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민(투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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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야구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KIA 타이거즈 1기 시절
2.2.1. 2005 시즌
2.2.2. 2006 시즌
2.2.3. 2007 시즌
2.2.4. 2008 시즌
2.2.5. 2009 시즌
2.2.6. 2010 시즌
2.3. 노포크 타이즈 (마이너리그) 시절
2.4.3. 2017 시즌
2.4.5. 2019 시즌
2.4.6. 은퇴식
2.5. 국가대표 경력
3. 골프선수 경력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前 야구선수 윤석민의 선수 경력을 정리해놓은 문서다.


2. 야구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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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탑고 재학 시절.




구리인창중 졸업 후 인창고로 진학했으나 1학년을 마치고 성남시에 있는 야탑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이 당시 동기로는 같이 인창고에서 전학온 초중학교 동창 오재일이 있고, 야탑고 2년 선배로는 오재원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포지션이 내야수였다. 투수는 김성준, 백자룡, 배우열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야탑고 창단부터 2021년까지 지휘봉을 잡았던 김성용 감독은 윤석민을 투수로 전향시켰고[1] 3학년인 2004년부터 마운드에 서기 시작했다. 팀은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vs 덕수정보고)와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vs 광주일고)에 진출했으나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2]

2005년 2차 1순위로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는데 이때는 뚜렷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투수는 아니었다. KIA 타이거즈의 성공적인 스카우팅 사례 중 하나.

리틀 야구 시절에는 타자 윤석민과 프로 때와 정반대로 서로 포지션이 달랐다. 투수 윤석민은 이때에는 포수, 타자 윤석민은 투수였다. 초, 중학교를 같은 곳을 나왔으며, 인창고 1학년까지도 같이 동문수학을 하다가 투수 윤석민이 야탑고로 전학갔다.


2.2. KIA 타이거즈 1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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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2005 시즌[편집]


신인임에도 개막 엔트리에 당당히 들었고, 2005년 4월 2일 한화와의 개막전에 6:3으로 지고 있는 와중에 8회초 세 번째 투수로 올라와 데뷔전을 치뤘다.[3] 선두타자였던 이도형에게 유격수 방면 내야안타를 내준 이후 신경현의 번트 타구를 본인이 잘 처리했고, 김수연도 1루수 직선타로 처리하면서 2사 2루까지 잘 막고 있었으나, 백승룡에게 중견수 쪽 안타를 허용한 데 이어 고지행마저 볼넷으로 출루시키면서 2사 만루 상황에서 조규제에게 마운드를 넘겨주고 내려왔다. 그러나 조규제가 데이비스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1점, 직후 윤형진 또한 이범호에게 밀어내기 볼넷에 김태균에게 좌익수 방면 적시타까지 허용하면서 윤석민이 쌓아두고 간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고 말았다. 최종 기록은 ⅔이닝 동안 2피안타 1볼넷 3실점.

첫 등판부터 다소 꼬이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10일 휴식 후 13일 삼성전에 1:4로 지고 있는 와중에 4회초 무사 1, 2루 상황에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승계주자 실점 없이 이닝을 잘 마무리한 후 3이닝 동안 2피안타 2볼넷 2탈삼진 2실점(1자책)으로 나름 선방했다. 물론 이후에 나온 김희걸조규제가 폭망하면서 경기는 패배했지만 그 날 KIA 투수들 중에서는 신인인 윤석민이 제일 잘 던진 편이었다.

그렇게 4월에 총 8경기에 등판하여 14⅔이닝을 소화하면서 14피안타(1피홈런) 12사사구 7탈삼진 8실점(7자책)으로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 중이었는데, 5월 10일을 기점으로 팀의 클로저를 담당하게 되었다.

5~6월 두 달 동안 해당기간 동안에만 2승 2패 7세이브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갓 데뷔한 신인에게 단 두 달만에 24경기 동안 37이닝[4]이라는 미친 혹사를 서정환이 자행하면서 관리 따위는 장식임을 몸소 보여버렸고, 그 여파로 인해 7월 월간 평균자책점이 6.52에 시즌 평균자책점도 4점대로 퍼져버렸다.

이후 8월 중순에야 다시 추스르고 어느 정도 기량을 찾은 모습을 보이며 남은 시즌을 완주하긴 했으나, 툭하면 롱릴리프로 2이닝은 물론, 3이닝 이상도 던지면서 시즌 최종 53경기에 출전하여[5] 84이닝 동안 3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4.29 라는 기록을 남겨버렸다.

2.2.2. 2006 시즌[편집]


4~5월 두 달 동안 20경기에 출장하여 31⅓이닝[6]을 소화하며 2승 1패 4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0.86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심지어 6월 2일과 3일 삼성전에 연이어 등판하여 두 경기 모두 무실점 투구를 하면서 시즌 평균자책점은 한 때 0.79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6월 21일 두산전이 끝난 직후의 성적은 무려 30경기 동안 49⅓이닝을 소화하며 3승 1패 8홀드 2세이브 평균자책점 1.28을 보여주며 철벽계투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이후 6월 25일 한화전에서 3이닝 동안 3실점으로 패전이 된 데 이어, 이틀 뒤인 27일 롯데전에서는 아슬아슬한 1:0 리드를 지키기 위해 7회 말 2사 1루 상황에 등판해서 김승관을 3루수 땅볼로 잘 처리하고, 8회 말 선두타자였던 박기혁도 2루수 땅볼로 잘 처리해놓고는 갑자기 강민호에게 볼넷을, 정보명에게 몸에 맞는 공을 허용하더니 정수근에게 좌중간 싹쓸이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허무하게 경기를 넘겨줘버렸다. 이후 박현승에게 까지 좌전 1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1:3으로 완전히 역전시킨 채 임준혁에게 마운드를 넘겨주고 내려왔고 팀은 그대로 지면서 또 패전을 적립했다.

자칫 혹사로 인해 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아직 그런거 없다는 듯이 7월부터는 마무리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며 월간 평균자책점 0.00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7월에만 1홀드와 5세이브를 추가로 쌓은건 덤.

8월에도 20일 롯데전 1이닝 3피안타 2사사구 1탈삼진 3실점 한 경기[7]만 제외하면 8월 등판에서는 모조리 세이브 or 승리를 챙기면서[8] 눈부신 호투를 이어나갔다. 다만 롯데전에 유독 약점을 보이면서 8월 20일 경기 이후 거의 5주 가량 롯데전에서의 등판은 없었다.

9월에도 무지막지하게 던져 12경기 동안 14이닝을 소화하면서 1승과 6세이브 그리고 2패를 적립했고, 월간 평균자책점은 3.21에 시즌 평균자책점도 2.10으로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0월 1일 롯데전에서 3:3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와중에 9회 초 등판에서 또 불쇼를 거하게 저지르면서 ⅓이닝 동안 3피안타(1피홈런)[9] 2실점으로 장렬히 불타버렸다. 경기 또한 5:3으로 진 건 덤. 그래도 다음 날 롯데전에서는 전날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4⅓이닝 4피안타 5탈삼진 1실점의 호투를 보여주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 한 몫하면서 시즌 마무리를 지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63경기 등판하여 94⅔이닝 동안 5승 6패 19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2.28이라는 신인 2년차 치곤 어마어마한 성적을 올렸으며, 특히 전년도에 비해 이닝수는 10⅔이닝을 더 소화했음에도 볼넷 개수는 전년도 보다 7개가 줄고, 탈삼진은 무려 26개가 늘어났다. sWAR도 3.62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리그 불펜 요원 중 4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3위인 권오준과는 단 0.01, 2위인 박준수와는 0.2 차이나는 수준이었다.[10]

이 해 팀 내 들의 고군분투 속에 기아는 극적으로 4위를 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윤석민 역시 당당히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승선하면서 가을야구 경험을 했다. 총 2경기에 등판하여 3⅔이닝을 소화했으나 시리즈 전적 1:2로 아쉽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시즌을 마무리 지었다.


2.2.3. 2007 시즌[편집]


윤석민상이 나오게 된 불운의 대명사와도 같은 시즌

팀 사정상 선발로 보직을 전향한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는데, 4월부터 이미 낌새가 좋지 않은 경기들이 나왔다. 개막전이던 4월 6일 LG전에서는 6⅓이닝 동안 6피안타 3볼넷 4탈삼진 1실점(비자책)을 기록했음에도 패전투수가 된 것을 시작으로, 4월 17일 SK전에서는 7이닝 동안 단 1피안타 2볼넷만 허용하면서 7탈삼진 1실점(비자책)을 기록했음에도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4월 22일 두산전에서 완봉승으로 데뷔 첫 선발승을 기록했다.

이런 불운은 5월에도 계속되었는데, 5월 2일 롯데전에서는 6⅓이닝 동안 5피안타 2볼넷 4탈삼진 1실점(1자책)을 했음에도 또 패전을 적립해버렸고, 심지어 5월 13일 SK전에서는 9이닝 5피안타(1피홈런) 1볼넷 2탈삼진 2실점(2자책)을 했음에도 오히려 완투를 적립하면서 불운의 끝을 보여줬다. 이 경기 직후 윤석민의 성적은 9경기 동안 57⅓이닝을 소화하면서 2완투 1완봉씩이나 했음에도 1승 6패 평균자책점 2.35이라는 믿기 힘든 지표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으며, 이후 7월 말 까지 20경기 출장하여 124이닝 소화하는 동안 74삼진 41볼넷 WHIP 1.21 평균자책점 2.76으로 맹활약하나 해당 기간 동안 기록한 승패는 6승 12패에 그칠 정도로 팀 타선의 지원이 처참하여 지원을 못받아 승이 패보다 절반이나 적은 불운한 시즌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시즌 중반 불운한 그를 조명하는 기사

결국 8월부터 슬슬 멘탈이 무너지면서 실점하는 경기가 많아졌으나 그 와중에도 8월 1일 SK전을 빼면 최소한 5이닝 이상은 버텨주고 있었음에도 승리보다는 패전 적립이 더 많았고, 결국 9월 세 번의 등판에서는 5이닝도 채 넘기지 못하는 투구를 연이어 보여주며 평균자책점도 대폭발한 와중에도 간신히 3.78로 시즌을 마무리지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28경기(선발 26경기)에 출장하여 162이닝 동안 2완투 1완봉을 하면서 7승 18패 평균자책점 3.78을 기록했다. 평균자책점이 막판 폭등한 와중에도 ERA+는 104.1로 리그 평균보다 나은 수준이었고, sWAR은 무려 3.19로 팀내 전체 2위[11] 리그 투수 15위의 기록이었다. 다패 2위였던 한화의 세드릭 바워스도 11승 13패의 성적이긴 했으나 윤석민의 불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일단 한화는 가을야구라도 갔었잖아 여긴 꼴찌였단 말이지

추후 윤석민은 이 시즌을 떠올리면서 "정말 1점만 줘도 팀이 지니까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2.2.4. 2008 시즌[편집]


완전히 에이스로 발돋음한 시즌

3월 29일 시즌 개막전 패배로 인해 개막 시리즈 연패를 막고자 다음날인 30일 선발로 등판하여 삼성 타선을 상대하였으나 제구가 좀처럼 잘 안된 와중에도 6이닝 동안 2피안타(1피홈런) 5사사구 3탈삼진 1실점으로 그나마 제 몫을 해줬지만 팀 타선이 아예 전병호-권혁-안지만-오승환에 완전히 막히면서 1점도 내지못하며[12] 패전투수가 되었다.

자칫 작년 시즌처럼 또 불운이 이어지는건가 싶었으나, 바로 다음 등판인 4월 5일 한화전에서 8이닝 동안 5피안타(1피홈런) 2볼넷 7탈삼진 3실점의 완투급 페이스를 보여주며 두 번째 등판만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팀 타선이 모처럼 윤석민에게 9점이나 지원해주며 작년 같은 불운을 겪지는 않았다.

이후 에이스로 완전히 각성하며 4월 16일 / 22일 / 27일 / 5월 3일 / 8일 까지 최소 7이닝 이상에 3실점 이하로 던져주면서 3승을 올리며 승승장구 했으며, 특히 5월 3일 만나기만 하면 안좋은 기억을 만들어주던 롯데를 상대로 무려 8이닝 8탈삼진 2실점(무자책)을 기록했는데, 직전 4월 11일 5⅔이닝 7실점으로 무너진 것을 완전히 앙갚음하는 대호투를 선보이며 천적관계를 청산하는 모습이었다. 이후 등판 역시 승승장구한데다 5월 20일 다시 만난 롯데를 상대로 6이닝 동안 4탈삼진 2실점(1자책)의 호투를 또 한 번 보여주며 승리를 또 따내면서 천적관계를 완전히 청산해버렸다.

이렇게 대호투를 펼쳐나가는 와중에 초유의 관심사로 떠오른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 최종엔트리에 7월 14일 탈락했다는 청천병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와중에 김경문 올림픽 야구대표팀 감독이 '윤석민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하면서 더욱더 논란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그럼에도 최종엔트리 탈락의 아픔 따위 모른다는 듯이 7월 15일 롯데전에서 7이닝 5피안타 2사사구 5탈삼진 1실점 대호투로 커리어 첫 10승에 도달했는데, 은퇴 이후 언급한 바로는 전날 올림픽 엔트리에 선발되지 못한 것 때문에 경기 당일 새벽에 술을 마시고 던지고도 이런 호투를 했다고 한다.[13][14]

한편 같은 날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SK와 두산의 대결에서 김선우의 뒤를 이어 등판한 임태훈이 ⅓이닝 동안 2피안타 2실점으로 부진하면서 최종엔트리 선발에 대한 논란이 더욱더 커져만 갔는데, 윤석민은 최종엔트리 발표 이후 4경기 동안 21⅔이닝을 소화하면서 3승 1홀드 ERA 1.66으로 오히려 펄펄 날아다닌데에 비해 임태훈은 7경기 동안 7⅓이닝을 소화하면서 1패 1세이브 1홀드 ERA 7.36이라는 완전히 대조된 피칭내용을 보이고 있었다.[15] 그럼에도 별다른 반전 없이 이대로 윤석민의 대표팀 엔트리 승선은 물건너가는가 싶었으나, 8월 4일 잠실에서 열린 네덜란드 야구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임태훈이 2이닝 동안 3피안타 1볼넷 1실점을 기록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당시에는 강팀이 아니었던 네덜란드 상대로의 경기 내용도 그렇거니와 구위가 현격히 떨어져보인다는 하일성 당시 야구대표팀 단장의 평가를 코칭스태프들에게 전달하면서 엔트리 교체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기어코 김경문 감독의 결단이 떨어지면서 정말 극적으로 윤석민이 대표팀 엔트리에 승선할 수 있었다.#[16]

야구 대표팀 엔트리 승선 이후의 활약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을 참조할 것.

금의환향한 이후에는 다승과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놓고 류현진, 김광현과 불꽃튀는 경쟁에 들어갔는데, 8월 28일 LG전에서 7이닝 1피안타 9탈삼진 무실점의 환상적인 투구로 평균자책점을 2.34까지 떨어뜨리며 우위를 점하고 있던 와중, 올림픽 후유증이 온 것인지 9월 2일 삼성전에서 피로누적으로 인한 어깨통증이 발생하면서 4⅓이닝을 소화한 직후 강판되고 말았다. 심지어 우동균최형우에게 2개의 피홈런으로 3실점을 하는 바람에 평균자책점도 2.46으로 높아진 것도 모자라, 4위권 싸움에서도 선봉을 서고 있던 윤석민의 부재는 결국 굉장히 뼈아프게 작용했고, 7일 롯데전을 건너뛴 사이 팀은 롯데에게 패하면서 4위권은 물건너가게 되었다.

팀 입장에서 4위권은 힘들어졌어도, 최소한 윤석민의 타이틀 수성을 위해 등판간격을 조정하여 9월 13일 두산전에 선발로 간신히 나서 5이닝 동안 2피안타 2사사구 4탈삼진 1실점으로 어깨가 완벽히 낫지 않은 상황에서도 좋은 투구를 보였지만, 상대 선발이었던 김선우에게 7회까지 완전히 팀 타선이 꽁꽁 틀어막히면서 결국 패전만 적립하고 말았다. 결국 다소 무리한 두산전 등판으로 인해 9월 14일자로 어깨 치료를 위해 1군 엔트리 말소가 되면서 다승왕 타이틀 경쟁에서는 하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조범현 감독은 가을야구가 좌절되더라도 최소한 에이스 윤석민에 대한 배려를 위해 평균자책점 타이틀 획득을 위한 지원을 해주겠다고 공언하면서 복귀 시점에 대한 가 계속해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김광현의 로테이션 상 10월 3일 KIA전이 마지막 등판이 될 것으로 예측되면서, 윤석민 또한 그에 비슷하게 맞춰 복귀할 가능성이 생겼고, 결국 이것이 들어맞으면서 김광현은 10월 3일 KIA전에 먼저 선발등판하여 7이닝 동안 2피안타 1볼넷 12탈삼진 2실점(비자책)을 기록했고 평균자책점 2.39로 시즌을 마무리지었다. 윤석민 입장에서는 최소한 3⅓이닝 이상 무실점을 투구를 해야만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성을 할 수 있으며, 1자책 이상 시 7이닝을 투구해야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SK는 10월 5일 히어로즈와의 최종전이 있었던 반면, KIA는 10월 4일 두산전이 최종전이었기 때문에 한치의 앞을 알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조범현 감독은 윤석민을 10월 4일 두산전에 전격적으로 선발투수로 예고를 했고, 그 지원에 화답을 하듯이 7이닝 동안 5피안타 1볼넷 7탈삼진 무실점이라는 기적같은 피칭을 선보이면서 최종 평균자책점 2.33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성하게 되었다.[17]

시즌 최종 24경기 출장하여 154⅔이닝 동안 14승 5패 1홀드 평균자책점 2.33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1위를 비롯하여 2완투로 완투 1위, 다승 2위를 기록하며 데뷔 4년차 만에 리그를 대표하는 우완 에이스로 거듭난 시즌이 되었다. sWAR도 무려 5.29로 리그 투수 중 3위, 리그 전체 10위의 기록을 남겼는데, 어깨 부상만 없었더라도 투수 부분 승리 기여도에서는 충분히 1위를 할 수도 있었던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시즌이기도 했다.


2.2.5. 200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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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광주 삼성전 9이닝 1실점 승패없음(결국 그 경기 패)

초반 방어율이 4점대인데다, 기아 평균자책점이 6선발 평균 2점대의 다른 팀 에이스 선발급 포스를 내뿜고 있어 점점 입지가 좁아졌다. 게다가 KIA 타선이 윤석민이 등판할 때에는 파업을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윤석민 등판일의 성적이 가장 나쁘다.

4월 17, 18, 19일의 3연전에서는 타선이 폭발해서 25점이 나왔지만 윤석민 등판일인 18일에는 달랑 2점만 나오기까지.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다.

게다가 연이은 한기주퐈이야로 날려먹은 경기가 꽤 되는 상황이 되자(4월 21일~26일, 6일 연속으로 8회 이후에 실점), 결국 [[조범현0] 감독은 선발에서 부진한 윤석민을 마무리로 내리기로 결정한다.

5월 1일 경기에서 한기주의 퐈이야에 이은 4:4 상황에서 등장, 한화 타선을 4⅓이닝 동안 6삼진 퍼펙트로 완벽하게 틀어막았으나 타선의 삽질이 이어지며 이번에도 승수 쌓기는 실패했다.

그리고 어린이날에 미묘하게 부진하면서 결국 패전투수. 결국 스승의 날인 5월 15일에서야 최희섭김상현의 도움으로 시즌 첫 승을 기록하였다.

마무리로서 제법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서재응과 이범석의 부상으로 인해 선발 로테이션에 문제가 생기자 5월 29일 선발로 복귀했다. 하필이면 상대투수가 봉중근이라 좀 흔들리는 감도 있긴 했으나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 승리를 챙겼다. 조범현 감독은 이제 다시 마무리는 안 한다고 못 박은 만큼 남은 시즌은 선발로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부상 당해 2군으로 내려간 한기주를 대신해 유동훈이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하고 윤석민은 다시 선발로 복귀, 전반기 마지막 등판에서 호투하며 부활을 알렸다.

이후 후반기에도 호투를 이어가며 연승행진 중. KIA 타선이 좋고 본인의 투구가 좋으니 진짜 남은 등판 경기 다 이겨서 10승 찍는 거 아니냐는 설레발도 나오는 상황이었다. 2009년 8월 12일 롯데전에서 7이닝 무실점 5탈삼진으로 시즌 6승을 거두며 팀과 자신의 연승 행진을 이어가는데 성공. 8월 18일 히어로즈전에서는 5이닝 1실점 승리, 8월 23일 SK전에서는 7⅔이닝 1실점으로 8승째를 올리며 10승 설레발을 부채질하고 있다. 8월 30일 두산전에서는 7이닝동안 피안타 2개 1실점으로 호투했으나 기아 타선이 미친듯한 병살을 때려내면서 1:0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2007년의 윤석민이 되살아나...나 했는데 8회초 최희섭의 적시타와 장성호의 대타 만루홈런, 다음 타자 김원섭의 백투백 1점 홈런으로 KIA가 대거 6점을 뽑아내면서 역전에 성공, 시즌 9승째를 거뒀다. 또한 7월 19일부터 8월 30일까지 7번 선발 등판해서 모두 승리 투수를 따내면서 선발 7연속 승리 투수를 이어가는 한편, 평균 자책점 부문에서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하는 김광현[18]을 제치고 1위[19]로 올라섰다.

하지만 9월 5일 두산전에서 3⅓이닝 10실점[20]하는 최악의 피칭을 하며 평균자책점 타이틀 수성은 사실상 어려워졌다. 항간의 소문으로는 2007시즌 부터 시작된 아킬레스건 부상이 재발한 것이 아니냐, 또는 작년 올림픽과 올 초 WBC까지 다녀온 탓에 결국 체력이 떨어지면서 투구 밸런스에 악영향이 간 것 아니냐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MRI 촬영결과 어깨에 부종이 확인되며 시즌 아웃되었다.# 다행히 포스트 시즌에서는 투구가 가능한 듯.

결국 정규시즌 최종 10승을 채우지 못하고 27경기 등판(선발 16경기)하여 119⅔이닝 소화하면서 9승 4패 7세이브 ERA 3.46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9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기다렸다는 듯 복귀,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KIA가 홈에서 1, 2차전 모두 가져가며 2연승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시리즈 전적 3:2로 앞선 6차전에서는 5이닝 3실점을 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해설, 선배투수, 본인까지 한 목소리로 '너무 급했다'고 평했을 정도로 일찍 승부를 보려는 조급한 피칭을 했다. 팀 타선도 꽁꽁 묶여서 승리는 결과적으로 어려웠던 경기. 타선이 터졌으면 승리 투수가 되면서 나름 잘했다고 칭찬 받을 수도 있었다. 역시 이기면 뭐든지 좋게 보인다.

다행히 팀은 시리즈를 7차전까지 가는 치열한 명승부 끝에 기어코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며 데뷔 5년차 만에 우승반지를 얻게 되었다.우승 후 만세하는 윤석민


2.2.6. 2010 시즌[편집]


성적이 나쁜 건 아니지만 순 제멋대로인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적응 못하고 투수코치가 데스기모토로 바뀐 탓인지 부진하다.

5월 9일에는 뜬금없이 마무리 등판까지 했다. 5월 11일 광주 넥센전에서 2년만에 완투승을 거뒀지만, 류현진의 17K 탈삼진쇼에 아쉽게 묻혀버렸다. 5월 26일 잠실 LG전에서는 ⅔이닝동안 8실점으로 관광당했다... 충격이 오래 갈듯 할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010년 6월 18일 있었던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8⅓이닝 동안 거의 130구 던지고 완투직전에 윤상균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강판당했다. 그리고 강판 후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라커룸에 오른손을 내리쳤는데 하필 새끼손가락이 골절되었다. 전치 6주.[21]

은퇴 후에야 윤석민 본인이 스톡킹에 출연해 이 당시 라커룸을 내리친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당시 팀은 순항하는데 윤석민이 선발 등판하는 날에 패하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중, 어느 날 경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기자가 승리 멘트를 요청한 적이 있었고 윤석민이 인터뷰를 수락하진 않았지만 그 날 경기에서 끝내 패하며 많이 마음에 남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심지어 그 기자는 다른 날에도 경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승리 멘트를 요청했고, 다시 거절하자 인터뷰를 한다고 경기가 뒤집어지거나 하냐면서 역으로 화를 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완투를 자처하다 적시타를 맞고 강판된 날에도 그 기자는 어김없이 경기가 끝나기 전에 멘트를 요청했고, 이 때문에 열을 받아 글러브를 내던지고 라커룸에 들어갔다 나왔더니 결국 끝내기를 맞자 홧김에 문을 내려쳤다가 손이 부러졌다고 한다.

8월 15일에는 2:1 상황에서 등판, 볼넷과 송구 실책으로 1점을 내준 직후 타석에 들어선 홍성흔에게 던진 속구가 손등을 강타해 홍성흔이 시즌 아웃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개 몸쪽 공은 대부분의 타자들이 잘 피하는데, 가끔 스윙하려고 나가다가 손등에 맞는 경우가 나온다. 하필 홍성흔도 이 경우였기에 안타까운 상황. 윤석민 본인도 그냥 서 있으면 안 맞았을 공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KIA와 롯데는 4강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중이었고, 홍성흔은 그런 롯데 타선의 중심축이었다. 게다가 홍성흔은 타점 신기록 경신이 상당히 유력한 상태이기도 했다.

때문에 윤석민은 롯데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다. 빈볼 논쟁이 나오기도 했지만 롯데, KIA 모두 빈볼은 아니라고 밝혔다. 특히 피해자인 홍성흔은 사과 전화를 한 윤석민에게 "경기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신경쓰지 말고 잘해라" 라고 말해주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이기도 했다.#기사

8월 19일 경기에서 마무리로 등판하여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8월 24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구원등판하였는데 스톡킹에서 밝힌 바로는 체인지업[22]이 손에서 빠지면서 조성환의 헬멧에 맞고 마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분노한 사직구장 롯데 팬들의 오물 및 물병 투척으로 경기가 10여분 정도 지연되었다가 재개되었다.[23]

이 때 롯데팬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는데 이는 단순히 롯데팬이 극성이기 때문만은 분명히 아니다.[24] 해당 경기 시점에서 롯데와 KIA의 4강 경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 + 2010시즌 윤석민이 던진 몸에 맞는 볼이 총 3개인데 3개 모두 롯데 중심 타자들(강민호, 홍성흔, 조성환)에게 맞았다는 것[25] + 8회말에 등판해서 9회말 2아웃까지 절묘한 제구로 5타자 연속으로 삼진 및 범타로 처리를 하던 중이었다는 것이 합쳐지는 바람에 엄청난 결과가 나와버렸다.

조범현 감독은 수많은 관중들이 "내려가"를 외치는데도 굴하지 않고 계속 윤석민을 던지게 했고, 윤석민은 이대호를 고의사구[26]로 거른 후 카림 가르시아를 외야 플라이로 잡아내고 내려갔다.

경기 결과는 KIA가 7:5로 승리. 이후 경찰들의 경호를 받으며 구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후에도 큰 파장이 있었다. KIA 타이거즈/사건사고 참조.

결국 심리적인 문제로 인해 1군에서 말소되었다. #기사 한편 메이저리그의 한 멘탈 코치가 윤석민의 소식을 듣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기사 그리고 이 때 공황 장애로 내려갔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루머로 밝혀졌다.[27]

그리고 9월 14일 다시 1군에 올라왔다.#기사 하지만 역시 후유증이 남아있었는지 9월 15일 서재응에 이어 8회 등판 ⅔이닝 4실점하며 084의 위엄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사구 논란과 그 후의 부진 때문에 광저우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에 든 것을 비난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2014년 6월 16일 조성환이 은퇴를 선언하자 이 사건이 다시 재조명되었다.[28]


2.2.7. 2011 시즌[편집]




파일:KIA_YSM_2011_04.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석민(투수)/선수 경력/201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8. 2012 시즌[편집]



파일:윤석민-20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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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2013 시즌[편집]



파일:윤석민-201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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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노포크 타이즈 (마이너리그) 시절[편집]



2.3.1. 201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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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즌 종료 이후 FA를 선언하면서 해외 진출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FA 선언 선수들이 전부 계약한 가운데 이듬해 2월이 넘어가도록 계약소식이 들리지 않으면서 국내유턴 설 등 여러 루머들이 돌았다.

마침내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인 노포크 타이즈에서 뛰게 되었다. 하지만 6월 중순 기준으로 방어율이 리그에서 밑에서 4위이고 이닝당 피홈런수는 리그 1위이며 6월 17일 기준으로 아홉경기 연속 피홈런을 맞는 등전혀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마이너리그 시즌이 모두 끝난 시점에서는 크보급 투수라는 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을 정도. 10경기 연속 피홈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겪었으며 이때 부정적인 별명 노폭전드라는 멸칭이 붙었다.

8월 31일 볼티모어의 40인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국내 리턴설이 다시 떠오르는 중. 윤석민 본인은 내년에도 메이저리그 도전의사를 드러냈다.[29]


2.4. KIA 타이거즈 2기[편집]



2.4.1. 2015 시즌[편집]



파일:윤석민(투수)201509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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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모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친정팀 KIA로 돌아온 해다.


2.4.2. 2016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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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2017 시즌[편집]


2016년 12월 8일 팀 공식 SNS를 통해 어깨에 웃자란 뼈 제거 수술에 들어가며 복귀에 최소한 6개월은 걸린다는 소식이 나왔다. 관련기사. 수술 후 재활에 반년 정도 걸려 최소 2017년 6월에야 복귀가 가능하고 당연히 상반기는 출장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재활 후에도 등판 준비에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전반기는 아웃이 확실시되고 후반기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팬들은 어차피 수술할 거였으면 일찌감치 수술을 받고 다음시즌을 확실히 준비해서 나올 것이지, 12월이 되어서야 수술을 받는 이 상황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쯤되면 토종 투수들 중 사상 최악의 먹튀가 될지도 모르는 우려스러운 상황.

여담으로 시즌 전인 2016년 12월에 득남했다. #

인터넷에서 팬들끼리 아직 복귀를 하지 않는 윤석민의 보직을 두고 선발투수와 불펜 자리로 예송논쟁을 벌이고 있다 카더라.

6월 18일 현재에도 이전의 6월 복귀 기사에 대한 복귀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올해 안에 복귀한다해도 현실적으로 2년째 경기경험이 없는 선수가 복귀 직후 제대로 된 활약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올해 복귀는 힘들다고 보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복귀해도 불펜으로 쓸 수 있는지조차 의문.

8월에 돌아온다고 하지만 또 미뤄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결국 9월달에야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기사가 났다. 몸 상태가 완벽해지면 복귀시킨다고 하는 걸로 봐서 아예 시즌을 통째로 날리게 될지도.

7월 31일, KIA가 2017년 2차 1라운더 유망주인 좌완투수 이승호를 내주고 넥센의 마무리 투수 김세현을 받아오자 팬들은 더더욱 윤석민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윤석민이 제때 돌아와 투수진에서 활약해줬어도 꼭 성사할 필요가 없었던 트레이드였기 때문이다.

결국 2017년 8월 30일, 2017년 복귀는 불가능하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시즌 아웃이 확정되었다. 같은 날, 팀 또한 최규순 스캔들이 터지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걸로 KBO 역사상 유례 없는 최악의 먹튀 확정.

결국 2017년 KIA 타이거즈의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하지 못했다.

11월 14일, 개그맨 변기수와의 사진으로 근황을 공개했다.

12월 9일, 아내의 출산으로 인해 1년여 간 미뤘던 결혼식을 올렸다.

12월 22일, 골프에 빠졌다는 근황이 공개되었다.


2.4.4. 2018 시즌[편집]



파일:윤석민-201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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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2019 시즌[편집]


연봉이 대폭 삭감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무려 10억 5천만 원이 삭감된 2억 원에 계약하였다. 하지만 팬들은 이것도 너무 많다는 반응이다.

2월 7일 인터뷰에 따르면 2017시즌에도 언급된 오른쪽 어깨 웃자람뼈 제거 수술 이후 아직도 통증을 호소한다고 한다. 햇수로 수술을 받은지 2년 2개월이 지났는데도 통증을 호소한다는 소식에 팬들은 크게 절망하며 사이버&먹튀화 예약이라며 씁쓸해 하는 중. #

결국 김세현처럼 국내 귀국 조치가 떨어졌고, 갸갤과 엠팍은 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체적인 기류는 부활은커녕 더이상 선수생활이 어려울 거 같단 의견이 대다수.

4월 퓨처스 리그에서 등판하여 24일 1이닝 무실점, 27일 2이닝 2K 무실점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최고 구속 139km/h를 찍었다고 한다. 구속이 더 올라오면 복귀가 가능하다는 전망도 있으나 복귀해서 활약할지는 미지수다.

7월 13일. 이범호의 은퇴식에서 오랜만에 근황이 포착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그라운드로 나와 있는데 차마 그러진 못했는지 라커룸에 있었다고 한다.

결국 4월 퓨처스 등판을 끝으로 재활만 하다 시즌을 마감했다. 그렇게 재활만 했는데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 모양. # 팬들도 이젠 완전히 포기하는 모양새. 이젠 남은 선수생활 동안 1군에 올라와서 공 한번이라도 던지는 게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지경.

10월 말에 기사 한번 나고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던 도중 12월 13일에 보도자료를 통해 긴 재활 끝에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윤석민은 "다시 마운드에 서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상적인 투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재활로 자리를 차지하기 보다 후배들에게 기회가 생길 수 있게 은퇴를 결심했다"라며 은퇴 의사를 밝혔고 KIA 구단도 이를 수용했다. 윤석민은 마지막으로 "선수로 뛰면서 팬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응원과 사랑에 보답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며 앞으로도 팬 여러분이 보내주신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살겠다. 그동안 기회를 주시고 지도해주신 감독님과 코치님, 구단 직원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드린다"라는 인터뷰를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임의탈퇴선수로 공시되며 은퇴 절차 또한 마무리지었다.

사실 지난 5월달에 마음을 정리하고 구단에 은퇴 이야기를 꺼냈지만 조계현 단장이 1년만 더 해보자며 만류해서 좀 더 재활을 해봤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아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30] 어찌되었던 한때는 트리플 크라운도 수상하던 선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아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말년에 재활만 하며 90억이라는 거액을 먹튀를 하는 것도 모자라 2018시즌 자신 때문에 다른 투수들의 보직까지 파괴시킨 행보[31]가 워낙 임팩트가 컸던지라 위에 나왔던 인터뷰에도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2.4.6. 은퇴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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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선언하고 약 2년이 지난 2021년 5월 30일,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리는 KIA vs KT 전에서 UNTOUCHA21E이란 부제를 달고 은퇴식을 갖는다.[32]

비록 국내 복귀 후 영 안좋은 행보를 보이다 불명예스러운 은퇴를 했지만, 전성기 시절 KIA 타이거즈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활약을 펼친 국가대표 출신 선수에게 구단 차원에서 예우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

은퇴식이 있던 경기 전에 마스크 5만장을 기부하고 시구를 했다. 또한 자기가 코치였어도 자길 안 썼을 것이라며 셀프디스를 해 팬들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2.5. 국가대표 경력[편집]


2006년부터 2013년까지 굵직했던 대회들에 개근 하였다. 그만큼 당시의 윤석민은 대체불가 였고 국대의 활약상만 보면 류현진과 동급 혹은 그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류현진, 김광현과 함께 대한민국 야구 전성기의 국가대표팀 에이스이자 마당쇠 로서 묵묵히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 국가대표로서의 활약으로 미국 무대에 도전할 수 있었고 고척돔 참사를 시작으로 국가대표팀이 삽질을 하며 무너질 때마다 이승엽, 김동주, 이대호 등과 함께 소환돼 나름의 재평가를 받고 있다.


2.5.1. 2006 도하 아시안 게임[편집]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파일:윤석민 2006.jpg

06시즌 당시 구원으로 2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에 우완 불펜으로 승선하였으나 도하 참사를 겪고 돌아오게 된다. 이 당시 프로 2년차 햇병아리로 너무 어렸기에 패전조 취급이라 대만전에서는 나가지 못했고 그다음 일본전 3.2이닝 무실점으로 던지고 크게 이긴 중국전에서 등판기회를 얻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졌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시합에 아예 나가질 못해서 패배에는 딱히 책임이 없긴 했다. 여담으로 본인 유튜브 방송에서 아내가 도하 아시안 게임 당시의 국가대표 유니폼을 꺼내자 도하참사를 언급하며 집어넣으라는 반응을 보였다. 본인도 흑역사 취급하는 듯.


2.5.2.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2008 베이징 올림픽

파일:윤석민 베이징.jpg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경기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자책점
삼진
4구
5
7⅔
2.35
2
0
0
1
6
1
2
6
1
윤석민은 임태훈을 대신하여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다. 당시 대표팀 감독 김경문이 윤석민 뽑는 것을 반대하다가, 평가전에서 참패하고 기술 위원들의 설득으로 임태훈 대신 넣었다는 사실이 허구연의 방송사고로 드러났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윤석민은 대표팀 명단 발표가 나고 페이스가 올라왔고, 임태훈은 하락했다. 대회 직전만 보면 윤석민이 들어가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야구] 윤석민 베이징 간다

원래 올림픽 대표팀의 불펜진은 한기주, 오승환, 권혁(L), 정대현(U)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해 보였으나 한기주가 심각하게 부진했고 오승환도 컨디션 이상으로 이탈해 버려서 졸지에 대표팀 유일의 우완 불펜으로 등극, 윤노예라 불리며 마운드에 자주 올랐다.[33]사실 올림픽 초반에는 투구내용이 기대보다 썩 좋지 안았다. 소위 말하는 분식회계가 많아서 이대호가 윤석민을 살렸다고 했을 정도로[34] 훌륭하진 못했지만 경기를 치를수록 확실히 투구내용이 좋아졌다.

윤석민은 조별리그 1차전 미국과의 경기, 6:5로 리드중인 9회초에 대회 첫 등판을 했다. 당시 한기주 아웃카운트 단 한개도 잡지 못한채 홈런-안타-안타를 허용해 무사 2,3루 위기를 만든 상황에서 윤석민은 2아웃까지 잘 잡아냈지만 결국 적시타를 맞아 역전을 허용했다. 하지만 팀이 9회말 3점을 내서 역전하는 바람에 윤석민은 대회 첫승을 기록하게 됐다.

이후 윤석민은 조별리그 4차전 일본과의 경기에 6회 1사후 구원등판했다. 윤석민은 올라오자마자 투런 홈런을 허용했지만 이후 타자들을 안정적으로 막아내며 2.2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이대호가 동점홈런을 치고 팀이 9회초 역전에 성공하면서 승리투수로 기록되었다.

윤석민은 조별리그 5차전 대만과의 경기 9:8로 리드중인 8회 다시 한번 구원등판했다. 이날 대한민국의 마운드를 상대로 맹폭을 날리던 대만타선을 1.2이닝 0실점으로 잠재우며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덤으로 이번 대회 첫번째 세이브까지 기록했다. 이때부터 윤석민은 대만 킬러가 된다.

바로 하루 뒤인 조별리그 6차전 쿠바전 역시 구원등판했다. 원래 윤석민은 이 경기 선발투수로 내정되었으나 대만전이 예상치 못한 접전으로 흐르게 되어 등판했던 것이다. 이날 윤석민은 4점차 리드 상황에 등판하여 1.1이닝 1실점을 기록하고 오승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윤석민의 등판은 결선 토너먼트에 가서도 이어졌다. 윤석민은 4강 일본전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1이닝 0실점 깔끔한 피칭을 보여줬다. 팀이 4점차로 리드중인 상황이라 세이브로 기록되진 않았다. 이 당시 불펜에서 몸을 풀때 긴장을 해서 제구가 흔들렸는데 막상 마운드에 오르니 긴장이 풀어졌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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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에서도 심판의 석연찮은 볼 판정과 강민호의 퇴장으로 류현진-강민호 배터리가 교체되면서 다음 투수로 김경문 감독이 올리려 했으나 불펜에서 공을 받던 진갑용정대현을 올릴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정대현이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해서 윤석민 역시 목에 금메달을 걸었다. 대회 내내 경기의 승부처마다 등판해 제 몫을 해낸 윤석민은 대한민국의 사상 첫 금메달의 일등공신중 한 명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최종성적: 5경기 7.2이닝, 2승 0패 1세이브, 6K, ERA 2.35

13년 뒤, 이보다 더한 혹사를 당한 선수가 등장했다.


2.5.3. 2009 WBC[편집]


2009 WBC

파일:윤석민 2009.jpg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자책점
삼진
4구
4
2
16
1.13
2
0
2
0
13
1
2
13
1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자원으로 떠오른 윤석민은 당연히 이번 엔트리에도 포함됐다. 불펜 투수로서 합류했던 지난 대표팀때와 달리 이번 대표팀에서는 선발투수로서 나설 것으로 예상됐다.

윤석민은 1라운드 중국전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몇 수 아래의 중국타선을 상대로 견고한 피칭으로 6이닝 0실점 완벽투를 펼첬다. 대한민국이 7회 14:0 콜드게임 승을 거둠에 따라 이번 대회 첫 승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이후 멕시코전, 일본전에서 계투조로 활약하며 방어율 0을 기록하며 대표팀의 4강 진출에 공헌했다.

베네수엘라와 펼친 4강전에서 메이저리거로 구성된 베네수엘라 타선을 6⅓이닝 7피안타 2실점으로 틀어막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미겔 카브레라를 본인의 장기인 슬라이더로 삼진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사실상 윤석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경기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는 명경기다.

최종 성적: 16이닝, 13K, 2승 0패, ERA 1.13, WHIP 0.88


2.5.4.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편집]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파일:윤석민 2010.jpg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자신의 커리어 2번째 아시안게임 출전으로 지난 4년전의 도하 참사 맴버로서 겪은 굴욕을 만회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11월 13일 조별리그 대만전 7회에 선발 류현진을 구원등판하러 나왔는데... 알고보니 당일 출전선수 명단[35]에서 빠진 상태였다. 때문에 주심이 윤석민을 퇴장시키는 바람에 1구도 못 던지고 쫓겨나고 대신 봉중근이 급히 올라왔다. 프런트의 초대형 사고. 이 과정을 심판이나 위원회가 민감하게 받아들였더라면 재경기 내지 몰수패라도 나올 상황이었다는 점[36], 대만측에서도 윤석민을 퇴장시킨 후에도 이런저런 항의를 하며 제스쳐를 취했다는 점, 비록 크게 리드해나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분위기가 매우 미묘해지는 바람에 등판투수의 기복에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는 점[37] 등 큰 문제가 될 뻔했다.

이일로 기아갤과 야갤에선 윤종범, 윤유령, 윤투명, 윤실종, 윤미아, 윤난입, 윤톨이, 윤누락, 윤나가, 윤간인, 윤난입, 윤리건, 윤명인간, 윤유령투수 등 김별명 못지않은 온갖 별명을 얻었다.

그래도 18일 준결승 중국전에는 제대로 나와서 150km/h 가 넘는 공을 뿌리며 호투했다.

이후 19일 대만과의 결승전에서는 선발 류현진 다음으로 마운드에 올라가 5이닝 7k 무실점, 9회까지 모두 던지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류현진이 4이닝 3실점으로 흔들렸지만 휘둘리지 않고 호투를 해서 경기 끝까지 안심하고 지켜본 국민들에게 박수를 많이 받았다. 야갤러들 마저 공황甲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특히 7회의 3타자 연속 삼진은 이 경기의 백미.


2.5.5. 2013 WBC[편집]


2013 WBC

파일:윤석민 2013.jpg



대한민국 대표팀 개인별 성적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피홈런
자책점
삼진
4구
1
1
4⅓
4.15
0
1
0
0
4
0
2
2
1

윤석민은 2013 WBC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4년전에 이어 커리어 2번째 WBC 출전이다. 이 대회에서 류현진, 김광현이 각각 MLB진출과 부상으로 대표팀 합류를 고사했기 때문에 팀의 에이스로서 윤석민의 어깨가 어느때보다 무거웠던 대회였다.

세간의 예상대로 팀의 에이스 윤석민은 네덜란드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1차전에 선발등판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타선은 한국언론에 과소평가받았지만 내실있는 강타선이었다. NPB 2년 연속 홈런왕 블라디미르 발렌틴, MLB통산 434홈런을 기록한 앤드루 존스, MLB 상위 유망주였던 안드렐톤 시몬스, 잰더 보가츠 등 해외에서 이름있는 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이 타선을 상대로 윤석민은 4.1이닝 2K 2실점(4피안타, 1피볼넷)을 기록하며 제 역할을 어느정도 해줬다. 하지만 팀 타선이 네덜란드 투수진을 상대로 단 한점도 뽑지 못하면서 패전투수로 남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호주, 대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2승 1패를 기록했지만 이 때의 5점차 대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상 첫 WBC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맛봐야만 했다.

최종성적: 1경기 4.1이닝, 0승 1패, 4K, ERA 4.15


3. 골프선수 경력[편집]


은퇴 이후 한동안은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간간이 TV 및 유튜브를 통해 근황을 알렸다가, 2020년 12월 22일 정푸드코리아의 스폰서십 체결 소식과 함께 KPGA 2부투어 도전을 알리며 프로골프선수로 전향을 알렸다.

야구선수 시절부터 골프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고 오프시즌 야구인 초청 골프대회에서 몇 번 초빙을 받으며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프로로 전향한 것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외에서도 투수 존 스몰츠가 은퇴 이후 골프대회에 도전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자격으로 도전에 나선 것이었다.

12월 26일 본인의 SNS를 통해 프로 전향이 아닌 세미골퍼 자격증을 따려고 하고있으며, 2부 투어는 참가비만 내면 누구든 참여 가능하다며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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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수치고는 발이 너무 느린 단점도 있었다.[2] 전설의 타이거즈 라이브에서 시청자가 준우승의 아쉬움을 언급하자 팬들이 이런것까지 알고 계시냐며 놀라워했다. 초,중,프로야구,성인 국가대표 모두 우승경험이 있으나 고교때만 없다고 덧붙였다.[3] 스코어로 알 수 있듯이 신인에게 첫 1군 등판부터 패전처리가 아닌 추격조의 역할을 맡긴 셈이다.[4] 4월까지 누적하면 32경기 동안 51⅔이닝(...)[5] 심지어 선발 등판은 아예 0이었다. 참고로 2007 시즌부터 선발 전환을 했기 때문에 2006시즌 역시 선발 등판이 없었다.[6] 특히 5월에만 11경기 동안 22⅓이닝을 소화했다(...)돌정환 죽어[7] 이 때 경기는 0:2로 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이브 상황은 아니었고 블론 세이브도 아니었다.[8] 1승과 6세이브 적립.[9] 심지어 이원석의 희생번트 빼고는 신명철박기혁에게 좌중간에 2루타를 연거푸 맞아버렸다(...)[10] 참고로 해당시즌 권오준은 홀드만 32개를 올리며 리그 신기록을 올리면서 홀드왕을 차지했고, 박준수오승환에 이어 세이브 2위를 기록했었다.[11] 1위는 이 해 2007 크보 미스터리에도 들어가는 타격왕을 수상했던 이현곤(4.39)였고, 투수로는 당연 1위였다.[12] 1점이 문제가 아니라 9회까지 달랑 2안타, 3볼넷으로 5출루가 전부였다(...)[13] 심지어 팜볼 연습이라면서 알려진 이 영상도 술을 진탕 마시고 뻗어있다가 경기 시작 10분 전에 겨우 깨서 캐치볼 몇 번 하고 나오다보니 맨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던진 공이 바로 이 아리랑볼이다.[1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윤석민이 밝힌 바에 의하면 이 경기에서 5회까지 상대 타자를 한번도 내보내지 않았다가 6회에 윤석민이 던진 커브가 빠지면서 실투가 발생, 상대 타자가 볼에 맞고 진루하면서 퍼펙트가 깨졌다고 한다. 아니, 그러니까, 술 먹고 던지는 상황에서 5회까지 상대 타자를 다 잡은게 기적이지........[15] 심지어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잡고 강판된 경기만 두경기나 되었다.[16] 그런데 사실 임태훈 대안으로 코칭스태프들은 제구가 좋고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 손민한을 언급했으나, 하일성 당시 단장이 강하게 윤석민으로 가야된다고 어필한 것이 잘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윤석민 입장에서는 정말 극적에 극적을 더하는 순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17] 한편 김성근 SK 감독은 10월 5일 히어로즈와의 최종전에 김광현이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도 따내어 트리플크라운을 하길 절실히 원한다면 중간계투로 등판시킬 수도 있음을 시사했지만, 이미 다승왕과 탈삼진 타이틀을 따내 2관왕을 했을 뿐더러 한국시리즈 직행도 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에이스를 굴릴 필요는 없었기에 더 이상의 등판 없이 시즌이 마무리되었다.김광현 또한 올림픽을 갔다온 상황에서 더 무리했다가는 더 빨리 퍼졌을지도 모른다.[18] ERA 2.80[19] ERA 2.79[20] 심지어 구원등판한 오준형최준석에게 좌측에 장외홈런(!)을 허용하며 최종 10실점이 되었다.[21] 일본의 좌완 투수 스기우치 토시야가 이전에 비슷한 짓을 하다가 부상당한 적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후 안티들이 윤석민을 깔 때 윤복서라고 부르기도 했다.[22]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119km/h의 체인지업이었다고.[23] 당시의 기억으로는 하늘에 별자리가 떠 있는 것마냥 오물들이 하늘에 수놓아져 있었다고...[24] 아무리 롯데팬들이 극성이어봤자 후안 카밀로 수니가를 대하는 브라질인 이상으로 극성일까? 롯데팬들이 윤석민에게 퍼부은 야유와 폭언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네이마르에게 니킥을 시전한 수니가에게 브라질인들이 살해 위협을 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다.[25] 공교롭게도 이 중 홍성흔조성환은 2010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다. 전원 3할 타자에 홍성흔의 경우 이승엽의 한 시즌 타점 신기록 갱신 가능성까지 있는 상태였다. 조성환은 전 시즌에 채병용에게 공을 맞아 광대뼈 함몰에 전치 8주 판정을 받은 적도 있고.[26] 이 고의사구가 롯데팬들의 분노를 키웠다.[27]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추정되나 기아빠로 유명한 이선호가 윤석민을 옹호하겠답시고 공황 장애라고 기사를 써 버린 것. 이에 대해 윤석민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이 기사 때문에 공황 장애에 걸린 적도 없는데도 윤공황(...)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28] 네이버 측에서 조성환의 활약상을 담은 동영상들을 올리면서 이 사건도 같이 올렸다.[29] 안타까웠던 점 하나는 마이너 거부권 조항이 유효한 것으로 생각하여 내년에는 무조건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30] 다만, 이 말을 믿을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5월에 은퇴의사를 밝혔던 선수였고 나아지지 않아서 은퇴를 이미 결심한 상황이라면, 신임 감독 환영행사 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의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연봉협상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해서 박차고 나가서 은퇴를 결정했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겠지만 미운털이 심각하게 박혀있고, 2018시즌 보여준 이기적인 모습을 생각해보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기에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2015년 어깨 수술 이후 본인이 수술 이후 정상적인 복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은퇴 이후 인터뷰에 밝힌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닐수도... 어찌되었던, 진실은 저 너머에.[31] 윤석민의 1군 복귀로 그 전까지 준수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돌던 한승혁임기영이 선발과 불펜을 와리가리하면서 결국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32] 바로 전날인 5월 29일에 대선배인 김태균이 은퇴식 및 영구결번 행사를 가졌다.[33] 우언 정대현도 맹활약했다.[34]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아라이에게 투런을 맞았지만 이대호가 바로 대형 투런을 쳐줬다.[35] 당시 규정상 24명 엔트리에, 경기당 22명까지 출전 가능하다. 윤석민 본인은 아예 엔트리에서 누락된 줄 알았다고 한다.[36] 물론 굳이 법대로 하자! 라면 규정상의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건 빌미를 잡혀봤자 좋을거 하나 없거니와 조범현 감독도 몰수패 판정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37] 우천지연 등의 예로도 알 수 있지만 타자도 리듬이 깨지지만 이 경우 어깨가 식고, 페이스를 잃은 투수쪽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걸 빌미로 역전이라도 당했었다간 큰일이었다. 그런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