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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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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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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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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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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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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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2001 · 2002


서정원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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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10주년 베스트 XI
FW
샤샤
FW
나드손
}}}
}}}
GK
이운재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주년 레전드
18
박건하
13
산드로
14
서정원
22
고종수
29
곽희주
7
김진우
3
이병근
1
이운재
11
데니스
12
나드손






청두 룽청 감독

成都蓉城足球俱乐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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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서정원
徐正源|Seo Jungwon

출생
1970년 12월 17일[조기입학] (53세)
경기도 광주군[1] 중부면
(現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3cm, 67kg
직업
축구 선수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등번호
6 11, 14 27
학력
남한산초등학교 (1976~1982)
광주중학교 (1982)
이천중학교 (1983)
연초중학교 (1984~1985)
거제고등학교 (1985~1988)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88 / 학사[3])
가족
아내 윤효진
아들 서동훈, 서동재, 서동한
종교
불교
소속
선수
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1992~1997)[4]
RC 스트라스부르 (1997~1998)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9~2004)
SV 잘츠부르크 (2005)
SV 리트 (2006~2007)
코치
대한민국 U-20 대표팀 (2009)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9~2010)
대한민국 대표팀 (2010~2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2 / 수석 코치)
감독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3~2018)
청두 룽청 (2021~ )
국가대표
88경기 16골 (대한민국 / 1990~2001)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프로 이전 경력
2.2. 클럽 경력
2.3. 국가대표 경력
2.4. 기록
2.4.1. 대회 기록
2.4.2. 개인 기록
3. 플레이 스타일
5. 여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91016142857.316.jpg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K-리그 공식 설명 영상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을 맡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사키이즘 전술가다.

현재는 중국 슈퍼리그 청두 룽청의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프로 이전 경력[편집]


1970년 12월 17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現 광주시 남한산성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출생신고를 늦게 한 것인지 실제나이는 더 많다는 의견이 있다. 70년생인 김병지가 서정원을 선배라고 방송에서 말하고 68년생 하석주랑 서정원이 반말하는 사이다. 초등학교는 집 근처 남한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1969년생이랑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정확한 생년은 모르니 일단 프로필에는 조기입학으로 해놓았지만 69년생/정상입학 이거나 68년생/입학유예 의 가능성도 있다. 남한산초에선 교내 육상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다 광주중으로 진학했지만 축구부가 없던 학교를 떠나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길 원했다. 결국 집에서 다소 먼 거리에 있는 이천중으로 전학갔지만, 이천중은 전국체전에도 진출하지 못할 만큼 약팀이었다.

그러나 서정원은 당시 거제고 감독이었던 유기홍 감독의 눈에 들었다. 당시 김우중 회장 주도 아래 축구계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던 대우그룹의 투자를 받던 거제고의 산하 중학교가 연초중학교였는데, 좋은 자질을 보이던 서정원은 결국 고향인 경기도를 떠나 멀리 경상남도의 연초중학교로 전학갔고, 거제고로 진학했다. 육상선수 출신의 피지컬과 축구 재능이 합쳐진 그의 실력은 거제고 2학년부터 두각을 보였고, 1986년 대통령배에서 11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수상하는 등, 고교 최대어로 성장했다. 그러자, 당시 대우 로얄즈 안종복 단장과 이차만 감독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서정원을 즉시 프로로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의 반대에 부딪혔고, 대학 진학을 원하던 서정원은 여러 대학의 스카웃을 받았다. 고려대, 성균관대, 아주대가 가장 강력히 그를 원했다. 성균관대는 그의 동기 10명을 스카웃하겠다고 했고, 대우그룹의 지원을 받던 아주대는 대우 입단을 약속했다. 하지만 결국, 당시 이미 프로 못지 않은 전력을 갖췄던 고려대 88학번으로 입학했다.

이미 국가대표 선수였기에 학교보다 대표팀에 오랜 기간 있었지만, 홍명보, 김병수, 노정윤, 이임생 등과 함께 대학무대를 휩쓸며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후 91년 졸업한 뒤 유럽 진출을 노렸지만 군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1991년 12월 열린 K리그 드래프트 1번 지명권을 갖고 있던 1991 시즌 꼴찌 LG 치타스가 그를 지명했고, 프로 선수로 데뷔하게 됐다.


2.2. 클럽 경력[편집]



2.2.1. 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편집]


1992년 LG 치타스 소속으로 프로팀에 데뷔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FC 바르셀로나, 바이어 04 레버쿠젠 등의 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군대 문제 및 LG 치타스의 소극적인 이적 태도 때문에 해외리그 이적에 실패했다. 이때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던 데트마어 크라머[5]도 재능을 알아보고 독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놈의 군대 문제가 발목을 잡아 결국 1994년 4월,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다.[6] 그걸 해결하고 왔더니 서정원 측의 주장에 따르면 LG가 징징거리면서 선수를 놔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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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는 SL 벤피카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고 실제로 벤피카 소속으로 훈련을 같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벤피카는 서정원이 월드컵 아시아예선에 출장하지 않기를 희망했으나 대한민국 축구협회는 월드컵 예선이라서 이적동의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서 이적이 무산됐다. 당시에는 유럽 클럽 소속의 선수는 구단에서 A매치에 보내지 않을 수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실제로 차범근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할때 1986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단 1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당시 언론 기사에서는 당시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차범근은 국가대표로 호출하고 싶어서 벤피카 이적은 서정원이 속고 있는 것이라고 언론사에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한국 방송국과 신문사는 차범근의 말을 믿고 서정원이 벤피카에 입단을 구걸하러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게 사진의 모 언론사의 주장이었으며 그로 인해서 최종적으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국가대표 콜업을 거부한 이 건으로 인해 서정원에게 미운 감정을 가져서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서 이적이 무산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은 벤피카의 레전드 에우제비우홍명보를 만나면 서정원의 안부를 매일 묻는 것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벤피카의 9번 배번을 받고 정식으로 이적이 될 뻔한 게 맞던 것이었다. 전지 훈련도 같이 한 것도 그런 맥락. 벤피카에서도 서정원을 공식 선수로서 박물관에 이름을 올렸고, 2019년 겨울에 서정원 본인이 이 소식을 듣고 직접 벤피카에 갔더니, 관계자가 먼저 찾아와서 환영을 하고 서정원의 이름이 새겨진 9번 유니폼을 선물했다고 한다. 중간 즈음에 서정원 본인이 직접 공개한 사진이 있다.

그래서 서정원의 팬들은 저 기사만 믿고 차범근을 싫어할 수도 있겠으나 차범근과 서정원은 고려대 선후배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그리고 수원 삼성에서 감독과 선수로도 잘 지냈다. 지금에와서 이것을 기사 내용대로 둘이 불화가 있었다는 것은 과장일 수도 있다. 실제로 차범근은 알면서도 모른척한 게 아니라 정말로 벤피카의 영입 제의가 거짓으로 알고있었다는 카더라도 있고 벤피카의 이적이 사실이라도 월드컵 진출이 중요해서 축구협회와 그것을 수락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서정원 본인도 언론사에 나와서 어릴때 차범근을 보고 자랐다는 말을 하면서 언급될때마다 칭찬을하지 비난이나 비판을 한 적이 없다. 애시당초 서정원이 차범근이 아닌 안양 LG를 싫어할 수 밖에 없는게 1997년 2월달에 서정원이 독일 팀들의 입단테스트를 봤었다. 그때 쾰른,함부르크,칼스루헤,빌레펠트 등의 입단테스트를 봤었고 쾰른과 빌레펠트가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그때 알려진 금액으로 쾰른은 70만마르크(3억 5,000만원)를 제의했는데 안양 LG가 저 팀들의 제의를싫다고 거부하다가 결국 벤피카가 독일 팀들보다도 더 파격적인 금액으로 제의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보스만 룰도 없었으니 서정원이 안양 LG에게 평생 앙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법적으로는 대기업인 현 GS를 서정원이 이길 수도 없고 미래의 수원 삼성으로 이적해서 안양 LG를 박살내는 것은 그에게 복수였던 샘이다.


2.2.2. RC 스트라스부르[편집]


대신 시간이 지나고 이적료 110만 달러에 프랑스 르 샹피오나RC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여[7] 당시 이 금액이 파격적인 금액이라서 안양 LG도 승낙했으며, 더군다나 당시에는 르 샹피오나 리그가 UEFA 클럽 랭킹 2위였다. 이적할 때 당시 남은 경기가 12경기였는데 27번의 등번호를 얻고 모두 출장하며 12경기에서 4골을 넣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당시 강등권이 돼서 서정원을 급하게 영입한 스트라스부르의 강등권 탈출에 일조했다.

팀의 상승세를 주도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다음 시즌 배번 11을 받았다. 여담으로 서정원은 프랑스 리그 데뷔전이었던 올림피크 리옹 전에서 데뷔골을 넣었고, 지롱댕 보르도 전에서는 당시 보르도의 신예 윙어 키키 무삼파와 서로 1골씩 주고 받으며 4-4 경기를 연출하기도 했다.[8]

당시 스트라스부르의 감독은 뒤게페로(Jacky Duguépéroux)를 거쳐 르네 지라르[9]였다. 그러나 지라르가 다음 해에 프랑스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가면서 감독이 바뀐 후 아시아 선수라는 이유[10]로 기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정원을 기용하지 않자 홈경기에서 팬들은 쎄오(SEO)를 외치며 그의 출전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고, 구단 수뇌부도 서정원에게 스위스 리그에 강팀으로 임대가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당시에 본인 폼이 좋았던 서정원은 거부. 실제로 그럴만도 한 게 당시에 잘 나가는 스트라스부르의 핵심 선수들이 서정원, 올리비에 다쿠르, 이스마엘 정도였다.[11] 서정원이 한국으로 왔을 때도 스트라스부르 서포터들이 편지를 보내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후로 팀은 부진에 빠져 결국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그 시즌을 벤치에서 보냈으며,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발렌시아 C.F., 바이에른 뮌헨의 오퍼가 있었지만 에이전트의 업무 미숙 때문에 K리그로 복귀하게 된다. 이때 수원 삼성이 해외에서 다시 불러주면 돌아가는 조건으로 서정원의 마음을 열게 된다.[12] 하지만 십자인대 부상으로 그 꿈은 날아갔다.


2.2.3. K리그 복귀, K리그판 유다 신드롬과 법적 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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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해외 진출 때 잡음이 있긴 했지만, 많은 축구팬들은 서정원이 친정팀인 안양 LG 치타스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정원 측 주장에 따르면 데뷔 때부터 해외 진출에 관해 LG 프런트와 충돌이 잦아서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고, 수원에서 다시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밀어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소속을 바꾸게 된다. 이때부터 안양 LG와 수원 삼성간의 감정섞인 K리그 최고의 더비가 시작된 계기가 됐다.

KBS 스포츠 다큐 '승부' - 슈퍼매치의 한가운데에 서다 당시 서정원은 안양 LG 치타스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안양 LG에서 서정원에게 준 50만 달러(당시 약 7억 원) 반환청구소송에 피소됐다. 결국 서정원이 패소하면서 일부 금액인 3억 원을 안양 LG에게 돌려줬다. 그 정도로 서정원과 안양 LG와의 관계는 험악했다. 또한 서정원은 프랑스에서 뛰면서 보스만 룰 사례나 에이전트(당시는 매니저로 표현) 제도를 접하면서 그동안 기존에 K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관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9년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복귀한 이후 전 소속팀 안양을 상대로 오버헤드킥으로 골을 넣는 등 맹활약하여 K리그 2연패,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13], FA컵 등 많은 우승컵을 수원 삼성에 선사했다. 아시안 슈퍼컵의 마지막 대회에서는 알 샤바브에서 우승컵을 뺏길 뻔 했으나 그 어려운 중동에서 서정원이 2골을 몰아붙이면서 수원에게 우승컵을 가져다 주는 등 소위 폭발할 때 미친 활약을 했다. 특히 2003년 안양과의 라이벌전에서 넣은 골은 김○○ 기자의 K리그 베스트 골 5에도 선정될 정도로 멋진 골이었는데 이 골로 인해 안양은 0:2 패배하여 결국 수원과 서정원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2001, 2002, 2003 수원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서정원 단독 인터뷰 “기성용 사태, 21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위와 같이 복귀 당시의 안양 LG와의 분쟁 사건은 2020년 기성용의 K리그 복귀 무산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더구나 해당팀이 동일팀이라 20여 년이 지난 현재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만, 무엇보다 안양 치타스에 협상하는 척 하고 몰래 수원하고 입을 맞추고 수원에 입단한 서정원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2021년 백승호의 전북이적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양측이 합의했음에도 갔다올 때와 돌아올 때 계약서와 얘기가 다르면 누구라도 화낸다 라는 쪽으로 의견이 굳어지고 있다.


2.2.4.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진출[편집]


파일:attachment/Seo_Ried.jpg

2005년에 은퇴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14] FC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전신인 오스트리아 SV 잘츠부르크로 연수를 겸해서 자유계약으로 이적하는데 이게 의외로 대박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6번의 배번을 받고 원래 포지션이 아니었던 중앙 미드필더로 12경기 2골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고, 다음 해에는 SV 리트로 이적하여 원래 포지션인 윙플레이어로 리그에서 7골을 기록하면서 막 2부에서 올라온 팀을 인터토토컵 공동우승을 거두게 하면서 UEFA 컵에까지 출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 유명 일간지 <쿠리어>나 <슈포르트보헤>지에서 2년 연속 최우수 외국인 선수로 선정[15]됐다. 그 활약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1·2부리그 팀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나이와 지도자 공부 문제로 은퇴했다. 은퇴 직전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있던 은사 김호 감독이 선수로 뛰어줄 것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서정원의 말년 활약 때문에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가 K리그보다도 훨씬 수준이 낮은 것 아니냐고 비하하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서정원의 K리그 마지막 시즌은 원래 포지션이 아닌 윙백으로 차범근이 출전시켜서 골 기록이 없었던 것이고 오스트리아에서도 SV 리트로 이적한 뒤에야 원래 포지션인 윙어로 뛸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진출 첫 해인 SV 잘츠부르크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다. 잘츠부르크에서 계약 기간이 끝나고 라피드 비엔나 등의 우승 후보 팀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승격팀인 SV 리트의 감독이 서정원을 계속 찾아와서 공격적인 윙어로 확실히 쓰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 해 강등 될 것이라 예상되었던 SV 리트는 최종 순위 4위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 감독은 레드 불 잘츠부르크에 기술고문으로 가면서 파스칭의 새 감독이 부임했고 이때는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한 서정원 외에 강철, 최성용, 노병준 등 K리그 주전급 선수들이 오스트리아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이들 중 서정원처럼 센세이션을 일으킨 선수는 없다. 그리고 요즘은 황희찬의 활약이 좋을 때마다 다시 서정원과 오스트리아 리그의 수준을 논하는 글들이 축구 커뮤니티에 올라오지만 UEFA 순위와 상관없이 서정원이 활약하던 시절은 그래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오스트리아 리그로 이적해서 1~2년 뛰다 은퇴하거나 더 좋은 리그로 이적하는 이름값있는 선수들이 많아서 지금보다는 질적으로 스쿼트가 좋았다. 당시에는 동유럽에 명문 구단 선수들도 은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활약했다. 예를 들어 서정원이 활약하던 시절에는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선수로 알렉산더 치클러(Alexander Zickler)나 토마스 린케(Thomas Linke)처럼 바이에른 뮌헨 팬이라면 모를리 없는 선수들과 니코 코바치, 얀 콜러, 장대 축구의 스트라이커로 유명했던 브라티슬라프 로크벤츠(Vratislav Lokvenc)등이 있다. 송종국과 페예노르트에서 활동하던 토마스 종사(Tomasz Rząsa)도 말년에 오스트리아로 진출해서 서정원과 같은 소속팀에서 뛰었다.

이렇듯 서정원이 활동하던 2000년대 초반에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는 유럽 클럽 랭킹 10위권 중순을 하기도 했었다. 이 정도는 스위스 리그라든지 유럽에서 상위리그 급이었다.[16] 하지만 이후에 좀 추락하여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리그 랭킹 20위권 초반을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르게 현재 오스트리아 리그는 독일인 출신 노장 선수들도 2부(2.Bundesliga) 출신이다. 당장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스쿼드를 봐도 웬만한 축덕들에게도 생소한 스쿼드다.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리그에 갔던 한국인도 K리그에서 프로 경력을 쌓았던 선수들이 진출했지만 지금은 프로 경험이 없었던 황희찬과 이진현같은 젊은 선수들이 진출해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당시와 지금의 리그 수준 차이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리그 수준을 논하기 전에 전혀 다른 언어, 문화권인 곳에 가자마자 실력을 발휘한 것은 서정원의 적응력 자체가 뛰어나다고 밖에 볼수 없다.



리그 잔여 경기가 12경기 남은 상태에서 SV 잘츠부르크로 선수 겸 코치로 이적해서 12경기를 모두 출장하고 2득점했다. 자신의 포지션이 아닌 중미로 활약하며 잔류를 확정지었고 SV 잘츠부르크는 다음 해의 레드불 잘츠부르크로 탄생했다. SV 잘츠부르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멤버가 되었다.


SV 리트에서 2년 활약하면서 리그에서 총 9골을 득점했다. 리그 마지막 헤딩 골은 링크에 없다. 또한 컵대회와 FA컵에서의 골 장면들도 포함되지 않았다. 영상2, 영상3, 영상4, 영상5, 영상6, 영상7, 영상8


2.3. 국가대표 경력[편집]


고려대학교 3학년이던 1990년 다이너스티컵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박종환 감독이 지휘하는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는 대표팀에 선발돼 대회 득점왕에 오르며 동메달을 수상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며, 그 때 잠시 함께한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 국가대표팀으로 1994년, 1998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웨덴전에서 득점해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24강 조별리그 1차전인 스페인전에서 1-2로 뒤지고 있던 후반 45분에 홍명보-황선홍의 1:1 패스 후 상대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은 뒤 홍명보의 패스를 받아 득점을 하여 2:2무승부로 스페인에게 승점 1점을 획득하였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골 1위로 꼽히는 명 장면이기도 하다.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헤딩 동점골을 넣으며 도쿄 대첩의 시작을 알렸다. 그런데 정작 32강으로 확대 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팀의 추락과 함께 서정원 역시 눈에 띄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서정원 본인의 사정도 있었는데,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수두에 걸린 아들을 안아주다가 그만 아들의 수두가 옮아버려 비행기도 선수단과 따로 타는 등 전혀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파일:external/photo-media.daum-img.net/20091016142857.316.jpg
그리고 마지막 벨기에전 경기에서 벨기에를 1:1무승부 탈락시키고 귀국하였다. 또한 2002년 월드컵의 멤버를 선정할 때는 십자인대 부상 후유증이 있었고 소속팀인 수원 삼성의 김호 감독도 히딩크 감독에게 국가대표로 선발해서 출장시키지 않을거면 선발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히딩크의 자서전인 마이웨이에는 최종 엔트리에 선발하지 않아서 아쉬웠던 멤버를 몆명 적었는데 그 중에서 서정원의 이름도 박성배, 고종수와 함께 언급되었다.

2006년때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노장 투혼을 하자 한때 대표팀에 선발하자는 여론도 형성되었다.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87경기에 출장하여 16골을 기록했다.

여담이지만 당시 1994년 월드컵 당시 득점한 골로 인해 이근호보다 먼저 "월드컵에서 골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연봉이 적은 선수"라는 씁쓸한 칭호가 붙었다. 1990년 당시 병장 월급이 9,400원으로 진짜 작은 셈이다. 그 당시 서정원은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도중 대표팀에 소집되었다.[17]


2.4. 기록[편집]



2.4.1. 대회 기록[편집]






2.4.2. 개인 기록[편집]


  • 1986년 전국고교선수권대회 득점왕 수상
  •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득점왕 수상
  • 1992년 한국일보 백상 수상
  • 1993년 프로축구 인기상 수상
  • 1997년 프로축구 인기상 수상
  • 1997년 아디다스컵 득점왕 수상
  • 1999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2001년 아시아 슈퍼컵 MVP 수상
  • 2001년 AFC 선정 8월의 선수
  • 2001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2002년 FA컵 MVP 수상
  • 2002년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2003년 K-리그 베스트 골 수상
  • 2005년 오스트리아 쿠리어 선정 올해의 최고 선수
  • 2005년 오스트리아 스포르트보헤 선정 최우수 축구 선수
  • 2005년 오스트리아 포지션별 올해의 선수 최우수 측면 공격수 부문 선정
  • 2006년 오스트리아 스포르트보헤 선정 최우수 축구 선수


3. 플레이 스타일[편집]



100m를 11초 6에 끊는 엄청난 가속력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 워낙에 빠르고 공간침투에 뛰어나 치달만으로 왠만한 수비수들은 제칠 수 있었고 좌우측 측면을 휘젓는 플레이를 선호하며 체력이 좋아서 가끔은 윙백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90분 내내 미친듯이 움직였다. 한국의 윙 스페설리스트 계보를 잇는 선수였다.[18] [19] 측면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중앙으로 파고드는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특히 1994년 월드컵 당시 스페인전과 독일전에서 보여준 플레이가 백미다.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양발을 모두 잘 썼으며 세밀한 볼 컨트롤에 능해 상대를 쉽게 제치고 골을 쉽게 넣었고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는 약간 줄었지만 가끔 오버헤드킥으로 골을 넣기도 하는 등 발기술은 나이를 먹어도 최고 수준이여서 창의적인 득점으로 멋진 골들을 뽑아내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가 죽자 맨유의 라이언 긱스처럼 중앙과 측면으로 움직이며 상대 수비수를 속임수로 벗겨먹는 플레이를 선호했으며 K리그 말년에는 차범근 감독 부임 이후에 윙백에 가깝게 기용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윙포워드에 가까웠던 선수인데 감독에 전술에 따라서 골을 노리는 선수가 되거나 클래식 윙어에 가까운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

예를들어 김호는 93-94 국가대표와 수원 삼성 감독일 때 서정원을 주로 득점을 노리는 윙어나 외국인 공격수들의 부상일 때는 쉐도우 스트라이커 위치로 올려서 골을 노리는 룰을 많이 줬다면 차범근 감독은 97-98 국가대표와 2004년 수원 삼성에서 크로스를 올리는 클래식 윙어로 사용했다.

실제로 국가대표전에서 서정원의 득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기가 94년 월드컵과 96년 AC밀란과 유벤투스와의 친선경기 그리고 98년전에 도쿄대첩 헤딩골이 있는데 득점에 집중하는 룰을 받았던 경기에서는 패스를 받아서 슈팅을 했거나 빠른 스피드로 돌파하면서 롱패스를 받은 볼을 직접 득점으로 연결하는 경우다. 98년 도쿄대첩 때는 원톱 선수의 크로스를 올리는 클래식 윙어 롤을 부여받았던 시절이다.

차범근 감독은 2004년 수원에 부임했을때도 서정원을 클래식 윙어 롤로 사용했는데 이때는 김대의를 영입하고 김대의에게 득점에 치중하는 롤을 주고 나이가 들고 플레잉코치를 겸하던 서정원을 클래식 윙어 또는 최성용과 같은 위치인 윙백 형태의 라인으로 내렸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에는 SV 잘츠부르크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하다가 SV 리트로 이적, 자신의 원래 포지션인 윙으로 돌아가서 2년 더 활약하다 은퇴했다.

수원 삼성 시절과 SV 리트 시절에는 등번호 14번을 사용했지만 국가대표에서는 11번 그리고 19번을 사용했다. LG 치타스 시절에도 11번이었다.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했을때는 27번과 11번. 그리고 SV 잘츠부르크에서 6번 그리고 벤피카에서는 9번으로 계약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축구수도를 이끄는 감독

수원 삼성 감독 시절 빅버드 소개 멘트


어찌 이런 팬들 앞에서 나태해 질 수 있겠는가

수원 삼성 감독 시절 빅버드에서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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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정원/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대한민국 축구 사상 월드컵-올림픽에서 모두 득점에 성공한 최초의 선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한 골 씩 넣었다. 이후로 이천수(2000&2004 올림픽 - 2006 월드컵), 박주영(2008&2012 올림픽 - 2010 월드컵), 구자철(2012 올림픽 - 2014 월드컵), 손흥민(2014&2018 월드컵 - 2016 올림픽), 황희찬(2016 올림픽 - 2022 월드컵)으로 이 기록이 이어진다.

  • 유명한 축구선수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프로 축구 리그에서 볼보이를 했던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서정원도 유소년 시절에 볼보이를 했다.

  • 자기소개서 형식으로 작성된 인터뷰에서 TWICE 이라는게 드러났다. 딴 감독들이야 아이돌 아닌 이승철, 강수지 등을 써내거나 요즘 아이돌을 써놓되 "애들이 좋아한다"고 했지만 서정원은 그런 거 없이 딱 트와이스라고 써놓았다. 물론 자식 세 명이 전부 아들이라 애들이 좋아해서 썼을 수도 있다.

  • 그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는 정원을 가꾼다고 한다. 감독이 된 지금도 술, 담배는 물론 탄산음료까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20]

  • 아들인 서동한 역시 축구 선수인데 매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20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아버지의 후배가 됐다. 등번호도 아버지의 번호인 14번을 달았다. 아버지와 다르게 윙어가 아니라 공격형~중앙 미드필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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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 종료 후 스페인 명문팀 FC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았으나 군 문제로 무산되었다.

  • 뭉쳐야 찬다 13화 마지막 부분에 전제향과 함께 특별출연했다. 이형택안정환으로부터 어쩌다 FC의 최우수 선수로 선택받은 특전으로 한우 세트를 받았는데,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관계로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함께 구워먹었고, 그 지인 중 한명으로 나온 것. 이때 이형택에게 "골 좀 더 넣어라"고 말했다.


  • 1박 2일 올림픽 특집편에서 1박 2일 팀과 여자 국가대표팀 간의 축구 시합이 있었는데 서정원이 1박 2일 팀의 일일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잠깐 뛴 적이 있었다

  • 위 문단의 군 대축구 최강썰 중에는 앞으로 도저히 경신될 수 없는 불멸의 기록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1994 FIFA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 득점한 이후 역대 월드컵에서 득점한 선수 중 최저 연봉을 받았던 선수라는 부분이다. 당시 이등병의 연봉이 몇만 원 정도에 그쳤던 점을 생각해 볼 때 경신되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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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입학] [1]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한 것은 1979년이며 광주군의 시 승격은 2001년이다.[2] #[3] 1992년 졸업[4] 1994년 4월부터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원 소속 구단 홈경기에선 출전할 수 있다는 당시 규정에 의해 2년간 총 8경기에 출전했고 LG에서 경기를 뛰지 못할 때는 국군체육부대로 파견 가는 형식으로 훈련했다.[5] 레버쿠젠에서 차범근을 지도했고 바이에른 뮌헨을 분데스리가 우승에 올려놨던 인물이다.[6] 당시 규정에 따라 방위병은 소속팀의 홈경기에선 출전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인해 복무하는 2년 간 8경기에 출전했다.[7] 원래는 릴 OSC 스카우터가 애정을 표현했지만 릴은 당시 2부 리그에 있어서 선수가 거부. 그러자 아깝다며 자기 친구가 일하는 스트라스부르에 연락을 해서 "저 선수 아까우니 니가 관찰해봐라"해서 이적이 성사되었다.[8] 참고로 무삼파는 말년에 노쇠해서 K리그 왔다가 망했다. 그 후 이근호를 영입하려던 빌렘이 무삼파를 영입했다가 역시 망했다. 결국 빌렘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9] 몽펠리에를 2011-12시즌 리그앙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그 뒤 2015년까지 릴 OSC 감독이었다.[10] 감독이 외국 선수는 아프리카 선수만 고집하면서 서포터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이때 바뀐 감독이 바로 피에르 만코프스키(Pierre Mankowski,1951년생) 카메룬 국대 감독이었던 양반인데 결국 최후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만코프스키가 한국에 왔을 때는 아시아 선수들이 좋다며 뻔뻔하게 립서비스를 했다. 스트라스부르가 강등당하자 당연히 감독에서 잘렸지만 2000년에는 프랑스 16세 대표팀 코치를 비롯하여 프랑스 국대팀 코치로 8년이나 있는 등, 프랑스 축구협회에서 인정을 받았던 듯 하다. 하지만 2021년에는 스코틀랜드 5부리그인 로우랜드 리그에서 Caledonian Braves FC라는 팀 고문으로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11] 올리비에 다쿠르는 AS 로마로 이스마엘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니 납득이 간다.[12] 결과적으로 해외로 돌아가는 데 성공은 했다. 2007년에 FC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전신인 SV 잘츠부르크로 이적하며 선수 말년에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뛰었다.[13] AFC 챔스의 전신 중 하나(FA컵과 리그컵 우승팀이 나가던 아시안 컵 위너스 컵이 합쳐졌기 때문)인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우승(2000~2001)으로 이 대회 마지막 우승도 수원이 거뒀다. 참고로 이전 글에선 아시안컵 위너스 컵 우승이라고 잘못 적혔는데 이 컵에서 한국 클럽팀은 준우승만 3번 했을뿐, 우승한 적은 없었다.[14] 지금보다 선수 생명이 짧았던 당시 1998 월드컵 직후부터 노장 소리를 들어왔고 2002년에는 플레잉 코치를 권하는 등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노장 소리를 들어온 선수로 불러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현재는 생애 주기가 늦어져 30대 후반쯤에 은퇴하지만 1998년만 해도 30대 초반까지 하고 은퇴하는 편이었는데 당시 서정원의 나이가 28~30세 정도였으니 오늘날에는 한창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슬슬 노장 취급을 받았다.[15] 놀랍게도 이 시절 몸 상태가 20대 중후반 정도였다고. 마침 대표팀의 주전 윙어였던 설기현이 역주행 사건으로 한창 욕을 먹던 시기였던지라 일부 축구 사이트에선 독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설기현 대신 서정원을 넣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설기현이 프랑스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의 단초를 놓은 크로스를 올렸으니 결과는 좋았다.[16] 서정원이 이적한 SV 잘츠부르크는 93~94시즌에 유로파 리그 전신인 UEFA 컵 준우승(인테르가 2-0으로 이겨 우승)을 한 적이 있다.[17] 공식적으로는 상무 소속이었다. 방위병이었는데 어째서 상무 소속이었냐하면 다른 선수들은 전부 입대시 상무 지원이었지만 서정원만은 방위병-상무 파견 형식이었기 때문. 그래서 방위병의 주말 경기 출전이 가능했던 94년, 95년에 각각 4경기씩 안양 소속으로 리그 경기를 뛸 수 있었다.[18] 전통적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은 윙어들이 강한 편이었는데, 그 이유로는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빙자한 정신력)이었다. 사실 체력이 좋았다기보다는 정신력으로 많이 뛰던 시절이었다. 즉 강한 정신력으로 많이 뛰지만 실상은 체력 저하 때문에 경기 내에서 기복이 발생한다.[19] 애당초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통적으로 좋은 신장과 체격을 지닌 대형 포워드를 선호했고(최정민, 김재한, 최순호,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등), 이들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양 측면에서 중앙으로 크로스를 계속 시도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런 영향으로 과거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은 박이천, 김진국, 차범근, 허정무, 변병주, 김주성, 고정운, 하석주, 서정원,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이근호, 이청용 등 뛰어난 윙어가 꾸준히 나왔다.[20] 탄산 음료는 고기를 구워 먹을때만 가끔씩 곁들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