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밸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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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제50대 총리.
한국에서는 총리 재임 당시의 업적보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민족의 민족 국가 수립을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밸푸어 선언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영국식 발음으로는 밸퍼에 가깝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영국 스코틀랜드의 최고의 명문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국회의원(MP)을 역임하였으며, 외삼촌은 훗날 영국의 총리가 되는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었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에서 그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명장 아서 웰즐리가 그의 대부였다.
이후 1885년
2.2. 총리 재임 시기[편집]
밸푸어가 총리에 오름과 동시에 보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도 개최되었기 때문에 밸푸어 내각을 향한 대중들의 지지는 뜨거웠다.[3] 게다가 야당 자유당은 심지어 보어 전쟁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둘로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밸푸어 내각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밸푸어 내각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제였다.
한편 외교적으로 밸푸어 내각은 대영제국의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대영제국의 지위에 도전한 국가는 러시아와 독일이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뒤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독일을 견제하고자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도 기존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영불협상을 체결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영국이 소위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부르짖으면서 유럽 대륙 내의 일에 불개입할 것을 천명한 고립주의를 핵심적인 외교 노선으로 내세운 점을 고려할 때,[6] 밸푸어 내각의 외교 노선 전환은 전세계 외교가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3. 이후[편집]
비록 총리직에 다시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밸푸어는 보수당의 요인으로 남으면서 활발한 정계 활동을 펼쳤다.[7]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거국내각이 수립되자 밸푸어는 1916년 로이드 조지에 의하여 외무부 장관으로 재발탁된다.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건국을 약속했던 밸푸어 선언이 이 시기의 일.[8] 종전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 내각에 남아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협상장에도 참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2년 5월 밸푸어 백작이 되었고, 동년 10월 로이드 조지 내각의 붕괴 이후에도 정계의 원로로 왕성히 활동했으며[9] , 이 때 추밀원장으로서 영국 본국과 자치령의 관계를 재규정한 1926년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0년 사망한다.
3. 선거 이력[편집]
4. 여담[편집]
- 평생 독신이었다. 그래서 1922년 서임된 밸푸어 백작 작위는 특별칙허로 동생 제럴드 밸푸어와 그의 후손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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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나 보어 전쟁 당시 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것은 밸푸어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2] 다만 게스코인세실 내각이 17년 동안 쭉 지속된 것은 아니다.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항목과 글래드스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19세기 후반 20년 동안 영국의 총리 자리는 딱 한 번 로즈베리 백작 아치볼드 프림로즈이 총리직에 취임한 것을 제외하면 이 둘이 계속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애초에 로즈베리 백작 또한 글래드스턴의 정치적 양아들이었다.[3] 왕의 대관식과 정권 지지도가 무슨 상관이냐고 여기기 쉽지만, 일반적으로 대관식과 같은 전국가적인 행사가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시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새빠지게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심어주었는데, 대관식 한 방에 리셋되었다.'라는 식의 한탄이 많이 보인다(...) 한국의 경우에는 한일 월드컵 이후 김대중 정부의 지지도가 일시적으로 폭등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된다.[4] Liberal Unionist. 1886년 글래드스턴 내각이 발의한 아일랜드 자치법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한 세력이 결성한 정당.[5] 밸푸어 본인조차 지역구에서 낙선했고, 선거 직후 다른 지역구에 발생한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어 겨우 의회로 복귀했다.[6] 물론 그 와중에도 러시아의 남진을 방해하려고 일시적으로 프랑스와 동맹 맺고 크림 전쟁을 벌이긴 했다.[7] 본인은 서민원 의원 신분(이전 서술과 달리 밸푸어가 귀족원에 입성한 시기는 백작 작위를 받은 말년(1922년)이다.)이었으나 보수당이 다수였던 귀족원을 활용해 자유당 정권을 집요하게 견제했고, 로이드 조지는 "귀족원은 헌법의 감시인이 아니라, 밸푸어의 푸들이다.(the House of Lords is not the watchdog of the Constitution, but Mr. Balfour's poodle.)"는 비아냥을 남기기도 했다(...)[8] 한가지 아이러니라면, 밸푸어는 수상 재임 당시 동유럽 유대인들의 영국 이주를 제한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었다.[9] 노년에도 기력이 왕성했다. 죽기 2년전인 1928년에 80살의 나이에도 테니스를 쳤다고 한다.[10] 지방정부위원회 위원장 임명으로 인한 보궐선거[11]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임명으로 인한 보궐선거[12] 제1재무경 임명으로 인한 보궐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