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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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타국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개입을 꺼리는 외교정책. 시대에 따라 고립주의의 스펙트럼은 꽤나 다양한데, 전근대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쇄국정책과 같이 모든 분야에서 철두철미하게 타국과 교류를 일절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고립주의의 의미가 다소 축소되어서 정치/군사적으로 자국의 이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 한하여 각종 국제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개입을 하지 않는 외교노선을 지칭한다. 즉 보호무역과는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2. 사례[편집]



2.1. 대한민국[편집]


역사적으로는 조선 시대 말기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이 가장 유명한 사례. 소수의 교류국을 제외하면 아예 외교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으며, 경제/문화적 교류까지 금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고립주의와는 그 양태가 무척 다르다.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 또한 6자회담에 참여하는 주요 교섭국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 외 국가에서 일어나는 분쟁 등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발언이나 개입을 잘 안하는 편이다. 전투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평화유지군으로 치안/구호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국회를 통해서 허울좋은 결의안이나 의결하는 정도에 그친다. 2010년대 들어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취업난으로 한국인들에게서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국내 유입 및 동남아 출신 여자들의 결혼 이민을 반기지 않는 정서를 가지는 등, 고립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있는데, 과거사 문제 때문에 제노포비아성 성향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2.2. 북한[편집]


현재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고립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곳이다. 다른 나라들은 과거에는 고립주의를 택했더라도 현대에는 폐기했거나 점점 개방적으로 가는 추세인데 반해 21세기인 지금도 고립주의를 넘어서 아예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국 자체도 엄격하게 제한될 뿐만 아니라 어찌어찌해서 북한에 들어간다고 해도 북한 일반인들과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고 오직 당국에서 허락한 곳만 다닐수 있으며 가이드를 빙자한 감시원이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외국인이라도 가차없이 억류하거나 노동교화형을 때린다. 게다가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것 뿐만 아니라 내부 주민들도 북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으며, 여행증제도로 주민의 왕래까지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이러니 외국에서는 북한을 가리켜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경이다.

2.3. 일본[편집]


헤이안 시대에 894년의 견당사를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와 일절 교류를 하지않고 국풍의 시대로 들어선다. 1271년 원나라의 일본원정으로 쇄국이 흔들렸고, 1401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요청으로 명과 국교가 성립되어, 500여년 간의 쇄국을 마지고 동아시아권에 재편입한다.

에도 막부 시절이었던 1641년부터 1853년까지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쇄국정책을 실시한 바가 있다. 물론 전통적인 교류국이었던 조선, 중국, 류큐 등지와는 간헐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데지마를 통해 서양인과도 접촉을 가지는 등[1] 철두철미하게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아니었다.[2] 물론 이후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에 의하여 강제 개항되며 쇄국정책은 종료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의 인식은 꽤나 고립주의적이지만, 정부 차원에선 1990년대 부터 '세계 진출', '적극적 평화주의' 등을 운운하며 미국을 따라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열심히 하며 세력 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

2.4. 중국[편집]


역대 왕조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변하기는 했지만, 가장 유명한 사례는 명나라. 초대황제였던 홍무제 때부터 아예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했을 정도.[3] 명나라 초기에는 환관 정화를 원정보내기도 했지만 정화의 원정 이후로는 나라의 문호를 걸어잠그고 고립주의를 취했다. 이후 청나라 역시도 큰 틀[4]에서는 명나라의 대외정책을 유지한다. 그리고 아편전쟁 이후 반 식민지화 크리

또한 전근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의 경험만을 가진 한국/일본과 달리, 중국은 현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를 외교노선으로 채택하기도 했는데 죽의 장막이 바로 그것. 죽의 장막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고립주의는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를 수립함과 동시에 채택됐으며,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며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후진타오 집권부터 유소작위, 대국굴기를 명분으로 고립주의 노선을 바꿨고, 시진핑 집권부터 고립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일대일로를 적극 추진하고있다.

중국 공산당의 인터넷 검열도 일종의 고립주의다.

2.5. 말레이시아[편집]


고립주의가 만연해 있다. 원인은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간의 갈등 때문이었는데, 본디 말레이인을 비롯한 부미푸트라는 오랫동안 말레이시아에 터를 잡고 살아 왔다. 그런데 영국령 시절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몰려오면서 갈등이 본격화되었고, 이들의 경제적 수준이 말레이인을 훨씬 압도했던지라, 말레이인들을 중심으로 반이민 정서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 때 말레이 민족주의 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결성되었고, 독립과 함께 집권하면서 부미푸트라 정책 등을 비롯한 말레이인 우대정책이 시행되었다. 당연히 중국인과 인도인들은 이를 인종차별로 규정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말레이인의 상황이 열악했기에 이들의 반격은 별다른 명분도 없는 꼴이었다.

2.6. 사우디아라비아[편집]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중 하나로 악명 높다. 아이러니한 것은 외국인이 인구의 20%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것.

일단 외국인이 관광을 올 수 없는 몇 안 되는 나라였다. 성지순례나 현지에 아는 지인이 있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락되었었다. 투자자들의 경우도 공항에서 비자를 받는 데만 2시간이나 걸리며, 나중에 일하더라도 무릎꿇고 긴장하며 일해야 하는 곳이다. 이 가운데 관광의 경우 2018년도부터 서서히 개방하는 모양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겉으로는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척이라도 하려고 킹 압둘라 금융지구 등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업무단지들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며 지금은 되려 외국인을 추방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는 소위 "사우디화"라고 불리는 정책으로, 외국인을 자국민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외국인을 교활하게 없애고 있다.

2.7. 영국[편집]


현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를 채택한 최초의 사례.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유럽 대륙 내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등 사이에서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한 유럽 내부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노선을 천명해왔다. 소위 말하는 영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 바로 그것. 하지만 18~19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경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영국이 고립주의를 파기하는 경우 역시 빈번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의 제국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프랑스 동맹의 주축으로 활동한 것.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영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크림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유럽 대륙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렇게 고립주의를 채택한 이면에는 19세기 절정을 자랑하던 자신들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도 밑바탕[5]으로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을 기점으로 영국의 국력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그레이트 게임이 지속됐고, 게다가 유럽에서 건함 경쟁이 보여주듯이 신생 독일 제국은 공공연하게 영국을 찍어누르고 세계 최강의 강대국으로 등극하겠다는 야심을 표출하였다. 이에 영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영예로운 고립에서 벗어났으며, 1904년에는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맺고 연이은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야욕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간의 상호의존성이 깊어진 탓에 영국의 고립주의는 그 색채가 많이 옅어졌다. 그렇지만 '우리 대영제국은 대륙과는 별개다'라는 마인드가 워낙 뿌리 깊은 탓인지 여전히 유럽 내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와중에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에게 했던 "대서양과 유럽 중에서 선택을 해야한다면 우리는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다."[6]라는 명언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전후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 공동체(EC)에도 오랜 기간 가입을 꺼리다가몇번은 되레 차이고1973년에야 가입했다.[7] EC에 가입한 이후에도 회의적인 태도는 여전해서, 마가렛 대처는 EC의 기능 확대에 대한 조소를 공공연히 표출하기도 했다.[8] 유로화를 도입한 이후에도 영국이 꿋꿋이 자신들의 파운드화를 고수하고 있는 것 역시 유명한 사례이다.

그마저도 2016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브렉시트라는 초대형 이슈를 국민투표에 부쳐 영국의 EU 탈퇴가 확정되었고, 브렉시트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당겨진 2019 총선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의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자, 2020년 1월 31일에 EU를 공식 탈퇴했다.

2.8. 미국[편집]


건국 이후 한 세기 넘게 고립주의를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노선으로 천명했던 역사가 있다. 다만 먼로 독트린 항목에서 나와있듯이 이는 국가적인 단위의 고립주의는 아니고 '아메리카 대륙은 우리 미국의 세력권이니 유럽은 신경꺼라. 대신에 우리도 유럽의 일에는 신경 안쓴다.'라는 방침이었다. 이후 1917년까지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일관적으로 채택하였으나,[9]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치머만 전보 사건을 겪으면서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면서 그 명맥이 중단된다.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우드로 윌슨국제연맹을 창설하였고, 미국은 고립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에서 국제연맹 가입이 부결되면서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도했으면서도 막상 가입은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 채로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한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도 미국 내에서는 유럽의 전쟁에 개입할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더 컸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의 참전을 이끈다. 2차대전의 승전 이후 미국의 외교노선은 180도 뒤집어져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변모하는데, 그 이유야 당연히 소련과 벌인 냉전 때문. 세계 어느 지역이건간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그리스 내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곳곳의 분쟁에 깊숙이 개입한다. 물론 이 와중에도 오랜 고립주의의 역사탓인지 애치슨 라인과 같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최근 수십년간 미국의 전반적인 외교노선은 활발한 개입주의였다. 때문에 항공모함 등 강력한 미국 해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반전여론과 전쟁피로로 아시아 지역에서 발을 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냉전이 자신들의 승리로 종결된 이후로는 이념적인 문제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활발히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걸프 전쟁.

이후 조지 W. 부시 재임 기간동안 이라크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신고립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이를 공약으로 내걸어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파리 기후 협약에서 단칼에 탈퇴하거나 무역 규제를 강화시키고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을 트레이드마크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신고립주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북한 핵 문제와 중국 내정 문제 등에 대해 국제적인 대응 공조를 주창하고 있는 걸 보면 완전한 고립주의는 아닌듯 싶어보인다.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10] 그리고 조 바이든이 트럼프의 재선을 막아 내고 대통령에 당선 되면서 신고립주의가 약화될 가능성이 생겼다.

2.8.1. 관련 문서[편집]




2.9. 스위스[편집]


중세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철저하게 외교적 중립 노선을 취하여 특정 국가와 동맹하지 않는 고립주의 정책을 썼다. 스위스는 유럽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연합에는 가입을 거부하고 있고, 당연히 유로화도 도입하지 않고 여전히 스위스 프랑을 쓰고 있다.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참가하고 있는 유엔에도 가입을 막는 요소가 없는데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가 2002년에야 가입하고, 솅겐조약도 2008년에 가입했다.


2.10. 헝가리[편집]


서서히 쇄국적인 길을 걷고 있다. 오르반 빅토르가 외국인에 대해서 상당히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일단 난민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인이 체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3. 코로나19로 인한 재조명[편집]


각 국가별로 겉으로는 세계화의 흐름에 따른 인류화합에 동조하는 듯했지만 특정 인종/국가에 대한 혐오적인 태도가 국가의 역사나 인식에 따라 존재해왔고 그러한 혐오와는 또 별개로 유럽은 유럽 난민 사태,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한국은 일본 불매운동 등 여러 국가에서 외국인에 대한 혐오적인 태도(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의 일부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사회의 큰 사건들로 나타났으나 세계화라는 큰 흐름 속에 이것이 고립주의라는 형태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세계의 물리적인 교류가 실제로 중단되었고 이후에도 종식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가 증가한데다 이전의 위와 같은 사건이 겹치며 고립주의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주류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코로나19 이후에 통신, 교류 등은 관련된 채팅,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체할 가능성이 높아지며(이전에도 화상회의 등을 시행하는 등 물리적 거리에 무관한 교류방법이 있었지만 이것이 대중화되며) 어떤 형식으로든 물리적인 거리의 접근성은 사회적 우선순위가 밀려나게 되고 장기적으로 전염병에 대한 예측들에 따라 불안정성에 의해 자급자족의 경제로 회귀해야만 하는 필요성, 자국 국민도 챙기기 바빠질 경제학적으로도 전례를 찾기 힘든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는 전망 등이 세계화에 오르는 걸 오히려 꺼리게 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전염병 해결에 대해 각 국가에서 세계적인 협력을 구하는 등 세계화가 작용하는 영향력이 입증이 되고 있지만, 큰 틀에서 종식이 이루어진 후에도 백신 연구가 완료되고 환자 치료의 안정적인 시스템이 자리잡히는 데에는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는 만큼 아무리 적어도 2~3년이라는 기간을 무역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로 운영해야 하게 생겼다. 무역에 대해 폐쇄적이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듯 실제로 근현대적인 고립주의와 관련은 적지만, 외교라는 것은 정치적인 요소 외에도 국가간의 경제적인 교류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무역이 폐쇄적으로 바뀌면 이전처럼 국가적 관계를 개선하는 등의 외교적인 역량의 필요성 자체가 약화되어버리는 부분이 있다.

개인의 시점에서 봐도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각 국가에 대해 혐오적인 태도를 가져왔지만 사회적인 요인이 없어 억눌려오던 일부 인종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혐오적인 태도를 거리낌없이 드러내게 되면서 외국인 입장에서도, 자국민 입장에서도 외국으로 나가는 데에 심리적인 장벽이 설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으며, 이중에서도 특히 중국은 코로나19가 가장 먼저 발생한 국가임에도 관련 조치에 미흡하고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등의 지적에 앞으로 중국 자체가 '혐오되어 마땅한 국가'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즉, 코로나 이후 시대에서 개인의 국적, 인종이라는 것이 만드는 앙금이 스노우볼처럼 굴러 개인의 입장에서도 딱히 고립주의를 반대하고 세계화의 지속을 지지해야 할 기반이 없어진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코로나19 이후로 각 국가에서 '리쇼어링'(여러 세제 혜택 등을 통해 해외에 나간 기업들을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일) 정책의 비중이 증가했다고 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RCEP를 새로이 체결하는 등의 무역협정 시도가 있긴 하지만 다루는 항목이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개방성이 낮다. 즉, 아직까지 기존의 경제 체제 상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고립주의를 타개하는 변화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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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년에 한번씩 쇼군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접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통역사, 게이샤를 제외한)일반인들이야 네덜란드 상인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2] 반대로 말하면 데지마 이외에 장소에서 서양인과 접촉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얄짤없이 사형이다. 하지만 페리 내항 이전 사쓰마번에서 중국과 서양 상인과의 밀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돈으로 번주가 서양식 문물과 공장을 지어 유신의 기초를 다졌다.[3] 아이러니하지만 해금정책 때문에 오히려 왜구들은 견제를 덜 받게 됐고, 그 덕에 더더욱 날뛰게 된다(...).[4] 한국에서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해 청 시기 베이징에서 활동한 선교사들 때문인지 청나라가 굉장히 활발히 대외교역을 한 것 같은 인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명나라의 그것과 큰 틀에서 차이는 없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5] 즉, '혹시라도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협하는 국가가 등장한다면 언제라도 개입해서 박살내주겠다'라는 마인드.[6] 미국과 프랑스 중에 선택해야 되면 영국은 미국을 편 들 것이다라는 의미.[7] 드골은 영국을 "미국이 유럽에 보낸 트로이의 목마"라 불렀고,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도 영국을 배제시켰다. 결국 영국은 드골의 퇴임 이후인 1973년에야 EEC에 합류했다. [8]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보수당의 내분으로 대처는 실각하고 만다. 물론 대처가 실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인두세 도입이었지만, EC 기능 확대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출발점.[9] 이때까지 미국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이 기간동안 미국은 유럽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서부로 진출하면서 멕시코와 전쟁을 치렀고 이후 하와이를 흡수했으며 더 나아가 일본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이 기간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하는지는 개개인이 판단하자. 제국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다.[10] 주한미군 주둔과 북한 배후의 중국 견제 목적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