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마운트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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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헨리 브루엄
남작


2대

존 잉글리스


3대

아서 밸푸어
백작


4대

제임스 매슈 배리
준남작


5대

존 버헌
남작


6대

빅터 호프
후작


7대

필립 마운트배튼
공작


8대


프린세스 로열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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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 몬 레포스 궁전
(現 그리스 공화국 이오니아 코르푸 섬 몬 레퍼스 궁전)
사망
2021년 4월 9일 (향년 100세)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장례식
2021년 4월 17일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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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필립 마운트배튼
Philip Mountbatten[1]
신체
183cm
배우자
엘리자베스 2세 (1947년 결혼)
자녀
장남 찰스 3세, 장녀 , 차남 앤드루, 삼남 에드워드
아버지
그리스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형제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학력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침 스쿨
고든스턴 스쿨 (졸업)
영국해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 신명: 필립보)[2]
최종 작위
[3]
약력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4]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5]
군사 경력
임관
영국해군사관학교 (1940년)
복무
영국 해군
1939년 ~ 1952년
최종 계급
중령
명예 계급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해군)
원수 (영국 해병대)
원수 (영국 공군)
상훈
전승 공로 훈장[6]
전쟁의 십자가 훈장[7]
그리스 전쟁의 십자가 훈장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참전
제2차 세계대전[8]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시절
3.1.1. 가문의 몰락과 망명
3.1.3. 어머니와의 이별과 영국행
3.1.4. 계속되는 시련
3.2. 청년기 ~ 노년기
3.2.1. 해군 복무
3.2.2. 공주의 연인
3.2.3. 영국으로 귀화하다
3.2.4. 약혼과 결혼
3.2.5. 영국의 국서
3.2.6. 장수와 건강 문제
3.3. 사망
5. 실언 목록
6. 평가
7. 매체에서
8. 기타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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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947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부군이자 국서. 그리스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장남이며, 찰스 3세,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필립 공(Prince Philip) 또는 에든버러 공작(Duke of Edinburgh)라고 불리며, 1952년 장인 조지 6세의 사망으로 인해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국서가 되어 오랫동안 왕실의 주요 업무를 담당해왔다.[1]

100번째 생일을 약 2달 앞둔 2021년 4월 9일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2. 작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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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2]
보통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로 지칭하며, 공식적인 칭호는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너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가터 훈장의 기사, 시슬 훈장의 특별기사, 대영제국 훈장의 기사, 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의 회원, 오스트레일리아 훈장의 컴패니언, 뉴질랜드 훈장의 회원, 여왕 공로 훈장의 컴패니언, 파푸아뉴기니 로거후 훈장의 치프, 캐나다 훈장의 컴패니언, 캐나다 무공 훈장과 캐나다 군대 훈장의 커맨더, 여왕 폐하의 영광스런 추밀원과 캐나다 추밀원의 의장, 해군 최고 사령관이신 필립 공 전하[3]'이다.

  • 그리스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Philip of Greece and Denmark (1921년 6월 10일 ~ 1947년 3월 18일)[4]

  •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 Lieutenant Philip Mountbatten (1947년 3월 18일 ~ 1947년 11월 19일)

  • 필립 마운트배튼 경 전하 His Royal Highness Sir Philip Mountbatten (1947년 11월 19일 ~ 1947년 11월 20일)[5]

  • 에든버러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 (1947년 11월 20일 ~ 1957년 2월 22일)
    • 메리오너스 백작 Earl of Merioneth (1947년 11월 20일 ~ 2021년 4월 9일)
    • 그리니치 남작 Baron Greenwich (1947년 11월 20일 ~ 2021년 4월 9일)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57년 2월 22일 ~ 2021년 4월 9일)


3. 생애[편집]



3.1. 어린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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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함께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에서 요르요스 1세의 4남인 안드레아스 왕자[6]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 왕자비의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마르가리타[7], 테오도라[8], 체칠리아, 소피아 4명의 누나가 있었으며[9] 모두 필리포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국서가 되기 전에는 그리스의 왕자였기 때문에 본명은 그리스어인 ‘필리포스 안드레아스’[10]로, 통치가문의 왕손답게 친가와 외가를 포함한 친척들 대부분이 유럽의 왕족, 공족들이다.

친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가계를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덴마크 왕이며 유럽의 할아버지라 불렸던 크리스티안 9세, 친할아버지는 그리스 초대 국왕 요르요스 1세, 친할머니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황녀이자, 니콜라이 1세의 친손녀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였다.[11] 친할아버지의 누이들, 즉 필리포스의 고모할머니들도 각각 영국의 왕비, 러시아의 황후, 하노버의 왕세자비라는 어마무시한 가족관계를 자랑했다.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로 가면 외할머니가 헤센 대공국의 공녀였고, 이모할머니들은 각각 러시아의 대공비, 프로이센의 왕자비, 러시아의 황후였으며, 이모가 스웨덴의 왕비였고 외삼촌들은 각각 후작백작이였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차녀였던 앨리스 공주를 외증조할머니로 두었기 때문에 필리포스는 빅토리아 여왕현손자이기도 했다.[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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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8개월의 필리포스
아버지 안드레이 왕자가 형 콘스탄티노스 1세의 퇴위로 인한 3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그리스로 돌아온 지 1년만에 태어난 늦둥이 외아들[14]인 필리포스는 가족들의 큰 기쁨이었다. 늘 아들을 원하던 부모님과 친척들은 필리포스의 탄생을 반겼으며, 외할머니 빅토리아는 아들 조지 마운트배튼에게, 이모 루이즈는 노나 커에게 이렇게 적었다.

필립은 하루 종일 딱딱한 마룻바닥을 맨다리로 기어다니면서 웃어. 이렇게 명랑한 아기는 살면서 처음 보는거 같아.[15]

1922년, 필립이 11개월 때 그리스를 방문한 외할머니이모가 보낸 편지.

그러나 당시 그리스 왕실의 안위는 좋지 못했다. 필리포스의 큰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는 1917년 강제 퇴위했던 전적이 있었고 왕위를 물려받은 차남 알렉산드로스[16]가 1920년 패혈증으로 사망한 후 다시 즉위했으나 그리스는 이미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1.1. 가문의 몰락과 망명[편집]


1922년 9월 27일,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그리스가 참패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2번째 퇴위를 했으며, 대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였던 고위층과 장군들은 짧은 재판 후 사형당했다. 전쟁에서 고위 사령관이었던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17]

이런 급박한 상황에 안드레아스 일가와 친척들은 여러 곳에 닥치는 대로 도움을 청했으며, 필리포스의 외가였던 바텐베르크 공가는 영국 총리에게 로비했고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영국 외무부 장관 조지 커즌은 영국 정보부 요원 제럴드 타블롯을 보내 안드레아스 왕자의 처벌에 대해 신(新) 정권의 지도자들과 협상하게 했는데, 그 결과 다행히도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형은 면했지만 그들 일가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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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12개월의 필리포스[18]
누나 소피아에 따르면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교황, 조지 5세 등이 도와주려했다고 한다. 결국 조지 5세같은 실수[19]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영국 경순양함 칼립소(HMS Calypso)를 급파해 이들을 구출하도록 했다. 고용인 6명[20]도 안드레아스 일가의 뒤를 따랐으며, 승선은 군중들이 모여들까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몇몇은 안드레아스 왕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첫 날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왕자비가 배에 오른 후, 그 다음날에 코르푸에 있는 궁으로 가 아이들을 데려왔다.

필리포스의 넷째 누나 소피아 공주는 "당시 일은 끔찍했고 혼란 그 자체"라고 회고했으며, 떠나기 전 언니들인 마르가리타 공주와 테오도라 공주가 자신들의 모든 문서와 편지를 태워서 "수십년이 지났어도 몬 레포스에서의 연기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짐을 챙긴 후 차로 이동하고 작은 배에 올라 군함까지 가서야 승선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생후 15개월이던 필리포스는 항해 내내 과일 상자로 만든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처음에 영국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이는 영국 외교부와 조지 5세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 브린디시[21]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수도인 로마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필리포스는 기차 여기저기를 기어다니고 창문을 핥으며 놀았다고 한다.[22]

로마에 도착한 안드레아스 일가는 말그대로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에 영국대사관에서 돈을 빌려주었고, 파리행 기차표까지 구매해줬다. 나중에 은행가들과 연락이 닿아 재산을 찾은 뒤엔 배고프고 가난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재정 상황이 이전에 비해 나빠졌기 때문에 주변 친척과 지인들에게 의존해야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로마에서 필리포스의 백모인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23]가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3.1.2. 프랑스 생활[편집]


1923년, 안드레아스 왕자 일가는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 생클루드에 정착해 그녀가 소유한 별장에서 생활한다. 이 때 필리포스는 생후 18개월이었으며, 생클라우드에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를 떠나 망명 온 사촌누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가족들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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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6살
유럽 각국의 부유한 친척들[24]은 필리포스의 학비를 대줬고, 필리포스는 파리에 있는 미국식 신설학교인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McJannet American school)에 입학한다. 맥자넷 스쿨은 필리포스를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학생들이 다양한 외국 문화를 배우며 사람들의 차이점을 존중해 나가는 것이 교육 이념이였다.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이던 도널드 맥자넷에게 아들의 활달한 성격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미래에는 영어말하는 곳에서 지낼 것이기 때문에 미국/영국식으로 교육되고 영어를 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25]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급우들과 함께 (가운데 금발머리)
필리포스는 운동을 좋아하는 활동적인 아이였고, 뛰어나진 않았지만 학업에도 충실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30분 일찍 가정교사와 함께 등교해 칠판과 책상을 정리했으며, 누나들이 말해준 예의범절 같은 충고를 언급하던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26] 학교를 너무 좋아해 어머니 앨리스에게 기숙사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당시 안드레아스 일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맥자넷 스쿨에서 필리포스는 ‘성이 없는 남자아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 동안 가장 친한 친구는 프리맨 쿠(Freeman Koo, 顧裕昌 구유창)와 웰링턴 쿠 2세(Wellington Koo, Jr., 顧福昌 구푸창)라는 중국인 형제였다.[27] 필리포스는 평생동안 맥자넷 부부를 기억했고 그들에 대해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애정을 담아 말했다. 1970년대까지도 도널드 맥자넷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맥자넷 부부는 필리포스가 1947년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혼인했을 때 학교 앨범을 선물했고, 첫 아들 찰스 3세가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아버지가 어린 아이였을 때’라는 필리포스의 학교 생활에 관한 책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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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베르크 해변에서 필리포스와 친구 헬렌 코뎃[28]
생클루드에 있던 집은 정원이 딸린 예쁜 저택이었으며, 이곳에서 모두가 함께 생활했다. 비록 불안정한 환경이었지만 가족들은 막내 필리포스를 매우 귀여워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휴일에는 가족과 함께 바닷가로 피서를 가거나 친척들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아직 어렸던 필리포스는 프랑스 생활에 금방 적응해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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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0월 촬영된 마지막 가족사진
위의 사진을 찍고나서 몇 년 후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필리포스의 안온한 생활도 막을 내린다. 먼 훗날 그는 프랑스 망명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한다.[29]


3.1.3. 어머니와의 이별과 영국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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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9살
1931년, 신경쇠약으로 수년간 고통받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스위스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누나들과 함께 외출을 하고 돌아온 필리포스는 그날 저녁에서야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때 앨리스 왕자비와 안드레아스의 결혼생활은 끝났으며, 안드레아스 왕자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가족들의 집을 정리했다.

곧이어 앨리스 왕자비에게 조현병 진단이 내려졌고, 누나들은 독일의 왕공족들에게 8달 만에 모두 시집갔다. 어머니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혼삿길이 막힐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30]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몬테 카를로에서 따로 생활하게 됨에 따라, 8살의 필리포스는 혼자가 되었다. 기숙학교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해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안드레아스 왕자는 자신이 경험한 가혹한 그리스 군대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를 바라며, 아들을 영국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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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스쿨 시절, 뒷줄 맨 오른쪽.
그를 돌볼 부모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가 필리포스를 책임졌다. 필리포스는 큰 외삼촌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 (George Mountbatten)을 후견인으로 두고, 서리에 있는 명문 사립학교 침 스쿨에 입학해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와 외삼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영국에서 지냈다.

필리포스는 7년 동안 어머니와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편지 1통 받지 못한 채 홀로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필리포스는 사실상 고아였고 방학이나 크리스마스같은 연휴때는 외할머니가 있는 켄싱턴 궁전, 버크셔에 있는 밀포드 헤이븐 후작저, 독일에 있는 누나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지냈다. 그중에서도 셋째 누나 카이킬리아가 시집간 헤센 대공가[31]가 있는 다름슈타트와 볼프스가르텐[32]에 자주 갔기 때문에 누나들 중 카이킬리아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이 휴일들을 항상 즐겼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필리포스의 일정을 계획했기 때문에 휴일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혼란스러웠다고.

미래의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것과 확연히 대조되는 성장배경이었던 것. 그럼에도 그는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고.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놀랄정도로 긍정적이었는데, 가끔씩 다른 가족들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했지만 부모님에 대해서 만큼은 항상 애정, 심지어 동경을 담아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초상화는 모두 버킹엄 궁의 서재에 걸려있었고, 거의 평생동안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인장 반지를 끼고 살았다.

필리포스의 친구이자 친척인 지나 베르너[33]는 필리포스가 기숙사에서 행복했지만 어릴 때 아래처럼 자신한테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돌아갈 집이 있어. 하지만 나는 아니야."
"Everybody has a family to go back to. I don't."



3.1.4. 계속되는 시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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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3살
1933년, 필리포스는 독일로 건너가 슐레 슐로스 잘렘(Schule Schloss Salem)[34]에 입학한다. 잘렘 학교는 둘째 누나 테오도라의 남편 바덴의 베르톨트의 소유였기 때문에 누나 가족과 함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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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6번째, 잘렘 시절의 필리포스.
뒤 쪽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있다.

잘렘에서 지내는 동안 나치당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 유대인 학생이 반유대주의자에 의해 삭발을 당하자 필리포스는 이 모욕적인 대우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침 스쿨 모자를 씌워주었다. 쿠르트 한에 따르면 필리포스는 사람들이 나치 경례를 할 때마다 크게 웃었으며, 경고를 받은 후에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웃었다고 한다. 결국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한다고 갑작스럽게 결정했다.

필리포스는 잘렘에 다닌 지 2학기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턴 스쿨(Gordonstoun School)에 입학했다. 고든스턴 스쿨 역시 슐레 슐로스 잘렘의 설립자인 쿠르트 한(Kurt Hahn)이 스코틀랜드로 건너와[35] 세운 기숙학교였으니 자매학교로 전학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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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4살
고든스턴 스쿨은 전교생 모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기숙사제로 운영되었으며, 특유의 체력장 문화와 엄한 학풍으로 유명했는데, 단순히 학문이나 교육적인 측면에서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육체적으로 단련시키는, 마치 사관학교를 방불케 하는 학교였다. 필리포스는 이런 스파르타식 학풍이 본인의 성정과 잘 맞았는지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한다.

이후에도 필리포스는 모교인 고든스턴에 많은 애정을 가져 기부도 지속적으로 했고, 장남 찰스 3세도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나 유약한 찰스 3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고 폐쇄적인 이곳의 생활을 몹시 싫어해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동급생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해[36] 부자 관계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윌리엄 왕세자해리 왕자상류층 자제들만 다니는 학교인 이튼 칼리지에 재학시켰다.

1937년에는 큰 비극이 벌어졌다. 셋째 누나 체칠리아런던에서 열리는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가던 도중 벨기에 오스텐더 상공에서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난 것. 이 사고로 매형과 넷째를 임신 중이던 만삭의 누나, 어린 조카 2명까지 전원 사망했다.[37] 필리포스는 사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행기의 작은 잔해를 간직했다고 한다.

1937년, 다름슈타트에서 엄수된 헤센 대공가의 장례식. (선두 오른쪽에서 2번째, 제복군인들 사이)[38]

설상가상으로 누나 가족의 장례식을 치른 뒤 불과 몇달 후, 후견인이던 큰 외삼촌 밀포드 헤이븐 후작이 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연휴마다 같이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가장 아끼던 셋째딸의 죽음 이후 필리포스를 버리다시피 하고 모나코에서 애인과 함께 생활하며 카지노를 전전하며 살다가 1944년 말 모나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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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7살
딸의 장례식에서 근 7년 만에 아들을 만난 앨리스 왕자비는 필리포스와 데리고 다시 왕정이 복고된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죽은 형을 대신해[39] 필리포스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고, 필리포스도 루이 마운트배튼을 사실상 아버지로 여긴데다가 영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며 해군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40]에 불안정한 그리스로 돌아가기 보다는 영국에 남는 선택을 한다.

훗날 그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댁에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41] 무슨 말을 쓰셨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집에서’라는게 무슨 뜻이죠?
What do you mean ‘at home’?


3.1.5. 엘리자베스 2세와의 만남[편집]


1939년, 필리포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조지 6세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가 큰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작은딸 마거릿 공주를 데리고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하러 방문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공주와는 사촌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의 결혼식, 조지 6세의 대관식 때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18살의 어린 생도였던 필리포스는 학생 대표로 나가 국왕 일가를 안내하였고, 공주들의 에스코트 역할을 맡았다. 이때 13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사실 말이 에스코트지 놀이 상대로 왔던 필리포스는, 엘리자베스와 마거릿의 기차놀이에 질려버린 나머지[42] "테니스 코트 네트를 뛰어넘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 후 네트를 넘어가며 달렸는데, 그 모습에 다시 한번 반해버린 엘리자베스는 그날 밤 가정교사인 크로포드 부인에게 “필리포스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신처럼 멋있었다“며 그와 함께한 이야기를 밤새 늘어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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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 앞줄에 앉아있는 소녀가 엘리자베스 공주, 뒷줄에 서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흰 생도모자를 쓴 소년이 필리포스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이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43]

반면 필리포스는 13살짜리 엘리자베스를 어린애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를 회상한 왕족들의 증언으로는,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첫사랑이 후일 운명적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3.2. 청년기 ~ 노년기[편집]



3.2.1. 해군 복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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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 13일 라밀리즈(HMS Ramillies)에서
사관 후보생 필리포스

18살의 필리포스는 영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40년에는 콜롬보에 기항하고 있던 낡은 리벤지급 전함 라밀리즈(HMS Ramillies)를 시작으로 인도양에서 호주 병력 호송대를 호위했다. 당시 그리스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포스는 전선에 나갈 수 없었다. 이후 카운티급 중순양함 켄트(HMS Kent) 및 슈롭셔(HMS Shropshire)에 배치되어 인도양의 영국 ~ 남아프리카 ~ 호주간 해상 교통로 호송 임무에 참여했다.[44]

1940년 6월에 이탈리아그리스를 침공하면서 그리스도 전쟁에 참여하자 필리포스는 전선에 나갈 수 있게 됐다. 따라서 1940년 말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지중해함대 소속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밸리언트(HMS Valiant)에 배치되어 리비아 포격, 크레타 섬 전투마타판곶 해전에 참여했다.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탐조등을 이용해 은밀히 접근하던 이탈리아 해군 함정들을 발견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마타판곶 해전에서 이탈리아 측 전투기가 없어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크레타 섬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45]

1942년 7월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셰익스피어급 구축함 월리스(HMS Wallace)의 부장(副長)에 임명되었다. 윌리스의 부장이 다른 곳으로 배치되자, 필리포스는 그의 자리를 맡아 대위로 진급했다. 필리포스는 21살로 가장 어린 나이에 대위로 진급했다. 월리스는 주로 북해, 북대서양의 호송 임무를 수행하며 독일 공군과도 여러 차례 교전했고, 이후 1943년에는 지중해로 이동하여 시칠리아 상륙작전에 참여하였다. 시칠리아 상륙작전 무렵에는 추축국 공군의 야간 폭격을 받아 거의 격침 직전의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이때 필리포스는 선내의 나무들을 엮어 간이 뗏목을 만들고 여기에 연막탄을 피워 바다에 던지는 기지를 발휘 했다고 한다. 야간이라 정확한 식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적 폭격기들은 이 뗏목을 적함으로 오인하여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에는 신조된 W급 구축함 웰프(HMS Whelp)의 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HMS 웰프는 북대서양 호송 임무를 수행하다가 독일 해군의 수상함 세력이 거의 소멸하자 동양함대(이후 태평양함대)로 전속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는 인도양남태평양에서 항공모함/전함 호위 등 다양한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다. 종전 후인 1945년 9월에는 일본의 항복 뒷처리를 위해 도쿄만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HMS 웰프는 홍콩, 호주 등을 거쳐 영국으로 귀환, 1946년 2월 포츠머스에 입항한다. 이로써 필리포스는 해군 장교로 6년여에 걸친 전시 임무를 완수했다. 5월에는 마타판곶 해전의 영웅 중 한명으로 인정됐다. 귀국해서는 육상 임무로 전환되어 윌트셔 주 코섐에 위치한 해군 부사관 통신학교 교관직을 수행했다.

1944년 12월 3일,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사망했다. 아테네에서 살던 앨리스 왕자비는 동생 루이 마운트배튼을 통해 HMS 웰프에 있던 필리포스에게 소식을 전했다.


3.2.2. 공주의 연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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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리포스 왕자
엘리자베스 공주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필리포스와 만난 이후 짝사랑에 빠져 계속 편지를 쓰고 사관학교에 면회를 가기도 했으나, 필리포스는 자신보다 5살 연하로 어린아이나 다름없던 엘리자베스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당시 잘생긴 외모와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귀족 영애들의 흠모 대상으로써 사교계를 휩쓸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한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어린 소녀에 불과한 대영제국의 공주를 보고 실망했었다고 한다. 나이로나 외모로나 취향 밖이었지만 공주의 편지를 무시할 수 없던 노릇이라[46] 가끔씩 답장을 써주었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오는 답장을 혼자 방에 들어가 몰래 읽으며 설레어 했다. 필리포스가 엘리자베스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던 친구들은 "요즘도 공주님께 편지 보내냐"며 그를 놀렸다고 한다.

1941년 10월 휴가 중에 필리포스는 윈저 성에 초대되어 조지 6세 및 엘리자베스와 환담을 나누기도 했고, 그해 11월에는 필리포스의 사촌매형[47]이자 엘리자베스의 작은아버지인 조지 왕자의 결혼기념일 파티[48]에서 둘이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럴수록 엘리자베스는 점점 더 사랑에 빠져들어 작전에 나간 필리포스에게 계속 편지와 음식을 담은 소포를 보냈는데, 여전히 필리포스는 마지못해 가끔 회답하는 수준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사촌인 마거릿 로데스에게 "지금 너무 신나! 엄마가 필립이 여기에 와서 지내도 된다고 허락했어!(It's so exciting. Mummy says that Philip can come and stay.)"라고 편지했다. 1943년에는 사촌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난 아직도 필립이 매력적이고 재밌다고 생각해. 그는 진지한 적이 거의 없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진지해지면 꽤나 논리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해. 일요일 밤에 우리는 축음기에 맞춰서 춤을 췄는데, 굉장히 즐거웠어.(I still think he is charming and he is great fun. Hardly ever serious. But when he is, I think he talks good sense. We had a terrific time on Sunday night. We danced to the gramophone, which was great fun.)" 이외에도 엘리자베스는 "필립이 다시 나한테 편지했어!", "필립이 곧 방문한대! 너무 즐겁지 않니?" 등등, 친구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1943년 12월 말, 당시 필리포스는 부장을 맡고 있던 HMS 월리스가 계속된 기계 고장으로 수리 도크에 들어가는 바람에 육상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크리스마스 휴가도 윈저 성에서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17살을 맞이한 엘리자베스는 그 사이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고, 필리포스는 지중해 전선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바이킹 전사 같은 남성적 매력이 넘쳐나던 때였다. 바로 이 때 엘리자베스는 성내에서 열린 왕실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주인공을 맡아 연기를 펼친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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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한 엘리자베스 공주
공연을 본 필리포스는 엘리자베스의 성숙한 모습에 확 빠져들었고, 이들의 관계에도 본격적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엄청 큰 필립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소유자야. 사진은 벽난로에 있고 나를 보고 있어. 이 사진이 도착했을 때 나는 꽤 많은 질책을 들었었지만 엄마가 "그는 잘생긴 아이야."라고 한 말은 동의해! 나는 샌드링엄의 고용인들은 모두 이 사진을 보고 "어머, 이게 누굴까나."라는 말을 했다고 장담해."

1945년 2월, 엘리자베스 공주가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보낸 편지


1944년, 필리포스는 새로운 구축함 HMS 웰프에 배치되어 다시 전선에 나가면서 선실에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걸어놨고, 엘리자베스도 복무 중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필리포스의 사진을 가장 아끼며 왕궁의 자기 방에 걸어놨다고 한다.[50]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 때부터 아버지 조지 6세에게 둘의 관계를 알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조지 6세는 큰딸에게 "아직 결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니,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의 할머니 메리 왕비도 1944년 1월에 "엘리자베스와 필리포스가 지난 18개월 동안 사랑에 빠져있었지만, 왕과 왕비는 엘리자베스가 아직 너무 약혼하기엔 어리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결혼 전 더 많은 것을 겪고, 또 더 많은 남자를 만났으면 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언론에는 "둘이 사귀는 것을 왕실에서 반대했다"는 기사도 많이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지 6세는 매사에 소심했던 자신과 다르게 남자답고 건실하고 활달했던[51] 필리포스를 좋아했지만, 큰딸이 너무 어려 걱정했을 뿐이었다. 조지 6세는 필리포스가 전쟁 중에도 휴가를 나오면 윈저 성이나 왕가의 여름 휴가지인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 초대해 왕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했다.

하지만 필리포스는 몇 십년 후에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윈저 성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것은 그저 특정하게 갈 곳이 없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꾸준히 연락은 했지만 이것도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었고,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라고. 결혼은 후술할 1946년 밸모럴 이전까지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1946년, 전시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필리포스는 밸모럴 성에 초대되어 1달의 긴 여름 휴가를 엘리자베스와 함께 보냈다. 이때 필리포스는 20살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고 엘리자베스도 완전히 결혼할 뜻을 굳히며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 무렵에는 왕실에서도 둘의 관계를 눈치채 주변 중신과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에게 직간접적으로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으나,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엘리자베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둘의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애초에 조지 6세 부부는 엘리자베스 2세의 미래 남편감으로 영국의 귀족이나 젠트리 가문의 청년들 중 하나[52]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필리포스도 혈통으로만 따지면 빅토리아 여왕현손자이자 전하(HRH) 칭호[53]를 가진 엄연한 고위 왕족이였기 때문에 부마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왕실 출신에 부모도 온전치 않은 점[54]과, 무엇보다도 그의 누나들이 전부 독일 왕공족들과 결혼한 점이 문제였다. 당시 독일의 많은 왕공족들은 자의건 타의건 나치당에 가입하거나 독일군 장교로도 복무했는데 필리포스의 매형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첫째 매형 호엔로헤-랑엔부르크 후작 고트프리트, 둘째 매형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55] 모두 독일 국방군에 복무했었고, 넷째 매형 헤센 공자 크리스토프는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56] 셋째 매형인 헤센 대공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앞서 상술했듯 전쟁 발발 전인 1937년에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일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다만 셋째 누나 부부도 사망 6개월 전에 이미 나치당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2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직후라 독일에 대한 국민감정이 최악인 상태여서 일반 국민은 물론 영국의 상류층들 사이에서도 필리포스의 집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으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나 윈스턴 처칠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왕비는 엄연히 백작의 딸이지만 그리스 공주 출신의 동서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에게 은근히 무시당해서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이런 마리나가 하필이면 필리포스의 사촌 누나였다.)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 항해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최일선에서 복무한[57] 참전 용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독일에 대한 영국의 여론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2.3. 영국으로 귀화하다[편집]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가 친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필리포스의 가족들은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영국으로 귀화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촌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는 필리포스의 영국으로의 귀화는 매우 좋은 생각이며,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58]

필리포스의 귀화를 위해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매우 많은 노력을 했다.[59] 먼저 영국의 조지 6세의 허락과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두 군주 모두 기꺼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요르요스 2세의 입장에서 귀화는 다른 나라에게 자국의 왕자를 빼앗기는 굴욕적인 상황처럼 보여질 수도 있었으며[60], 조지 6세의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의 의도가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의 결혼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지 6세는 일기에 "필리포스의 귀화는 결혼과 관련 있을 것 같다."고 적었다.

두 군주들이 허락을 꺼렸고 영국 정부에서도 필리포스의 귀화로 발칸 반도의 정치 상황에 기어들까 조심스러워 했다. 결국 필리포스의 귀화는 3년이 걸렸다. 그동안 루이 마운트배튼은 여러 곳에 로비를 하는 등 이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조지 6세가 필리포스의 귀화를 허락하자, 루이 마운트배튼과 요르요스 2세는 앨리스 왕자비에게 필리포스가 영국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줘 감사 인사를 하라고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고 조지 6세는 요르요스 2세가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해 허락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와 요르요스 2세 모두에게 온전히 승인을 받았음을 확인했다.[61] 이후에도 앨리스 왕자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이모 루이즈 왕세자비가 함께 버킹엄 궁전에 방문해 왕과 왕비와 상의하는 등 사실상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

필립은 귀화로 새로운 성이 필요했다.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가문 이름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로 올덴부르크 가문의 분가였기 때문에 올드캐슬(Oldcastle)이라는 성을 추천 받았다. 하지만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리포스는 어머니 가문의 성 마운트배튼(Mountbatten)[62]을 사용하기로 했다.

1947년 5월 18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로 영국에 귀화했다. 아울러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신분과 계승권[63]을 포기함과 동시에 종교도 동방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64]

3.2.4. 약혼과 결혼[편집]


조지 6세는 이에 엘리자베스가 21살 생일을 맞는 이듬해 1947년 4월까지는 둘의 교제를 발표하지 않고, 12주의 남아프리카 순방 동안 약혼에 대해서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겠다는 조건 하에 허락했다. 중간중간에 둘의 교제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는 했으나, 왕실에서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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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공식 약혼사진
마침내 1947년 7월 9일, 영국 왕실은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이 날이 선택된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21세 생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다음 날인 7월 10일에 야외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맞춰 대중에게 두 선남선녀의 모습을 공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어 필립의 정식 청혼과 결혼 발표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결혼식
같은 해 11월 20일 11시 30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열린 로열 웨딩은 큰 화제가 되었으며, 비록 결혼식에 참석한 영국 왕족귀족들은 필립을 향해 안좋은 말을 수군거렸지만[65] 이미 필립도 논란거리를 정리한 상황이었고,[66] 현역 해군 대위에 훤칠한 미남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 이 결혼식의 공식 하객만도 2천여 명에 이르렀고, 결혼식을 보기 위해 5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런던 거리에 운집했다. BBC 라디오를 통해 결혼식 중계 방송을 들은 전 세계 청취자도 약 2억 명에 달했다고 한다.풀영상

결혼식에는 필립의 사촌인 엘레니, 이리니, 에카테리니, 5촌 조카인 알렉산드라와 그 남편 페타르 2세, 6촌형 프레데리크 9세와 당숙인 호콘 7세, 5촌 조카인 미하이 1세, 6촌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안,[67] 사촌형 파블로스의 왕비이자 누나 소피아의 시누이이며 동시에 필립의 6촌이기도 한 프레데리키, 룩셈부르크 대공세자 등 유럽 전역의 친척왕족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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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과 피로연을 마치고 3주간 가진 신혼여행 초반은 본가나 다름 없는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의 브로드랜즈 저택에서 보냈다. 그리고는 스코틀랜드밸모럴 성[68]으로 이동하여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

결혼 1년만인 1948년에 첫아들 찰스 3세가 태어났고, 이듬해인 1950년에는 고명딸 앤 공주가 태어났다.


1949년, 생후 8개월의 찰스 3세와 함께



1950년대, 버킹엄 궁전에서 가족들과 함께[69]
이후에도 필립은 영국 해군에 계속 복무했다. 1948년에는 그리니치의 왕립해군대학의 교관직을 맡았으며, 1949년에는 영국령이었던 몰타의 지중해 함대로 나가 구축함 체커스(HMS Chequers)의 부장직을 맡았다. 이어 1950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역시 몰타 지중해 함대 소속 호위함 맥파이(HMS Magpie)의 함장에 임명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이 해외 근무 시기에 필립과 함께 몰타에서 거주했는데, 훗날 여왕이 되고 나서 몰타에서 보냈던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3.2.5. 영국의 국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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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직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종전 이후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초가 된 조지 6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70], 추밀원은 1951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을 국왕 대리로 임명했다. 필립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군을 떠나야 했다.[71] 부부는 국왕 대리로서 영연방을 순방했다. 1952년 2월 6일 케냐에 체류하는 도중 조지 6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필립은 다른 수행원들을 물리친 후 직접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때부터 앨버트 공 사후 91년만에 등장한 여왕의 부군으로서 필립의 임기도 함께 시작되었다.


조지 6세의 사망으로 인한 갑작스런 귀국
급히 귀국한 부부의 앞에 놓인 첫 번째 문제는, 왕가의 명칭 변경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필립의 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남편의 성씨를 따라 영국 왕가의 명칭이 윈저 왕가에서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조지 5세의 왕비이자 조지 6세의 어머니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로서 아직 생존해 있던 메리 대왕대비는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는 원래부터 합의되어 있던 사항이라고 한다.[72] 필립은 이따금씩 "영국에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자조하고는 했다.

1960년 차남 앤드루의 출생을 앞두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 태어날 아이의 후손, 즉 왕족 직함을 쓰지 않을 미래의 후손들은 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73][74] 여러가지 논의 후, 필립과 여왕의 일부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surname)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왕가의 이름(family name)은 계속 House of Windsor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surname=family name이지만, 영국 왕가의 경우 앞으로 surname은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 family name은 윈저 가(House of Windsor)라고 하여 구분하겠다는 것이다.[75] 즉 성씨는 달라지더라도 왕가의 이름은 계속 Windsor로 고정된다는 뜻이다.[76]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 영상[77]
조지 6세의 사망과 엘리자베스 2세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인해 평범한 가정생활과 그동안 쌓아왔던 해군 경력을 겨우 31살의 젊은 나이에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즉위 초창기에 엘리자베스 2세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78] 또한 여왕의 남편임에도 여전히 무일푼 외국인 왕자라는 귀족들의 비아냥과 모욕을 듣거나 왕가의 성을 윈저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서서 남편 필립 공의 지위를 확실하게 정리했는데, 특히 딸을 비롯한 여계 후손들과 왕족 호칭이 안 붙는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란 성을 쓰게 조치했다. 심지어 자신도 아주 사적인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윈저 부인이라는 이름을 쓴 적도 있다.[79]

더불어 1953년부터 시작된 당시 에든버러 공작의 왕실 작위에 대한 논쟁 끝에 여왕은 그에게 1957년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공(Prince of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작위를 내리는 한편[80], 그를 칭할 때에는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로 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더불어 필립 공의 공식 지위가 '현저하고 우선하게 여왕 폐하 다음(Place, Pre-eminence, and Precedence next to Her Majesty)'이라고 법적으로 못을 박았다. 이로써 필립 공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81]

아내 엘리자베스 2세와는 평생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데에는 남편 필립 공과의 모범적인 결혼생활도 한몫 했다. 외국에 알려진 것처럼 수십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왕이 남편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고, 필립 공 역시 바람은 피워도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간히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평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고전적인 유형의 부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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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신혼여행 중 (위)
2007년 결혼 60주년을 맞이해 위를 재현 (아래)

필립 공은 여왕의 부군이라는 위치 때문에 항상 아내보다 한발 물러서 있어야만 하는 처지에 엘리자베스 2세는 국정을 혼자 살피기 때문에[82] 정치적으로 발언권을 가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대신 여왕을 대리해 해외를 순방[83]하거나 각종 학술단체 또는 자선단체의 후원자를 맡는 등 민간 활동에서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필립 공은 생전에 자신을 "나는 세계 최고의 현판 제막식 전문가"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1956년 남극 제도를 방문한 이후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의전 서열상 영국군 최고 계급 보유자로, 영국 육군, 영국 해군, 영국 공군원수 계급을 보유하고 있고, 201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해군 최고사령관(Lord High Admiral) 직위를 넘겨받았다. 옛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마운트배튼 경처럼 외국인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반대로 인해 해군 제독 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다. 반면 마운트배튼 경은 영국 해사 출신이고 이미 본국 왕정도 없어진 상태라 큰 논란이 없었던 듯하다.

맏이이자 장남인 찰스 3세와는 어려운 관계였다고 전해진다.


3.2.6. 장수와 건강 문제[편집]



파일:21ukroyals1-master1050.jpg

결혼 70주년 기념 사진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 중 가장 장수했다. 이전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여왕의 손녀인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1883년 ~ 1981년, 97년 313일) [84]였는데, 2019년 4월 19일부로 필립 공이 이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크리스티안 9세의 후손 중에서도 가장 장수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워낙 고령이다 보니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곤 했었다. 2011년 12월 23일에는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병원에 입원해서 관상동맥경화 수술을 받고 27일 퇴원했다. 2012년 6월 4일에는 전날 있었던 수상 퍼레이드에서 비가 오는 날씨에 2시간 동안 선 채로 참석한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 증세를 보여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9일 퇴원했다. 2013년 6월 6일, 복부 수술을 위해 런던클리닉에 입원했다.

2017년 8월 2일 버킹엄 궁에서 열리는 왕립 해병대 퍼레이드 행사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왕실 업무를 끝내고 은퇴하였다. 필립 공이 맡았던 업무들은 막내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인계되었고, 이 95세 전후가 왕실의 은퇴 연령으로서 장차 여왕 역시 은퇴하고 아들이 섭정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제기되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2019년 1월 17일,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인근에서 본인이 운전하던 랜드로버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큰 부상 없이 멀쩡하다는 병원 진단이 나왔다.[85] 그러나 사고 이틀 뒤 안전벨트 없이 또 운전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어 고령자의 운전 금지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2월 9일 운전면허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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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 기념 사진[86]
왕실 공무에서 물러난 후 여왕과 찍은 사진들을 보면 거동도 크게 불편해보이진 않는 등 꽤 정정한 모습이었다.

2020년 6월 10일 99세 생일을 맞이해 영국 역사상 현직 군주의 배우자로서 최고령이자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87]

2021년 2월 16일, 필립 공이 몸이 좋지 않아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고 밝혔다. 코로나 19는 아니라고 한다.# 3월 1일 구급차로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심장 수술을 잘 받았다고 한다.# 1달 만에 퇴원하였다.#


3.3. 사망[편집]



파일:필립 공.png

생전에 공식적으로 찍힌 마지막 모습[88]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모습이다.[89]



BBC의 특별 추모 방송[90]
버킹엄 궁은 현지 시간 2021년 4월 9일 성명을 발표하고 필립 공이 윈저 성에서 이날 아침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망 당시 여왕이 곁을 지켰다고 한다. 향년 만 99세.[91]##

얼마 전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꽤나 수척해진 모습(이 문서의 윗 사진)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었는데, 우려대로 곧 사망했다. 코로나19가 아닌 감염증 치료를 하던 중 심장 관련 지병이 발견되어 추가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고 밝혔다. 공식적인 사인은 노환으로 기록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의 배우자의 직무[92]를 수행한 왕족으로, 장례식은 생전 그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질 것이라고 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펐다"면서 "필립 공은 영국과 영연방, 전 세계의 여러 세대로부터 애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필립공은 비범한 삶을 살았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의 삶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필립 공은 왕실이 영국인들에게 중요한 기관이 되도록 도왔다"고 덧붙였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영국은 비범한 공복[93]을 잃었다"며"그는 2차 대전 때는 영국 해군으로서, 이후엔 에든버러 공작으로서 나라에 인생을 헌신했다"라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필립 공이 여왕을 오랜 세월 놀랍고 꾸준하게 지지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지만 선견지명과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도 기억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필립 공의 모국이자 지금은 없어진 그리스 왕국콘스탄티노스 2세[94] 전 국왕은 필립 공에 대해 "그의 나라와 영연방을 위한 의무와 봉사에 전 생애를 바친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가족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그리움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필립 공이 "결혼과 가족에 대한 헌신, 공익사업에 대한 경이적인 기록, 미래 세대의 교육과 발전을 위한 헌신을 했다"면서 진심 어린 애도를 표했다. 교황은 또 "필립 공이 떠난 데 대해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주님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부탄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과 제선 페마 왕비가 심토카 종(Simtokha Dzong)에서 1000개의 등불을 밝혀 필립 공의 명복을 빌었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 역시 다음날 트위터에 성명을 내 명복을 빌었다.#

영국 정부와 각 국의 영국대사관 및 영사관을 비롯해서 같은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뉴질랜드, 호주에서는 조기를 게양했다.


파일:The Following Announcement Is Made By Royal Communications.jpg

버킹엄 궁전에 게시된 부고문
사망 이후 버킹엄 궁전 대문에는 공식 발표문이 붙었으며, 이후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버킹엄궁 측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해 조화를 놓는 등의 행동을 자제하고, 기부 등의 방법으로 추모를 할 것을 권장한다"고 밝혔지만, 애도를 표현하려는 인파가 버킹엄 궁 앞으로 몰리는 것을 우려해 공식 발표문도 1시간 만에 뗐다.

장례식은 4월 17일 토요일에 왕실 관례와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윈저 성 내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국장이 아닌 왕실장으로 치러지며, 안장도 그 곳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대략적인 예상도 다만, 이는 가안장에 해당하며 여왕의 영면 후에는 여왕과 같이 조지 6세 경당에 안장될 예정이다.[95] 코로나 19로 인해 일반인 추모를 위한 시신 공개 행사도 없다고 한다.# 최근 잇따라 왕실에 대한 폭로를 내놓았던 해리 왕자도 평소 할아버지 필립 공과 사이가 가까웠던 만큼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한다.[96] 다만, 부인 메건 마클은 현재 둘째 아이임신 중인 만삭이어서 장례식 참석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장례식 참여 인원이 30명 이하로 제한되어, 장례식에는 그의 가족과 개인 비서만 참여한다. 보리스 존슨 총리 또한 그의 가족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필립 공의 생전 요청에 따라, 나치에 시집을 갔다는 이유로 자신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던 누나들의 후손들이 올 수 있게 되었다.

ITV는 필립의 영면이 발표된 당일 앤 공주에드워드 왕자인터뷰를 가졌고 찰스 3세는 이튿날 간략한 성명을 남겼다. 앤드루 왕자는 11일 추모성찬례를 마치고 BBC인터뷰를 가졌는데 영국 여론은 저런 성범죄자가 부친상을 핑계로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냐는 반응이 대다수.

4월 12일 BBC 두 채널에서 계속 추모 방송을 하여 필립 공 특집 방송을 그만하라는 항의 청원이 11만 건으로 기존 최고 기록이었던 제리 스프링거쇼 방송 항의 횟수 6만 3천 건을 훌쩍 넘어 기록을 갱신했다.# 어느 정도 보수성이 있는 공영 방송이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평도 있다. 결국 BBC는 필립 공의 장례식을 BBC1에서 생중계한 뒤 당일 저녁 BBC2에서 재방송할 예정이다.#

바누아투의 타나섬 카스톰 족은 필립을 자신들과 같은 부족이라고 믿고 있어서 큰 슬픔에 빠졌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여담으로 필립 공이 세상을 떠난 2021년에 그의 증손주가 무려 4명이나 태어났다.[97]

유언장이 최소 90년 동안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채 봉인된다.#

2022년 3월 2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필립공의 추도식이 열렸다. 여왕을 비롯하여 자녀, 손주, 증손주 및 각국의 국왕과 왕비들도 참석하였다.

이후 2022년 9월 8일에 엘리자베스 2세가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부부가 나란히 1년 5개월의 차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여왕의 장례식 후 가안장 되어있던 필립의 관을 조지 6세 경당으로 옮겨 여왕과 함께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엘리자베스 2세/가족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GettyImages-78104212-copy.jpg

앤드루 왕자
(셋째)

공주 (둘째)
에드워드 왕자
(넷째)

찰스 3세
(첫째)

엘리자베스 2세 (아내)
필립 공
(본인)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그리스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요르요스 1세
(George I)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a
of Russia)

러시아 제국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Nikolayevich
of Russia)
[98]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von Hauke)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99]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엘리자베스 2세
(Elizabeth II)
1남
찰스 3세
(Charles III)
1948년 11월 14일
다이애나 스펜서
슬하 2남[100]
카밀라 파커 보울스
1녀
프린세스 로열 앤
(Anne, Princess Royal)
1950년 8월 15일
마크 필립스
슬하 1남 1녀[101]
티머시 로렌스
2남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Prince Andrew, Duke of York)
1960년 2월 19일
사라 퍼거슨
슬하 2녀[102]
3남
웨식스와 포퍼 백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Earl of Wessex and Forfar)
1964년 3월 10일
소피 리스존스
슬하 1남 1녀[103]
엘리자베스 2세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군주정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해로했는데, 정작 자식들은 막내아들 빼고 전부 이혼하는 바람에 왕실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

필립 본인도 그렇거니와 아내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장수하고 있어서 2007년에는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고, 2011년에는 필립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거행되었다. 생일 전날 BBC와 인터뷰한 필립은 "(여왕의 부군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여왕의 남편의 교본을 만들어가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5. 실언 목록[편집]


여러 차례 짓궂은 농담과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라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를 당혹케 만들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블랙 유머를 즐겼고, 나름 자신이 유머 감각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104] 하지만 여기에 20세기 초 여전히 대영제국의 영광이 남아 있고 계급간 신분차별인종차별, 성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에 형성된 의식이 고스란히 깔려 있던게 문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가, 지역, 신분, 인종, 성별간 차별이 점점 금기시되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농담은 블랙 유머가 아니라 실언과 망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또 사석에서야 이런 발언을 아슬아슬하지만 빵 터지는 드립 정도로 여겨졌지만, 왕가의 일거수일투족이 TV로 노출되고 대중의 가십거리가 되면서부터 더욱 물의로 번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로 인해 20세기 후반부터 국내외에서 거의 실언 제조기, 포의 둥아리 취급을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2세도 필립 공이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불안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기도 했다.

잘 알려진 실언 사례들은 아래 목록 및 인디펜던트가 모은 90가지 발언들에 정리되어 있다. 단, 아래 목록의 실언 중에는 아예 가짜뉴스로 추정되는 내용들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 1965년에는 수단을 방문해서 베풀어진 리셉션 자리에서 박사학위 소유자들을 소개받고 "이 나라의 유일한 박사들이 틀림없군요."라고 발언했다.


  • 1966년에는 자선기금 모금 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마이애미의 한 사업가가 "내 풀장에 뛰어들면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진짜로 옷을 벗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으나, 그의 사회적인 위치가 영국의 국서라는 것이 문제였다.

  • 같은 해인 1966년 "영국 여자들은 요리를 못한다"고 주장했다. 필립 공은 영국 여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이다.[105]

  • 1967년 인터뷰에서 소련을 방문하고 싶냐는 질문에 "가고는 싶지. 그 새끼들 때문에 내 가족 절반이 죽었어도 말이오."라고 발언했다.

필립의 외조모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자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 차르 부부에게는 조카손자, 그들의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에게는 5촌 조카이다.[106]

필립의 과격한 발언은 논란이 되었지만, 당사자로서 충분히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물어본 기자도 눈치가 없다고 비판받았다.

사실 한국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선노동당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몰살당하고 탈출한 북한이탈주민이나 폭정으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잃은 실향민, 이산가족,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고향에 가고 싶나요'라는 질문과 같다.[107]

그 후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소련 해체 후인 1994년에 비로소 러시아를 공식 방문했다. 단, 필립 공은 1973년 국제승마연맹 회장 자격으로 소련을 비공식 방문한적이 있다.

  • 1980년에는 "국민들은 항상 정부에 불평만 한다."라고 말했는데, 당시 영국 경기는 보통 불황이 아니여서 불평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영국의 경제난은 보통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서 1976년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였다.[108]

  • 1982년에는 솔로몬 제도의 인구성장률이 5%란 말을 듣자 "당신들 다 미쳤군."이라고 외쳤다.

  • 1984년에는 케냐를 방문해선 현지 여성을 보고 "당신 여자 맞소?"라고 물어 구설수에 올랐다.

  • 1986년에는 [109] 학생들이 1년동안 중국에 머문다는 것을 알아내자, "1년은 사람이 현지화되고, 찢어진 눈이 될만큼 충분한 시간이다.(long enough to go native and come home slit-eyed.)"라고 말했다.[110]

한 학생이 필립공이 사석에서 한 이 말을 더선, 데일리 미러의 기자에게 말해주자, 그들은 필립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도했다. 필립은 "내가 왜 악의를 가지고 찢어진 눈이라는 말을 사용했겠어?(If I did use the phrase 'slit-eye', I certainly didn't use it offensively. Why would I?)"라고 사석에서 해명했다.[111]



  • 1994년에는 케이맨 제도를 방문해서 현지 주민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해적의 후손이야."라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케이맨 제도는 의도적으로 주변을 지나가던 선박을 암초에 걸리게 해서 해적질을 하는 전형적인 약탈경제로 돌아갔는데 이를 빗댄 발언이다.

  • 1995년에는 스코틀랜드인 운전학원 강사에게 "자네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음주단속에서 안 걸리게 하려면[112] 얼만큼 술을 마시라 알려주나?" 라고 질문했다. 스코틀랜드스카치 위스키와 맥주 생산량이 높아, 영국에서도 유달리 1인당 주류 섭취량과 알코올 중독 환자 발생률이 높다. 스코틀랜드 왕국 작위인 에든버러 공작임에도 이런 발언을 남겨서 더 까였다.


  • 1997년, 하노버 박람회 방문에서 당시 독일 연방총리 헬무트 콜과 만났는데 이때 유창한 독일어[113]로 "Guten Tag, Herr Reichskanzler! (안녕하시오, 제국 총리!)"라고 인사했다. 'Reichskanzler'는 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 총리의 직위명인데, 아돌프 히틀러도 이 자리[114]에 있었기 때문에 민감한 명칭이다.

오늘날 독일의 총리는 '연방총리(Bundeskanzler)'이다. 물론 Reichskanzler가 통용되던 시절에 독일어를 배운 사람이고 이때 이미 70대라 별 생각 없이 내뱉은 것이었겠으나, 독일인들 입장에서는 순간 당황할 만한 발언이었다. 약간 다르지만 한국 국무총리총리 대신 내각총리대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15]

  • 1998년에는 파푸아뉴기니에 다녀왔다는 영국 학생에게 "용케도 안 잡아먹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 파푸아뉴기니의 일부 부족들은 아직도 식인 풍습이 있고,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타 부족원에게 극단적인 복수를 행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1999년에 와이어 연결이 끊어진 퓨즈 박스를 보고 "이건 인도인이 만든 거야."라고 단정지었다. 사석에서 이 말을 한 이유에 대해 묻자 필립은 "자네가 정말 인도에 방문해 퓨즈 박스를 한 번 봤어야해!!"라고 말했다.

  • 1999년 5월 웨일스에서 열린 락 콘서트에 참석해서 같이 공연을 보던 청각장애 어린이에게 "(이런 걸 듣고 있으니) 귀가 안 들릴 만도 하지."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필립은 가일스 브랜드레스에게 개인적으로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이었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국립기관의 후원자였던 내가 그런 말을 하겠냐.", "나는 그 공연에서 청각장애 아이들을 만난 적 조차도 없다", "피커 소리가 너무 커 스피커 가까이 앉으면 귀를 먹을 것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등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해명했다. [116]

  • 2001년, 영국 왕실의 연례 문화행사인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가 그해 11월 26일 런던 도미니언 극장에서 열렸을 때, 공연을 한 엘튼 존을 보고 "마이크 좀 껐으면 좋겠다"라고 조롱했다.[117] 두 사람은 이전에 한 차례 악연이 있었다. 엘튼 존이 1975년부터 윈저 성과 가까이 위치한 윈저 우드사이드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 1976년에 왓포드 FC 회장 역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애스턴 마틴을 왓포드 유니폼(노란, 빨간, 검정) 색깔로 도색하며 몰고 다닌 것으로 필립한테 악담을 들었다고 2019년 자서전 〈Me〉에서 밝혔다.[118]


  • 같은 해 호주 방문 도중에는 여왕을 환영하기 위해 전통 무용을 공연하던 원주민들에게 "아직도 창을 서로에게 던져대나?"라는 농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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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필립 마운트배튼/마운트배튼.png}}}||

그 당시의 모습으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이 크게 당황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와 같은 부군의 발언에 크게 곤욕을 치르곤 했다. 더불어 호주 정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호주 정부가 한때 원주민에 대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 질문을 받은 원주민 대표는 "아니요, 요즘은 그러진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같은 해 <인디펜던트>[119] 편집장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왕실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자 "당신 부른 적 없어, 왜 온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맞이해 또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 같은 해 방글라데시에 방문하여 유소년 클럽 회원들을 보고 "대체 무슨 마약을 했길래 몰골이 그러니?"라는 질문을 던졌다.

  • 2003년 전통옷을 입은 올루세군 오바산조 나이지리아 대통령을 만났을 당시 천을 둘둘 만 듯한 나이지리아 전통옷을 보고 “당신은 이제 바로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되었네요”라는 말을 했다.

  • 2009년 IRA의 공격으로 눈을 크게 다친 상이군인이 왕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여왕이 "지금은 시력이 좀 나아졌나요?"라고 묻자, 옆에서 "매일 입는 옷 색깔이 비슷한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라고 거들었다가 대차게 까였다. 당사자가 대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며,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고 해명해야 했다.

  • 2010년에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하여 의정활동을 참관하던 중 수행하던 여성 의원에게 "댁 팬티체크무늬[120]요?"라고 물어 빈축을 샀다.



  • 같은 해에는 병원을 방문해 간호사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필리핀계 이민자 출신 간호사들에게 "당신들이 우리 의료보험을 지탱해주는건 좋은데, 당신네 나라는 텅 비어버릴거요"라고 이야기해 물의를 빚었다.

  • 2015년 7월 10일, 장손 윌리엄 왕세손과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참석한 참전용사 모임에서 기념사진 촬영이 지연되자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다가
Just take the fucking picture!(그냥 X발 좀 찍어.)
라고 화를 냈다.
순간 에드워드 왕자는 아무 표정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윌리엄 왕세손은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이런 일들이 너무 잦아서 영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 데이비드 스타키(David Starkey)는 필립의 기행을 "드라마의 빅터 멜드루(Victor Meldrew)같다"고 꼬집었다. 빅터 멜드루는 영국 BBC 시트콤 'One Foot in the Grave'에 등장하는 괴팍한 노인캐릭터인데, 우리나라의 드라마 등장인물로 치면 "무슨 노인네가 인성이 노구야동순재급이시네요."라고 깐 셈이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이런 모습을 반영하여 필립 공이 종종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묘사된다. 예를 들면 시즌 1 2화에서는 케냐의 다양한 부족장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부족장들의 개오지 목걸이를 툭툭 쳐내며 가슴에 달린 훈장을 가리키며 "이건 나도 못 받은건데 어디서 훔쳐온 것이냐"고 묻거나, 전통 왕관을 가리키며 "모자 멋지다"고 말하는 등의 언동을 보여 엘리자베스 2세가 주의를 주는 모습이 나온다.


6. 평가[편집]


워낙 복잡한 시대를 살아왔는지라 보는 시각과 기준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연이은 실언과 기행들에서 보듯 인격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영국 국민들이 필립에게 붙인 별명이 '웃기는 사람(funny man)'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은 인종주의나 신분의식 등 1920년대에 태어난 꽉 막힌 상류층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필립은 유럽 왕실들 중에서도 제일 으뜸[121]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왕실의 공주(The Princess),[122] 그것도 차기 여왕인 왕세녀에 준하는 공주였던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혼인으로 과소평가된 감이 있으나, 원래 최상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으로 엄연한 상류층 출신이다.[123] 누나들이 전부 다 독일 왕공족들에게 시집가서 그렇지 신분으로만 따지면 여왕의 남편이 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오히려 일등 신랑감 수준으로, 이런 위치에서 평생을 살아온지라 동년배 기준으로도 더 경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궁에서 귀한 공주로 자라면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어린시절을 보내며, 영국 특유의 레이디 퍼스트 성정을 지닌 영식들만 봐왔던 엘리자베스에게 필립은 신선한 충격과 설렘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나머지 자녀들과 달리 왕위 계승자인 장남 찰스 왕세자에게는 엄했는지, 찰스는 엄격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든스턴(Gordonstoun)이란 스코틀랜드 시골 한가운데 있는 기숙학교[124]에 들어간 자신을 필립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며 딱 잘라 무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필립과 찰스 모두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사이가 좋아졌다. 찰스는 자신이 애정을 덜 받았다고 인정하고 필립 공이 아버지로서는 별로, 할아버지로서는 최고라고 은근하지만 직접적으로 깠다. 가장 사랑했던 자식은 자녀들 중 하나뿐인 딸 앤 공주로 성격도 외모도 자신을 닮아서 유독 아꼈다고 한다.

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왕자가 장래 군 복무를 조건으로 영국 해병대로부터 대학시절 등록금을 지원받았지만, 입대 후 계약 기간인 12개월 중 의무복무기간 3분의 1만 하고는 전역을 신청했을 때 집안에서 에드워드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버지 필립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와 누나 앤 공주는 "네가 선택한 길인데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지 않느냐"고 엄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필립 역시 해군 장교 출신인 데다 장남 찰스 왕세자도 대학 졸업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해 복무를 마쳤고, 차남 앤드루 왕자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군인이었다.

맏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에게도 다정한 시아버지였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찰스의 불륜으로 고통을 호소해도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하는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고 방관하였던 반면, 시아버지 필립은 자신과 다이애나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서[125] 당시 왕실 인사 중에선 거의 유일한 다이애나의 우군으로 하소연을 들어주고 슬픔을 달래주었다. 다이애나와는 특히 편지도 자주 주고 받았고 "너를 버리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에게 가려 하다니 찰스 저 자식이 도대체가 제정신이 아니다"고 다이애나의 편을 들기도 했다. 찰스에게도 "멍청한 놈, 바람은 바람이고 가정은 가정이지!"[126]라고 대신 욕해주기도 했다고. 다이애나 역시 왕실에서 고립된 자신을 신경써주는 필립 공에게 매우 고마워하여 편지에서도 그를 Dearest Pa라고 부르는 등, 사이가 좋았다.[127]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손자 윌리엄해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 당시에도 손자들이 가엾다며 뒤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장례식 행렬에서도 내내 손자들을 신경썼으며 이후에도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썼다고 한다.[128] 또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준비할 때 다들 어린 왕자들보다는 국장 순서와 진행사항에만 더 신경쓰자 "이 애들은 방금 어머니를 잃었다"며 일갈했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례식에 빠지려는 윌리엄에게 "지금 (장례식 행렬을 따라)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게 될거다. 할아버지랑 같이 가 보자꾸나(If you don't walk, I think you'll regret it later. If I walk, will you walk with me?)"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BBC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를 하도록 한 점이나, 당시 왕실 어른들 중 드물게 처제 마거릿 공주가 이혼 경력이 있는 피터 타운샌드 영국 공군 대령과 결혼하는 것에도 찬성[129], 손자 해리 왕자가 이혼 경력이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메건 마클과 교제하는 것을 허용하고 둘을 지지하는 등 왕실과 관련된 파격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면도 있다.

드라마 더 크라운 등 필립 공에 대해 다룬 매체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리스에서 쫓겨난 경험을 통해 "왕실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국민들이 왕실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왕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때문에 왕실의 풍습과 법도에 대해 이런 개혁적인 면모를 가지게 됐다고. 이러한 시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필립 공은 조국에서 쫓겨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 왕실을 개혁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 셈이다. 어찌보면 정말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면 외부 접촉도 거의 하지 않고 살았을 텐데, 사고의 대부분이 구시대적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라 물의를 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개인으로서는 마음씨가 좋고 심성이 곧으며 나아지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지만,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격동의 사회 속에서 물의를 빚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7. 매체에서[편집]


전통을 중시하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여론의 질타에 꼬장꼬장하게 분통을 터트리곤 한다.


상술한 복합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인물로 나온다. 대중에게 왕실 모습을 공개하거나, 대관식을 TV로 생중계 하는 등의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의혹 제기일 뿐이긴 하지만 해외 순방 중의 불륜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애매한 연출이나 장남 찰스에게 가혹하게 구는 모습 등이 묘사된다. 앞서 말한 막말 일화도 등장했다.[130][131]

8. 기타[편집]


  • 필립 공 본인은 만 2살도 안 되어 그리스를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어는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본인이 1992년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했다고 한다.

  •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독일어를 매우 능숙하게 구사했다. 오늘날에 그 위상이 많이 낮아지기는 했으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프랑스어는 유럽 상류층의 공용어이자 필수 교양이었다. 필립 공도 당연히 전형적인 상류층 교육을 받으며 프랑스어 능력을 쌓아왔다. 또한 필립 공은 어머니와 누나쪽 친척들이 다 독일 왕공족들인데다, 어린 시절 독일의 슐레 슐로스 잘렘에서 수학하기도 하여 독일어 능력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유창한 독일어 인터뷰 영상 프랑스어 실력 또한 독일어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 없는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

  • 그리스 왕국의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외모의 어디를 뜯어봐도 대부분의 그리스인에 해당되는 남유럽계가 아니라 평범한 서유럽계 외모다. 필리포스도 자신을 그리스인보다는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필리포스의 조부인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 요르요스 1세[132]는 본래 덴마크 왕국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빌헬름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어머니 앨리스도 독일계 가문 출신이라 부모 모두 독일인이다. 이 때문에 남유럽계 그리스인과는 외모가 다른 금발/벽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133][134]

  • 사촌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는[135] 엘리자베스 2세의 작은 아버지 조지 5세의 4남 켄트 공작 조지의 부인이다. 마리나 공주는 아름다운 외모로 켄트 공작가 사람들이 한 미모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136] 다만 손윗동서인 엘리자베스 왕대비를 왕족이 아닌 귀족 출신이라고 무시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2세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의 증손녀이고, 필립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137]의 증손자로,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며, 모계(영국 왕실) 기준으로는 8촌이다. 또 필립의 조부 요르요스 1세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고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모인 알렉산드라는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로 부계(그리스 및 덴마크 왕실)로는 7촌관계이다. 덧붙이자면 필립은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소피아 왕비 부부와도 친척관계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증손자로, 필립과는 7촌이고(바텐베르크 가문으로는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는 8촌), 소피아 왕비는 필립의 큰아버지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의 손녀이므로 필립과는 오촌의 비교적 가까운 친척 관계이다.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미하이 1세도 1921년생 동갑이지만 촌수로는 필립 공의 5촌 조카가 된다. 필립 공과 미하이 1세의 어머니인 엘레니 왕대비사촌 사이이기 때문.[138]

  • 누나들은 모두 독일 왕공족들과 결혼했다.
    1. 첫째 누나 마르가리타 (1905~1981): 1931년 4월 20일 호엔로헤-랑엔부르크(Hohenlohe-Langenburg)[139] 후작(Fürst) 고트프리트와 결혼해 4남 1녀 출생. 맏손자[140]가 현재 가문의 당주 역할을 맡고 있다.
    2. 둘째 누나 테오도라 (1906~1969): 1931년 8월 17일 바덴 변경백(Markgraf)이자 아버지 안드레아스의 고종사촌인 베르톨트[141]와 결혼, 2남 1녀 출생. 맏아들 막시밀리안 안드레아스(1933~2022)가 바덴 대공가를 이끌다가 2022년 말 사망했고 그 아들 베른하르트(1970~)가 당주가 되었다.
    3. 셋째 누나 체칠리아 (1911~1937): 1931년 2월 2일 헤센 대공국의 대공자[142]이자 어머니의 외사촌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결혼했다. 1937년 10월 선친의 사망으로 대공위를 승계한지 한달여 뒤인 11월 16일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게오르크 도나투스, 체칠리아 부부와 두 아들[143]이 모두 사망하고 만다.
    4. 넷째 누나 소피아(1914~2001): 1930년 12월 15일 헤센-카셀의 공자(Prinz)[144] 크리스토프[145]와 결혼했다. 언니들보다 앞서 남매들 중 제일 먼저 결혼했다. 2남 3녀를 낳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프트바페로 복무하던 크리스토프는 1943년 10월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이후 1946년 4월 23일 하노버 왕조의 빌헬름[146]과 재혼했다. 빌헬름과의 사이에는 2남 1녀를 낳았다. 소피아는 자매 중에 영국 왕실과도 제일 사이가 가까워서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 1985년 전두환 前 대통령이 필립 공이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했다. 이후 필립은 2004년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방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 환영만찬이 열리자 훈장을 이브닝 드레스에 패용한 채 참석했다.
훈장 수여를 보도한 당시의 대한뉴스 제1562호 - 대통령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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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엘노권필.jpg}}} ||
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여왕 부처.
필립 가슴의 흰색 훈장이 청룡장이다.








필립 공 : 자네 요즘 무슨 일 하나? 혹시 그 크라운인가 뭔가 하는 거에 관여하고 있나?
영화계 인사 : 아닙니다, 그쪽 일엔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영화계 인사 : 필립 전하, 헌데 궁금해서 말입니다. 더 크라운을 제작하고 있는 제 친구들이 있어서 그럽니다만, 혹시 그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필립 공 : (노려보면서) 말 같잖은 소리 좀 하지 말게나 (Don't Be Ridiculous).
한편 엘리자베스 2세도 시즌 초에 엄하게 그려진 남편 필립 공과 아들 찰스 3세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편한 관계와 갈등이 묘사되어 있는 부분들을 불편하게 여겼다고 제작진에게 지적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필립 공이 사망한 후에 해당 부족은 매우 애통해하며, 마을 족장은 필립 공의 영혼은 살아있으며 영원히 자신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
Buckingham Palace has announced the death of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
버킹엄 궁은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이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발표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저렇게 방영되었다고 와전이 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속보 전환 타이밍을 놓쳐 댄스곡 중간에 God Save the Queen이 어정쩡하게 방영되었을 뿐, 영상에 나온 위성 및 인터넷 전용 방송인 BBC Radio 1 Dance도 속보 전환을 했으며[155] 당시엔 음악, 스포츠 라디오 1, 2, 3, 5 채널 가릴것 없이 모두 뉴스 채널인 Radio 4를 몇 시간동안이나 릴레이 송출했다. 즉 위 영상은 누군가 조작한 가짜 영상인데 서거 소식 발표 직후 자연스럽게(?) 비트를 드롭하며 다시 댄스 음악으로 넘어가는 것이 웃겨서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이 아직도 본 영상을 당시 실제 방송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후 2022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자 또 Radio 1의 당시 발표 영상이라며 누군가 패러디 장난 영상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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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서로서의 공식적인 업무는 2017년 8월 2일부로 내려놓았다.[2] 부군의 문장은 아내의 문장과 합쳐질 수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독보적으로 타 왕족들의 문장과 따로 노는 걸 알 수 있는데, 필립 공의 친가 글뤽스부르크 가문과 외가 바텐베르크(마운트배튼) 가문의 문장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3]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Earl of Merioneth, Baron Greenwich, Royal Knight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Extra Knight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Grand Master and First and Principal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Member of the Order of Merit,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 Additional Member of the Order of New Zealand, Extra Companio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Royal Chief of the Order of Logohu, Extraordinary Companion of the Order of Canada, Extraordinary Commander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Canadian Forces Decoration, Lord of Her Majesty's Most Honourable Privy Council, Privy Councillor of the Queen's Privy Council for Canada, Personal Aide-de-Camp to Her Majesty, Lord High Admiral of the United Kingdom[4] 엘리자베스 2세와의 혼인을 위해 이후 그리스 왕족 신분과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5] 엘리자베스 2세와의 결혼을 위해 그리스 왕족 신분을 포기하면서 HRH 칭호를 잃었으나, 다시 받게되었다. 왕자비와 달리 공주의 부마들은 HRH 호칭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왕족 신분을 받지 못하므로 원칙대로라면 필립도 HRH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다만 차기 여왕의 부군이 될 사람이었기에 전하 칭호를 수여한 것.[6] 1882 ~ 1944.[7] 1905 ~ 1981.[8] 1906 ~ 1969.[9] 순서대로 마가리타(Margarita), 돌라(Dolla), 세실(Cécile), 타이니(Tin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10] ‘필립’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전하/HRH 경칭을 가진 고위 왕족이라서 성씨를 안썼고 미들네임인 안드레아스는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필리포스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의 이름도 여기서 따왔다.[11] 따라서 니콜라이 1세는 필리포스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12] 아내 엘리자베스 2세빅토리아 여왕현손녀로 남편 필리포스와는 8촌 지간이다. 앨리스 공주의 친오빠 에드워드 7세가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할아버지였기 때문.[13] 사실 엘리자베스 2세와는 외가뿐 아니라 친가쪽으로도 친척인데, 필리포스의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와 엘리자베스의 증조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가 친남매 지간이다. 때문에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 2세는 덴마크그리스 왕실 기준으로도 7촌이고, 따지고 보면 장인어른인 조지 6세와도 같은 항렬인 6촌 지간이 된다.[14] 첫째 누나 마르가리타 공주와 나이차이가 16살이나 났다.[15] 편지의 본문은 "Philip could stand up alone now & sits with bare legs on the hard road & crawls on it without minding the stones. He is in fact as advanced & sturdy for his age as all the others were & has the same tow-coloured hair.."(이제 필립은 스스로 설 수 있고, 맨다리로 딱딱한 도로에 앉고 기어가. 다른 아이들(필립의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래에 비해 튼튼하고, 옅은 금발이야.) 그리고 루이즈는 “아이는 하루종일 웃어. 난 이렇게 명랑한 아기는 본 적이 없어.(laughs all day long. I have never seen such a cheerful baby.)"[16] 장남 요르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이유는 그가 독일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반독정서를 의식해서였다.[17] 재판을 받은 7명 중에 안드레아스 왕자만이 목숨을 건졌다.(1명은 종신형.) Trial of Six[18] 남자아이임에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는 당시의 배변 훈련 문화 때문. 옛날에는 바지는 입히고 벗기며 기저귀를 갈아주기에 번거로워서, 남자아이에게도 치마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훗날 자신의 맏아들 찰스 3세에게도 이런 드레스를 입히고 안아주는 사진이 남아있다.[19] 조지 5세러시아 혁명 당시 앨리스 왕자비의 이모이자 자신의 사촌동생인 알렉산드라 황후니콜라이 2세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의사를 타진한 것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그들을 죽게 만든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20] 앨리스 왕자비의 시녀, 아이들의 가정교사, 유모[21] 노년의 소피아 공주는 이제까지 살면서 가본 최악의 장소라고 평했다.[22] 앨리스 왕자비는 멈추려고 했지만, 유모는 필리포스를 가만히 놔두라고 했다.[23]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으로, 성에서 짐작하듯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이다.[24] 에드위나 애슐리, 낸시 리즈(아나스타샤 왕자비), 마리 보나파르트 등. 에드위나 애슐리는 필리포스의 외숙모로 루이 마운트배튼의 부인, 에드워드 7세의 재정관리인이었던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의 상속녀였다. 낸시 리즈는 필리포스의 숙모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크리스토프 왕자의 첫째 부인, 철강왕 윌리엄 리즈와의 2번째 결혼에서 큰 돈을 상속받았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필리포스의 백모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 몬테 카를로의 카지노를 설립한 외할아버지 프랑수아 블랑의 상속녀였다.[25] 맥자넷 전기, 앨리스 왕자비가 교장에게 전한 말. 원문: Instead of being constantly hushed up he should be working off his boundless energy by practicing games and learning Anglo-Saxon ideas of courage, fair play, and resistance. Philip should develop English characteristics, because his future will be in English speaking lands, perhaps American, and I want him to learn English well.[26] 뿐만 아니라 항상 방문자들을 위해 의자를 가져다주고,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음식을 가져다 주는 일이 없도록 직접 부엌에서 음식을 가져왔다고 한다.[27] 당시 프랑스 주재 중화민국 대사였고, 나중에 주 영국, 주 미국 대사, 대총통 권한대행까지 지낸 구웨이쥔웰링턴 쿠(Wellington Koo, 顧維鈞)의 아들들이다. 이 둘은 학교에서 칭칭 차이나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28] 헬렌 코뎃은 영국의 여배우로 필립의 불륜 상대로 자주 지목된다. 엘레니 포우푸니스가 본명으로, 필리포스와 소꿉친구였다. 포우포니스 가족은 꽤나 부유한 프랑스에 살던 그리스인 가족이었다. 필리포스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와 엘레니의 엄마, 필리포스의 유모와 엘레니의 유모는 친구였다. 포우포니스 가족은 베르크 해변가에 별장이 있었다. 필리포스네 가족이 해변가로 휴가를 나왔을 때 누나 카이킬리아소피아와 필리포스는 엘레니, 엘리니의 남동생 라이니, 여동생 리아와 함께 놀았다한다. 헬렌 코뎃은 60년 후에 이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어릴 때 필리포스를 매우 질투했어요. 내가 필리포스를 싫어한 만큼 필리포스는 나를 싫어한 것 같진 않지만, 내 감정은 주로 질투였습니다. 모두들, 특히 우리 엄마는, 필리포스가 잘생긴 아이라고 좋아했어요! (참고로 엘리니의 엄마의 회고록에 따르면 예전에 사람들은 자신보고 필립의 보호자인지 가정교사인지 계속 물어봤는데, 그 어느것도 아니였지만 자신의 아이처럼 필립을 사랑했다고 함.)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새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금발 벽안의, 이 독일인처럼 생긴 작은 아이가 우리집에 오고, 우리 엄마가 그 아이에게 너무나 많은 관심을 쏟을 때면 나는 매우매우 화났어요. 필리포스와 내 동생 라이니는 작당해 맨날 나를 괴롭혔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그들은 헤어졌지만 새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세가 기운 이후 필리포스가 15살 때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헬렌이 첫번째로 결혼할 때 신랑 들러리가 되어주었고, 2번째 결혼으로 낳은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헬렌의 아들 맥스에게 고든스턴 학교를 권유했으며, 헬렌의 필립이라는 손자도 고든스턴에 갔다. 그들은 친구였지만 불륜상대로 지목된 이유는 첫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별거 중에, 두 번째 남편이 될 애인과 아들 맥스를 낳았기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를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근데 필립이 맥스의 대부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불륜 상대로 지목돼 버린 것.[29] 그가 느끼기로는 그저 평범한 가족의 삶과 다름이 없었으며,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적이 없다고 밝혔다.[30] 조현병은 오늘날까지도 인식이 매우 안 좋은 병이다. 20세기 초반의 상류사회에선 인식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았다.[31]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가이기도 하다.[32] 이 시기보다는 이후이지만 볼프스가르텐 성에는 1946년부터 2005년까지의 방문기록이 창문에 새겨져 있다. 창문에는 필리포스, 엘리자베스 2세, 찰스 3세, 앨리스 왕자비의 서명이 있다.[33] 외숙모였던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나데이아 마운트배튼의 조카다.[34] 바덴 대공국의 대공자인 당주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후원을 받아 쿠르트 한이 1920년 독일 남부 잘렘에 설립한 기숙학교이다. 필립은 둘째 누나 가족 소유의 학교이기 때문에 학비를 아끼려고 침 스쿨을 떠나 잘렘에 입학했다.[35] 쿠르트 한은 유대계 독일인이라 나치당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나치가 집권하고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자, 1933년에 투옥되었다가 영국으로 추방되었다.[36] 이는 남동생들인 앤드루 왕자에드워드 왕자도 마찬가지였다.[37] 이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동행하지 않아 살아남은 막내딸 요한나는 숙부 루트비히에게 입양되었으나 2년 뒤 수막염으로 사망한다. 이후 루트비히 또한 자녀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직계는 사실상 단절된다.[38] 선두에 서있는 제복군인들 중 3명은 필립의 매형들이다. 첫째 줄은 루트비히 폰 헤센 공자. 둘째 줄은 왼쪽부터 고트프리드 호엔로에-랑겐부르크 공, 크리스토프 폰 헤센 공자(SS 제복), 필립 폰 헤센 공자(SA 제복), 필립 공(에든버러 공작), 베르톨트 폰 바덴 공.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뒤에서 뾰족한 해군 모자를 쓰고 있으며, 조지 6세엘리자베스 왕비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이 장례식에는 헤르만 괴링이 직접 착석했다.[39] 밀포든 헤이븐 후작의 아들이었던 데이비드가 후작위를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필리포스보다 고작 2살 많았을 뿐더러 미성년자였기에 누군가의 후견인을 맡을 처지가 아니었다.[40] 1995년 인터뷰에서 해군으로 입대하게 된 것이 루이 마운트배튼의 영향이라고 직접 밝혔다. 기자의 질문은 “전하의 할아버지들 모두 해군에 몸담으셨고, 아버지는 육군에 계셨었지만 전하는 원래 공군이 되고 싶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결국 해군을 선택하게 되었나요?”였는데, 대답은 “결국 외삼촌(마운트배튼경)한테 설득당했으니까요.”였다.[41] 필립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는 너무 어린 시절에 그리스를 출국해 대화는 다소 서툰 편이었으나, 1992년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했다고 한다.[42] 일찍 취업 준비를 하던 고등학교 3학년이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3학년 꼬마 둘을 데리고 놀아줬다고 생각하면 된다.[43]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 날에 대해 "필립과 아이들(엘리자베스와 마거릿 공주)의 만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라고 일기에 적었다.[44] HMS 켄트의 중위는 일지에 ‘오늘은 비가 많이 왔다. 다행히 필리포스 왕자가 사관생도로 있는데, 코코아를 정말 잘 만든다…’라고 적었다.[45] 이 전투에서 잃은 전함 중 하나는 HMS 캘리로 필리포스의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지휘했었다. 살아남은 마운트배튼이 필리포스와 만나자 필리포스는 마운트배튼이 기름을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46] 굳이 왕녀가 아니더라도, 상류층 남성으로서 레이디의 편지를 무시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다.[47] 조지 왕자의 아내인 마리나 왕자비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필립의 아버지 안드레아스의 친형이다.[48] 이것이 조지 왕자의 생전 마지막 결혼기념일이 되었다. 영국 공군에서 복무 중이던 그는 이듬해 여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다.[49] 전쟁 중 영국 왕실에서는 연말에 상류층 인사들을 초청해 크리스마스 자선 공연을 열어 전쟁자금을 모아 기부하는 행사를 가졌다. 왕실에서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참여했는데, 1941년에는 '신데렐라', 1943년에는 '알라딘', 1944년에는 'Old Mother Red Riding Boots'에 등장했다.[50] 그런데 정작 왕실 직원들은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온 필리포스의 모습에만 익숙해서, 사진 속 수염을 기른 인물이 필리포스인지도 잘 몰랐다고.[51] 왕족치고는 풍파를 좀 겪어본 데다가 군대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탓이었다.[52] 대표적인 후보가 왕실과 인연이 있던 카나본 백작(Earl of Carnarvon) 가문의 7대 카나본 백작 헨리 허버트(1924~2001)로, 엘리자베스보다 2살 연상에 어릴 적부터 친해서 왕래가 잦았다.[53] 이 칭호는 왕의 자녀와 친손자녀까지만 허용된다.[54] 부친 안드레아스 왕자는 모나코몬테 카를로에서 객사한지 오래였고, 모친 앨리스는 이전에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서 3년간 지낸데다 그리스로 돌아가 수녀처럼 지내며 봉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55] 베르톨트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56] 크리스토프는 괴링 밑에서 Forschungsamt(FA)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일했다. 후에는 SS 장교, FA수장을 맡으면서 루프트바페에서 복무하다가 1943년에 전사했다. 넷째 누나 소피아는 남편의 전사 이후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자이자 하노버 왕가의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과 재혼한다.[57] 그냥 복무한 것도 아니고 공을 세워서 군 기관지에 이름이 언급된 것만 수차례가 넘는다.[58] Duchess of Kent to Louis Mountbatten 28 January 1945 "I think it is a very good idea & apart from it being a help in his naval career it might also be an asset for other 'matters'." Of course the less said about the question we have sometimes discussed the better - & as you say it must take its course.[59] 루이 마운트배튼은 조카가 영국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매우 들떠했다. 그는 야망이 컸고 가계도와 결혼 중매에 관심이 많았다. 1930년대에 친구 에드워드 8세를 위해 (33세부터 15세까지) 18명의 결혼 가능한 유럽의 공주들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60] 당시 남성 왕족이 얼마 없었던 그리스 왕가에서 필리포스는 의외로 계승서열 3위인 왕족이었다.[61] 덕분에 들뜬 루이 마운트배튼은 앨버트 공의 사례를 찾아보며 벌써부터 설레발을 쳤다.[62] 마운트배튼은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의 성을 영문식으로 읽은 것으로, 1차대전 중 반독 감정으로 개명한 것이다. 단,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그 훨씬 전에 결혼했기 때문에 한번도 '마운트배튼'이었던 적이 없었다.[63] 필립의 계승권은 당시 그리스 왕가에서도 매우 높은 3위였다. 살리카법을 채택하고 있던(1952년 폐지) 그리스의 국왕은 필립의 사촌형인 요르요스 2세였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으며(1921년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1935년에 이혼했고, 필립의 영국 귀화 직후인 1947년 4월 1일 동맥경화로 급서), 요르요스의 동생이자 후임 국왕인 파블로스도 아들이 콘스탄티노스 2세뿐이었으며, 둘째 백부 요르요스 왕자는 80살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 그의 외아들 페트로스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한데다 자녀 없이 사망, 셋째 백부 니콜라오스 왕자는 딸 셋만 두고 이미 사망, 이미 사망한 숙부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이 있었지만 슬하에 딸만 둘을 두어서 여기도 단절됬다.[64] 여태껏 가족이나 친구들과 성공회 감사성찬례(예배)를 드렸으나, 군에 있을 때 세례는 그리스 정교회식으로 받았다고 한다.[65]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그 윈스턴 처칠"신랑 가족들이 왜 다 안왔는지 알아? 전부 나치하고 결혼했거든. 골수 나치하고!"라고 두 사람의 결혼식을 못마땅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즌 2의 1화에서도 마거릿 공주가 언니 엘리자베스에게 "뭐? 그럼 형부의 나치 누나들이 계속 와서 괴롭혀?"라고 말한다. 2화에서 나온 필립의 단독 인터뷰 장면에서도 그가 독일에 있는 학교에 다닌 것에 대해 누나들이 거기에서 살았다고 대답하자, 여기자가 "나치 누나들이죠. 당신 누나 한 분과 결혼한 사람이 히틀러의 친구였어요."라고 말하여 필립의 성질을 긁어버린다. 그리고 필립의 학창 시절을 다룬 9화에서도 고고한 태도의 필립에게 불만을 가져 ’어디 몰락한 백작님이라도 되나?‘라고 이죽거린 학생이 ‘난 백작이 아니라 왕자야.‘ 라고 맞받아치자, 반격한답시고 가족들의 상황을 언급하며 "네 누나들은 다 나치잖아."라고 말한다.[66] 그럼에도 필립의 누이들은 가족의 나치 전력 등의 이유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6년이 지나서야 올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후술하지만, 그 후손들은 사후 필립의 장례식에 참석했다.[67] 이후 이 결혼식에서 만난 미하이 1세와 결혼하게 된다.[68] 2022년 9월 8일 아내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난 그 곳이다.[69] 왼쪽부터 앤 공주, 필립 공, 찰스 3세, 마거릿 공주. 촬영한 사람은 엘리자베스 2세. 참고로 저 시대에 공주가 달리는 장면이 포착된 아주 희귀한 영상이라고 한다. 왕족 같은 상류층들은 살면서 직접 뛰어다닐 일이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을 뿐더러, 경박하다고 지적받기 때문. 찰스 3세도 훗날 이 비디오를 보고 "이모가 뛰는 걸 처음봤다"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70] 사실 조지 6세는 젊은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아서 건강한 사람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안 그래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편인데 전쟁으로 인해 과로와 스트레스, 거기에 줄담배까지 피워댔으니 건강이 정상일 리가 없다.[71] 필립은 해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상심했다고 한다. 총각 시절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자기 실력으로 중령까지 달았는데, 느닷없이 반강제로 군을 떠나야 하게 됐기 때문. 사실 해군을 떠나긴 했지만 제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존에 근무하던 호위함 함장을 그만두고 왕실 공무에 투입됐을 뿐이다. 필립은 아내가 즉위한 1952년까지 현역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1년 필립이 호위함 함장을 그만둔 이후 그는 다시는 현역 해군 장교로서의 보직을 받지 못했다. 사실 부군으로써 업무가 너무나 무지막지한지라 신경을 썼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72] 루이 마운트배튼은 자신이 쓰고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게만 유통된 책 <마운트배튼 계보>에서 마운트배튼 가문이 영국을 두 달 동안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그 두달은 여왕이 결혼한 이름으로 통치한 1952년 2월 6일부터 4월 9일까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4월 9일에 윈스턴 처칠의 조언에 따라 여왕과 그녀의 아이들은 윈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고 설명한다.[73] 조지 5세의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전하의 호칭은 군주의 자녀, 군주의 아들의 자녀, 웨일스 공의 손자의 자녀만 사용할 수 있다. 이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찰스 3세는 메리오너스 백작, 앤 공주는 레이디 마운트배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6세의 1948년 개봉 칙허장으로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아이들은 전하(H.R.H.)와 Prince or Princess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성을 안쓴다.[74]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성을 안쓴다. 성을 쓰는 The Royal Highness Prince는 필립 뿐이었다.[75] 영국 왕실의 공식 설명.#[76] 마운트배튼윈저 성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손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이다. 아버지의 직위와 상관없이 왕의 부계 손녀이기 때문에 루이즈는 HRH 칭호와 Princess 호칭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에드워드 왕자 부부가 자식들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기 때문에 HRH 경칭을 주지 않을 것 뿐이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보통 성을 쓰지 않고, 써야 할 상황이면 영지 이름을 사용한다. ex) 찰스 에든버러, 윌리엄 웨일즈, 조지 케임브리지.[77] 04:12쯤에 필립공이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78] 필립 공이 해외 순방으로 6개월동안 여왕과 떨어져 지냈는데, 이때 이혼설이 언론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버킹엄 궁 측에서 곧바로 부인했다. 또한 이는 버킹엄 궁이 사상 최초로 밝힌 왕족의 이혼설에 대한 입장이었다.[79] 엘리자베스는 결혼 이후 즉위하기 전까지 엘리자베스 마운트배튼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80] 그 외에 이 논쟁에서 후보로 거론된 작위로는 영연방 공(Prince of the Commonwealth), 대공(Prince Consort), 왕국 공(Prince of the Realm, 적절한 번역인지는 불확실), 왕공(Prince Royal)등이 있었다. 여기서 Prince Consort를 번역한 대공은 일반적인 대공 작위가 아닌 유럽 여왕의 국서를 칭하는 대공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럽에서, 왕가의 황태자나 여왕의 부군()을 이르는 말'이라고 지정되어있다.[81] 1957년에 여왕이 작위를 내리기 이전에는 에든버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라는 호칭이 전부였다. 이는 왕족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자신의 아들보다 낮은 신분이었다.[82]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정부에서 보낸 서류를 상자에 넣은 다음 꺼내서 함께 들여다 보았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상자의 열쇠를 자기만 갖고 남편에게 주지 않았다.[83] 예를 들면 1956 멜버른 올림픽 개회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을 대신하여 개회선언을 했다. 한편 인도를 방문해선 영국 식민지 시절 학살자 추모비를 딴지걸다가, 여왕이 나중에 인도를 방문할 때 극우파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실컷 당하는 데 기여했다.[84] 여왕의 막내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1남 1녀 중 장녀.[85] 상대 차량은 기아 카렌스였고, 탑승자 2명 모두 가벼운 부상으로 끝났다.[86] 마지막 공식 생일 사진이다.[87] 현직이 아닌 전체 군주로 한다면 최장수한 배우자는 필립의 선배(?)이자 장모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다. 무려 만 101세까지 살았다.[88] 사망 1달 전에 찍힌 사진이다.[89] 고령에도 비교적 정정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또한 평소에는 퇴원 시 스스로 걸어나와 차를 탔지만 이때는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탑승했다.[90] BBC영국 왕실 일원의 추모 방송에 국제 방송인 BBC World News를 포함한 모든 정규 방송을 끊고 God Save the Queen을 송출한다.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때도 방송했다. 영국 왕실기나 국기를 띄워주었던 지난 추모 방송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필립 공의 사진을 띄웠다. 이후 다음 해 엘리자베스 2세 사망 때도 여왕의 사진을 띄웠다.[91] 만 100세를 단 2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굉장히 장수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92] 1952년 ~ 2017년.[93] 원문 extraordinary public servant, 쉽게 번역하자면 만인의 비복[94] 필립 공의 사촌인 파블로스 1세의 아들로 필립 공에게는 5촌 조카. 스페인 소피아 왕대비의 남동생이기도 하다.[95] 필립은 생전에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이 영면한 프로그모어에 묻히고 싶어했다고 한다.[96] 원래 2달 뒤인 100세 생일 때 영국에 방문하려고 했었다고.[97] 외손녀 자라 틴달의 아들 루카스, 친손녀 유제니 공주의 아들 어거스트, 친손자 해리 왕자의 딸 릴리벳. 여기에 친손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딸 시에나가 태어났다. 루카스와 어거스트의 미들네임에는 필립이 들어간다. 손녀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와서 지은 것.[98]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다.[99]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100]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101] 피터 필립스, 자라 틴달[102] 베아트리스 공주, 유제니 공주[103]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 세번 자작 제임스 마운트배튼윈저[104] 그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도 농담을 좋아했다고 한다.[105] 일련의 영국 관련 발언 때문에 필립 공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개념없는 영감이라는 농담아닌 농담도 있다.[106] 필립 공의 할아버지인 요르요스 1세가 니콜라이 2세의 외삼촌이니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에게는 5촌 조카, 그 자녀들과는 6촌 사이가 된다. 또한 필립 공의 외할아버지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는 니콜라스 2세의 5촌 당숙으로 필립 공은 니콜라스 2세에게 7촌 조카이다. 그와 동시에 필립 공의 친할머니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이 니콜라이 2세의 5촌 당고모라서, 니콜라이 2세에게 7촌 조카이자 그 자녀들과는 8촌관계로 겹겹히 친척 관계였다.[107] 물론 고향이라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듯이, 풍비박산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잊기 위해 평생 가기도 싫다는 사람도 있으며, 필립 공은 상대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당사자였다고 보면 된다.[108] 이 불황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서 강력한 구조개혁을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였다. 당시 마거릿 대처의 정책은 경기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서민층과 노동자 계급에서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109] 중국에 머무는 유학생들 중 에든버러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인 필립공은 그 학생들에게 매우 관심을 가졌다.[110] 이 발언은 인종차별이 맞지만 본인에게는 악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로 영국에 거주하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이곳에 너무 오래 있다가는 당신들 눈도 크고 동그래진다"고 한 전적이 있었다.[111] 사적인 점심 모임에서 어떤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로 농담을 하자 필립은 그 사람들의 말을 저지했다는 등 필립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증명해주는 일화는 많다. 필립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1920년대 사람이다보니 그 시대의 잘못된 편견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112] 정확히는 음주단속 적발로 인한 무효처리.[113] 필립 공은 독일어에 매우 능통했다.[114] 히틀러의 대표적 직책 퓌러의 정식 명칭부터가 Führer und Reichskanzler(최고영도자 겸 제국 총리)이다.[115] 내각총리대신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낯선 건 둘째고, 내각총리대신은 일반인들에게 망국의 책임이 크다고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은 대한제국에서 썼고 과거 한반도를 지배해서 역시 다루기가 민감한 일본에서만 현재까지 쓰고 있기 때문에 '제국 총리'라는 표현이 히틀러의 존재 하나만으로 민감해진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116] 6월 4일, 원문은 You may have noticed that the tabloids were quick to suggest that I had made another 'gaffe' 'insulted' some deaf children at Cardiff recently. Needless to say, the story is largely invention. It so happens that my mother was quite seriously deaf and I have been Patron of the Royal National Institute of Deaf for ages, so it's hardly likely that I would do any such thing. Quite apart form that, I have no recollection of meeting a group of deaf children at the event for the Prince's Trust in the grounds of Cardiff Castle. There were young people milling all over the place and there may well have been a group of deaf children amongst them. What I do remember is that the noise from various stages and bands was quite deafening and I may well have said at some point something to the effect that if anyone were to sit too close to the loud speakers they would certainly be in danger of going deaf.[117] Prince Phillip outburst: Sir Elton John reveals shock moment he was confronted by Duke[118] The day Prince Phillip savagely told off neighbour Elton John[119] <인디펜던트>는 시론으로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언론이다. 구독자들도 공화주의자가 많은 편.[120] 정확히는 스코틀랜드전통의상 킬트에 그려진, 타탄이라는 다른 여러 선이 교차되는 스타일의 무늬이다.[121] 독일 황실러시아 황실처럼 영국 왕실과 격이 비슷하거나 더 높다고 볼 수도 있는 왕실도 있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이 아예 퇴위하거나 권력을 잃고 몰락했다. 이런 난리통 속에서도 영국 왕실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서 모두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대영제국 시절보다 국력은 낮아졌을지언정 현재 존재하는 왕실 중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122] Princess란 작위 앞에 The가 붙는다는 건 왕자의 딸(왕의 친손녀/종친)이 아닌 왕의 적녀라는 뜻이다. 왕자의 딸도 Princess 작위와 HRH(전하) 칭호는 가지고 있으나, 앞에 The를 붙이지 않고 부친의 영지 이름을 따서 'Princess of~ (~의 공녀)'라는 작위로 불린다. 이는 왕세자(Prince of Wales)의 딸도 마찬가지다. 사실 Princess니 뜻만 놓고 번안하자면 왕녀나 공주라고 봐야 맞겠지만, 한국에선 왕의 딸과 왕자의 딸이라는 서열 구분을 하기 위해 공식적인 작위는 공녀라고 번안한다. 이는 대공의 딸도 같다.(ex.헤센의 알릭스)[123] 망명생활을 하던 어린시절은 어디까지나 왕족, 그것도 고위왕족이라는 기준에서 가난하게 살았을 뿐이지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124] 이 학교는 필립의 모교인데, 매우 억압적인 교칙으로 유명한 학교다. 필립은 아들들을 모두 이곳에 보냈다. 찰스는 이 시절을 "지옥이자 수용소 생활"이라 회고했고, 자신의 아들들은 전부 이튼 칼리지로 진학시켰다.[125] 당장 필립 공 자신도 혼인 초기에 몰락한 집안과 부모의 사정 등으로 멸시를 받은 적이 있어 사실상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며느리에게 연민을 느끼는건 당연했을 것이다.[126] 현대의 일반인들 눈에는 둘을 따로 놓고 볼 수가 없지만 유럽 왕족 및 귀족들은 예로부터 정략결혼이 많아 배우자에게는 정치적인 의무를 다하고 연애는 내연녀와 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과거에는 그 부인에게 가짜 남편을 결혼시킨 뒤, 만약 왕이 자식을 낳을 경우 그 남편의 아들로 세례를 받게 하는 식으로. 로얄 미스트리스 부분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필립 공도 찰스에게 가정에 대한 의무는 지키라고 꾸짖은 것.[127] 다만 2002년 쯤에 다이애나의 심령 치료사라는 사람이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이후로는 필립 공이 "찰스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실이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그녀를 비판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주장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필립 공은 자신이 그 해당 편지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데, 심령치료사가 공개한 편지 양식과 서명이 모두 자신의 것과 다르다며 조작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또한 자신은 단 한번도 며느리에게 나쁜 말을 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있는게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다이애나의 최측근이나 가족도 아니고 심령 치료사라는 이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인데다 생전 다이애나와 인연도 없었다. 반면 필립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시아버지이고 국서 신분이다. 신분적으로나, 가정 내의 위치에서나 필립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128] 이 때문인지 해리 왕자가 훗날 왕실이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여 아내 메건을 압박했다고 폭로했을 때도, 조부모인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범인이 아니라고 별도의 증언을 했다.[129] 결국 성공회 교회의 반대와 내각의 반대, 그리고 법률상의 문제로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130] 당시엔 아직 공주였던 여왕이 공항에 도착하자 맞이하기 위해 나온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복장이나 훈장 등을 가지고 조롱을 하고, 이에 엘리자베스 2세가 당황하며 제지하는 모습이 나오며, 시즌4에서는 외국이 선물로 준 항아리에 그려져 있는 새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131] 다만 여태 있던 의혹들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해 극이 진행되다 보니 필립 공 본인은 이 드라마를 정말 싫어했고, 다이애나 스펜서가 등장하기 전까진 여왕 본인은 물론 왕족들도 더 크라운을 즐겨보던 것과 달리 대놓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 더 크라운의 제작자들을 고소하길 원했으며, 특히 누나 체칠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고 한다.#[132]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그냥 왕자였다.[133] 그래서인지 자신과 아내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출국을 담당하는 게슈타포 장교가 어린 필립에게 그리스인이 맞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134] 한편 할머니 올가가 러시아 황족이라(니콜라이 1세의 손녀) 러시아 혈통도 약간이나마 섞여있다.[135] 요르요스 1세의 아들로 필립 공의 큰아버지인 니콜라오스 왕자의 딸.[136] 특히 켄트 공작과 마리나 공주의 장녀인 켄트의 공녀 알렉산드라가 어머니를 쏙 빼닮은 상당한 미녀였다. 더군다나 마리나의 두 아들들 역시 미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손주들도 하나같이 훈남 훈녀.[137] 필립의 어머니인 앨리스의 외할머니.[138] 중세부터 근세의 유럽 왕가에서는 사촌간 혼인이 굉장히 흔했고 이후 4~5촌 정도의 가까운 친척간의 결혼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왕족은 가급적 왕족끼리만 결혼하는 오랜 전통상 20세기까지도 유럽 왕실에서 6~8촌간의 결혼은 종종 이루어졌다.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경우도 이런 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139] 슈탄데스헤어 가문.[140] Philipp Gottfried Alexander Prinz zu Hohenlohe-Langenburg (1970~)[141] 독일 제국의 마지막 재상이자 군주제 폐지 이후 바덴 대공가의 실질적인 초대 당주,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아들.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아내인 마리아 루이제가 필립과 테오도라의 조부 요르요스 1세의 여동생인 티라 공주의 딸이다. 바덴 대공가의 수장은 대공국 멸망 이후 바덴 변경백을 칭한다.[142] 헤센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장남[143] 실제는 임신하고 있던 태중의 아들까지 세 아들[144]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과는 다른 헤센-카셀 방백 가문이다. 물론 모계로는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지만 부계로 치면 16세기 이후 갈라진 먼 친척 뻘인데다가, 헤센 대공국의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이 단절되어 1968년 이후로는 헤센-카셀 가문의 수장이 헤센 가문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145] 첫째 큰어머니 조피빌헬름 2세의 조카. 잠시 핀란드 왕국의 왕으로 추대된 적이 있었던 가문 수장 프리드리히 카를의 5남이자, 그 다음 수장 필리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둘째 사위다)의 둘째 남동생이다.[146] 가문 수장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의 동생이며 훗날 그리스의 왕 파블로스의 왕비와 왕대비가 되는 프레데리카 공주(1917~1981)의 오빠. 참고로 빌헬름의 어머니는 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 루이제이니 전남편 크리스토프에게는 오촌 조카이다. 또한 소피아에게 형부가 되는(상기한 언니 테오도라의 남편) 바덴 변경백 배르톨드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다.[147] 필립 공의 외증조할머니 앨리스 모드 메리의 남아있는 여계 후손들은 1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와 3녀 이레네 공녀의 자녀들밖에 없었는데 이레네 공녀는 아들만 셋을 낳아 미토콘드리아 유전이 단절되었고, 빅토리아에겐 딸이 둘 있었으나 차녀 루이즈는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장녀 앨리스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4명의 딸은 모두 사망한 상태여서 마지막 남은 아들 필립 공이 미토콘드리아를 대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었다. 만약 필립 공마저 없었으면 필립 공의 조카이고 알렉산다르 1세의 차남 토미슬라브 왕자의 아내 마르가리타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만약 더 윗대에서 갈라진 친척 중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하는 혈족을 찾아본다면 알렉산드라 황후의 이종사촌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알폰소 13세의 자식들, 또 다른 이종사촌인 프로이센의 조피의 외손자 미하이 1세 등을 추가로 찾을 수 있다. 범위를 더욱 넓혀보면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왕 콘스탄티노스 2세도 동일한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하는 혈족이지만 이들은 미토콘드리아 DNA 계보로만 따지면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조모 빅토리아 여왕의 언니 라이닝겐의 페오도라의 후손들이라(물론 실제 촌수는 더 가깝다) 아주 먼 친척이다.[148] 니콜라이 2세의 경우에는 DNA를 대조해 볼 만한 친척이 마땅찮아서 (영국에 거주 중인 친척이 있었으나 해당 인물이 본인 일가족의 망명을 돕지 않은 영국에 대한 악감정을 이유로 DNA 검사를 거부했다) 사망한 다른 친척의 관을 열고 DNA를 채취해서 검사해야 했다. 사실 필립은 니콜라이 2세와도 부계조상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이 경우 공통조상이 16세기 인물인 프레데리크 1세이기 때문에(25촌 조카뻘, 다만 크리스티안 9세 기준으로는 5촌, 니콜라이 1세 기준으로는 7촌이다), 불일치로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덴마크 왕실이 난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신원 확인을 위해 두 사람의 Y염색체를 대조하기는 곤란했을 것이다.[149] 정말로 사촌 마리나의 집에서 엘리자베스와 필리포스는 만났다고한다.[150] 시즌 2 에피소드 9로 본래 편명은 "Paterfamilias", 국내 방송시 편명은 "왕자의 아버지"[151] 필립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생각해 보리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52] 필립 입장에서도 자신을 저렇게 숭배하니, 도저히 나쁜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15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뉴헤브리디스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식민통치를 받았다. 프랑스 대통령의 초상화 역시 같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통령은 임기직이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 사진으로 바뀌었을 테지만 영국 여왕 부군은 이혼하거나 군주제가 철폐되지 않는 한 종신직이니 사진이 계속 걸려 있어서 필립 공을 섬기게 된 듯.[154] 필리프 드골은 친아빠인 샤를 드골과 함께 영국 런던에서 망명정부자유프랑스를 이끌고 있었다.[155] 다른 정규 중파 라디오 채널들인 Radio 1, 2, 3, 5는 제때에 속보 전환이 이루어졌다. BBC Radio 2 속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