에서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 사마르 해전에서 일본군은 또 다시 참패했다. 명량 대첩의 전투 자체는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데, 불리한 상황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둬 판도를 뒤집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미드웨이의 경우는 당시 항공모함으로 주축이 된 그 당시 해전 교리가 항모 1대가 1개 함대와 필적해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이 4대, 미국은 3대가 있었고 그중 요크타운 1대가 격침 당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주력 항모 4대를 모두 격파하여 일본의 태평양에서의 해상 항공 자산을 상실했고, 미국은 다시 해군을 재건할 시간을 벌었다. 서로 간의 규모와 전황은 미드웨이, 총 함선 무게를 비교해보자면 사마르 해전이 비슷하다. 미국의 태피3 함대를 모두 합쳐봤자 상대의 기함인 야마토 전함 1척과 같았기 때문이다.[101]

  • 중국의 전함 모에화 게임 벽람항로의 국내 1서버 명이 이 해전인 명량이다.


  • 영어판 위키피디아나, 여러 글에 구루지마가 임진왜란 중 전사한 유일한 다이묘라고 나오는데 애매하다. 상충되는 기록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선에서 매 사냥 도중 조선군의 습격으로 전사했다고 알려진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있다.[102]


  • 어느 유튜브 역사 계정에서 영화 명량의 장면들과 함께 명량 해전을 밈으로 정리한 영상을 만들었다. 제작자가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를 플레이하던 역덕후기도 했고, Extra Credits에서 이순신의 생애를 다루면서 이순신의 인지도가 늘어난 것 때문인 듯하다.


11. 관련 단체[편집]


  • 명량대첩기념사업회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07 06:16:16에 나무위키 명량 해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7 22:50:54에 나무위키 명량 해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위 그림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당대에 그려진 그림은 확실히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명량수도의 폭은 484m로, 절대 판옥선 한 척으로 틀어막을 정도로 좁지 않다. 물론 정유재란 당시 암초 등의 이유로 폭이 더 좁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폭이 최소 3백여 미터만 되더라도 판옥선은 물론 일본 수군의 안택선 여러 척도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다. 명량 해협이 망망 대해보다야 좁음은 당연하지만, 저 그림은 그런 지형적 특성을 심히 과장했다. 실제로는 133척이 모두 전진하지 않고 아군끼리 진로가 꼬이는 것을 막기 위해 축차투입의 형태로 1진, 2진, 3진씩 거리를 두어 차례대로 조선수군에게로 진격했고, 조선수군이 이를 족족 격퇴했을 것이다. 위 그림에서 근대 일본에서 peninsula라는 뜻으로 만든 반도(半島)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화원반도(花原半島)라는 지명을 한자로 적었다. 반도라는 일본발 한자어가 들어온 이후에 그림이 그려졌다는 뜻이니, 아무리 일러도 일제 시대쯤에 그려졌을 것이다. 게다가 가로로 글자를 쓸 때에도 현대 글 쓰기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적었으니 더욱 확실하다.[2] 비전투 인원 및 사후선 포함 시 약 2200여 명 추정.[3] 기록상 최소 330~최대 500여 척이나 울돌목에 진입한 전선은 130여 척이다. 전황으로 미루어보아 후방의 함대는 울돌목에 진입하지 못하는 대형전선 아타케부네가 주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설명은 후술 참조.[4] 안위의 전선에서 익사한 8명을 포함한 수치.[5] 사망 및 부상자 수는 난중일기에 근거한 수치이나,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좌선만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6] 왜군의 인적 피해와 관련한 교전 참가자들의 증언이 전체 병력에 대한 것인지, 자신이 목격한 것만 말한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상당한 피해가 있었음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7] 승전 이후 조선 수군은 중과부적으로 다음 전투를 위해 일시적으로 고군산도로 후퇴한 뒤, 군세를 정비하고 다시 남해로 내려와 남해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한다.[8] 사실 전황을 보면 알겠지만 어지간한 먼치킨물 소설에서나 볼법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라....소설도 저리 쓰면 재미없다고 할 정도인걸 고려하면 현실은 소설을 능가한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전투라고 볼 수 있다.[9] 미군은 진주만 공습,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10] 현대의 군 체계로 따지면 해임되었던 해군 대장인 해군참모총장이 복직하는데 계급은 대장이 아닌 중장으로 복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1] 사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을 벌일 예정이 없었다. 원균이 함대를 띄웠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원균이 어떤 놈인지 잘 모르던 왜군은 그 규모를 알아본 후 이전에 없었던 규모라는 것을 확인한 후 '드디어 우리가 죽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총동원해 방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 조선 수군의 실태는 참담하기 그지없었고, 다르게 말하자면 원균이 얼마나 조선 수군을 말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12] 전술했듯이 이순신을 복직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권율이 찾아온 것이다. 즉 조선 내에서 이미 이순신을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13]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14] 명나라 때 관리. 성품이 곧아 남의 모함에 빠져 귀양 갔다가 풀려나 복직되었음.[15] 더군다나 이순신은 모친상으로 인해 3년상 중이었다. 양반의 3년상 중에는 관직을 제수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물론 조선왕조에서는 여러 임금들이 그런 관례를 무시하고 총애하는 신하에게 막 관직을 제수하기는 했지만 3년상을 이유로 신하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럴 경우에는 딱히 관직을 강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모친이 사망한 것도 반은 선조 때문이다 보니 이순신이 3년상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함은 충분히 가능했기에 조정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이 정도는 최소한도 안 되는 상황이다. 당장 이순신의 자당 본관과 백의종군하며 지낸 지명을 생각해 보자.[16] 윤두수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것이 싫어서 칠천량 해전 직후에 각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김경진이 퍼트린 낭설일 따름이다. 실록에서 해당 기사를 전부 읽어보면 전혀 그런 맥락이 아니다. 왕도, 신하들도 수군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유효한 방어책을 논의하다 나온 의견 중 하나였을 뿐이다.[17] 한반도는 호남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토가 산지였으므로 도로공사를 하려면 큰 인력이 필요했으며 예부터 한반도를 침략한 외적은 주로 북방의 유목민족이었으므로 도로를 개설하는 데 대한 리스크도 높아 조선은 도로 건설에 열을 올리지 않고 수로를 주로 이용했다. 교통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2010년대 이후로도, 만항재로 대표되는 강원도나 경북 지역 일부는 산지에 터널을 뚫지 않아서 그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야 하고 당연히 그만큼 교통사고도 많이 난다.[18] 원문 상에는 도적 적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19] 장졸이라고 하지만 패잔병과 노병이 대부분이었다.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따르던 정예 수군들은 이순신이 재부임했을 당시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20] 배설의 행동을 봤을 때 PTSD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으며, 배설의 이후 수상한 행적과 연관하여 이때부터 배설이 다른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21]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만호나 하면 딱일 인간이 우수사라는 과분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김응남과의 연줄 때문이다"라고 깠다.[22] 특히 이순신은 만성 위염을 가지고 있었다.[23] 이때의 교전을 어란포 해전이라고 부르는데, 백의종군 후 이순신의 첫 번째 승전이었다.[24] 배설은 결국 선조 32년(1599)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별다른 말 없이 한 줄만 쓰여져 있어서 평소 이순신은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데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 전부터 배설에 대해 이순신이 안 좋게 봤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명량 해전 직전 거의 유일한 전력인 전선을 인계하는 데에도 미적거려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가 괘씸하다고 적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이 묘사가 나온다.[25]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안택선)와 크기가 비슷했는데, 일본 수군은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대한 배라고 인식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26] 보통 전투직전에 배에 물을 뿌려 혹시 있을지 모르는 화공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솜이불에 물을 먹여 걸어둔 것도 화공 대비책일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굳이 배에 물을 뿌리는게 아니라 솜이불을 두른걸 고려하면 현재 가용 가능한 전선 전부를 가지고 온 것이기에 혹여나 조총사격 등으로 배가 파손될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기 위해 내구도를 보강하려는 목적을 겸했을 가능성이 높다. 육상전으로 치자면 탱크에 임시로 장갑을 보강하는 것과 비슷한 목적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셈. 다만 이 기록 자체가 사실확인이 힘든 면이 있어서 100% 신뢰해선 안되는 기록이다. 그런데 대장선 혼자서 장시간 전투를 치뤘다는것 또한 사실이니 처음부터 무쌍을 고려한 조치였을지도...[27]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와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28] 실록에는 정응두로 오기.[29] 실록에는 영등포 만호로 오기.[30] 일부 도서에서는 아예 침몰한 배가 133척이라고 잘못 나온다.[좌선] A B 기함, 대장선을 이르는 조선 시대 군사 용어[주석] 수연이라는 지명은 다른 지도에 보이지 않으며 수연이라는 것은 웅천의 옆 땅을 말하는 것이라. 정한위략, 나베시마 가기(家記)를 인용하였다.[31] 갓 부임한 김억추야 그렇다 치더라도 안위/송여종/유형 등 모두가 이순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장수들이다. 그런 자들마저 두려움에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32] 이상한 것은 김억추는 이후 전황이 반전되어 조선 수군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어 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버텼다는 것이다. 이후 김억추가 육군으로 보직 변경을 신청하여 옮겨간 걸 보면 해전 지휘에 문외한이라서 소극적으로 굴다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쫄아서 못 움직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량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배는 칠천량 패전 후 수습한 12척에 김억추가 가져온 배 1척을 합하여 군선 13척이라고 본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김억추가 가져온 배는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므로 군선이라고 보기 애매했거나 병장기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준비가 된 판옥선은 모두 전투에 투입됐기 때문.[33] 중군장은 좌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는다.[34] 오후가 되어서야 조류가 바뀌어 조선 수군에게 유리해졌다.[35] 중군에게 명령을 하달할 때 거는 깃발. 난중일기에서 초요기와 함께 걸었다고 언급된다.[36] 조선 시대 군영에서 대장이 장수를 부를 때 사용되던 깃발로,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다. #[37] 이때 주저하던 장수들 중 수군에 남아 훗날 또 다시 비슷한 짓을 한 장수는 한 명도 없었다. 즉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의미 없는 죽음을 당할 것이 눈에 선해 여기서 싸우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말이다. 이들은 이미 원균 밑에서 하극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독자적인 판단으로 수군의 절반이나마 빼낸 적도 있었다.[38] 어차피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달아나도 조선이 일본에게 장악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명예롭게 적과 싸우다가 죽고 싶은지 치욕스럽게 군법에 따라 죽고 싶은지 묻는 것이다.[39] 당시 안위는 수군에 편제되지도 않은 일개 고을 수령에 지나지 않았기에 이순신 입장에서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안위는 가장 먼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장에 뛰어들었고, 그 공으로 종5품 현령에서 이순신에게 추천을 받아 정3품 전라우수사(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직속 부하)로 파격 승진했다. 김응함은 중군장의 위치로 합류가 더 늦었으므로 원래는 처벌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순신은 도주를 하지는 않았고 의미 없는 죽음이 뻔함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던 명량 해전의 특성을 감안하여 군법을 엄히 적용함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미조항 첨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는 것 외에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았다. 물론 그 뒤 전쟁 말까지 또 다시 이순신 앞에서 머뭇거리는 장수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에서도 자신의 전공을 내세우지 않는 이순신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순신 본인의 힘이 가장 컸으나 이순신은 그 전과를 안위에게 돌려 그가 파격 승진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거꾸로 안위가 제일 늦게 나왔다는 어이없는 왜곡을 가했다.[40]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 해전을 말한다.[41]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가리킨다는 것이 통설인데 마찬가지로 수군 출신으로 마타시로(又四郎)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역시 명량 해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간 마사카게(菅正陰)라는 설도 존재한다.[42] 조선 수군의 무상(舞上)이자 사부(활 쏘는 병사). 한문으로 쓸 때는 金石孫이지만 읽을 때는 '김돌손'으로 읽는다.[43]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주로 난중잡록에 의거한 것이고, 133척 중에서 10척만이 온전히 살아 돌아갔다면 사실상 출전한 일본 주력함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조선수군이 굳이 고군산도까지 후퇴할 이유가 없으며, 일본함대가 전라도 남서부 해안가를 유린할 상황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난중잡록 자체는 기록유산으로써 인정받지만,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쓰는 등 불확실한 부분도 많다. 그리고 명량해전 직후 일본 함대는 벽파진에서 멀뚱거렸으므로 이순신 장군이 전과를 작성할 시간은 있었다고 본다.[44] 아니면 선발대 133척에서 피해 없이 본대에 재합류한 병력이 10여 척이라는 내용을 두루뭉술하게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45] <고산공실록>과 같으므로 매우 신뢰성 높은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46]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무가관위가 이즈모노카미(出雲守)이다. 간양록에서 '내도수'라고 한 것이 이와 관련이 있다.[47] 주사, 즉 수군을 말한다. 이 수군이 격군을 포함했는지, 아니면 갑판의 아시가루와 무사 등 전투원만 일컫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선조실록에 실린, 일본 수군에게 잡혀 명량 해전에 참전한 조선인 포로가 '울돌목에서 통제사와 접전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말한 증언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48] 일본에서는 봉건 체제에서 다이묘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49] 현대의 시각으로 아침 9시.[50] 도도 다카토라. 그의 무가관위가 이즈미노카미(和泉守)이다.[51] 근대까지의 해상전에서는 시야 확보와 가장 좋은 설계를 적용한 기함이 지닌 우수한 전투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함이 함대 대열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전국 시대 일본 수군만은 기함이 최후방에 배치되었다.[52] 위에 나온 전멸 항목에서는 지휘관과 부관이 피해를 입으면 병력 손실이 10%만 되어도 전멸로 칠 수 있다고 설명하는데, 133 가운데 31이라는 건 20%가 넘는 수치이다.(!!!) [53] 이 사람은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에게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며 "배에다 괘홍(붉은 비단을 내걸어 축하한다는 뜻)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한다." 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또 1598년에는 선조에게 이순신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압박할 정도로 이순신을 좋아하던 장수이다.[54] 양호가 선조와 만나자 선조는 '경리님 덕분에 나라를 구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조촐하지만 받아주십시오.'라며 큰 선물을 준비했는데, 정작 왜군들과 싸워 공을 세운 것은 조선 관군들과 의병들인지라 아무리 외국에서 온 명나라 양호라도 함부로 받을 수 없어 거절했으며, 양호가 이순신의 명량 해전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선조가 "그건 장수들이 마땅히 해야하는 일인데 왜 그런 상을 내렸습니까?"라고 따지자 양호가 반박한 것이다. 명량 해전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라 명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될 정도인데, 양호 입장에서는 막상 그 이순신의 상관인 왕이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니까 화가 난 것이다. 명군의 입장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어 수송로가 확보되고 조선이 패배하면 곧바로 자신들에게 칼날이 들어오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조선을 방파제로 일본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순신이 오히려 13척으로 수백 척이나 되는 대규모 함선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것도 모자라 왜군 지휘관 여러 명을 전사시켰으니, 이순신은 기적을 일으켜 수많은 명나라 장병들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 된다. 소설로 써도 작위적이라 불려도 할 말 없을 정도의 전과를 알리는 소문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선조가 이순신의 전과를 폄하하니 명군은 "당신은 말하는 것이 마치 '명군도 거기 있었으면 더 크게 이길 수 있었는데 명군이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해서 결과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됐다'라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네?" 하고 발끈한 것이다.[55] 노량해전을 제외한 이순신의 장계는 기록에 남아있는데 유일하게 명량해전의 장계만이 전해지지 않는다. 선조가 장계를 받아본 것은 확실한데 전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선조가 읽고 파기했다는 설도 있다.[56] 육군 소속으로 군량을 담당하는 자였으나 집으로 복귀 후 뗏목을 타고 피란가던 중 일본군에게 잡힌다[57]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58] 군인 수천 수만 명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과 물자는 장난 아니게 많으므로, 예상 소비량을 계산한 뒤 소비 계획을 세워서 최대한 비축한 뒤 전시에 들어가야 한다. 보급을 제대로 안 하면? 그 많은 병력들이 빈손이 되거나 밥을 굶는다.[59]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하여 아군 물량이 많은 상태에서 적을 격파하는게 당연히 유리하므로, 각지에 있는 군대들이 합류하기까지도 또 시간이 걸린다. 전시에는 더더욱 전투에 대비해 편제, 편성을 손보고 결원은 보충 요청을 해서 병력이 도착할때까지 기다려야 하고.[60] 애초에 조선은 육로 정비를 등한시하고 해로 수송에 몰빵한 국가라 육상에선 대군을 움직일만한 보급을 원활히 하는게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이었다.[61] 왜군은 이순신의 기함 판옥선 한 척조차도 격파하지도 못 하고 쩔쩔매기만 했는데, 칠천량 이후로 흩어져 숨어있던 일부 해군과 백성들이 합류해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 다시 재건되었다. 싸우러 나섰다간 격파는커녕 도리어 자신들이 격파당하게 생긴 상황이 된 것이다.[62] 우스갯소리로 조선군 육군 전체와 싸우기보다 이순신의 함대와 싸우기를 더 무서워했으리란 말이 있는데, 실제로도 조선 수군은 왜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예 헛 말은 아닐 것이다.[63] 이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비싼 값에 판매되는 물품이었다. 기록상 2개월 이내에 수만 석 곡식이면 엄청난 가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64] 1593년 한양을 내주고 남하할 때, 그들은 처음 투입 병력의 50%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65] 미 해군 역시 일 해군 항모를 격침시킨 후 전장에서 전함으로 구성된 일 해군 본대의 추격을 피해 후퇴했기 때문이다.[66] 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인근에 수도권 전철 1호선 직산역도 있다.[67] 보통은 의병이 함께 편제되었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수 있는 부산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곳에있는 경주에서조차 임진왜란 발발 4개월뒤에 관군과 의병에 의한 1차,2차 경주 전투가 이루어졌을 정도였다.[68] 더군다나 경로 중간을 노리고 있을 조명연합군을 일일이 박살내면서 수송해야 했다[69] 이는 현대도 마찬가지인데 육상 물류 운송수단이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발달한 현대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물류 물량이라면 같은 양을 옮기는 데에는 수운을 활용하는 게 압도적으로 싸다.[70] 전근대 금강 수운은 부강까지 올라왔으며 1927년 일제의 자료를 보면 공주 100석, 대평리·부강 60석까지 운항이 가능했다고 한다. 토사의 퇴적이 덜했던 16세기 말엽이라면 이보다 항행조건이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71] 간신히 물길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함선 수량인 12척[72] 그나마도 충무공이 직접 지휘하는 대장선 말곤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는 상태.[73] 일본의 배는 깊은 바다에서 속도를 내기 위해 뱃바닥이 뾰족한 세형선이라 물의 저항을 덜 받으므로, 얕은 바다를 다니기 위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제작된 판옥선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대신 선회력에선 세키부네가 더 열등하기에 명량 해전에서 후퇴하는 세키부네들이 서로 부딪히는 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74]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사실 왜선은 내구력이 그리 좋지 않아서 지자총통 및 현자총통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75] 단, 이러한 화포들은 접현이 이루어지는 근접전에서는 그 활용이 제약되었을 것이다.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함선(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 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는 하향 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방지해주는 장치가 없어 하향 사격이 불가능했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하향 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다만 승자총통의 경우엔 이중 토격을 사용하여 하향 사격을 가능케 한 부분이 존재한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대신 정상적인 교전이 벌어지는 50~200 미터 정도의 거리에서는 최고 효율을 발휘했다.[76] 이것 역시 의도했을 것이다. 물살이 극도로 센 전장환경이 딱히 조선군에게 더 유리한 것은 아니고 서로에게 힘든 환경이기 때문에 심각한 전장환경으로 아타케부네를 편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77] 배는 크게 만들어도 대형화포 수준이 차이가 나서 맞포격전을 이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맞포격전을 할수 없다면 함선의 대형화는 일본 배의 장점인 기동력만 깎아먹는 꼴이 된다.[78] 여기는 온갖 최첨단 선박들이 돌아다니는 현대에도 연 평균 4회 ~ 5회 선박 조난 사고가 일어나는 험한 곳인데,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바로 여기서 발생했다.[79] 김억추가 검풍을 휘날리자 왜선 수백여 척이 침몰하였다던가,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잡고 세 발로 전열을 무너뜨렸다던가, 막내 동생 김응추가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다던가.[80] 1592년 1월 17일의 철쇄공석(鐵鎖孔石), 2월 2일의 철쇄횡설(鐵鎖橫設), 2월 9일의 철쇄관장목(鐵鎖貫長木), 3월 27일의 철쇄횡설. 사실 이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수군 수영들에는 철쇄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81] 실제로 거북선 선장보다 판옥선 선장의 품계가 더 높다. 근본적으로 거북선은 적진에 돌격해서 다 휘젓고 다니며 진형을 흐뜨러뜨리는 역할을 하고, 판옥선은 그 흐트러진 진형에 인정사정 없이 화력을 쏟아부어 작살을 내는 역할이다. 쉽게 말해서, 거북선 없이 판옥선만 가지고 싸우면 (어려울지언정) 이길 수 있으나, 판옥선 없이 거북선만 가지고 싸우면 뭣도 안 된다.[82] 근거로 행록의 판본 중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없는 판본도 있음을 내세운다. 번동아제의 포스팅[83] 오익창은 명량 해전 직전 피난민들과 사대부들에게 공문을 돌려 이순신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문신이다. 오익창은 물자를 이순신 함대에 지원하고, 자신의 호소에 응답한 사람들을 모아서 군량과 무기를 운송하면서, 피난용 어선들로 적 교란용 위장선 병력을 만들어 후방에서 지원하였다. 이 전적을 인정받아 전후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84] 구경을 늘린 오오즈츠,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나 간신히 약간의 타격을 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리고 실제 역사는 그보다 더 적었다. 물론 총탄에 직접 맞지 않더라도 파편에 의한 피해는 막을 수 없기에 솜이불이나 가죽 판으로 둘러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85]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과장된 기록이 남음은 당연한 일이다.[86] 위의 명량 철쇄설이나 기타 이런저런 잡설들도 결국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건지 짐작이 안 되니 이런저런 추측이 생겼을 것이다.[87] 그런데 이 당시 기술력의 부족으로 일본 특촬팀이 지원하는 중이었다.[88] 권준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영남은 최소한 사천 해전부터 이순신을 깊이 신뢰하고 생사를 같이한 인물로 묘사되며, 우치적은 이순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라는 원균의 유지를 받든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역사를 비틀어 이들을 명량 해전에 참가한 것으로 설정한 이상, 도망치지 않고 싸우는 것으로 연출할 수 밖에 없었다.[89] 현충사에 보관된 유물의 설명에는 의장용이라 써놨지만 실제로 이정도 장검은 충분히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검이며 이는 이 검과 비슷한 길이의 일본 노다치가 현대에도 충분히 수련이 이루어지고 실전적 동작이 충분히 잘 구사되는 걸로 입증이 된다. 오히려 사극에서 잘 묘사되는 지휘관의 짧은 검이 의장용 내지 비상용으로만 사용되는 검이라 장병기를 든 적을 상대로 대적할수가 없다.[90] 실제 인물 안위는 상당히 용맹한 인물이었으며, 상술되었듯이 이순신의 대열에 가장 먼저 합류한 인물도 그다. 당장 제작진들이 검증은 제대로 안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91] 권준이 명량 대첩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충청 수사였던 데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한 달 전의 칠천량 해전만 보더라도, 충청 수사 최호는 칠천량에서 전사했고,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 권준이다. 당시 권준이 참가하지 않은 이유는 칠천량 패전 이후 수습이 가능했던 충청 수영 휘하 함선이 아직까지는 없었던 데 있다고 봄이 더 합리적이다.[92] 대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김억추가 아니라 그의 군관인 서한수다.[93] 의외로 조선낫은 다른 나라의 낫에 비해 다재다용으로 쓸 수 있는 구석이 많다. 자세한 것은 조선낫 참조.[94] 이 장면은 대본에서는 망연자실하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고 대사는 없다. 즉 배우의 애드리브였던 셈.[95] 바로 직전 있었던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쁨에 가득찬 환희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96] 일본에서 시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고양이의 눈을 확인해 시간을 알아보는 기록이 있긴 있다. 닌자들도 주변의 고양이들의 동공을 통해서 시간을 알아봤다라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그만큼 고양이들이 시간에 따라 들어오는 햇빛의 양에 따라 동공의 수축과 확장을 하기 때문이다. 고증에 맞지 않는 건 당시에는 일본에 해당 묘종인 터키시 앙고라가 전래되기 이전이라는 것이다.[97]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 일본 측 화기가 거의 무력화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발휘된 조선 화포의 뛰어난 화력과 같은 것.[98] 시신들은 방치하면 부패하고 썩어 전염병을 일으키기에 방치하기도 뭣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은 원통함에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물귀신이 된다는 미신도 있었기에 측은지심도 들었을 것이다. 옛날에 해군을 기피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배가 침몰하면 시신도 못 찾는다라는 점에서였다. 하물며 땅에 묻는 것이 장례의 진리인 조선 땅에서야 오죽할까.[99]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쩌다 이처럼 이치에 어긋났는가?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100] 숫자가 10배수 차이가 나는 전투(육전, 해전 모두)는 자동으로 전멸로 처리된다.[101] 게다가 호엘, 존스턴, 사무엘 B. 로버츠가 침몰한 전투 중후반부터는 히어만 혼자 일본 함대를 저지했다.[102] 다만, 나카가와 히메다마의 경우는 임진왜란 후 명으로 압송당해 처형당했다는 기록도 있어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