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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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영표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클럽 경력[편집]



2.1. 프로 이전[편집]


안양초 4학년에 축구를 시작한 이영표는 축구 명문 안양중 - 안양공고를 거쳤다. 안양중시절 각종 대회에서 득점왕을 휩쓸었고, 안양공고 시절에도 등번호 10번을 달며 95년 KBS배 고교 대회 우승을 이끄는 등 10대 시절까진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건국대학교 96학번으로 입학한 뒤 정종덕 감독의 추천에 의해 좌측 윙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초반에는 선배들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등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하다가, 점차 기량이 급성장했고, 3학년부터 주전으로 발돋움해 대표팀에 차출될 만큼 대학 최고 윙어로 성장했다.


2.2. 안양 LG 치타스[편집]


파일:영표리.jpg

2000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2000 K리그 드래프트 전체 1순위안양 LG 치타스에 지명을 받았다.

신인임에도 주전으로 나섰다. 비록 잦은 허정무호 차출로 인해 소속팀에서 기여도는 낮았음에도 양현정과 함께 신인왕 후보를 경쟁할 만큼 리그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고, 리그와 리그컵 18경기 2득점 1도움을 기록하며 안양의 10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1 시즌에는 팀의 부주장으로 활약하며 K리그 수퍼컵을 이끌었고, 팀을 리그 준우승에 이끌며 리그와 리그컵에서 29경기 1도움을 기록했다.

월드컵 종료 후 한 달 후 벌어진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전 최초로 자책골을 기록했다. 리그에서 23경기 1골 5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임생 선수에게 경기 중 폭행당한 것도 이 시즌 7월이다.

2.2.1. PSV 에인트호번 (임대)[편집]


2002년 8월부터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팀 PSV 에인트호번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과 함께 이영표를 네덜란드로 데려간다.[1]

임대 신분으로서 2002/2003 시즌 후반기 동안 리그 15경기 출전(선발 14경기, 교체 1경기)과 컵대회 2경기 출전(선발 2경기)을 기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입단한 박지성이 리그 8경기 출전(선발 2경기, 교체 6경기)에 그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활약을 토대로 2002/2003 시즌이 끝나자마자 이적료 170만 달러(약 20억원)에 완전 이적을 하였다.

2002-03 시즌: 17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에레디비시
15
14
1
0
0
암스텔컵
2
2
0
0
0
합계
17
16
1
0
0

2.3. PSV 에인트호번[편집]


파일:/image/001/2004/12/03/072004120300800_1.jpg

2003-2005

113경기 1골 17도움


2.3.1. 2003-04 시즌[편집]


03-04 시즌에도 팀의 주전 레프트백으로써 리그, 컵대회 포함 47경기 6도움을 기록했다.

2003-04 시즌: 47경기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에레디비시
32
32
0
0
4
암스텔컵
2
2
0
0
1
UEFA 챔피언스 리그
6
6
0
0
0
UEFA컵
6
5
1
0
1
요한 크루이프 스할
1
1
0
0
0
합계
47
46
1
0
6

2.3.2. 2004-05 시즌[편집]


04-05 시즌에는 공식전 4,425분을 출장하며 당시 팀에서 출전시간 1위를 기록하는 등 팀에서 대체불가 수준의 입지를 보여줬다.[2]

2004년 10월 24일 아약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헛다리 짚기로 파고든후 중거리 슈팅으로 데뷔골을 신고했다. 이후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상위리그에서 이영표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시즌 동안 PSV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을 견인하는 등 박지성과 함께 맹활약했다. 특히 AC 밀란과의 챔스 4강 2차전에서 측면에서 카푸를 재끼고 크로스를 올려 어시스트를 기록한것이 압권.[3]

2004-05 시즌: 49경기 1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에레디비시
31
31
0
1
9
암스텔컵
4
4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12
12
0
0
1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1
합계
49
49
0
1
11

2.3.3. 2005-06 시즌 초[편집]


토트넘 홋스퍼 FC볼턴 원더러스 FC가 이영표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며 잉글랜드 이적설이 불거졌다. PSV 구단과 히딩크 감독은 이영표의 잔류를 원했으나 결국 8월, 토트넘 홋스퍼 FC와 4년 계약을 체결했다.

2005-06 시즌 (에인트호벤): 4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에레디비시
3
3
0
0
0
요한 크루이프 스할
1
1
0
0
0
합계
4
4
0
0
0

2.4. 토트넘 홋스퍼 FC[편집]


파일:external/dcf7e1547d65204ac39b08f90186aaeb64de55ece96199cc6fecc5746d89c4b6.jpg

2005-2008

92경기



2.4.1. 2005-06 시즌[편집]


초기에는 뛰어난 기량과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토트넘의 주축으로 자리잡았으나 수비능력에서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4]

2005-06 시즌 (토트넘): 31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0
30
0
0
0
칼링컵
1
1
0
0
0
합계
31
31
0
0
0


2.4.2. 2006-07 시즌[편집]


시즌초부터 베누아 아수 에코토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겨 2개월 가량 벤치멤버로 전락하였으나 에코토는 겨울에 열린 아스날전에서 상대 공격수들에게 유린당하며 멘탈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 경기 후반 이영표로 교체되었다. 이영표는 그 경기에서 전과는 달라진 수비능력을 보여주면서 스카이스포츠로부터 "IMPROVED" 라는 호평을 받으며 이후 주전자리를 공고하게 지켜냈다.

하지만 이영표의 공격 능력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원래 크로스 킥력이 부족하고 정확도가 낮아서 드리블 돌파 후 이어지는 낮고 빠른 크로스라면 몰라도 상대를 제치면서 올리는 높은 크로스는 위협적인 경우가 많지 않았다. 높은 크로스는 EPL은커녕 K리그에서도 좋지 못했다.(일명 아리랑 크로스. 또는 두둥실 크로스) 가장 큰 문제점은 왼쪽 윙백이면서도 왼발로 크로스를 못 올렸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뛸 때는 분명 왼발로도 크로스를 올린 적도 적지 않은데, EPL로 가면서 갑자기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 오버래핑 후에 왼발로 바로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고 뒤로 방향을 바꾼 다음에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리니 공격템포가 죽고 성공할 리가 없었다. 상대방 수비수골키퍼 사이 공간으로 크로스를 못 올리니 이영표의 오버래핑 공격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2006-07 시즌 : 31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1
20
1
0
0
칼링컵
1
1
0
0
0
FA컵
5
5
0
0
0
UEFA컵
4
4
0
0
0
합계
31
30
1
0
0


2.4.3. 2007-08 시즌[편집]


마틴 욜 감독 체제에서는 그래도 꾸준히 기회를 받으며 출전했으나 시즌초반 1승 4무 5패로 부진하여 결국 마틴 욜 감독이 경질당하고 후안데 라모스 감독이 부임하면서 완전히 전력 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토트넘 부임 이전 세비야에서 다니엘 알베스라는 세계 최고의 공격형 풀백과 함께한 라모스 감독에게 이영표로는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 이에 이영표는 시즌이 끝나고 바로 이적을 모색하게 되었다.

2007-08 시즌 : 30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8
17
1
0
0
칼링컵
4
4
0
0
0
FA컵
2
2
0
0
0
UEFA컵
6
6
0
0
0
합계
30
29
1
0
0

2.5.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편집]


파일:/image/311/2014/01/17/1389938982683_59_20140117200603.jpg

2008-2009

22경기 1도움



2.5.1. 2008-09 시즌[편집]


결국 장기 부상 당한 주전 레프트백 데데의 대체자를 찾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하게 된다.[5] 2021년 팬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당시 FC 샬케 04, PSV 에인트호번에서도 이적 제의가 들어왔으나 위르겐 클롭이 자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 플랜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도르트문트로 이적했다고 한다. 계약 기간은 1+1년.

2008/09 시즌 초반에는 도르트문트에서 꾸준히 출전했고 1년 재계약에도[6] 성공했지만, 뛰어난 공격가담 능력을 가진 부주장 데데가 복귀하여 팀내 입지가 흔들리고[7] 본인도 다음 해에 월드컵이 있는 만큼, 꾸준히 경기 출장을 할 수 있는 팀을 찾았기 때문에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알 힐랄 FC로 이적했다. 여담으로 도르트문트 시절 가장 친했던 동료는 마르셀 슈멜처마츠 후멜스였다고 한다.

2008-09 시즌 : 22경기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18
17
1
0
1
DFB-포칼
2
2
0
0
0
UEFA컵
2
2
0
0
0
합계
22
21
1
0
1

2.6. 알 힐랄 FC[편집]


클래스가 훨씬 낮은 사우디리그에선 축구를 가르치다시피 뛰었다.[8]

파일:/image/076/2011/05/21/2011052201001923100159791.jpg

2011년 2월 16일에 벌어진 FA컵인 크라운 프린스컵 8강전 알 아흘리 경기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득점에 실패했다.[9] 다행히 골키퍼의 활약으로 겨우 4:3으로 팀이 4강에는 진출했다. 그리고 팀의 크라운 프린스컵 결승 경기에서도 활약하며 팀은 대회 우승했다. 그 당시 결승이 이교도는 들어갈 수 없는 메카에서 치러지는 거여서 이영표를 포함하여 알 힐랄의 외국인 선수들이 참가를 못할 뻔 했으나 왕자의 중재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메카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 이교도일지도 모른다.[10]


2.7.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편집]



2012-2013

69경기 1골 6도움


2.7.1. 2012 시즌[편집]


파일:이영표밴쿠버.jpg}}}
2012 밴쿠버 화이트캡스 올해의 선수

2011년 6월, 알 힐랄과의 계약만료 이후 알 힐랄과 재계약하지 않고 친정팀 FC 서울에서 FA 신분으로 반 년간 몸을 만들며 거취를 고민하다가 12월 6일 미국프로축구(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와 1+1 계약을 확정짓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였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와 장래 지도자로의 변신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자신의 트위터티켓 필요한 밴쿠버 유학생들 연락달라며 새 팀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

2012년 4월 29일에는 7년 만에 리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프리킥 골이다.

2012년 7월 20일에는 대한민국 기준 나이 36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프로축구 리그(MLS) 전 경기 풀타임 연속 출전 기록을 달성했다.[11] 그야말로 이영표 선수의 몸관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방증한다. 대한민국의 하비에르 사네티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2012 시즌 : 36경기 1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메이저 리그 사커
33
33
0
1
4
메이저 리그 사커 PO
1
1
0
0
0
캐나다 챔피언십
2
2
0
0
0
합계
36
36
0
1
4

2.7.2. 2013 시즌[편집]


대한민국 기준 3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전 풀백으로서 거의 모든 경기를 소화했다. 10월, 이영표가 현역 은퇴를 발표하며 프로 축구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013 시즌 : 33경기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메이저 리그 사커
32
30
2
0
2
캐나다 챔피언십
1
1
0
0
0
합계
33
31
2
0
2

2.8. 현역 은퇴[편집]


파일:/image/077/2013/10/28/PAP20131028069601034_P2_59_20131028102403.jpg
2013년 10월 27일 은퇴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찼다.

2013년 10월,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공식 발표됐다. 그리고 2013년 10월 28일, 공식 은퇴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에서 주장 밴드를 차고 나와 90분을 소화한 뒤에 추가시간에 교체되어 나왔다. 교체사인 뜨자마자 박수 쳐주는 피치 위의 동료들과 한번씩 포옹한 뒤 마지막에 교체선수와 포옹하면서 피치 위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2013년 11월 15일, 스위스와의 A매치에서 현역 은퇴식을 치렀다.

파일:/image/020/2013/10/28/58511628.4_59_20131028162903.jpg
사진을 잘 보자, 이영표 선수가 뛰었던 안양 LG 치타스, PSV 에인트호번, 토트넘 홋스퍼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알 힐랄,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엠블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엠블럼이 이영표 선수의 얼굴과 나란히 실려있다.

이어서 건국대 홍보모델이 됐다.은퇴 이후 후배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해당기사


3. 국가대표 경력[편집]




3.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3.1.1. 2000 시드니 올림픽[편집]


본래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과 이영표가 재학중이던 건국대학교 간의 연습경기에서 허정무의 눈에 들어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했다. 당시 포지션은 3-4-3 포메이션의 왼쪽 미드필더.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오른쪽에서 영리한 플레이로 주가를 높이던 박진섭과 쌍으로 묶여 ‘좌영표 우진섭’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도 발탁되는 영예를 누린다.[12] 당시에는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성인 국가대표팀에 전격 발탁되는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때 이영표와 같이 선수들 중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등은 훗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3.1.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편집]


1 이운재 [[와일드카드(스포츠)|

W
]] · 2 조병국 · 3 현영민 · 4 박요셉 · 5 김영철 [[와일드카드(스포츠)|

W
]] · 6 박용호 · 7 변성환
8 김두현 · 9 이천수 · 10 박지성 · 11 최태욱 · 12 이영표 [[와일드카드(스포츠)|

W
]]

VC
· 13 김동진 · 14 박규선
15 조성환 · 16 김용대 · 17 최성국 · 18 김은중 · 19 박동혁 · 20 이동국

C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최강희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최진한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이운재, 김영철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다.

대한민국은 준결승인 이란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갔을 때, 이영표가 찬 공은 아쉽게 골대를 맞았다.[13] 이 한번의 실축으로 대한민국이란에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났고, 울산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태국을 이기고 동메달을 수상했다. 이 실축 때문에, 월드컵 탈락 한풀이를 하러 온 이동국은 시즌 후 빼도박도 못하고 군대 확정이 되었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3.2.1.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편집]


올림픽 대표팀을 맡고 있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1999년 6월 12일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14]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룬다. 예나 지금이나 대표팀 선수 대다수가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U-17, U-20, 올림픽 팀(U-23)을 차례로 거쳐 대표팀에 뽑히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에 비하자면 이영표는 대기만성형으로 또래들에 비해 다소 늦게 주목받은 경우다.[15]

이 시절 이영표는 윙백이 아닌 윙어로서 공격력이 상당해 득점도 곧 잘 기록했다. 특히 중국에게 강했는데, 중국 대표팀과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레바논 아시안컵에서도 중국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3.2.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677aa;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파일:external/pds.joins.com/2014080115174634201_3.jpg
2002 한일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3경기 포르투갈에서 루이스 피구를 막아내는 이영표

그리고 히딩크 감독의 지옥훈련도 무난히 통과하여 월드컵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선 쓰리백을 사용한 대표팀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나서 대회 기간 내내 맹활약했다.[16] 특히 조별리그 3차전에서 루이스 피구가 이끌던 포르투갈 대표팀을 좌영표-우종국의 미칠 듯한 콤비네이션으로 도륙내 버렸다. 이영표의 크로스를 받은 박지성의 환상적인 결승골로 기억되는 그 날의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뿐만 아니라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헤딩 골든 골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만 결승골 도움 2개를 기록했다.

8강 스페인전에서는 김남일의 부상으로 인한 빠른 교체 이후 이을용과 함께 수비에 집중했으나 호아킨 산체스에게 상당히 고전했다. 비단 두 선수뿐 아니라 당일 한국 대표팀 모두가 체력적 부담, 실력의 차이, 부상으로 인한 악재 등이 겹쳐 스페인에게 거의 뚜들겨 맞다시피 했으나, 이운재의 선방과 수비를 강화하여 승부차기전까지 이끌었다.
특히, 후반전 14분 36초에 엘게라가 이영표한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서 공을 손으로 걷어내고(핸드링 반칙), 박지성을 팔로 잡아 넘어뜨렸으나 주심은 경고,퇴장도 없이 파울 선언으로 끝났다.[17]

4강 독일전에서는 공수양면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장신의 독일 수비진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고 발락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탈락했다.

터키와의 3ㆍ4위전에도 선발출전하여 4위로 대회를 마감한다.

3.2.3. 2006 FIFA 월드컵 독일[편집]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50E77;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각주]



2006 독일 월드컵 명단에 당연히 포함되었으며, 팀은 원정 최다 승점 4점 기록과 원정 첫 1승 1무 1패, 조 3위 월드컵 17위를 기록했고 아쉽게 16강은 진출 실패했다.

당시 김동진의 존재와 우측 윙백자리에 마땅한 카드가 없던 관계로 오른쪽 윙백을 맡았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선임되며 조원희가 발탁되어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조원희는 월드컵에서 기용되지 않았다. 당시 대표팀은 포백을 도입하는 과도기였고 따라서 국대에서도 풀백을 보게 되었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라 아무래도 덜 익숙한 곳이다보니 항상 대표팀의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됐다.

다만 첫경기 토고전에는 김동진이 예선에서 경고 누적을 당해 1차전에서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준비한 포백대신 스리백으로 나왔고 송종국이 선발로 나가며 본래 자리인 왼쪽 윙백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스리백 카드를 쓴 탓인지 수비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했고 프랑스전에서 지단의 공을 빼았는 활약을 했고, 스위스전은 포백으로 나섰으며 오른쪽 풀백을 맡았다.

3.2.4.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편집]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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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해성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태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현태



2008년 11월 20일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 김태영, 이운재에 이어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경기력과 신상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했고, 4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뛰며 풀백으로서의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4-1로 대패한 아르헨티나 전은 이영표-박지성의 좌측 라인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서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반대쪽 라인이 숭숭 뚫리면서 실점이 전부 우측에서 터졌다.


3.2.5.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편집]


1 정성룡 · 2 최효진 · 3 황재원 · 4 조용형 · 5 곽태휘 · 6 이용래 · 7 박지성

C
· 8 윤빛가람
9 유병수 · 10 지동원 · 11 손흥민 · 12 이영표 · 13 구자철 · 14 이정수 · 15 홍정호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김보경 · 19 염기훈 · 20 김신욱 · 21 김용대 · 22 차두리 · 23 김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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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광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태하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서정원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현태 · 파일:브라질 국기.svg 알렉산드레 가마


2011년 AFC 아시안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3ㆍ4위전까지 6경기를 모두 뛰었다. 마지막까지 대한민국 최고 풀백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A매치 127경기 출장[18]라는 기록을 남긴 채 박지성과 함께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1] 이 때 박지성은 정식 입단으로 3년 계약을 체결했으나, 이영표는 6개월 임대 후 완전 이적 계약 여부 결정이었다. 때문에 이영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매우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2] 보통 체력안배가 많이 필요하지는 않은 골키퍼들이 출전시간 1위를 차지하고 3,000분대 중후반 정도를 뛴다. 그걸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경기에 나왔다.[3] 슛포러브에서 밝히길 이 때 챔피언스리그 우승시 보너스가 13억이었다고 한다.[4] EPL은 에레디비지보다 수준이 훨씬 높다. 특히 킥이 발달한 EPL에서 크로스를 허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기에 수비수는 상대방이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반면 네덜란드 리그는 크로스를 올려도 별로 위협적인 크로스가 드물기에 수비수들이 적극적으로 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영표는 네덜란드 리그에서 하던 것처럼 상대방이 크로스 올리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였다.[5] 클롭이 마인츠 감독 시절에 차두리가 마인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는데 이 때 인연이 되어 차두리에게 이영표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후, 클롭은 시간이 흘러 지동원을 영입할 때도 차두리에게 먼저 물어보았다고 한다.[6] 데데가 다음 시즌을 끝마치고 브라질로 복귀하겠다고 밝혔던지라 구단측은 2년 재계약을 제안했으나 이영표 측에서 1년 재계약을 원했다.[7]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데데는 여전히 부상에 자주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유망주인 마르셀 슈멜처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8]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에게 지적했던 많은 문제점들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었을 정도. 이 문제는 결국 알 힐랄이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2019년에서야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본선 진출로 겨우 이 문제들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9] 승부차기를 잘 못 찬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도 4강 이란전 마지막 키커로 나갔다가 실축해 금메달을 날리고 이동국군대로 보내버린 바 있다.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슛![10] 사실 종교를 판단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옷만 비슷하게 차려입고 무슬림 행세를 하면 이교도라도 들어갈 수는 있다고 한다.[11] 7월 20일 기준 21경기 연속 풀타임 출장.[12] 박진섭 역시 이영표와 함께 국가대표에 승선하였으나, 피지컬의 부족으로 인해 히딩크감독 부임 후 국가대표에 승선되지 못한다.[13]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 슛이었다.[14] 여담으로 이 대회가 1970년대에 박스컵에서부터 이어졌던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의 마지막 대회였다. 당시 참가팀은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멕시코, 이집트, 크로아티아. 우승은 1년 전의 돌풍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크로아티아가 차지했다.[15] 기대주 박진섭박주영이 나타나기 전까지 천재소리를 듣던 유망주였지만, 체력이 모자라고 체격이 왜소하다는 이유로 강판되었으며, 이후 그의 자리를 꿰찬 선수가 바로 송종국이었다.[16] 다만, 1~2차전에는 결장했었다. 개막 전 훈련 도중 왠 기계인간과 부딪히면서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17] 파일:스페인전 엘게라 핸드링반칙.jpg 이영표를 걸어 넘어뜨리면서, 의도적으로 공을 손으로 걷어냈다.[18] 통산 최다 출장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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