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두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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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부인 칼리파 광장의 야경. 낮에는 그저 공터지만 밤에는 야시장이 열린다. 뾰족한 돔은 아래의 마흐디 영묘
1. 개요[편집]
수단 제2의 도시로,[1] 인구는 2,395,159명이다.[2] 하르툼 주에 속하며, 수도 하르툼과 나일강을 사이로 마주보고 있다. 하르툼 광역권에 속해있고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다. 지명은 '두르만 엄마'란 뜻이다.[3] 19세기 마흐디 운동의 중심지였다.
2. 역사[편집]
마흐디국 수도이던 시절 세워진 성벽의 일부인 밥 엘 압델가움
마흐디국의 초대 지도자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영묘
1885년 마흐디 운동군의 하르툼 포위 당시 옴두르만 일대는 전자의 병영이었다. 하르툼 함락 직후 마흐디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인 칼리파 압둘라히는 (마흐디 교리에서 의하면) '불신자' 튀르크 인들이 세운 하르툼을 재건하는 대신 옴두르만을 수도로 삼았다. 이때 마흐디 영묘와 현재 칼리파의 집이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남아있는 압둘라히의 관저가 세워졌고, 하르툼의 폐허를 재활용하여 도시를 두르는 성벽도 건설되었다. 성벽의 규모는 남북 9.5km, 동서 3km에 이르렀다. 압둘라히의 지도 하에 마흐디 국이 체계를 갖추게 되자 바까라족, 베쟈족 출신 지지자 (일명 안사르)들이 몰려들며 옴두르만은 1895년에 이르면 인구가 40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2.1. 영국령 수단[편집]
1898년 옴두르만 전투
옴두르만 함락 후 영국군에 의해 파괴된 마흐디 영묘
1896년 말부터 영국-이집트 군은 수단 '탈환'에 나섰다. 2년에 걸쳐 수단 북부를 평정한 원정군은 마흐디 국의 수도 옴두르만으로 향하였다. 1898년 9월 2일, 옴두르만 북쪽 10km 지점의 케레리에서 약 5만의 마흐디 군과 2만 5천의 영국-이집트 군이 조우하였다. 5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개틀링 기관총 등 근대적 화기로 무장한 영국군은 1만 대 50의 엄청난 교환비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영국측 참전자 중에는 윈스턴 처칠과 더글러스 헤이그 등이 있었다. 대패 후 칼리파 압둘라히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도주하였고, 영국측 사령관 키치너 경은 옴두르만에 입성한 후 13년 전 찰스 고든의 복수라며 마흐디 영묘와 시신을 훼손하였다. 칼리파 압둘라히 역시 1899년 코르도판에서 전사하며 마흐디국은 멸망하였다. 전후 영국은 하르툼을 복구하였고, 옴두르만은 그 위성도시가 되었다.
2.2. 현대[편집]
독립 후 옴두르만은 수도 하르툼과 연계되어 광역권을 이루며 인구가 증가하였다. 다만 쿠데타나 내전이 일어날 때마다 하르툼과 함께 전장이 되었다. 2008년 다르푸르 전쟁 때에 그랬고, 2023년 수단 내전 시에도 현재까지 약 4개월간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7월 들어 전투가 치열해지며 8일, 15일, 25일 세 차례에 걸친 반군의 드론 공격에 민간인 43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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