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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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조정의 조치
4. 여담


1. 개요[편집]


乙未義兵

일제에 의해 발생한 을미사변김홍집 내각에 의해 시행된 단발령에 항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이 일어난 을미년(1895년)에 충청도 유성구에서 시작된 대규모 의병이다.

을미의병 이후에 일어난 을사의병, 정미의병[1]과 함께 대표적인 의병 사례로 꼽힌다. 또한 격변기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자 가장 먼저 일어난 의병이다. 후일 13도 창의군, 독립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2. 상세[편집]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만행으로 인해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

유생들은 일제에 격분하여 친일 역적을 처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리고(10월 8일, 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의병들을 규합했다(10월 10일, 음력 8월 22일). 마침 고종이 각지의 유명 유림들에게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밀서들을 보내면서, 같은 해 10월 18일, 충청도의 의병장 문석봉이 유성 장터에서 맨 처음 유성 의병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걸고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다.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을미개혁의 정책 중 하나로 단발령까지 시행되자[2] 1896년 1월[3]에 민중들까지 호응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먼저 일어난 곳은 충청도 유성이며, 이후 전국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4] 강원도에서는 이소응(李昭應), 충청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 전라도에서는 기우만, 경상도에서는 허위(許蔿)가 일어났다. 이때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인물들이 바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유인석과 이소응이다.

교과서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동학농민군 출신들을 축출하여 전투력이 급감했다고 설명하나 실상과는 상반되는데, 해산된 지방 구식군인들[5]과 동학 진압으로 실전경험을 쌓은 민보군, 포군으로 구성되어 중앙의 친위대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관리와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또, 지방 관아를 점령하고, 단발령에 앞장선 수령이나 스스로 단발을 한 인물들을 보기만 하면 붙잡아 목을 베었다. 이들 대다수는 아관파천 이후 고종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 해산 권고 조칙[6]을 내리자 어느 정도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고 대부분 자진 해산한다.

2.1. 충청도[편집]


가장 활발하게 의병을 일으킨 지역이 바로 충청도이다. 1895년 9월 유성에서는 문석봉(文錫鳳), 11월 충청도 제천에서는 유인석(柳麟錫)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올리며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호좌창의진을 평성하고 강원도의 일부 의병과 연합했다.

이때 유인석영월에서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보내 의병 봉기를 호소했다. 그들은 단양 군수와 청평 군수를 살해하고 충주부를 점거했다. 1896년에는 홍주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또, 유인석의 문인이었던 서상렬, 이필희 등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충북 보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보은 장터에 격문을 붙이고 회덕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무장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안병찬, 이설, 김복한 등이 홍주(홍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가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배신으로 붙잡혔으며, 여기서 붙잡히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의병을 일으키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2. 경기도[편집]


경기도 이천, 여주, 안산, 남원, 수원, 죽산 등지에서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여 1896년 1월 일어났다. 약 2,000여 명으로 구성된 박준영의 의병은 이천과 광주에서 일본 수비대에게 승리하고,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했다.

그들은 1896년 2월 25일 남한산성을 공격하고, 점령까지 했으나 일부 의병이 매수당해서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하락이 안동으로 물러나자 남한산성에서 물러나고 한성부 진격은 무산되었다.


2.3. 강원도[편집]


강원도 강릉에서는 1896년 1월 30일 민용호(閔龍鎬)를 대장으로 삼고, 송형순, 이병채 등이 결집했다. 평창, 영월, 정선강원도 출신 포수들이 호응하면서 의병이 일어났다.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영동9군창의소(嶺東九郡倡義所)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석을 처단하면서 기세를 높였다.

한편, 강원도 춘천에서는 문인 이소응과 이진응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춘천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약 400명을 포섭하고 춘천 관찰부를 기습하여 점령한 후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했다.


2.4. 전라도[편집]


기우만 등이 광주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陳)을 편성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 후 기우만은 나주,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2.5. 경상도[편집]


경상도 진주에서는 안의 출신의 유생 노응규가 1896년 1월 7일 기의하여 19일 진주성을 점령한 후, 부산 진격 중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산청에서는 200여 명의 유생들이 의병진을 편성하였고, 안동(당시 경북남부에는 대구관찰부, 경북북부에는 안동관찰부가 존재했다.)에서는 봉정사에서 회합, 궐기하여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1896년 1월 31일 관군에게 패배한 후 후퇴하였고, 김천성주에서는 허위 등이 기의하여 대구로 진격하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했다.


2.6. 기타 지역[편집]


동학 농민 운동 때처럼 황해도 등지에서 일어나지는 않은 듯 싶다.

2.7. 의병 목록[편집]


  • 곽한일(안성)
  • 구만서(광주)
  • 권세연, 김도화(안동)
  • 기우만, 고광순(장성)
  • 김하락(이천)
  • 노응규(진주)
  • 문석봉(유성)
  • 민용호(강릉)
  • 박준영(이천)
  • 심상희
  • 유인석, 안승우, 이춘영(제천)
  • 이문호(가평)
  • 이소응(춘천)
  • 이필희(단양)
  • 허위(선산)


3. 조정의 조치[편집]


친일내각은 선무사를 파견하거나, 세력이 큰 지역은 군사를 보내 진압하기도 했으나 말만 구식군인이지 일본 측의 입김의 작용으로 해산된 지방의 친군영들은 프로이센식, 영국식 신식군대 교육을 이수 받은 이들이 다수에 구식 화포은 당연하고 리볼버, 전장식 소총은 물론 극소수지만 암스트롱제 후장식 야포까지 무장했으며, 여기에 동학 진압으로 막대한 실전경험을 쌓은 포군과 민보군이 합류해서[7] 무력 진압이 쉽지않았다.

지방군은 물론 일본군이나 친위대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아 조정은 일단 의병 전투력의 중핵인 해산된 지방군영 병사들 회유에 나서 이들에게 과거는 묻지 않고 진위대로 재기용 하겠다는 회유를 했다. 손해볼게 없어진 군인들이 이탈하면서 의병 전력이 약해졌고 마침 아관파천이 발생해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서자 목적을 어느정도 이뤘다고 판단한 의병들은 자진 해산한다.


4. 여담[편집]


  • 고종이 아관파천을 위해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는 해석이 있다. 당시 궁 주위를 일본군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의병 궐기를 이용해 수비를 분산시키고 슬쩍 빠져나갔다는 이야기. 아관파천 직후에 의병 해산 명령이 내려진 점 등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 일부 청군 패잔병이 가담을 했다고 한다. 신식무기의 보유 및 능숙하게 다룰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근대적 전술에 대해 밝으니 일부 의병장들이 용병 형식으로 고용한 모양새였다고 한다.#

  • 시험에 을미 의병, 을사 의병, 정미 의병을 비교하는 문제가 자주 나온다.~거기다가 시간 순서를 이용한 문제도 상당한 난제인데 위에 나온 아관파천은 을미의병 도중 혹은 이후이다. 의외로 을미사변이 아니다.

  •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의병장 유인석은 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충청북도 제천시의 지역 축제인 제천 의병제가 을미의병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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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렇게 세 의병 활동을 전기(을미), 중기(을사), 후기(정미) 의병으로 나누기도 한다.[2] 고종도 머리를 잘랐고, 유길준세자의 머리를 직접 잘랐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상투를 잘렸다.[3] 고종 33년 1월, 음력으로는 아직 을미년이다.[4] 이는 단발령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효경(孝經)》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지키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구절 때문이다.[5] 후술되겠지만 말만 지방군이지 근대 군사훈련의 이수와 함께 근대무기를 장비한 부대들도 있었다.[6] 1896년 2월 18일 고종의 1차 해산 조령, 1896년 2월 18일 내부 대신의 훈시, 1896년 2월 27일 고종의 2차 해산 조령[7] 이들도 구식이지만 화포를 운용했던 터라, 충주성에서 자신들을 진압하러 온 친위대 2개 대대와 일본군 3개 중대에게 지방군의 암스트롱 야포와 합세하여 도합 60여문을 방포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