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산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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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산체스의 역임 직책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주장

호르헤 몰리나
(2014~2016)

호아킨
(2016~2023)


안드레스 과르다도
(2023~ )


호아킨 산체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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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파일: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심볼.svg







스페인의 前 축구 선수


이름
호아킨 산체스
Joaquín Sánchez
본명
호아킨 산체스 로드리게스
Joaquín Sánchez Rodríguez
출생
1981년 7월 21일 (42세)
스페인 엘푸에르토데산타마리아
국적
[[스페인|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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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79cm / 체중 75kg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소속
선수
베티스 데포르티보 발롬피에 (1999~2000)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00~2006)
발렌시아 CF (2006~2011)
말라가 CF (2011~2013)
ACF 피오렌티나 (2013~2015)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015~2023)
국가대표
51경기 4골 (스페인 / 2002~2007)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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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클럽 경력
2.5.1. 2018-19 시즌
2.5.2. 2019-20 시즌
2.5.3. 2020-21 시즌
2.5.4. 2021-22 시즌
2.5.5. 2022-23 시즌
2.6. 은퇴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수상
5.1. 우승
5.2. 개인 수상
6. 여담
6.1.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죠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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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국적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국내에선 2002 한일 월드컵 8강 한국전에서의 실축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1기[편집]


1999년 스페인 유스 대회에서 베티스 B의 우승을 이끌고 2000년 9월 3일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 시즌 38경기 3골을 기록한 호아킨은 1군에서도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강등된 팀의 1부 승격에 큰 공헌을 하였다.

2002년 이후 베티스에서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중하위권 정도의 빅 클럽이 못되는 베티스의 중흥을 이끌지만 호아킨은 베티스에 대한 애정이 강했으며, 베티스 역시 자기 팀의 프랜차이즈이자 에이스인 선수를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호아킨의 영입에 가장 근접했던 팀은 바로 지구방위대로 명성을 떨치던 레알 마드리드 CF였다. 호아킨 자신이 루이스 피구를 그렇게 존경하기에 레알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하였지만 레알이 선택한 건 바로 데이비드 베컴이었다.[1][2]

어쨌건 이적도 물건너 간 후, 심한 기복과 함께 상당히 지지부진하며 유로 2004에서도 부진한 플레이와 함께 까이면서 묻히나 싶었지만, 2004-05 시즌에 다시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시즌 도움왕에 등극함과 함께 베티스를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한다. 시즌 MVP를 줘도 아깝지 않는 엄청난 활약이었다. 이때는 아직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가 국내에선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는데, 단 1시즌 뿐이었지만 호아킨은 이미 최정상을 한번 찍어본 선수다.

이러한 대활약과 함께 수많은 빅 클럽들이 러브콜을 보내었으며, 특히 부유한 첼시 FC에서 정말 강한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높으신 분들이 직접 행차하셔서 이적을 추진하였을 정도. 하지만 호아킨은 그런 러브콜을 다 거부하며 베티스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과연 챔스에서도 호아킨의 현란한 플레이가 먹힐지 주목을 받았으나...

챔스도 나갔으면서 선수보강이 부족하여, 특히 호아킨의 공백을 메울 수가 없었기에 호아킨은 매 경기 선발출전하면서 혹사를 당하며 정말 지지부진한 성적을 거두게된다.

그렇다보니 베티스는 팀의 아이콘인 호아킨을 이적시키는 초강수를 두게 되며, 호아킨은 새로운 도전을 위하여 정든 베티스를 떠나 빅클럽 발렌시아 CF로 이적하게 된다. 이적확정 후 마지막 인터뷰에서 호아킨이 눈물을 흘리며 남긴 "저는 떠나지만 영원한 베티코(베티스의 팬)입니다"라는 인터뷰가 워낙 인상깊어서 발렌시아 팬들 사이에서 강제로 빼내온 것도 아닌데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2.2. 발렌시아 CF[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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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에 25m 유로로 발렌시아 CF로 이적하였다. 그렇게 첫 시즌에 리그 35경기 출장 5골 3도움, 총 48경기 5골 5도움을 기록했다. 마침 발렌시아의 왼쪽 윙에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비센테 로드리게스가 있었기 때문에 팬들은 게임에나 나올 전설의 윙어라인인 좌센테 우아킨을 기대했지만... 말네스카도 그렇고 전설의 라인은 꼭 가동이 제대로 안된다 비센테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호아킨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이면서 팀내 고참급 선수였던 앙굴로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후반기로 갈수록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특히 챔피언스 리그 8강 첼시 FC와의 경기에서 애쉴리 콜을 상대로 좋은 활약을 하며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의 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3] 그렇게 호아킨은 시즌 막바지로 갈수록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팬들로 하여금 호아킨이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일 것이라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2007-08 시즌 초반 성적부진으로 키케 플로레스 감독이 경질되고 희대의 먹튀 로날드 쿠만이 감독으로 오면서 흑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때 호아킨의 부진이 정말 두드러졌는데, 쿠만이 호아킨의 플레이를 두고 30유로 수준이라고 디스한 것부터 시작하여[4] 본 포지션이 오른쪽 윙어인 호아킨을 왼쪽 윙이나 원톱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는 등 정말 별 방법으로 다 굴려졌다.[5][6] 이 저조한 시즌의 성적은 리그 34경기 3골 4도움, 총 56경기 7골 6도움.

쿠만 감독이 경질되고 2008-09 시즌에 부임한 우나이 에메리 감독의 지휘 아래 호아킨은 다시 준수한 활약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다비드 실바의 부재 시에는 플레이메이커 역할까지 맡을 정도로 신임받았으나, 헤타페 CF에서의 인상적인 시즌을 보낸 뒤 바이백 조항으로 팀에 복귀한 파블로 에르난데스가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호아킨은 다시 힘겨운 주전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즌 호아킨의 성적은 리그 31경기 4골 6도움, 총 40경기 6골 9도움.

2009-10 시즌에 들어서면서 에메리 감독은 후안 마타와 함께 다비드 비야를 측면에서 지원해줄 자원으로 호아킨에 비하면 측면에서의 파괴력이 떨어지나 더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한 파블로를 더 선호했고, 호아킨은 그의 날카로운 크로스 능력을 더 잘 살릴 수 있는 장신 공격수 니콜라 지기치와 기용되는 일이 잦았다. 이런 상황에 격분한 호아킨은 결국 훈련장에서 에메리 감독을 상대로 패드립(...)을 시전하는 등 관계가 악화되나 싶었지만 어찌어찌 해결되었다. 이 시즌 호아킨의 성적은 리그 28경기 2골 4도움, 총 45경기 7골 6도움.

2010-11 시즌 팀내 3번째 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비야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등번호 7번을 부여받게 되었고 파블로가 부진한 사이 다시 주전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특히 11월에는 라리가 돌파 성공률 순위 1위에 랭크되기도. 시즌 성적은 리그 30경기 4골 7도움, 총 38경기 5골 9도움. 그래도 아직 살아있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에 말라가 CF와의 링크가 지속적으로 뜨더니 결국 말라가 이적에 합의했다.


2.3. 말라가 CF[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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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시즌이 끝난 후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선수를 영입하고 있는 말라가 CF가 영입하면서, 호아킨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발렌시아 CF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2011-12 시즌에는 리그에서 23경기에 출전해 2골 3도움을 기록하며 이전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이 시즌에 팀은 프리메라 리가 4위를 차지해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2012-13 시즌에는 AC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해 1-0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 크게 공헌하는 등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8강전에서는 1차전 홈에서 0:0 무승부로 마쳤지만, 2차전 원정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말라가의 4강행 신화를 써내려가나 싶었지만 후반 추가시간에 마르코 로이스와 펠리페 산타나에게 연속골을 내주며 팀은 2:3으로 분패했다. 그래도 이 시즌 호아킨은 리그에서 34경기에 출전해 4골 8도움, 총 46경기 8골 10도움을 기록하여 지난 시즌보다 좋은 활약을 보였다.


2.4. ACF 피오렌티나[편집]


2013-14 시즌을 앞두고 말라가의 재정 악화로 인해 2013년 6월 13일에 세리에 A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되었으며, 첫 시즌에는 리그에서 26경기에 출전해 2골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14-15 시즌에는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을 선보이며 피오렌티나의 중심 선수로 거듭났으며, 피오렌티나 또한 호아킨의 활약과 맞물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4-15 시즌이 끝난 상황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레알 베티스로 복귀를 고려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결국 레알 베티스로 간다는 오피셜이 떴다.#


2.5.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2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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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이적시장 막바지였던 8월 31일에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2006년 이후 9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계약 기간은 3년.

복귀 이후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루벤 카스트로와 함께 팀을 이끌었다. 베티스가 이기는 경기에서는 거의 항상 이 두 베테랑이 뭔가를 해주는 것이 공식과도 같은 상황. 16라운드 기준으로 공격포인트는 1골 2도움을 기록 중이지만 실제 경기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스탯 그 이상이다.

2016-17 시즌에는 찰리 무손다를 밀어내고 주전으로 뛰었고 결국 무손다는 첼시로 돌아갔다.

2017-18 시즌에도 여전한 활약으로 시즌 후에 AS 선정 라리가 베스트 XI에 뽑혔다.


2.5.1. 2018-1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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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9 시즌 9월 3일 지역 라이벌 세비야를 상대로 벌인 안달루시아 더비에서 결승골을 넣어 팀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11월 12일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팀의 2번째 득점을 터트린 후, 세르히오 카날레스와 교체되었고, 팀은 4:3으로 승리하였다.

레알 마드리드 CF전에서는 개인 통산 라리가 500번째 경기를 치렀다.

2월 7일 코파 델 레이 4강 1차전 발렌시아전에서는 코너킥 키커로 나서 일명 바나나킥을 선보이면서 득점을 기록했다. 이 날 호아킨은 드리블 돌파 3회(경기 2위), 키패스 2회(경기 최다), 드리블 성공률 100%, 태클 성공 1회, 가로채기 성공 4회(경기 최다) 등 공수 양면에서 빼어난 기록을 남겼다. 팀도 3-2 승리를 따냈다.

2월 10일 기준으로 이번 시즌 윙어, 공격수, 윙백 등 다양한 포지션을 오가며 16경기 선발, 8경기 교체 출장을 통해 3골 1도움을 기록했다.

24라운드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전에서는 후반 23분 교체 투입되면서, 이날 경기 출전으로 라리가 개인 통산 505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그러면서 차비 에르난데스와 함께 라리가 최다 출전 부문 공동 7위로 올라섰다.

나이가 있어서 가끔 선발로 이곳저곳(세컨탑, 윙백) 나오지만, 나올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 성적은 리그 30경기 6골, 총 43경기 7골 3도움.


2.5.2. 2019-20 시즌[편집]


라리가 6라운드 레반테와 경기에서 팀의 3골에 모두 기여하고 키패스를 7회나 성공시키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3:1 승리에 공헌했다.

라리가 16라운드,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홈 경기에서 전반 21분만에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그.아.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기록은 38세 140일로 종전 기록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1964년 기록 37세 255일을 갱신하였다. 참고로 이 해트트릭은 호아킨의 커리어 첫 해트트릭이며 또한 라리가 최고령 해트트릭이다. 득점 장면들을 보면 한동안 호아킨을 못 본 팬들이 "이게 비야야 호아킨이야..." 할 정도로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발렌시아, 마요르카전에 이어 이날까지 3경기 연속 득점했다.

2019년 12월 26일 재계약을 맺었다.

4월 29일 기준으로 시즌 28경기 10골 2도움을 기록 중이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베티스 복귀 후 시즌을 거듭할수록 활약상이 더욱 좋아지고 있다. 공격 포인트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복귀 첫 시즌이던 2015-16 시즌에는 총 1골 5도움에 그쳤으나, 2016-17 시즌과 2017-18 시즌에 각각 3골 4도움과 4골 7도움을 기록하더니, 지난 시즌 7골 3도움에 이어 이번시즌에는 두 자릿 수 득점을 기록 중이다. 호아킨의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시즌 두 자릿 수 득점을 기록한 시즌은 2002-03 시즌과 이번 시즌이 유이하다. 곧 불혹을 바라보는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

코로나 19로 인해 아리츠 아두리스가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하면서, 현재 라리가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라리가 37라운드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전에서 선발출전하여 72분을 소화했는데, 이 경기를 통해 개인 통산 라리가 551번째 경기를 치르면서 라울 곤살레스의 550경기를 넘어 라리가 역대 최다 출전 부문 2위로 올라섰다.


2.5.3. 2020-21 시즌[편집]


라리가 5R 발렌시아 CF전에서 19분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세르히오 카날레스에게 패스를 건내주며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이후에도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양 팀 통틀어 가장 많은 8회의 기회 창출을 기록했다.

12R CA 오사수나전에서는 경기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82분에 조커로 투입되었고 90+1분에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후안 미란다를 보고 우측면에서 땅볼 크로스를 연결하며 추가골을 어시스트했다.

20R 레알 소시에다드전에서도 0:2로 뒤지고 있는 78분 조커로 교체 출전하여 투입된지 3분 만에 우측 하프 스페이스에서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있는 카날레스의 머리에 정확히 전달되는 택배 크로스로 만회골을 어시스트했고, 90+2분에는 크리스티안 테요의 컷백을 받아 문전 앞에서 침착하게 마무리하며 동점골까지 넣으며 팀을 패배의 위기에서 구했다. 그아호

리그에 꾸준히 출장하고 있지만 20R까지 리그 1골 3도움을 기록하고 있다. 1월 26일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코파 델 레이 16강 경기에서 쐐기골을 어시스트하며 박문성 해설위원으로부터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죠!를 이끌어냈다.

26R 알라베스전에서 역전골을 넣어 3:2로 승리했다.

31R 발렌시아전에서는 굉장한 활약을 보여주며 2도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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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R 그라나다 CF전에서도 선발 출전하면서 레알 베티스 통산 461경기 출장을 기록, 레알 베티스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7]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호아킨은 자신의 최다 출전 기록에 대해

461경기는 쉽지 않은 숫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 현역 선수로 이 팀에 있다는 것이다. 베티스가 자랑스럽고 기회를 주는 것에 감사하다. 정말로 기쁜 것은 내가 아직 팀을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라커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음악을 틀어놓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시즌 종료 직후 레알 베티스와 계약을 2021-22 시즌까지 연장했다.


2.5.4. 2021-22 시즌[편집]


2021년 8월 27일, 라리가 데뷔 20주년을 맞이했다.

리그 9R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전에서 64분에 교체 투입되어 경기 종료 직전인 89분에 컷백으로 이글레시아스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시즌 첫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은퇴 의사를 밝힘에 따라, 호아킨이 현역으로 뛰는 마지막 시즌이 될 전망이다.

4부 리그 팀인 알리칸테 CF와의 코파 델 레이 1R 경기에서 1골 2도움의 화끈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4:0 대승을 견인했다.

UEFA 유로파 리그 32강 1차전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전에서 킥오프 7분 만에 귀도 로드리게스의 머리에 정확히 떨어지는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다.

2021-22 시즌에는 유스 출신인 로드리 산체스와 후안미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벤치에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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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 델 레이 결승전 발렌시아 CF전에서는 86분에 교체 출전하여 5명을 뚫어내 반칙을 유도하는 드리블을 선보이는 등 준수한 경기력을 보였고, 승부차기에서 2번째 키커로 나와 골망을 가르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발렌시아 시절 07-08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이후 14년 만의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 또한 이 우승으로 호아킨은 선수 말년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우승 이후에 인터뷰에서 20년 전 한국전 승부차기 실축을 언급했을 정도로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듯하다.

코파 델 레이 우승 후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인지, 현역 생활을 1시즌 더 이어갈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베티스와 1년 재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내년에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현재 유럽 5대 리그에서 뛰고 있는 필드 플레이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가 되었다.[8]

나이가 나이인지라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는 못했으나 출전할 때마다 녹슬지 않은 드리블 실력을 선보이며 90분당 드리블 성공 3.4회를 기록, 불혹의 나이에 라리가 90분당 드리블 성공 횟수 전체 5위에 랭크되는 위엄을 보였다.


2.5.5. 2022-23 시즌[편집]


2022년 7월 6일, 레알 베티스와 1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2022년 9월 15일, 유로파 조별리그 PFC 루도고레츠 라즈그라드전에서 후안 미란다의 어시스트로 팀의 두 번째 득점을 해내면서 41세 56일로 유로파 리그 최고령 득점 기록을 세웠다. 결과는 3-2 승리.

리그 34R 라요 바예카노전 90분에 교체로 출전하여 3대1로 달아나는 쐐기골을 어시스트했다. 만약 나머지 4경기를 모두 출장하게 된다면, 라리가 최다 출장 타이 기록을 세우게 된다.


2.6. 은퇴[편집]


현지 시간 기준 2023년 4월 19일, 시즌 종료 후 은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인 38R 발렌시아 CF전에 선발 출전하면서 스페인의 전설적인 골키퍼 안도니 수비사레타라리가 역대 최다 출장 기록(622경기)과 타이를 이루게 되었다. 59분간 경기를 소화한 뒤 교체되었고, 후반전이 시작할 때와 교체될 때, 베티스와 발렌시아 양 팀의 팬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둘러본 뒤 키스를 하며 24년 간의 커리어를 마무리하였다.



시즌 종료 직후인 2023년 6월 6일 은퇴 기념 경기를 열었는데 라울 곤살레스, 이케르 카시야스, 뤼트 판니스텔로이, 세르히오 라모스, 호베르투 카를루스, 하비에르 사비올라,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페페 레이나, 산티 카솔라, 가이스카 멘디에타, 다비드 알벨다, 줄리우 밥티스타, 구티, 루벤 카스트로, 데니우송 등 초호화 인맥들이 참가해 화제가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베티스에서의 활약으로 2002년 2월 13일 포르투갈과의 A매치에서 첫 데뷔하였고,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최종 명단에 선발되었다.

대한민국과의 준준결승전에서 호아킨은 선발 출전하여 카를레스 푸욜과 오른쪽 측면을 계속 공략하면서 대한민국을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다. 히딩크호의 월드컵 모든 경기 중 가장 전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경기였고 한국은 시종일관 끌려다녔다. 개인기량 차이는 물론이고 한국은 포르투갈전에 이어 16강전에서 이탈리아와 연장까지 가는 혈투를 펼치며 체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심했고 스페인은 한국보다 이틀을 더 쉬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연장전에서 호아킨의 골라인 크로스에 이어 골망을 흔들었으나, 오심 판정으로 무효되었다. 골라인 아웃이 애매한데 부심은 휘슬을 불었고 휘슬 소리에 대한민국 선수단은 동작을 멈췄으나 모리엔테스는 일단 크로스를 받아서 밀어넣었다. 사후에도 판정에 필요한 정확한 사진이나 영상이 없어서 아웃이냐 아니냐를 어느 쪽도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전 정규시간부터 스페인 선수들도 한국 선수들에게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자세한 내용은 히딩크호/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스페인전 참조. 승부차기에서 네 번째 키커로 나와 이운재에게 막히며 실축했는데, 이는 양 팀 통틀어 유일한 실축으로 5위로 탈락하고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으로 진출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제일 인상깊었던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가 한국의 4강 진출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말았다. 상술한대로 2021-22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승부차기를 넣고 우승하자, 20년 전 한국전에 승부차기를 실축하던 것을 스스로 언급할 정도로 20년전 일이 잊혀지지 않은 듯하며,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귀국한 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그를 위로하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유로 2004[9]에도 참가했으나 호세바 에체베리아에 밀려 주전으로 뛰지도 못했으며 스페인도 조별리그[10]에서 그리스와 비기고 포르투갈에 패해 최종 10위로 광탈하여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11] 2006 독일 월드컵 3경기에 출장했으나 인상깊은 활약을 보이진 못했으며 발렌시아 이적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국가대표팀에서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유로 2008 지역예선 북아일랜드전에서의 3:2 충격패 이후에는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서 유로 2008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다.[12] 그리고 국가대표팀에서 다비드 실바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백업해줄 역할도 산티 카솔라헤수스 나바스에게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2010 남아공 월드컵 직전에 비센테 델보스케가 뽑겠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하였으나 그 직후 부상. 그렇게 헤수스 나바스가 대신 월드컵으로 가면서 대표팀과 멀어지게 된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페인은 월드컵을 들어올렸고 부상으로 낙마한 호아킨은 굉장히 아쉬웠을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클래식 윙어로 분류된다. 측면을 파고들어 크로스나 패스로 공을 중앙으로 전달하는 전통적인 윙어가 주된 플레이 스타일이다. 프로 초기부터 이미 오른쪽 측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플레이는 완성형 상태였다.

호아킨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풀백을 만나더라도 기복없는 측면 돌파 후 크로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준수한 피지컬, 빠른 주력과 완벽한 템포 조절로 상대의 허점이 생기면 과감히 밀고 들어가고 만약 상대 수비가 내려앉는다면 여지없이 각도를 만들어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린다. 무엇보다 이러한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능력은 피지컬이 다소 떨어진 커리어 후반기에도 측면에서 뛰는 것이 가능하게끔 한다.

그러나 측면을 고집하는 단조로운 플레이 스타일은 격변하는 현대 축구 흐름 속에서 치명적 단점으로 작용했다. 루이스 피구의 플레이메이킹이나 데이비드 베컴과 같은 경기를 지배하는 능력에 비교하면 경기 관여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또한 로베르 피레스를 필두로 인버티드 윙어의 시대가 열리며 클래식 윙어의 역할을 풀백들이 대체해 나가면서 주가를 올리던 호아킨에게는 그러한 단점들이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하지만 말라가에서 마누엘 펠레그리니 지도 하에 2선에서 위치를 가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플레이가 가능해졌으며, 피오렌티나에서 역시 2선 전 위치에서 뛸 수 있었다. 베티스에서 노장을 보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과거의 폭발적인 돌파와 스피드는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살아있는 킥력과 뛰어난 경기 흐름 리딩으로 2선의 좌우와 중앙에서 모두 플레이가 가능한 성공적인 말년을 보내고 있다.


5. 수상[편집]



5.1. 우승[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리저브)
  • 라리가 Breakthrough Player[13]: 2001-02


6. 여담[편집]


  • 호아킨이 위에 언급한 월드컵에서의 승부차기 실축의 여파인지 폐인 양성기로 유명한 풋볼 매니저 시리즈에서는 호아킨의 승부차기 능력치를 비교적 짜게 준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짜게 설정한 것도 대략 12 정도 수준이라 호아킨의 킥 능력에 비하면 낮은 편이지 마냥 낮기만 한 스탯도 아니었고, FM21 기준으로는 PK 능력치가 14라서 더이상 짜게 준다고 볼 여지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플레이를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부분이긴 하다.

  • 2022년 9월 15일 41세 56일로 유로파리그 최고령 득점기록을 세우자 2002 월드컵 8강전에서 실축한 그 선수가 이색 기록을 세웠다 식으로 JTBC 뉴스 등에 등장했다.[14]


6.1.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죠[편집]


호아킨을 두고 나오는 말 중에서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죠", 약칭 "그아호" 말이 있는데, 한국 축구계의 서브컬처[15]에서 2000년대 중반 앨런 스미스리즈시절세리에 7공주에 버금가게 많이 사용된 유행어로, 아이러브사커에서 호아킨vs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비교글이 올라오자 댓글이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죠'로 뒤덮인 것이 발단이 되었다.[16] 사실 그뿐만 아니라 '장난? 호아킨 쩝니다'라는 댓글도 꽤 임팩트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줄여부르기 편한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 쪽이 더 유행세를 탔다.

당시 호아킨은 베티스의 소년가장으로서 레알 이적이 가시권에 있었던 라리가 정상급 선수였고 호날두는 맨유에서 포텐이 덜 터져서 섹날두, 혼자우두 등으로 까이던 시절이라 그런 반응이 나왔던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아호 드립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던 2007년에 호날두가 제대로 터져서 발롱도르 2위를 먹으면서 그아호 드립은 완전히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후 괴물이 된 호날두와 호아킨은 물론 비교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호아킨이 유로2008 이후로 퇴물(...) 취급받자 호아킨을 옹호하기 위한 팬들의 발언으로 자리잡았다. 꽤나 굴욕적인 별명임에도 지금은 호아킨을 대표하는(?) 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호아킨이 나이를 먹으면서 이젠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40살을 바라보는 노장 중의 노장 반열에 들었음에도, 아직도 라리가 1부에서 통하는 클래스로 활약을 이어나가며 여러 기록을 경신할 뿐 아니라 베티스와 재계약까지 맺게 되면서, 이 말은 다시금 긍정적인 의미로 바뀌어 폼은 일시적이라도 클래스는 영원한 호아킨의 활약을 칭송하는 문장이 되었다.

2012년 10월 25일 챔스 경기 후에는 기자가 호아킨의 사진에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그래도 탈모는 못막아

종목도 나라도 다르지만 KBO 리그이호준에게 붙은 "인생은 이호준처럼"과 어느정도 유사한 문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본래 선수를 비하하는 의미[17]가 더 컸지만 시간이 지나 선수가 나이를 잊은 활약으로 클래스를 보여주며 긍정적인 문장으로 의미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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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식을 접한 호아킨은 정말 살빠지도록 울었다고 하는 후문이 있다.[2] 하지만 그래도 아직 2004-05 시즌도 시즌에 레알의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이 직접 언제 오냐고 하였을 정도.[3] 다만 발렌시아는 결국 탈락했다.[4] 호아킨은 이에 대항해 "당신이 여기 와서 가장 고민한 건 '저녁식사 때 무슨 와인을 먹을까' 밖에 없잖수?"라고 받아쳤다.[5] 하지만 이 흑역사로 인해 포지션 다양화를 장착하게 되어 각종 전술 변화 속에서 윙에서 미드필더, 원톱까지 다양하게 굴려지지만 어떤 위치에서도 제 몫을 해내는 만능형 선수로 거듭나게 되었다.[6] 첨언하자면 호아킨이 원톱으로 기용된 경기는 하필이면 친정팀 베티스와의 국왕컵 경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호아킨이 헤딩으로만 2골을 기록하며 발렌시아가 2:1로 승리했다.[7] 종전 기록은 베티스의 전설적인 골키퍼 호세 라몬 에스나올라의 460경기였다.[8]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같은 1981년생이지만 호아킨의 생일이 2개월 반 정도 빠르다.[9] 16개국 본선[10] 16강 조별리그[11] 재밌게도 이 두 나라는 결승에서 다시 격돌하게 되고, 그리스가 포르투갈을 꺾고 최초의 유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12] 문제의 북아일랜드전 충격패 이후 인터뷰에서 호아킨은 아라고네스를 비난하는 어조의 말을 남겨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 경기가 호아킨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13] 돈 발롱 어워드[14] 사실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의 실축 때문에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갔고, 지금도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로 프란체스코 토티는 은퇴 후 근황을 알리는 기사가 나오면 한일월드컵 16강전 때 퇴장당했던 선수였다는 사실이 헤드라인에 함께 적혀져 나온다.[15] 호날두가 떠오르던 시기의 피파온라인의 영향도 있다. 당시 오른쪽 윙포워드 내지 윙어 위치에 호날두냐 호아킨이냐는 올드 피온 유저라면 기억할 것이다.[16] DC 해축갤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는데 해축갤은 알싸를 까는 용도로 이 말을 자주 쓴 것이다.[17] "인생은 이호준처럼"은 원래는 FA 계약후 먹튀가 되어버린 이호준을 보고 "예쁜 와이프 만나 결혼 잘 하고 큰 돈도 손에 거머쥔 이호준이 진짜 인생의 승리자다"라는 식으로 비꼬는 의미의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