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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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재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별명은 '황새.'[7] 1988년부터 2002년까지, 21세부터 35세 때까지 14년간 부상이 아닌 한 항상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뛰었다. A매치 통산 103경기 50골로 득점 2위[8] 에 올랐고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9] 홍명보와 함께 한국 축구 사상 첫 월드컵 4회 연속 출전이라는 기록을 가진 선수이자 한국 축구 선수 최초의 해외 리그 득점왕이기도 하다.[10]
공격수로서 은퇴할 나이인 34살의 나이에도 2002 월드컵에서 주전 공격수로서 한국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11][12] 다만 1990년대 축구를 직접 보지 않은 세대들은 그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왜곡되어 폄하되는 경우도 있다. 지독한 부상[13] 과 불운에 시달리며 19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한 경기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던 비운의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대표 선수 시절 한국 대표팀은 황선홍 없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황선홍만큼 장기간 국가대표팀에서 붙박이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선수는 없다. 특히 한일전마다 황선홍의 맹활약도 빠질 수 없는데 총 4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넣는 기염을 토했다. 차범근의 6골에 이은 역대 한일전 최다 골 2위이며 그가 뛴 한일전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출전한 모든 한일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유일한 선수이다.[14]
은퇴 후 해설 위원을 거쳐 2008년 부산 아이파크에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이후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를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감독했다. 포항에서 K리그 1회 우승과 FA컵 2회 우승을 기록하며 감독 커리어 초반에는 좋은 경력을 보유했다.[15] 그러나 2016년 FC 서울 감독 부임 이후 첫 시즌 K리그 우승을 제외하면 2017 시즌에는 리그 5위에 그쳐 5년 만에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더니, 2018 시즌에는 급기야 10위, 11위를 왔다갔다하며 강등권 문턱에서 전전하다가 4월 30일자로 결국 사퇴하면서 감독 명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그러다 12월 14일 뜬금없이 중국 갑급 리그의 옌볜 푸더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구단 해체, 이후 휴식을 취하다가 2020년 하나은행에 인수된 대전 하나 시티즌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진한 경기력이 지속되어 2020년 9월 8일부로 사퇴했다. 이후 1년 간의 휴식과 방송 활동을 거쳐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취임, 여러 우려 속에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획득에 성공하며 지도자로서 재기에 성공했다.
2. 선수 경력[편집]
자세한 내용은 황선홍/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지도자 경력[편집]
자세한 내용은 황선홍/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기록[편집]
4.1. 선수[편집]
4.1.1. 대회 기록[편집]
- 포항제철 아톰즈 / 포항 아톰즈 / 포항 스틸러스 (1993~1998)
- FA컵: 1996
- 리그컵: 1993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7, 1998
4.1.2. 개인 수상[편집]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슈: 2001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올스타팀: 2001 (서브)
- 아시안 게임 득점왕: 1994
- AFC 득점왕: 1994, 1995
- AFC 특별상: 1995
- 한국프로축구 골든볼: 1995
- 한국프로축구 브론즈슈: 1995
- K리그 베스트 XI: 1995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2013
- J리그 디비전 1 베스트 XI: 1999
- J리그 디비전 1 득점왕: 1999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 자랑스런 충남인상 체육발전분야: 2002
4.1.3. 통산 성적[편집]
4.1.3.1. 국가대표[편집]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4.1.3.2. 클럽[편집]
4.1.4. 개인 기록[편집]
4.1.4.1. 클럽[편집]
- 1995년 K리그 8게임 연속 득점[17]
- 1999년 J리그 득점왕 24골 8어시스트
4.1.4.2. 국가대표[편집]
- A매치 103경기 50골.(역대 득점 순위 2위, 1위는 차범근)
- 1990년 월드컵 지역 예선 득점왕 6경기 7골
-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득점왕 11골
- 1994년 아시아축구연맹선정 득점왕 A매치 16골
-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론즈슈 2골[18]
- 2002년 6월 4일. 월드컵 폴란드전 골. 이탈리아전에서 센츄리 클럽 가입
- 대한민국 최초 전대륙 상대 A매치 득점 성공[19]
4.2. 감독[편집]
4.2.1. 대회 기록[편집]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021~)
-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22
4.2.2. 개인 수상[편집]
4.3. 수훈[편집]
- 체육훈장 맹호장: 2002
5. 황선홍에 대한 언사[편집]
"황선홍은 듣던대로 좋은 선수다. 그는 후반에 팀의 공격 실마리를 풀어 주었다. 반바스텐이나 베르캄프를 연상시키는 좋은 움직임과 슈팅 감각을 가졌다."
"그는 현대적인 선수이다. 특히 후배 선수들에게 마음을 열어 놓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려 했던 점을 높이 평가한다"
"나는 모든 선수들에게 애착이 있지만 황선홍에게 조금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는 팀의 베스트로서 항상 혼자 아픔을 뒤집어썼다. 프랑스에 5대 0으로 대패하던 날 그는 내 숙소에 찾아와 밤을 새워 울었다. 조금 더 일찍 좋은 팀에서 체력과 개인 스피드를 연습했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6. 방송 활동[편집]
- 한밤의 TV연예: 최용수 결혼식 장면 하객 (2005)
- 한밤의 TV연예: 이동국 결혼식 장면 하객 (2005)
- 공감토크쇼 놀러와: 김태영, 유상철과 게스트로 출연 (2010)
- 무릎팍도사: 단독 출연 (2010)
- 뭉쳐야 찬다: 설기현과 스페셜 코치로 출연 (2019)
-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이동국 편 인터뷰 (2020)
- 뭉쳐야 찬다: 조원희와 스페셜 코치로 출연 (2020)
- 안싸우면 다행이야: 안정환과 함께 출연 (2021)
- 골 때리는 그녀들: FC 개벤져스 (2021)
- 와카남: 김병지, 김태영과 함께 최용수편[21] 게스트로 출연 (2021)
7. 여담[편집]
- 스포츠 만화 주인공 같은 수련을 한 적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이런 거 다 설정 사진이다. 과거에는 해태 타이거즈 야구 선수들이 동물원 가서 호랑이랑 눈싸움하거나, 씨름 선수로 뛸 당시의 강호동이 산소통 매고 해변을 뛰어 다니는 등, 만화 속에 나오는 수련을 연출하는게 종종 있었다. 보통 언론과 기자가 갑이던 시절이라 신문사가 요구하면 구단이나 선수가 할 수 없이 들어주는 것.
- 선수 시절 두 번의 전방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축구 선수로서 한창 때인 24세(1992년) 독일에서, 그리고 본인 스스로 기량이 절정이었다고 말한 1998년에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을 입었다. 그만큼 선수 시절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1992년 부상으로 군대 면제가 되었고[22] 1993년에 결국 수술을 받으면서 이후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깨졌다고 한다.[23]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되자마자 1994 미국 월드컵에 나가서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특히 둘째이자 장남인 황재훈은 아버지를 따라 축구 선수가 되어 선수 생활을 했지만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고 황선홍 본인이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 본인이 당해봤던 부상이라 재활과정 등을 잘 아는지라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24]
- 축구 동료들 사이에서 성격 좋은 선배로 유명한 듯하다. 특히 최용수는 황선홍을 다른 사람에게 언급할 때 착한 사람이란 말을 종종 쓴다고 밝혔다.
- 아내 정지원과의 사이에서 1녀 2남을 낳았다. 이중 맏이이자 장녀인 황현진이 '이겨'라는 이름으로 걸그룹 예아(Ye-A)로 데뷔했다.[25] 처음에는 아내와 함께 거세게 반대를 했는데 본인이 대중들에게 안 좋게 노출되었던지라(위 문단 참조) 그런 상황에서 비난이나 악플을 견딜수 있을까 해서 걱정이 되어서였다고. 하지만 황현진이 "이 일을 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 같다"고 말했고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26] 한편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 합격하여 1학기를 재학한 후 활동을 이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소속사(신후이엔터)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아 활동을 완전히 접었으며, 현재는 연예계에서 은퇴한 상태다. 대학 졸업 후에는 호텔 관련 직장을 다닌다는 근황이 알려졌다.[27]
-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편부 가정에서 성장했다.[28] 형제로는 형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는데 공교롭게도 형의 이름이 황선수다. 사업을 하고 있고 민간봉사단체를 운영하기도 해서 다음 인물 검색에도 등재되어 있다. 황선홍의 결혼 당시 웨딩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어 결혼식을 거의 도맡아 준비해줬다고 한다. 여동생 황선경은 가정주부라고 한다.
- 2002년 월드컵 때 폴란드와의 예선전 첫경기 1, 2호 골은 당시 건국대 선후배 황선홍과 유상철이 넣었다. 이때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는데 그들의 뒤에는 정종덕 감독이 있었다. 정 감독이 이끌던 당시에는 대학 축구의 정상을 이끌었다. 당시의 주축이 황선홍, 유상철, 이영표, 현영민, 고정운, 유승관, 이상윤, 공문배, 유영록, 권우진, 신병호, 노규영 등이 국가대표였다.
- 2002년 월드컵 공식 게임 2002년 피파 월드컵에서는 팀 내 유일한 스타 플레이어.[29] 스타 플레이어 선수들은 능력치에 따라 뛸 때 잔상이 생긴다거나 숏패스가 휘어서 전달된다거나 하는 특수효과들이 있는데 여기서 황선홍은 슈팅 능력치가 스타플레이어 급인 7이었으며 이 게임은 슈팅이 7이면 불꽃 슛이 나간다.[30] 덕택에 전원 수비로 틀어막다가 황선홍으로 하프라인 조금 더 가서 슈팅을 때리거나 킥오프 직후에 바로 슈팅을 하면 상당히 높은 확률로 골로 연결되었다 보니, 해당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은 다크호스로 꼽히기도.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한창이던 2010년 6월 23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상당한 입담을 보여줬다.
- 2020년 1월 27일을 시점으로 대전 하나 시티즌 및 시즌권 홍보 때문인지 각 커뮤니티를 돌며 이벤트 및 인사 영상을 게시하였다. 펨코#, 락싸#, 대마갤# 공교롭게도 2002 월드컵 폴란드전 때 같이 골을 성공시킨 유상철도 대전 시티즌의 감독을 맡았다.
- 비흡연자라고 한다. #
8.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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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난 곳은 예산군이지만 중학교까지는 구리에서 다니다가 전학을 가서 서울 성북구에서 보냈다.[2] 성적 부진으로 인한 감독직 사퇴.[3] 시즌 개막도 하기 전에 구단 해체로 자연스럽게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옌볜 푸더의 마지막 감독이 됐다.[4] 성적 부진으로 인한 감독직 사퇴.[5] 2006 FIFA 월드컵 독일 축구 해설 위원.[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2위, 1위는 차범근[7] 단순히 성이 황씨라서 황새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이유와 함께 가난하던 어린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를 채워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황새라고 별명을 붙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8] 1위는 차범근[9] 참고로 15명의 센츄리 클럽 가입 선수 중 공격수는 차범근, 황선홍, 이동국, 손흥민으로 4명 뿐인데 공격수의 경우 오랜 기간 기량을 유지하는게 더 힘들다는 뜻이다.[10] 세레소 오사카 이적 이듬해인 1999년에 26골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역대 두 번째 해외파 득점왕은 23년 후 손흥민이 2021-2022 시즌 프리미어 리그에서 거머쥐었다.[11] 간혹 2002년 월드컵을 직접 보지 않은 세대 중 안정환이 주전 공격수였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선홍이 주전 공격수고 안정환은 황선홍과 교체되는 후반 조커 공격수였다. 그러나 황선홍이 본선 첫 경기인 폴란드전부터 허벅지 부상을 입었고 이후 경기부터 진통제 주사를 맞아가며 뛰는 바람에 세 번째 경기인 포르투갈전부터는 안정환이 선발 출장했다. 32강 조별리그부터 4강전(독일전)까지의 6경기 중 황선홍이 3경기(폴란드, 미국, 독일), 안정환이 3경기(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선발 출장했다. 이후 3위, 4위전(터키전)에서는 안정환이 선발 출장했다.[12] 보통은 선수가 나이를 먹어가며 기량 저하로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하거나 미리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의 공격수인 최용수, 김도훈, 서정원이나 2002 한일 월드컵 공격수였던 이천수, 설기현 등 모두 30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기량 저하로 대표팀 주전에서 밀렸다. 안정환의 경우도 34세로 출전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 경기도 못뛰고 벤치에 있었으며 박지성은 30세에 대표팀을 은퇴했다. 황선홍 이후 공격수인 이동국, 박주영 등 대표팀을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도 기량 기복이나 감독의 전술에 의해 또는 나이가 들면서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14년간 대표팀 주전이라는 것 자체가 레전드임을 뜻하며, 30대 중반까지 주전으로 활약했던 필드 플레이어는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딱 3명 뿐이다.[13] 전방 십자인대 두 번 파열. 그로 인해 군 면제가 됐다.[14] 유튜브 세대 중에는 1998년 한일전의 역전 골 후 슬라이딩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15] 포항에서의 우승을 외국인 선수 없이 국내 토종 선수로만 가지고 달성하여 당시에는 더욱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FC 서울을 맡을 때 외국인 선수들을 통제 못하는 모습을 보여줘 이는 오히려 약점임이 드러났다.[16] 이때는 A매치 대회였다.[17] 김도훈이 타이 기록을 세우긴 했으나,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여담으로 이 때 황선홍은 연속골에 실패한 9번째 경기까지 계속해서 같은 축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이는 일종의 징크스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 축구화는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18] 이때 호주전에서 넣은 골이 컨페더레이션스컵 역대 최고의 골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http://www.fifa.com/confederationscup/video/best-goal/index.html 참고로 어시스트한 선수는 박지성이다.[19] 1988.12.6. 일본(아시아), 1989.8.13. 미국(북아메리카), 1990.2.4. 노르웨이(유럽), 1994.2.26. 콜롬비아(남아메리카), 1994.5.3. 카메룬(아프리카)를 상대로 득점. 2001.6.3.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오세아니아)에게 득점하여 대한민국 선수로는 최초로 전대륙 득점에 성공했다. 참고로 박주영(2011), 이동국(2014), 손흥민(2017)도 전 대륙 상대 득점자다.[20] 2013년은 같은 해에 FA컵 우승까지 이루면서 K리그 최초의 더블(리그 우승 +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것도 외국인 선수 하나 없이 국내 선수만으로 이룩한 업적.[21] 직접 나온건 아니지만 이동국도 전화연결로 목소리로 출연하였다.[22] 전방 십자인대 파열은 지금도 군 면제 사유가 되며 군대에서 부상을 입을 경우 곧바로 의병 제대하게 될 정도의 큰 부상이다.[23] 무릎에 철심이 3개가 박혀있다.[24] 아들이 어린시절에 축구에 재능이 있어보여서 축구를 시켜볼까 하고 고민했지만 아내 정지원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자신의 남편이 선수 시절 어땠는지 가장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그럴 수 밖에...하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진 못했던 듯.[25] IZ*ONE 출신 권은비가 프로듀스 48에 참가하기 전에 소속되어 있던 걸그룹이었다.[26] 덧붙여 황선홍은 딸의 활동에 일체 비호 및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만약 포항 프런트가 포항 홈경기에 자신의 딸이 소속된 걸그룹을 초청한다 해도 본인이 불허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27] 소속 그룹인 예아는 해체되었으며, 권은비를 제외하고는 다른 멤버들은 연예계에서 은퇴한 상태다.[28] 아버지는 1996년에 사망.[29] 능력치 들 중 슛, 스피드, 패스 중 하나라도 최고치인 7이 찍혀있으면 스타 플레이어로 표시된다.[30] 실제로 불꽃 슛이 나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