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덤프버전 :

1. 개요
2. 정의
3. 순국의 종류
3.1. 자국이 있는 상태에서의 순국
3.2. 자국이 없는 상태에서의 순국



1. 개요[편집]


가장 고귀한 죽음은 전쟁에서의 죽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15a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


2. 정의[편집]


순국은 순교와 함께 인류가 최고로 명예롭고 고귀하게 여기는 죽음이다. 비록 현대에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회의가 늘긴 했으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사를 폄하하는 문명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다. 순국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이므로 고대로부터 순국에 대해서 경외와 예의를 표해왔다. 이러한 부분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윤경원(尹慶元)은 비록 드러나게 칭찬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공무로 인해 죽었으니 또한 가긍합니다. 상의 분부대로 합당하게 헤아려 증직(贈職)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변 이후 국사 때문에 죽은 신하가 없지 않습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회양 부사(淮陽府使) 김연광(金鍊光)은 모두 순국(殉國)하여 절의가 칭송할 만한데도 장계(狀啓)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포장(褒奬)받지 못하고 있어 인정(人情)이 매우 답답해 합니다. 이밖에도 반드시 포장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해사로 하여금 시급하게 실적을 조사하여 일체 포장하고 증직함으로써 충혼을 위로하게 하소서.

선조 26년 10월 29일 기유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가상하도다. 너희의 조부나 부친은 나라가 극도로 어려운 때에 크게 분발하여 싸우다 죽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고 도망하여 사는 것으로써 욕됨을 삼아, 두어 치(雉)330) 의 성(城)을 지키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고 주리고 피곤함을 독려하면서 깃발을 날리며 적진에 나아가 시석(矢石)을 무릅썼다. 그중에는 지위가 편비(褊裨)331) 의 대열에 있으면서 먼저 올라가 용맹을 자랑한 자도 있었고, 졸개의 편대에 있으면서 몸을 숨겨 적기를 뽑아온 자도 있었다. 또 북을 치다가 죽은 자도 있었으며, 고삐를 잡고 죽은 자, 성을 지키다 죽은 자, 그리고 야전(野戰)에서 죽은 자도 있었다. 비록 그들이 죽은 장소의 어렵고 쉬움이 있고, 세운 공의 크고 작음이 있지만, 순국(殉國)한 의리에 있어서는 모두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영웅과 의열(義烈)의 명성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역사에 기록되어 후세를 격려할 만한 자도 있으니, 아, 아름답도다. 나는 진정으로 잊을 수가 없어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이미 포증(褒贈)의 법을 시행하였거니와 아직 미치지 못한 자에게는 지금 차례대로 시행하도록 하여 지하에 있는 너희의 조부며 부친의 혼령을 조금이나마 위로하였으나, 나의 가장(嘉奬)하는 마음은 그침이 없어 이에 너희 자손들을 수록하여, 제직 또는 면천을 사목(事目)과 같이 차등을 두어 시행한다.

선조 27년 10월 10일 갑인 4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응하(金應河)가 힘껏 싸워 순국한 것은 옛날 사람에 비해 손색이 없다. 급히 중국 장수가 지나는 곳에 사당을 세워 충혼(忠魂)을 표창하라."

광해 11년 5월 6일 무자 1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화란(禍亂)의 혹독함이 지난 날과 같은 적이 없는데 당초 절의(節義)의 신하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정온(鄭蘊) 등은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의리로 순국하였으니, 이들이야말로 이른바 평시에는 과감히 말하고 난리에는 절개를 지킨 사람들입니다.

인조 24년 10월 13일 을유 2번째기사 1646년 청 순치(順治) 3년




순국이 이렇게 경외를 받는 이유는 순국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조직은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희생이 없는 안전하고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이 없으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전쟁이나 재난의 경우 현재 인류의 능력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쟁의 경우 21세기에 접어들어 국제화사회가 들어서면서 그 규모와 횟수가 압도적으로 감소했지만 재난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원자력의 운용으로 이해 이러한 재난의 위험성은 매우 높아진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는 이러한 재해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순국하는 분이 많아지고 있다. 또한 사회안전망을 유지하기 위해 군인뿐 아니라 경찰관소방관들도 순국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희생 덕분에 한국의 존속이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없었다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가 적혀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학자들 중에서 카이로 회담이 한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독립 선언은 전적으로 장제스의 주장에 의한 것이었기에 홍커우 공원 의거가 얼마나 한국독립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인지 명백하다.


3. 순국의 종류[편집]



3.1. 자국이 있는 상태에서의 순국[편집]


주로 자국을 위하여 업무를 집행하다가 발생하는 일이 많다.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 당시 우리나라의 각료 등 17명이 순국한 일이 대표적이다.


3.2. 자국이 없는 상태에서의 순국[편집]


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발생하는 일이 많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각각 사쿠라다몬 의거홍커우 공원 의거사형 선고를 받아 사형이 집행된 일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하얼빈 의거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도 있지만, 이 시기는 자국의 유무를 따지자면 애매한 경우다. 나라가 있긴 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예 없었다고 하기엔 공식적으로 일제와 병합되긴 전이었으므로. 그래도 굳이 양분한다면 이 경우도 자국이 없는 상태에서의 순국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1]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4 11:47:05에 나무위키 순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민영환 등 자결 순국 인사들이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