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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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을지니,(Oh,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
천지가 하느님의 위대한 심판의 옥좌에 설 때까지 그러하리라.(Till Earth and Sky stand presently at God's great Judgment seat;)
그러나 동서양도 국경도, 인종도, 계급도 없으리라.(But there is neither East nor West, Border, nor Breed, nor Birth,)
세계의 끝에서 온 두 강자가 서로 대면할 때에는!(When two strong men stand face to face, though they come from the ends of the earth)!
러디어드 키플링의 영일동맹 헌시 <동양과 서양의 노래(The Ballad of East and West)>
1. 개요[편집]
크게 제1차 영일동맹(1902년)과 제2차 영일동맹(1905년), 제3차 영일동맹(1911년)이 있다.
2. 제1차 영일동맹[편집]
2.1. 배경[편집]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은 대영제국과의 1세기 가까이 끌어온 그레이트 게임으로 남하 계획이 번번히 막히자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었다. 러시아는 기존의 튀르키예, 흑해 및 중앙아시아 방향으로의 진출을 사실상 포기하고 대신 만주와 한반도라는 새로운 거점 확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당시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했고 이어 만주에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만주의 군사적 점령을 시도했으며 요동 반도에서 다롄과 뤼순 항 및 동청철도(東淸鐵道 - 하얼빈 철도의 예전 이름)를 건설하여 남하를 시도했다. 또한 한국에서도 마산포, 용암포, 절영도[4] 를 조차(租借)하려 하거나 조선에서 제주성 위협사건, 아관파천 사건과 같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러 세력을 침투시켰다.
한편 일본은 반대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숙원이었던 '대륙 진출'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 제국은 한반도 점령을 시작으로 만주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일본 제국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 시점부터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의 도전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장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뱉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만주의 이권은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국의 이권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기본 입장을 러시아에 표명하였다.
이에 영국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당연히 러시아의 팽창을 동아시아에서도 저지하려 했다. 이전에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어 진출을 저지하는 데에 성공한 적이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만주,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욕심을 알아챈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1899년 미국의 헤이 국무 장관 역시 문호 개방을 주장하여 당시 열강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만주와 중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었다. 1902년 1차 영일동맹 뒤 러일전쟁이 발생하여 1905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미국과도 대러 협조를 위한 각서를 체결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것이다. 그러나 1907년 일본이 끝내 감당하기 벅찬 러일전쟁 전쟁 비용[5] 의 충당을 위해서 만주에서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을 독점하는 조치를 취하자, 미일 협력 관계는 무산되었다.
2.2. 내용[편집]
1901년 일본의 입장은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단독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여타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한반도 지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이권 분할에도 참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영국과의 제휴를 모색하였다. 두 나라의 이해가 결부되어, 그 해 12월 양국은 일본 대표로는 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林董), 영국 대표로는 외무대신 랜스다운이 협상 교섭을 하였고,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동맹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講和)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동맹의 체결에 대항해 러시아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강조하면서 같은 해 3월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 - 프랑스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으나, 러일전쟁에서 입은 타격 덕분에 국제 외교에서 크게 수세에 몰리는 입장이 되었다.
2.3. 결과[편집]
영국 국내의 반응은 충격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후 오랫동안 초강대국 자리를 유지하며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 도도한 외교적 태도를 고수하던 국가였다. 그렇게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고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자국이 처음으로 동맹을 맺은 대상이 고작 극동의 신흥국이라는 사실에, 한동안 자조적인 분위기가 언론을 맴돌았다. '왕자가 방앗간집 딸과 결혼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여기서 나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대영제국이 자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에 전국이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나라가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분위기에 들떴다. 이는 당시로서는 김칫국이었지만, 영일동맹 이후 점차 현실이 되었다.
영일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국채 등을 매입하는 등 전비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6][7] 이에 그치지 않고 전함 미카사를 비롯한 최신예 영국제 군함을 일본이 수령하도록 허용했다. 당시에는 군함 제작국이 보유한 함선보다 더 좋은 군함을 타국이 구매하게 되면 당장 제작국의 해군이 태클을 넣는데, 이런 방해가 전혀 없었다.
이런 도움에 힘입어서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년)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대한제국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3. 제2차 영일동맹[편집]
러일전쟁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열강 중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1905년 8월 12일에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받았다.
또한, 영국은 만주벌판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정규야전에서 러시아군을 잇달아 패배시키는 일본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만주에서 철수할 러시아가 인도로 진출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의 적용 범위를 종래의 '극동'에서 '동아시아 및 인도'로 확대하였다.
그 결과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상호 동맹 조약을 겸하여 그 해 3월 봉천 회전과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최종 결정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의 과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의 한국 지배가 공식 승인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4. 제3차 영일동맹[편집]
미국은 처음에는 이 동맹을 대(對)중국 문호 개방 정책으로의 지지와 방어 또는 극동에서의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벽이 된다고 생각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러일 전쟁 후 만주의 철도 중립화 문제와 포츠머스 협정의 성립,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의 일본 이민 제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일간 관계가 점차 미묘해지자, 긴밀한 영미 관계가 영일동맹과 모순되지 않도록 영국과 일본 양국에 강하게 요구했다. 간단히 말해서 영국과 일본이 편 먹고 미국을 양면 공격하는 사태를 불러오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6년 후에 영일 양국은 미국을 그 동맹 협약에서 말하는 '제3국'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제3차 영일동맹을 1911년 7월 13일에 체결했다. 그리고 독일이 팽창주의를 내세움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영러협상을 체결하여 그레이트 게임을 종식시킨 바가 있다. 그래서 영일동맹의 목표를 러시아 견제에서 독일 견제로 바꾸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 때 당시 일본은 연합국의 편에 선다. 1914년 8월 1일, 영국은 주일대사관을 통해 일본에게 독일에 선전포고할 의무가 없다며 처음에는 일본의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으나 동년 8월 4일 영국 외무부는 독일의 동양함대가 홍콩과 웨이하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일본에 독일령 교주만을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영국이 일본에 참전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를 점령할 경우, 호주와 뉴질랜드 입장에서 일본군이 코 앞에 오는 상황이고 미국 입장에선 필리핀과 하와이가 위협받을 수 있었기에 미국, 호주, 뉴질랜드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일본에 영국이 참전을 요청한 다음날인 8월 5일에 미국은 일본의 참전에 우려의 뜻을 표현했다.
일본 해군 내에서도 참전에 대해 찬반은 갈렸으나 8월 4일 독일의 엠덴급 경순양함[8] 이 쓰시마 앞 바다에서 러시아 선박을 임검한 사건이 일어나자 독일의 동양함대의 존재가 일본의 통상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 참전을 결정했다. 영국은 호주와 미국의 반발로 인해 일본에게 전선을 태평양 방면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의 참전을 인정했다. 즉, 초기 영국은 일본군을 통해 칭다오 지역의 독일군은 궤멸할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일본도 독일령 뉴기니를 노리고 있었고 끝내 점령해버리나 식민지가 아닌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점령이 인정되었다.
이후 일본은 영국 등 연합국의 군사지원요청[9] 에도 불구하고 칭다오 전투에서 승전한 일본은 유럽의 서부전선에 가담하지 않았다. 일본 육군은 친독 성향이 강한 편이었기에 파병에 더 부정적이었던 반면 영국 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해군은 영국을 도와주자는 분위기가 강한 편이었다. 이런 분위기의 차이로 인하여 일본은 육군 대신 해군 함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주로 구축함이었고 기함으로 사용할 소수의 순양함이 더해졌다.[10] 유보트 때문에 꽤 고생하던 영국 입장에서는 구축함이 더 필요했기에 잠수함을 상대할 구축함이 오는 게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유럽 열강에게 군수품을 공급하고 구축함 파견의 대가로 아시아 등지에서 독일이 누리던 이권을 그대로 챙기는 것을 인정받았으며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거두어 산업화 도약에 성공한다. 사실상 일본으로서는 동맹국인 영국을 조금만 지원하고서는 막대한 이득을 얻은 셈이었다.
5. 파기[편집]
그러나 제3차 영일동맹 이후에도, 계속 미국과 일본간의 관계가 더 안 좋아지는 등 그 후의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로부터 10년 후인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1921년 ~ 1922년)에서 조인된 영국ㆍ일본ㆍ미국ㆍ프랑스간의 4국 조약에 의해 파기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해당 비준서 기탁이 1923년 8월 17일에 이루어지면서 함께 실효되었다.
동맹이 파기된 원인은 크게 다음과 같다:
6. 영향[편집]
결국에는 폐기가 되었다고는 하나 해당 동맹을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세력 균형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 일본의 조선 점령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그 이후 만주 장악까지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득을 다 본 뒤, 1차 대전에서 전시 호황을 통해 채무를 완전히 청산하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아직 산업화의 기초가 부족했었던 일본에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운 사태 전개는 제2차 세계 대전시 일본 제국의 추축국 가담에 이르는 과도한 자만심을 낳았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의 양대 축인 일본 해군을 세계 제3위의 해군으로 급성장시키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러일전쟁에서 최신예 영국 군함을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일본 해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기반은 영국 해군이 기준이 되었으며, 이런 관계는 사실상 일본의 초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초석이 되는 공고급 순양전함의 판매와, 항공모함에 적용되는 많은 기술을 입수하는 것까지 진행되었다. 만일 영일동맹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시일 내에 일본 해군이 급성장을 하기 어려웠다.
1931년 만주 사변 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일본을 비호했지만 1936년의 방공협정과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양국의 관계는 빠르게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직후, 폭격을 퍼부은 뒤 홍콩섬에 해군 육전대를 상륙시켜 구룡반도를 통해 5만 대군을 투입,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홍콩을 점령했다.[11] 그리고 더 나아가 싱가포르, 말라카 등의 말레이 연방 식민지들도 모두 점령함으로써 영국과 일본은 적으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