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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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피구의 역임 직책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페르난두 쿠투
(2002~2004)

루이스 피구
(2004~2006)


누누 고메스
(2006~2008)


루이스 피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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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심볼.svg

2000-01 · 2004-05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파일:World Socce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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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파일:ESM.png

1997-98 · 1999-00
파일:UEFA 유로 2000 심볼.svg

파일:유럽 축구 연맹 로고.svg

파일:2006 FIFA 월드컵 독일 심볼.sv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6EA842; font-size: 0.9em"
2006 FIFA 월드컵


2000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지네딘 지단
2위
루이스 피구
3위
히바우두
2000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티에리 앙리


루이스 피구의 기타 정보



파일:유럽 축구 연맹 로고.svg
UEFA 기술 고문

파일:Figo_UEFA.jpg

이름
루이스 피구
Luís Figo
본명
루이스 필리프 마데이라 카에이루 피구
Luís Filipe Madeira Caeiro Figo
출생
1972년 11월 4일 (51세) /
포르투갈 리스본
국적
[[포르투갈|

포르투갈
display: none; display: 포르투갈"
행정구
]]

신체
180cm / 75kg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축구 행정가
주발
오른발
소속
선수
스포르팅 CP (1989~1995)
FC 바르셀로나 (1995~2000)
레알 마드리드 CF (2000~2005)
인테르나치오날레 (2005~2009)
행정
UEFA (2015~ / 기술 고문)
국가대표
127경기 32골 (포르투갈 / 1991~2006)

1. 개요
2. 클럽 경력
2.2.1. 레알 마드리드 이적 비화
2.2.2.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폭풍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은퇴 후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피구에 대한 말, 말, 말
8. 기타



1. 개요[편집]


포르투갈축구 선수 출신 행정가. 포지션은 윙어.

2000년 발롱도르, 2001년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로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인테르에서 활약하며, UCL 1회 우승, 라리가 4회 우승, 세리에 A 4회 우승을 이끌었다. 포르투갈 대표팀에서는 이른바 ‘골든 제너레이션’의 리더로서 유로 2004 준우승과 2006 월드컵 4위라는 성적을 거두는데 선봉장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원소속팀 바르셀로나의 최대 앙숙인 레알 마드리드로 직접 이적하는 충격적인 행보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 클럽 경력[편집]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에는 육상을 배웠지만,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종목을 바꾸었다.


2.1. 스포르팅 CP[편집]


고향 팀인 스포르팅 CP 유스 팀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포르투갈인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팀 선배가 된다.

유스 시절 스포르팅에 입단할 때 벤피카와 이중 계약을 한 것이 들켜 45일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우승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4시즌 동안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뛰게 되는데 세계의 내로라하는 빅 클럽들이 노릴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2.2. FC 바르셀로나[편집]


스포르팅 CP에서 활약한 후 빅 클럽들이 노리기 시작했고, 피구 또한 해외 빅 리그 이적을 모색했다. 원래 당시 최고의 리그로 자타가 인정했던 세리에 A로 진출을 모색했지만, 선수와 에이전트가 각각 유벤투스, 파르마와 이중 계약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2년간 세리에 진출 금지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이후 피구는 라리가의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1995년 애증의 팀이 될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바르셀로나에서 피구의 활약은 눈부셨다. 히바우두-호나우두/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함께 3톱에 서서 프리 롤과 윙어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며 팀이 2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다비드 실바처럼 공격진에 활기와 파괴력을 불어넣는 타입이었다. 당연히 피구의 인기는 바르셀로나에서 최고를 자랑했다. 그 때 바르셀로나 팬 클럽들 중 하나가 이름이 '피구'였고 당시 칸테라에서 올라와서 바르셀로나의 상징이라고 떠받들어진 펩 과르디올라의 부재 시 주장 완장은 늘 피구가 차고 다녔을 정도.

이후 UEFA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을 4강에 진출하게 되지만, 이후 바르셀로나와 보드진과의 불화설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사실 피구는 활약에 비해 많은 주급을 받지 못했고, 피구와 피구의 에이전트는 그것에 불만이 많았다. 결국 피구의 에이전트는 유로 대회가 끝난 후 레알 마드리드 이적을 추진하게 된다. 바르셀로나에선 총 248경기 45골 58도움을 기록했다.


2.2.1. 레알 마드리드 이적 비화[편집]


어떻게 상식적으로 구단이 절대 불허할 이적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답은 바이아웃 제도 때문이다. 루이스 피구의 바이아웃 금액은 6,000만 유로(당시 환율 기준 약 710억 원대)였는데, 이 금액을 지불하는 상식 초월의 행보를 보이는 구단이 등장한 것.

라 리가에는 선수의 권익 보호를 위해 A 팀 계약 시 일정 금액을 현금 지불하면 원 소속 팀의 방해 없이 선수와 접촉하여 이적을 추진할 수 있는 바이아웃 제도가 있다. 하지만 금액 자체는 얼마를 써도 문제가 없어서 시장가격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쓰곤 하는데 재계약을 하면서 바이아웃 액수 또한 새로 지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나 존재하던 제도였다. 피구의 경우 바르셀로나와의 장기 계약에 묶여 있었고, 바이아웃 가격 역시 6,000만 유로로 당시 세계 최고액 이적료를 뛰어넘는 금액이었다.[1] 때문에 바르셀로나 경영진은 재계약을 원하는 피구에게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피구의 에이전트가 바이아웃을 언급했을 때도 그런 금액을 지불할 팀은 없을 거라며 가볍게 무시했다.

그런데 레알 마드리드가 정말로 바이아웃 금액을 덜컥 현금으로 내놓자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 유명한 갈락티코스 정책의 시작이었다.[2] 이 사건 이후 라 리가 선수들의 바이아웃 금액이 비정상적으로 상향되어 다시금 제도가 사문화되다시피 했다.[3] 이를 테면 리오넬 메시의 경우 바이아웃을 행사하려면 7억 유로(약 9,200억원)를 일시불 현금으로 질러야 한다. 또한 메시의 라이벌 호날두의 바이아웃 금액은 10억 유로, 그러니까 약 1조 3,200억을 지불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 금액을 지불하고 선수를 살 구단은 아직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유벤투스가 호날두를 영입했을 때는 바이아웃이 아닌 레알 마드리드, 호날두와의 협상과 합의를 통해 100M의 이적료로 호날두를 영입한 거다.[4]

이런 초유의 이적을 계획한 것은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에서 밀리고 있던 플로렌티노 페레스. 2008년 피구와의 인터뷰 겸 보스만 룰 특집 기사를 낸 포포투 영국판에 따르면, 피구 자신도 바이아웃 조항을 주급 인상에 미온적이었던 바르셀로나를 압박하려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지 마드리드 이적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 당시 마드리드의 회장이었던 로렌소 산스전해 챔스 우승을 해서 지지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에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당선 가능성은 낮게 예측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페레스 측은 피구에게도 우상이었던 전설적인 포르투갈의 축구선수 파울루 푸트리를 통해 피구의 에이전트 주제 베이가에게 줄을 대서 협상을 진행해달라고 피구에게 비밀리에 접근, "100만 달러를 줄 테니 내가 당선되면 마드리드로 반드시 이적해 달라"라는 계약을 제안한다.[5][6] 페레스가 낙마하더라도 피구가 선금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조건과 함께. 페레스 낙선을 기정사실로 보던 피구 측은 당연히 얼씨구나 하고 그 계약을 받아들였다.[7] 실제로 1998-1999 시즌 우승을 차지한 FC 바르셀로나가 도심 퍼레이드를 나갔을 때 피구는 도청 테라스에서 카탈루냐와 포르투갈 국기를 몸에 두르고선 마드리드를 까는 구호까지 외쳤을 정도.

문제는 페레스가 피구와의 이 비밀 계약을 흘리면서 결국 레알의 소시오들은 페레스를 찍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당선이 되어 버렸다는 것. 페레스는 이러한 상황을 예측이라도 한 것인지 계약서에 피구가 레알로의 이적을 거부하면 페레스에게 막대한 위약금(약 25.6m유로, 22m파운드)을 지불해야 한다는 페널티 성격의 조항을 삽입해놓았고, 이때문에 인터뷰에선 바르셀로나에 남겠다고 확언을 해놓고서도 레알 마드리드에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때문에 피구는 페레스 회장이 당선되고 행선지에 대해 묻자 바르셀로나 구단 측에 "내 위약금을 대신 내주면 잔류할게"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시전해버린다. 당연히 바르셀로나 측에선 레알 마드리드에 줄 돈은 한 푼도 없다며 거절했고, 페레스가 곧바로 바이아웃을 포함한 계약 일체를 강행해 피구가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겠지만 마드리드에서 계약 확인 기자 회견을 한 피구의 얼굴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피구는 실제로 회장 투표 이전에 심경이 불안한듯 사르데냐에서 휴가를 보내다가도 언론사 스포르트에 연락해 인터뷰를 진행해 "바르셀로나에 남겠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최초로 밝힌다. 이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운동 현장에서 페레스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나, 페레스는 마치 자신이 이미 회장이라도 된듯 피구의 이름이 새겨진 레알 마드리드 저지를 입은 소년팬과 사진을 찍어 언론사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루이스 피구는 계약서를 직접 와서 검토하지 않았으니 페널티 조항에 대해서 모른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루이스 피구의 서명이 없으니 나는 서명을 하지 않았고 에이전트인 조제 베이가와 브로커 역할을 한 파울루 푸트리의 책임이라고 법정공방을 하게되면 둘은 큰 곤경에 처할 위기였다. 이 때문에 파울루 푸트리와 조제 베이가는 연일 루이스 피구의 집에 전화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것이 현재 놓인 유일한 옵션이라고 설득을 해댔고 루이스 피구는 아무도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등 언론사와 에이전트 양쪽에서 시달렸다고 한다. 조제 베이가는 자신이 페레스와 피구 양면에서 소송을 당하는 상황을 우려해 굉장히 불안해했다고 하며, 실제로 페널티 조항의 위약금은 구단 이적료로 쓰일만한 거액이었으므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베이가가 이토록 불안해한 것은 계약서에 직접 서명한 것은 다름아닌 본인인데다가 루이스 피구는 계약서를 직접 보지도 않고 자기가 구두로 계약서 내용을 불러줬으니 이 내용에 대해 공방이 붙었으면 법정에서 매우 불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패배라도 한다면 십중팔구 거액의 위약금은 자기 몫으로 내야할 상황이었다.

상황이 극에 치닫자 조제 베이가와 파울루 푸트리는 심각성을 깨닫곤 사르데냐로 전용기를 타고 가서는 피구를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설득했고 피구는 완강하게 거부했고 그런 와중에 피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섞였고 계약 거부설이 스포츠 신문 1면을 앞다퉜다. 결국 피구와 파울루 푸트리, 조제 베이가는 레알 마드리드행을 접고 3천만 유로의 해결책을 찾았고 셋은 페레스 회장을 찾아가 싹싹 빌며 계약을 무위로 되돌려달라고 부탁하려는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페레스 회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리스본의 조제 베이가 에이전트 사무실에 넷이 사자대면을 하게된다. 밤부터 시작한 설득의 시간 끝에 다음날 아침이 됐고 페레스는 피구에게 꼭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어달라고 오히려 부탁하며 자신의 갈락티코스 계획에 피구가 중심에 설거라며 설득했다. 마침내 아침이 됐을때 피구는 레알 마드리드행을 결정했다.

이후 가스파르트가 당선이 되고 당선 축하연을 열었는데 한밤중에 거액의 지급보증서를 써주지 않으면 바로 휴가지에서 레알마드리드로 가겠다고 협박에 가까운 말을 남겼고 한밤중에 가스파르트 회장이 "어떻게 지급보증서를 써주겠냐 지금 한밤중이다. 불가능한 제안이다." 라고 답했더니 피구가 "그럼 여기 까지네요. 레알 마드리드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스파르트 회장이 TV 방송에 나와 공공연하게 폭로했다.

하지만 피구는 이에 대해서 가스파르트 회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딱잘라 말했으며 그런 제안을 할리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판단은 결국 각자의 몫.

한편 피구는 이적 결정 후 스포츠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바르셀로나 측이 피구에게 그다지 애정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적을 결심했다고 말하고 있다.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 근데 이적하기 싫었다 쳐도 이미 이적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8]

사람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법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5년 동안, 팀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열린 유로 2000 대회 당시에 포르투갈 대표팀은 4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클럽으로 이적할 할 기회가 생겼어요. 그런 기회에 대해 바르셀로나에게 이야기를 했죠. 바르셀로나에 책임을 다하고 싶었으니까요. 그 당시 이야기에 대해 많은 소문이 있었죠. 제가 최고액의 계약을 원했다고요. 많은 돈을 원했다는 거죠.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난 바르셀로나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바르셀로나에서 뭘 해줄 수 있는지, 뭘 원하는지 듣고 싶었죠. 그런데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좋아. 떠나도 좋아. 이적료만 많이 남겨주고 넌 가도 좋아.” 난 클럽이 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느꼈고, 이적을 결정했죠. 계약 조건도 더 좋았죠. 레알 마드리드의 멤버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팀의 명성을 끌어올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행운을 잡은 겁니다.



2.2.2.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폭풍[편집]


앙숙 레알 마드리드로 다이렉트 이적을 해버린 루이스 피구는 바르셀로나 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첫 엘 클라시코 경기부터 바르셀로나 팬들은 관중석에서 엄청난 수위의 욕설로 피구를 맞이하였다.[9] 이때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이었다. 서포터즈의 분노로 인해서 피구의 안전이 우려될 정도로 험악했다고.

물론 피구 이전에도 바르셀로나에서 바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사례는 제법 많았는데, 주젭 사미티에르 같은 고전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사이에 베른트 슈스터, 루이스 미야, 미카엘 라우드럽 등 여러 선수들이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바 있었다. 앞의 사례들을 보면 바르셀로나에서 뛰다가 구단과의 갈등으로 엿 먹으란 뜻에서 레알로 이적한 케이스가 많았다. 특히 라우드루프.

팀 동료였던 호나우두도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경력이 있긴 하지만 피구에 비하면 그리 파장이 큰 편은 아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시기도 한 시즌이었고 인테르로 이적한 뒤에 다시 스페인으로 리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0] 전 바르샤 감독이던 루이스 엔리케는 반대로 레알에서 바르샤로 다이렉트 이적했지만 레알에서의 활약이 미미했고 계약 만료로 이적한 경우라 피구만큼의 파장은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서포터들이 곱지 않게 봤지만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주장까지 선정되고 은퇴 후에는 감독이 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에투도 마드리드에서 돌고 돌아 바르샤로 간 케이스지만, 엔리케와 마찬가지로 레알에선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피구는 팬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바르셀로나의 부주장이었던 데다가 바이아웃, 즉 돈 때문에 이적한 사례라 후폭풍이 아주 폭발적이었다.[11] 지금으로 따지면 메시 혹은 이니에스타가 레알 마드리드로 간 것과 비슷한 것이다. 혹은 호날두가 바르사로 이적했다면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피구는 오늘날까지도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선수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피구가 레알로 이적하자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의 비난은 엄청났다. 거리 곳곳에서 피구의 사진이 불태워진 건 물론이요, 피구가 엘 클라시코 날이 되어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으로 오면 피구에게 온갖 쓰레기와 욕설이 날아들었다. 코너킥 차러 가던 피구에게 양주병을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피구가 제대로 뛰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바르사 팬이 돼지 머리를 투척한 사건.[12] 오죽했으면, 바르셀로나의 주장 펩 과르디올라가 팬들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13] 피구는 엘 클라시코가 열리기 전 시합에서 고의로 퇴장을 당해 엘 클라시코 더비를 일부러 빠질 정도로 마음 고생이 심했다.

어차피 계약의 세부 상황이 일반에 알려질 일은 없겠지만 배신감으로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날뛴 바르셀로나의 울트라스에 비해 피구 자신은 조용히 처신했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적의감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그나마 비난을 했던 것은 자신의 가치를 정당히 평가해주지 않았던 당시의 보드진과 회장인 호안 가스파르트.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바르셀로나에 대한 호감은 그대로 드러냈던 모양이다. 후일 다큐멘터리에서 밝히기로는 바르셀로나 시절은 본인의 커리어는 물론이요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으로 손꼽는다고 한다. 이때 아내를 만났고 딸까지도 세상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 이 시기를 말할 수 밖에 없다고. 이적 문제가 있긴 했지만 오랜시간이 흐른 2021년 무렵 다큐멘터리를 찍을때까지도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실제로 2003년 당시로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더 먹어주는 특급 유망주였던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기자 회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피구가 자신에게 갈 수 있다면 바르셀로나로 가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가 피구의 이적 시 선수 본인과 상호 동의하에 내걸었던 바이아웃 조항에 적혀 있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금액을 어찌 됐건 받게 됐다.

그래도 돈 보고 이적했다는 말은 듣기가 거북한지 상기 서술한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축구 선수의 커리어는 결코 길지 않다. 누구든지 선수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게 쳐주는 클럽으로 이적하는 것에 대해 딴죽을 걸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했다.

피구의 상황은 극한 상황에 다다르고 신변에도 위협을 느끼기도 했으나 어찌됐건 그런 상황에서 리그 우승에 기여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한편, 그가 떠나온 바르셀로나는 상황이 극적으로 뒤바뀌어 레알 마드리드를 조롱하던 피구가 합류해버린 시점에서 5년동안 트로피를 단 한번도 들지 못하고 후안 가스파르트 회장은 2003년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사임한다. 그러곤 꽤 시간이 흐르도록 역대 최악의 회장이라는 불명예를 안는다.[14]당시 바르셀로나로서는 라리가 최고의 선수를 한순간에 잃고 대체자는 커녕 거액의 이적료를 받아들고도 이제 막 회장단이 들어서 허둥지둥하느라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페레스 회장은 잘 알려졌듯, 장기 집권했을 뿐만 아니라 갈락티코스 계획은 현실화해 수많은 트로피를 들게 했다는 명예를 안았다.


2.3. 레알 마드리드 CF[편집]


레알 마드리드 이적을 확정지으면서 참가한 유로 2000에서는 포르투갈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았고,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루이스 피구가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은 4강까지 올리는 뛰어난 활약을 하긴 하였으나, 무관이었기 때문에 유로 2000 우승을 이끈 지네딘 지단 쪽이 좀 더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지단이 챔스 조별 리그 함부르크전에서 박치기를 하고 퇴장당하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여론이 피구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고 한다.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후 2000-01 시즌에도 대활약을 펼치며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활약하며 4강까지 올라갔지만 바이에른 뮌헨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2000/01 시즌: 50경기(선발 49경기) 14골 2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4
33
1
9
17
챔피언스 리그
14
14
0
5
9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0
합계
50
49
1
14
26

다음 시즌인 2001-02 시즌에는 지네딘 지단이 새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피구가 시즌 내내 잔부상을 달고 다니던 사이 지단이 맹활약하면서 에이스의 자리가 지단에게 차츰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피구 역시 출전한 경기에서 만큼은 여전히 절륜한 기량을 선보이며 꿈에 그리던 빅 이어를 들어 올리는데 기여한 시즌이었다. 그리고 2001년 연말에는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다.

2001/02 시즌: 47경기(선발 45경기) 11골 1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8
27
1
7
9
챔피언스 리그
11
11
0
3
2
코파 델 레이
6
5
1
1
5
수페르코파
2
2
0
0
1
합계
47
45
2
11
17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충격적인 조별 리그 탈락을 겪었지만 2002-03 시즌에도 클럽에서는 여전히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다. 그리고 2년 만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탈환해낸다.

2002/03 시즌: 51경기(선발 50경기) 12골 1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3
33
0
10
14
챔피언스 리그
15
15
0
2
3
코파 델 레이
1
0
1
0
0
슈퍼컵
1
1
0
0
1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1
합계
51
50
1
12
19

2003-04 시즌에도 준수한 활약을 이어가지만 점차 피지컬의 하락과 30을 넘긴 나이에서 찾아오는 노쇠화 등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2003/04 시즌: 54경기(선발 52경기) 13골 1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6
34
2
8
11
챔피언스 리그
10
10
0
2
4
코파 델 레이
6
6
0
2
1
수페르코파
2
2
0
1
1
합계
54
52
2
13
17

2004-05 시즌은 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 감독이 부임하면서 피구는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 후보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피구는 불만을 품고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자유 계약으로 팀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레알에선 총 244경기 57골 91도움을 기록했다.

2004/05 시즌: 43경기(선발 36경기) 7골 1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3
26
7
3
7
챔피언스 리그
10
10
0
4
6
합계
43
36
7
7
13


2.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편집]


자신의 포지션에 젊은 피들이 들어오고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자 2005년 여름 자유 계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인테르로 이적하였다. 또한 그해 포르투갈 대표팀에 복귀하여 2006 독일 월드컵에 출전하여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에 나서 4위를 차지하였다.

월드컵 이후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은퇴한 피구는 2006-07 시즌 도중 호나우두데이비드 베컴 등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연이어 이적을 확정지은 가운데 피구 또한 차기 시즌 타 팀 이적을 기정사실화했는데, 놀랍게도 새로 입단하게 될 팀은 사우디아라비아알 이티하드. 당시 구단 유니폼 인증 사진까지 찍으면서 이적이 사실상 확정적인 상황이었으나, 이적 시장이 열리기 직전 피구 측에서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알 이티하드를 FIFA에 제소한 뒤 이적을 무효화했다.

그 이후 인테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다가 2008-09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15]

여담으로 이 시절 마시모 모라티와 함께 루치아노 모지와 심판들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했고, 이후 이것은 이탈리아 축구계의 최대 흑역사 중 하나로 이어졌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청소년 대회에서 낸 엄청난 퍼포먼스 때문에 국대에도 일찍 소집되었지만 포르투갈 자체가 부진하며 제대로 된 메이저 성적이 초반엔 없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축구에도 '골든 제너레이션'이라는 황금기가 찾아왔다. 후이 코스타, 파울레타, 비토르 바이아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성장했고 그중에서도 피구가 단연 돋보였다.

UEFA 유로 2000 조별 리그(16강)에서 잉글랜드, 독일, 루마니아라는 죽음의 조에 속하지만 모두 다 박살내며 3승으로 8강에 올랐고 8강에서 터키를 상대로 2-0으로 승리한다. 하지만 4강에서는 프랑스를 만나 누누 고메스가 선제골을 넣었으나 앙리지단에게 연달아 골을 내주고 2-1로 역전패한다. 당시 연장 후반에 프랑스의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는데 피구는 주심에게 거칠게 항의하다가 키커인 지단이 페널티킥을 차지도 않았는데 필드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경기는 지단의 페널티킥 성공과 함께 골든골 룰로 종료. 물론 피구 본인은 대회 내내 뛰어난 퍼포먼스로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되었다.

그런 좋은 기세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한다. 당시 지역 예선에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에드가 다비즈, 야프 스탐,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초호화 멤버였던 네덜란드아일랜드와 협공하여 탈락으로 몰아넣었다. 본선 조별 리그(32강)에서 폴란드, 대한민국, 미국과 같이 한 조가 된 포르투갈은 첫 경기에서 어이없게 미국에게 3-2로 패배한다. 그리고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파울레타해트트릭으로 4-0으로 승리하지만, 한국과의 경기에서 송종국에게 피구는 꽁꽁 묶였고, 결국 박지성의 결승골로 1승 2패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심지어 전반 내내 송종국에게 너무 심하게 털려서 후반전에는 우측으로 갔는데, 정작 거기서도 이영표에 의해 지워지며 팀 동료 세르지우 콘세이상과 함께 투명인간이 되어 버렸다. 본인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굴욕적인 경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자국에서 열린 UEFA 유로 2004때는 이미 나이가 30대 초반의 노장 선수가 되었다. 주장 완장까지 찬 피구는 조별 리그(16강)에서 그리스, 스페인, 러시아를 상대로 2승 1패로 올라간다. 8강에서는 승부차기잉글랜드를 꺾었고 4강에서는 네덜란드를 2-1로 꺾는다. 그렇게 결승에서 만난 팀이 돌풍의 그리스였으며, 결과는 그리스의 기적적인 1-0 승리였다.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황금세대의 찬란한 결말을 기대했던 포르투갈 포함 전 세계 축구계는 그야말로 멘붕이었고, 피구는 다시 한 번 물을 먹어야 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은 조별 리그(32강)에서 멕시코, 앙골라, 이란을 모두 완파하고, 16강에서 우승 후보 네덜란드를 1-0으로 잡아내고,[16] 8강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황금 세대 잉글랜드까지 꺾는 등 우승 후보의 모습을 보이며 4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4강에서 동갑내기인 지네딘 지단이 이끌던 프랑스와 맞대결을 펼치며 결국 지단의 페널티킥 결승골 한 방으로 탈락하고 만다. 이 경기는 국내외 축빠들에게 지단과 피구의 마지막 맞대결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으나, 결과는 고작 1-0으로 좀 싱겁게 끝났다.[17] 이어 홈팀 독일과의 3위 결정전에서도 패하며 4위를 차지했다. 그래도 피구 본인은 3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며 마지막 월드컵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18]


4. 플레이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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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그 날 일(경기 결과)에 일희일비 연연할 필요 없어요. 다음에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 2010년 잡지 포포투 인터뷰에서


전성기 시절에는 클래식 윙어로 뛰었고, 말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러닝 크로스에 매우 능한 월드 클래스 드리블러였고, 클래식 윙어였음에도 날카로운 패스와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갖춘 데다가 중거리 슛도 곧잘 넣었으며 날카롭게 감아 차는 프리킥 능력까지 훌륭했다. 그야말로 만능 선수.

특유의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측면과 중앙을 넘나들며 활동 범위를 폭넓게 가져감으로 플레이의 유연함을 살렸고, 크로스, 패스, 슈팅을 잘 선택하여 측면을 지배하였다. 윙어로서 한순간에 치고 나가는 속도 및 발밑 스킬과 트릭, 완급 조절을 통한 짧게 치는 돌파에도 능했다.

피구가 얼마나 만능이었는지에 대한 근거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2000년대 초반 피파 시리즈는 지금의 축구 게임처럼 세부적인 스탯 배분이 없었기에 각종 항목을 7점 만점으로 계산했는데, 피구는 여기서 모든 항목 7점을 받은 선수였다. 피구와 더불어 동시대 최고의 선수였던 호나우두지네딘 지단조차 몇몇 부문은 6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비록 게임상이긴 하나 당시 피구가 받았던 평가가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키는 180cm로 축구선수로서는 보통의 체격이었지만 바디 밸런스가 뛰어났고, 사진으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강력한 다리 근육까지 가지고있어서 몸싸움 능력도 상당한 수준이라 상대 수비수와의 경합에서 밀리지 않았다. 이는 포르투갈 선수들, 특히 플레이메이커였던 후이 코스타의 신체 조건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상당 부분 만회해줬다.

피구는 무엇보다 기량의 유지가 꾸준했는데, 은퇴하기 직전까지 큰 기복 없이 리그 최정상급 플레이를 보여줬다. 30을 넘긴 이후에는 전성기 시절의 스피드와 드리블 돌파 대신 상대의 템포를 뺏는 움직임으로 효과적인 드리블을 성공시키는 모습이 늘어났다. 10년이 훌쩍 넘도록 꾸준한 출장수를 보여주면서도 리그 탑급의 플레이를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이만한 선수를 찾기 어렵다. 동시대 선수 중 라이언 긱스, 하비에르 사네티, 프란체스코 토티 정도를 제외하면 저만큼 오랜 기간 클래스를 유지한 선수가 없다.


5. 은퇴 후[편집]


으음... 예전에는 각 리그의 상위권 구단들 외엔 제대로 된 선수 육성 체계와 시설, 훈련 방법을 갖춘 구단이 드물었어요. 그러나 요즘(2010년대)은 많은 구단들이 그런 기반을 갖추고 있습니다.

- 2010년 잡지 포포투와의 인터뷰 내용 중[19]


2011년부터 인테르의 앰버서더를 역임했다.

2011년 말에 "바르사를 떠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가 고급스러운 구단이라서다"라는 인터뷰를 하면서 또 바르셀로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2013-14 챔피언스 리그 16강 추첨식에서 바르셀로나의 상대로, 조별 리그 2위를 차지한 팀 중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맨체스터 시티를 뽑은 후 "나이스 매치"라는 발언을 하는 한편, 레알 마드리드의 상대로는 가장 쉬운 상대인 샬케를 뽑아 수많은 꾸레들을 충공깽 상태로 빠뜨렸다.

2014년 10월 26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 더비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승리하자 이런 멘션을 남겼다. 선수 시절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말을 아꼈던 것과 상반되는 모습이다. 2020년에는 바르셀로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메시가 팀을 떠나겠다고 해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 "와우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이적이군"이라는 멘션을 남겨 안 그래도 초상집 분위기인 바르셀로나 팬덤의 속을 긁었다. 다만 메시는 자신처럼 팀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이유는 메시의 천문학적인 바이아웃 때문. 하지만 1년 후 자유 계약 신분이 된 리오넬 메시는 평생을 함께한 팀인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된다.

2015년 1월 27일 FIFA 회장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 제프 블라터의 부패와 스캔들을 강력히 비판하며 나섰다. 하지만 당연히 낙선했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2000
  • FIFA 올해의 선수: 2001
  • UEFA 올해의 팀: 2003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6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2004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0-01, 2004-05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20]: 1998-99, 1999-00, 2000-01
  • 라리가 도움왕: 1996-97, 1998-99
  • UEFA U-21 챔피언십 MVP: 1994
  • FIFA 100: 2004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0
  • ESM 올해의 팀: 1997-98, 1999-00
  • 옹즈 드 옹즈: 2000, 2001, 2002
  • 포르투갈 골든볼: 1994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 스포르팅 올해의 선수: 1994
  • 인테르 올해의 선수: 2006
  • 골든풋: 2011
  • IFFHS 레전드: 2016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RW 4위)
  • IFFHS 올타임 포르투갈 드림팀: 2022


7. 피구에 대한 말, 말, 말[편집]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는 바로 루이스 피구다.

미셸 플라티니


피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요한 크루이프


피구는 너무나도 훌륭한 선수이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다.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는 최고의 선수임에 틀림없다. 그는 발롱도르를 수상할 자격이 충분하다.

지네딘 지단


하얀 유니폼을 입은 피구의 모습이 익숙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펩 과르디올라


레알 마드리드가 지네딘 지단과 루이스 피구를 데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다른 스포츠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비셴테 리사라수


포르투갈전이나 레알 마드리드전에서 루이스 피구와 함께 경기하는 것은 나에겐 명예롭고 자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내가 닮고자 하는 모델이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항상 연구하고 있다.

호아킨 산체스


피구는 전성기의 마라도나와 비슷하다.

후이 코스타


유벤투스에 지단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는 피구가 있다.

바비 롭슨


피구는 환상적인 선수다. 매우 지능적이고 승부욕이 강하다.

루이 판 할


그에게 행운을 빈다. 다만, 포르투갈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을 때에 한해서 말이다.

아벨라르도



8. 기타[편집]


  • 음악(, )을 좋아하며 특히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한다. 휴식 시간에는 자주 직접 기타 들고 퀸 노래들을 부르기도 한다.

파일:Luís_Figo_family.jpg
  • 미모의 부인과 결혼해 슬하에 딸만 셋을 뒀는데, 부모님이 둘 다 선남선녀라 그런지 딸들의 미모도 모델급이다. 정작 피구의 부인은 처음 만났을 때 피구가 축구선수인 줄 몰랐었다고... 20년만에 재회한 박지성과 자녀 얘기를 하다 1남 1녀를 둔 박지성에게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게 좋지. 난 노력해봤는데도 자꾸 딸만 낳길래 포기했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 위 문단에서도 한 차례 서술한 적이 있지만, 피파 2002 게임에서 능력치가 전부 만렙인 7이다. 이 당시에는 능력치가 세분화되지 않아서 항목도 적었고 최고치가 7이었다.

  • 빈곤 퇴치 활동을 위한 피구 재단을 만들어서, 매년 자선 경기를 벌이고 있다. 유니세프와 연동하여 경기를 하기도 하고, 벤피카와 붙기도 하고, 7 대 7로 풋살에 가까운 형태의 경기를 하는 등 다양하다. 피구의 인맥에 자선 경기라는 것도 엮여서 은퇴한 선수건 현역 선수건 꽤나 유명한 선수들이 출장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TV 중계를 하기도 한다. 친선 경기이므로 피구와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미하엘 슈마허가 참가한 경우도 있다.

  • 일식 매니아다. 한때 바르셀로나에서 일식집을 경영한 적도 있다. 그래서 2002 월드컵 때도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경기하게 된 것을 아쉽게 여겼다고 한다.


  •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전이 끝나고 유상철이 유니폼 교환을 제의했는데, 속이 상했는지 거절했다.


  • 마시모 모라티 당시 인테르 구단주와 함께 칼초폴리의 최초 고발자였다. 루치아노 모지 당시 유벤투스 단장이 심판 대기실에 들어가는 걸 봤다고 말했다고. 안 그래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말이 많던 유벤투스는 피구의 구체적 증언으로 인해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 바르셀로나에서 뛰던 당시 골 때리게도 펩 과르디올라와 열애설이 있었다고 한다. # 두 사람 다 주장단이기도 했고 숙소에서도 룸메이트였기 때문에 터진 루머라나. 두 사람 다 결혼하고 나서는 열애설이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파일: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200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 5위에 이름을 올렸다.

  • 2022년 8월 25일에 바르샤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과정을 다룬 다큐가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제목은 루이스 피구 사건: 세기의 이적

  • 2022년 11월, 골때리는 그녀들에 출연해 박지성과 오랜만에 재회하는 한편, 아주 젠틀하면서 소탈한 매력을 뽐내며 호평을 받았다. 딸바보. 이후 박지성과는 감독으로서 20년만에 다시 맞붙게 되었는데, "이게 나의 감독 데뷔 경기이자 은퇴 경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는 위트 있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2002년 당시 자신의 팀 동료이자 당시 한국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파울루 벤투에 대해서 "선수 시절부터 우리 중 최고의 지략가였다. 장차 좋은 감독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라고 극찬했다. 또 한국어 발음에는 F발음이 없어서 F로 시작하는 외래어 단어들을 모두 P발음으로 발음하는 것을 몰랐기에 처음에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구라고 발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1] 물론 요즘에야 이정도 금액은 수비수나 골키퍼가 이적할때도 나오는 수준이지만 2000년 이전까지 유럽축구 시장에선 시장가격을 아득히 뛰어넘는 액수였다. 피구 이전까지 사상 최고액 이적료는 1999년 비에리의 4650만 유로였고 불과 3년 전 발롱도르 수상자이던 호나우두의 이적료는 2800만 유로였다, 때문에 누구도 6000만 유로를 진짜로 낼 거라곤 상상하기 힘들었고, 누군가가 등장하기 전까진 업계관계자들조차 이 계약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조차 못했다.[2] 90년대 말부터 유럽축구는 유럽 경제가 호황을 맞고 아시아, 미국, 아프리카 등 당시로서는 축구의 변방이던 지역으로 중계권을 수출하며 적극적으로 진출한 덕에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었고 이적료 또한 가파르게 오르는 중이었다. 그 전까지는 세리에 A가 유럽 최대의 축구시장으로 통했지만 레알의 갈라티코스 이후로 라 리가가 최대의 시장으로 떠올랐다.[3] 헌데 말도 안되는 바이아웃을 지불하여 선수를 영입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2017년 8월 바르셀로나 선수였던 네이마르를 PSG가 바이아웃 2억 2,200만 유로(약 2,900억)을 지불하여 영입한 것. 1억 5백만 유로(1,300억)으로 역대 1위였던 폴 포그바의 기록을 단숨에 2배 이상 넘겨버렸다.[4] 역으로 바이아웃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을 주고 영입하기도 한다. 바이아웃을 통한 이적 역시 클럽 간의 계약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라도 협상과정을 거치는데, 규모가 작은 클럽에서 갑자기 시장가치가 폭등한 유망주가 나온다거나 하면 원 소속구단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이적료를 올려주는 경우가 있다.[5]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에서의 피구 이적비화에서 공개된바에 따르면 푸트리는 일부러 베이가가 말도안되는 소리말라고 전화를 끊었음에도 가능성이 있는것처럼 거짓으로 전화하는 척을 페레스 앞에서 했다고 한다. 그러곤 수수료 1000만유로를 요구한다고 대담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페레스는 500만유로를 제안했고 600만유로에 합의를 본 푸트리는 베이가에게 "이 친구야 자그마치 수수료가 600만 유로야!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이런 기회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어!"라고 말해 설득했다고 한다.[6] 이때의 바이아웃 금액에 대해서 축구계에 몸 담은지 30년이 다 되어갔던 후안 가스파르트 당시 회장은 그 누구도 이 가격을 낼 수 없다고 확신했고 베이가와도 바이아웃 수표를 가져오면 그때부터 협상을 해주겠다고 큰소리쳤으며 이적료를 내겠다는 클럽의 정체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도 없이 피구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계약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7] 넙죽 받은 것처럼 서술되었지만 피구는 실제로는 베이가를 설득해 레알 마드리드가 제안한 기존 주급의 4배라는 거액의 계약에 근접하도록 바르셀로나 회장선거 당시에 후보들과 임원들에게 접근해 설득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아웃 이야기를 듣고는 말도 안되는 소리말라고 거짓말로 치부했다고. 피구는 페레스의 제안을 임금을 올리려는 거짓말로 치부하는 후안 가스파르트 당시 부회장에 염증을 느꼈고 이적을 진행해달라고 베이가에게 부탁했다고 한다.[8] 후일 피구가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바로는 이미 계약적으로 연봉 협상이 끝났으니 계약 갱신에 대해서 더 이상은 협상 생각이 없다는 투로 자신에게 못박은 것이 몹시 못마땅했다고. 이때문에 피구는 바르셀로나가 자신을 팬들의 사랑만큼 대우하지 않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자신의 짧은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그 모든것이 사실인지는 개개인의 판단의 몫이지만.[9]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인간의 창의성이 이토록 대단하구나 싶은 온갖 다채로운 욕설들이 난무했다고 한다. "배신자 유다" 정도면 귀여운 표현이었다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독실한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유다라는 말은 절대로 가볍게 나오는 말이 아니다. 한국말로 어감이 통하게 의역하자면 어린 학창시절 대충 고자질하던 급우를 쪽바리니 일러라 일러라 일본놈이니 강도높은 혐일 용어랑 섞어 욕하는걸 생각하면 된다.[10] 대신 레알 갈 때도 갑자기 이적해버렸고 레알을 나간 이후론 인테르의 라이벌 AC 밀란으로 이적하는 바람에 인테르 팬들이 '너 같은 놈은 관광으로라도 밀라노에 오면 안 된다'는 걸개를 걸어 분노를 표하긴 했다.[11] 어느 정도냐면 당시 피구는 바르셀로나의 아이콘이었고, 혹자는 그 실력과 상징성 때문에 바르셀로나가 곧 피구라고 할 정도였다. 이적하고 바로 보여준 미친 활약 때문에 당시 팀 동료였던 펩 과르디올라마저도 어디서 데려온 거냐며 크루이프에게 물어볼 정도였다고. 그 상징성은 오늘날 메시가 2010년대 중반까지 보여준 것에 비견될 정도였다. 당시 스페인 뉴스는 물론 유럽에서 피구의 활약과 상징성이 심심치 않게 다뤄졌다.[12] 뒤의 푸욜을 보면 관중들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고 있다.[13] 펩도 후일 밝히기로 여러가지로 피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워낙 절친했던 탓에 감정적으로 격양돼 이적 당시 울먹이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팬들의 반응이 지나치게 격하기도 했다. 경력이 오래된 축구 관계자들도 이런 광경과 분위기는 처음이었다고 한다.[14]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어떨지, 운영 파탄으로 인한 막대한 적자로 성골이자 상징 그 자체였던 리오넬 메시를 잃어먹은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가 이견의 여지 없는 바르셀로나 역대 최악의 회장이 되었다.[15] 1년만 더 뛰었으면 트레블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하고는 다르게 레알 시절에 빅 이어를 들어올린 적이 있다는 게 다행.[16] 다만 네덜란드전은 일명 '뉘른베르크의 전투'라고 불리울 정도로 이번 대회에서 상당히 지저분한 경기였다. 자세한 것은 2006 FIFA 월드컵 독일/16강/포르투갈 vs 네덜란드 참고.[17] 이 이전에도 유로 2000에서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와 붙었으나, 그 경기에서도 지단의 페널티킥 골든골 하나 때문에 4강에서 멈춰야 했었다. 피구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결국 지단을 넘어서지 못했다.[18] 여담으로 피구의 은퇴 이후 포르투갈은 유로와 달리 월드컵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이후 후배 호날두가 주축이 된 이후 월드컵 최고성적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황금세대라 불릴만큼 역대급 전력을 구축하여 8강 진출까진 성공했으나 끝내 4강에는 올라가지 못했는데, 이는 새삼 포르투갈에 있어서 피구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실감케 한다. 그래도 이런 황금세대가 만들어졌으므로 다음 월드컵도 생각보다 미래가 밝다.[19] 당시 피구는 선수 생활을 마친 인터 밀란 구단에서 일하고 있었다.[20] 돈 발롱 어워드[21] 이 때 하는 대사는, "나는 러브 유나이티드를 위해서 경기를 합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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