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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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하노버 왕조 제4대 국왕
조지 4세
George IV


파일:George_IV_1821_color.jpg

출생
1762년 8월 12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사망
1830년 6월 26일 (향년 68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버크셔 윈저 성
묘소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하노버 국왕
1820년 1월 29일 ~ 1830년 6월 26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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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하노버 가문
이름
조지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George Augustus Frederick)
아버지
조지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형제자매
프레더릭, 윌리엄 4세, 샬럿, 에드워드 ,어거스타,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옥타비우스, 알프레드, 아멜리아
배우자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1795년 결혼 / 1821년 사망)[1]
자녀
샬럿
종교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4. 여담



1. 개요[편집]


영국하노버 왕국의 군주로 빅토리아 여왕의 첫째 큰아버지이다. 1762년 조지 3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가 그에게는 고조부가 된다.


2. 생애[편집]


왕세자 시절부터 이미 품행이 나빴다. 머리가 좋고 재치 있는 성격이었지만 방탕한 성격이 문제였다. 18세부터 이미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낭비벽이 심해서 경마 등에 가명으로 나가 돈을 탕진하여 왕실 비용의 절반 수준인 빚을 졌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왕국부르봉 왕가(루이 18세)를 후원했다. 거기에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하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적극 개입하고 싶어 했다. 이러다보니 아버지가 자주 질책했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않았다.

1811년부터 아버지 조지 3세가 정신병 증세를 나타내어 더이상 국정을 이끌수 없게 되자 섭정을 맡다가 1820년에 즉위했다. 그래서 별명이 섭정 왕세자(The Prince Regent). 제인 오스틴 소설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리젠시(섭정) 시대'가 조지 4세의 시대다.

애인 마리아 피츠허버트와 비밀리에 결혼했으나 그녀가 과부가톨릭 교도였기에 인정받지 못했고[1], 아버지의 협박으로 무효화했으며 의회의 중재로 본인이 진 빚 탕감을 조건으로 고종사촌인 캐롤라인[2]과 결혼한다.

애초에 애정이 없던 결혼이고 조건부로 이루어진 혼인인 만큼 조지 4세와 캐롤라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삐걱거렸다. 조지 4세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사랑하던 애인과 강제로 헤어진 슬픔에 브랜디를 연신 마셔댔고 캐롤라인은 조지 4세가 뚱뚱하다고 조롱했다고 한다.[3] 조지 4세가 아내를 병적으로 싫어해서 섹스를 첫날밤 이후로는 안 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니는 파탄난 결혼 생활 와중에 기적적으로 외동딸 샬럿이 태어났다. 샬럿은 비난과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많은 영국인이 동정하고 사랑하는 공주였다. 그녀가 사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차기 왕위 계승자 빅토리아의 이름을 샬럿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4] 샬럿이 태어난 후로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급기야 캐롤라인은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에서 쫓겨나 유럽 대륙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수많은 추문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인은 대중들에게서 동정을 받고 있었는데, 조지 4세의 사생활도 만만치 않게 막장이었던 데다 그가 아내를 딸 샬럿과 만나지도 못 하게 하는 것도 한 몫 했다. 심지어 1817년 샬럿이 출산 중 사망한 것도 알리지 않아 캐롤라인은 사위인 레오폴트[5]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조지 4세가 정식으로 즉위하자 캐롤라인은 왕비로서 대관을 받기 위해 귀국했으나 근위병들의 저지로 대관식에 참석하지도 못 했다.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 상원은 간통을 이유로 캐롤라인에게서 왕비 자격을 박탈하는 법안을 발안했으나[6] 대중들의 반발에 밀려 결국 폐기, 캐롤라인은 영국 왕비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821년 사망했다.

조지 4세가 얼마나 아내를 증오했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하가 기뻐하며 "폐하의 최대의 적이 죽었습니다!" 하고 알렸는데 조지 4세는 "오, 그럼 그 여자가 죽었단 말인가!" 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그 여자란 자신의 아내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을 말한다. 캐롤라인은 나폴레옹이 죽은 지 3달 뒤에 죽어서 결국 조지 4세의 소망대로 되긴 되었다.

유일한 적녀였던 샬럿 공주가 먼저 사망한 탓에 1830년 그가 죽자 왕위는 동생인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이 물려받았다. 정실인 캐롤라인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으니 조지 4세의 남은 직계 후손들은 모두 사생아인데다 이마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위기간 내내 버킹엄 궁전 보다는 윈저 성을 좋아하여 윈저 성에 거주했다. 권력욕이 강한 터라 원저 성에서 사실상 은둔 생활을 했지만 정치에 자주 개입했고 국왕으로서의 업무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열심히 한 것은 아니며 정치도 잘 하지 않다 보니 이를 두고 수상들과 심하게 갈등하기도 했다.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기 시작했다.[7] 특히 병석에 않아눕는일이 많아졌고 업무를 더는 볼 수가 없어 왕위를 물려받을 동생이 대신하게 된다. 결국 임종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 조지 4세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유언장을 쓰게 했고 곁에 있던 대주교에게 그동안 방탕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는 말을 남기며 고해성사를 한다. 그리하여 1830년 6월 26일 오후 3시경에 조지 4세는 6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의사들이 부검했을때 사인이 위혈관 파열로 인한 상부 위장관 파열로 사망했고 그의 방광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장례식이 치러진다음 세인트 조지 성당에 묻히게 된다.

품행이 나쁜데다가 아내를 심하게 박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터라 생애 내내 평판이 나빴으며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은 왕이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조지 4세
(George IV)
조지 3세
(George III)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조지 2세
(George II)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안할트체르프스트의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Magdalena Augusta of Anhalt-Zerbst)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조피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Adolphus Frederick II, Duke of Mecklenburg-Strelitz)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에밀리 공녀
(Princess Christiane Emili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Ernest Frederick I, Duke of Saxe-Hildburghausen)
에어바흐에어바흐의 조피아 알베르티네 여백작
(Countess Sophia Albertine of Erbach-Erbach)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웨일스의 공녀 샬럿
(Princess Charlotte of Wales)
1796년 1월 7일
1817년 11월 6일
레오폴드 1세


4. 여담[편집]


  • 섭정왕세자 시절인 1811년, 처음으로 진수식의 진수선 절단 의식을 여성이 도맡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해군이 세계해군의 표준이 되면서 이런 의식은 국가를 불문하고 퍼져나가 일본을 제외한 세계공통의식이 된다.

  • 스코틀랜드를 방문할 때 킬트를 입기도 했다. 당시 동행했던 월터 스콧의 아이디어였다고. 오늘날 영국 왕실에서 스코틀랜드에 갈 때면 킬트를 입는 전통의 시작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eorge_IV._of_the_United_Kingdom.jpg
1822년에 그린 초상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righton_Royal_Pavilion.jpg


  • 방탕한 사생활을 영유하며 여러 여인과 오입질을 하고 다녔는데, 그가 찝적거리던 대상에는 당대 영국 최고의 미녀이자 호레이쇼 넬슨의 정부인 엠마 해밀턴도 있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넬슨과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던 엠마의 남편 해밀턴 경이 조지 4세에 대해 화를 내는 넬슨에게 '엠마는 여전히 넬슨을 사랑한다'고 중재를 해줘야 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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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조지 3세가 크게 화를 내며 아들의 빚을 갚아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왕세자궁에서도 쫓아내려 했을 정도였다.[2] 굳이 자세히 설명하면 조지는 벨프 가문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이쪽은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베버른).[3] 실제로 조지 4세는 대식가에다가 애주가인터라 심각한 비만이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체중이 111kg이나 되며 옷도 무려 50인치(130cm)를 만들 정도였다.[4] 샬럿과 빅토리아는 사촌 관계.[5] 후에 벨기에의 왕이 된다.[6] 이때 캐롤라인은 자기가 간통을 한 번 한 적이 있긴 한데 상대는 마리아 피츠허버트 부인의 남편, 즉, 조지 4세라는 농담을 던졌다.[7] 통풍이 심해져 손과 팔을 쓸수가 없었고 백내장을 심하게 않아 수술까지 받았지만 한쪽눈의 시력을 상실한다. 그러다보니 당시 진정제로 쓰이던 아편과 라우다늄을 항상 달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