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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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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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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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펠럼홀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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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왓슨 웬트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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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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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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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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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뱅크스 젱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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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존 로빈슨
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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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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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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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웰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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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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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볼드윈
램지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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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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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nthony_Eden_(retouched).jpg

본명
로버트 앤서니 이든
Robert Anthony Eden
출생
1897년 6월 12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더럼주 웨스트 오클랜드
사망
1977년 1월 14일 (향년 79세)
영국 잉글랜드 윌트셔주 솔즈베리
재임기간
제64대 총리
1955년 4월 7일 ~ 1957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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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1대 에이번 백작[1]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학력
샌드로이드 스쿨 (졸업) (-1910년)
이튼 칼리지 (졸업) (1910-1914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2]
(페르시아어학, 아랍어학 / B.A.) (-1922년)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재임 시기
3. 선거이력
4. 이야기거리
5.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영국 제64대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외무장관을 지내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전후였던 1955년부터 1957년 사이의 2년 동안에는 영국 총리직을 지냈다. 외무장관으로의 명성과 달리 총리로서의 평가는 0점에 가까운 인물. 아닌 게 아니라 영국 역사학자들이 뽑은 20세기 최악의 영국 총리였다. 영국 언론들도 역대 총리 순위를 매기면 항상 최하위를 차지한다. 네빌 체임벌린은 그나마 대공황에서 영국을 살려냈기에 훨씬 나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지만, 앤서니 이든은 안정적으로(...) 최하위를 마크하고 있다. #


2. 생애[편집]


1897년 유서깊은 젠트리 가문에서 태어났다.[1] 부잣집 도련님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그 역시 정해진 명문코스를 밟아나갔고 이튼 칼리지에 진학한다. 이튼에 재학중이었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든 역시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걸맞게 왕립근위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벨기에 전선에서 세운 전공을 바탕으로 십자훈장을 수여받는 한편 소령으로 진급한다.[2][3]

전쟁 말기부터 이든은 본격적으로 정계 진출을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1918년 영국에서 시행된 총선은 아직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실시됐기 때문에 이든은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고, 종전 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로 진학하여 동양어를 전공한다. 옥스퍼드 졸업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22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31년에는 램지 맥도널드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가 부상하더니, 급기야 정권을 장악하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수립하면서 유럽에서는 점점 전운이 짙어지던 때였고, 외무장관으로 이든의 책임은 막중했다. 외무장관 재임 초기 이든은 대부분의 1차대전 참전자들이 그러했듯이 반전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했고, 국제연맹을 통한 평화 유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거치면서 파시스트에 대한 이든의 의구심은 점차 커져만 갔고, 결국 1938년 히틀러를 둘러싼 네빌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정책에 반발하여 이든은 외무장관직을 사퇴한다.[4]

이든이 외무장관직을 사퇴한 지 1년 후 과연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1차대전 참전용사였던 이든은 소령의 신분으로 군대에 복귀한다. 예비군 소령으로 동원 대기중이었던 상황에서 1940년 전시내각을 수립한 윈스턴 처칠이 이든을 전쟁장관으로 선임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내각 수립 시점인 5월부터 시작된 정부 위기에서 이든은 처칠의 편에 서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고,[5]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성공하고 처칠이 무사히 자리를 유지하면서 베팅은 성공으로 끝났다.

위기가 마무리된 뒤 처칠이 대독 화평파였던 할리팩스 자작을 경질하고 이든을 다시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이후 20년의 걸친 두 사람 사이의 정치적 이인삼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훗날 처칠은 회고록에서 '이든이 1938년 외무장관직에서 사퇴하던 날 너무 기뻐서 잠을 못잤다'(물론 짤려서 기쁜게 아니라 정치적 동지를 얻어서 기뻤다는 것이다)는 문장을 남겨놓았지만 사학자들의 반응은 '처칠 양반, 또 오바섞인 기록 남기셨네' 정도(...). 1938년 시점에서 처칠과 이든은 대독 정책을 제외하면 정치적으로 공통분모가 없는 남남 사이였다.

중요한 외교사안은 총리였던 처칠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이오시프 스탈린과 직접 회담을 통하여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든의 권한이 그리 막강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든에 대한 처칠의 신뢰는 굳건했고, 이든 역시 처칠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해냈다. 소련에 밀사로 파견되어 무기대여법, 제2전선과 같은 전쟁 수행 문제의 막후 협상을 행했던 것도 이든이었고 늘 으르렁거렸던 샤를 드골과 처칠의 관계를 중재했던 것도 이든이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로도 이든은 처칠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였고 1951년 처칠이 세번째로 총리직에 올랐을 때는 외무장관을 맡음과 동시에 부총리까지 역임하게 된다. 1955년 4월 처칠이 수상직을 사임하자 마침내 이든이 영국의 총리에 오르게 된다.


2.1. 총리 재임 시기[편집]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시행된 선거에서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을 40석의 의석 차이로 여유있게 제쳐버렸고, 그렇게 이든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든 내각이 채택한 긴축정책은 영국인들의 불만을 샀고,[6] 결정적으로 물품세를 20%나 한 번에 인상해버린 것이 불만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흔들리던 이든 내각에게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중동 문제였다.

1954년 2월 이집트에서 소장파 장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오른다. 대통령에 오른 가말 나세르는 당시 이집트의 적대국이었던 이스라엘과의 군비경쟁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 역시 소련이 중동으로 세력을 뻗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세르를 우군으로 삼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나세르는 미국을 버리고 동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심기가 불편해진 미국은 이집트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해 버린다. 차관 제공 거부에 격분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해버렸다. 당시 영국은 수출입의 30% 가량을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여 진행하고 있었고 수에즈 운하가 막힌다면 이는 영국에게 극대한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결국 이든 내각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력관계를 맺고 이집트를 공격하는 초강경 대응을 택한다. 자세한 사항은 수에즈 전쟁 항목 참고.

이집트 공격 자체는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제국주의 시기에나 자행되던 내정간섭이 제국주의가 끝나고도 이루어져 영국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급기야 영국의 우방 미국조차도 영국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이 일대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심지어 이든 본인의 건강상태도 최악이었다. 1953년 담석 제거수술 도중 담관에 손상이 갔는데, 그 후유증 때문에 툭하면 감염증, 담도폐쇄, 간부전에 시달렸던 것. 1956년에는 담관염으로 인해 열이 41도까지 치솟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증상 완화를 위해 의료진은 이든에게 벤제드린을 처방했다. 그것 때문에 이든은 극심한 불면증과 감정기복 등에 시달려야 했고, 다우닝 가로 이사온 초기에는 관저 앞을 지나는 오토바이 소리에도 잠을 설쳐대곤 했을 정도였다. 즉, 수에즈 전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서 총리가 질병과 약의 부작용 때문에 끙끙대며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이다.

이런 국제적인 망신으로 이든의 정치적 위신은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됐고, 결국 1957년 이든은 반강제적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이든으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보수당 중진들이 사퇴 압박을 장난아니게 넣었다. 이든이 총리직에서 사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행한 연설은 "당신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를 버렸습니다." 이든의 후임 총리로는 해럴드 맥밀런이 지명된다.

총리직 사퇴 이후 회고록 저술과 여행 등에 전념하던 이든은 197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3.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22
영국 하원의원 선거
스페니무어


7,567 (27.6%)
낙선(2위)

1924
워윅-리밍턴
16,337 (51.8%)
당선(1위)
초선
1924
19,575 (60.2%)
재선
1929
23,045 (47.6%)
3선
1931
38,584 (80.6%)
4선
1935
35,746 (76.6%)
5선
1945
37,110 (61.3%)
6선
1950
27,353 (59.8%)
7선
1951
28,282 (60.5%)
8선
1955
29,979 (64.5%)
9선
1957
24,948 (52.3%)
10선


4. 이야기거리[편집]


  • 낯을 무척 가리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대중 연설을 싫어했던 건 당연하고 심지어 내각 각료들과 만나는 것도 부끄러워했고, 내각 회의에 참가한 횟수보다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들과의 회의에 더 많이 참석했을 정도.

  • 셰익스피어 덕후였다고 한다. 웬만한 전문가보다도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을 정도. 상술한 낯 가리는 성격도 대화 떡밥이 '셰익스피어'일 경우에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한다.

  •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사이먼 개스코인 이든은 공군 장교(소위)로 62 비행대대에서 C-47의 항법사로 복무하던 도중 1945년 6월 종전을 코앞에 두고 버마 전선에서 실종됐다. 영문위키에 따르면 정확히는 그의 비행기가 6월 23일에 실종되어 실종 처리됐다가 7월 16일에 추락한 비행기가 발견되어 전사로 처리되었다. 아들과 각별한 사이였던 앤서니 이든은 이 사실에 큰 충격을 받지만 담담히 외무장관으로의 책무를 다했다. 반면 이든의 아내는 아들의 실종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고 만다. 차남인 로버트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막내 아들이었던 니콜라스 이든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았지만 1984년 에이즈로 사망하며 계승자가 없었기에[7] 에이번 백작위는 2대 만에 단절되고 만다. 한편 이든은 부인과 이혼하고 비티 백작[8]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이쪽도 이혼한다. 정작 이든은 윈스턴 처칠조카[9]와 1952년에 재혼한다.

  •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놀림받은 적이 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가 국제연맹에서 나서는 것을 영국이 뜯어말렸을 때의 상황인데, 무솔리니는 이든을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멍청이'라고 비웃었다. 반면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든을 '세기의 거물'이라고 대단히 호평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두 인물의 이후 삶을 보면 위의 인물평은 자신들에게 걸맞는 평가가 되었다.[10][11]

  • 외국어의 귀재였다고 한다. 외교관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불어[12] 기본 탑재였고 독일어, 중국어, 심지어는 페르시아어까지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것도 단순히 할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네이티브 스피커급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 저우언라이와 회담할 때 통역관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을 정도지만 외교 예절상 통역관을 대동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면모가 더 크라운에서도 드러나 자신의 아랍어 실력이 형편없다고 겸손을 떨지만 이집트를 방문해서 아랍어로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듣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이든이 아랍어를 너무 잘한다고 오히려 불쾌해한다.

  • 재임 기간 중 프랑스의 기 몰레 전 총리가 프랑스영국 양국의 합병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 기밀문서를 인용한 BBC의 보도에 따르면 모레 전 총리는 지난 1956년 9월 10일 런던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국가원수로 양국을 통일하는 방안을 타진했었다고 한다. 프랑스, 1950년대 영국에 국가합병 제안 프랑스는 이 시기 실지로 영연방 덕을 좀 보려고 했던게 있는데, 그런 발상으로서의 여왕 옹립 떡밥이라고 보면 된다.

  • 2차 대전 와중에 장관직을 지낸 인물 중 가장 최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라는 떡밥이 돌지만 서방연합국만을 생각한 오류로, 당장 미영소 3국 연합국의 전쟁지휘를 조율할 당시 이든의 카운터파트인 소브나르콤 제1부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는 1986년까지 살았고, 소브나르콤 부의장 겸 철도인민위원 라자르 카가노비치1991년[13]까지, 중화민국 군정부장 허잉친은 1987년까지 살았고 나치 독일에서도 대통령을 맡은 되니츠가 1980년까지,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1981년까지 살았다. 이런 식으로 2차 대전 트리비아를 논하면서 서방연합국만을 계산에 넣는 일은 많은데 중화민국 정부주석 겸 행정원장으로 2차 대전 당시 국가원수로 참전했던 장제스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쯤 되면 샤를 드골 외에 현역에 있는 2차 대전 당시 지도자는 없다는 말이 나오곤 했다.[14]

5. 매체에서[편집]


  •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새뮤얼 웨스트가 분했다.

  • 더 크라운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제레미 노섬이 분했다. 윈스턴 처칠 재임기에는 그에게 은퇴를 종용하며 후임 총리를 노리지만[15], 정작 본인도 보수당 내부의 사퇴 압박으로 물러난다. 명예를 지키며 은퇴한 처칠과는 달리 병에 시달리며 수에즈 전쟁 벌였다가 해럴드 맥밀런에게 배신당한 끝에 초라한 몰골로 물러나야 했다. 기존에는 단순히 앤서니 이든의 무능함만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드라마상에서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상황을 묘사해주어 무능하게 보인다기보다 안타까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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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로 앞전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도 공작의 친손자이자 젠트리 신분이였다.[2] 당시 영국 육군 전체에서 최연소 소령이었다고 한다. 전공이 상당했던 모양. 근데 정작 본인은 1차대전 시기 자신의 전공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3] 여담이지만 전쟁말기였던 2차 이프르 전투에서 부대 배치를 따져보면 이든의 부대와 아돌프 히틀러의 부대가 정면으로 대치중이었다. 두 사람이 전쟁터에서 맞닥뜨렸을 가능성도 꽤 크다고 한다. 흠좀무.[4] 다만 오늘날에는 학계 일부에서 이든이 대독일 유화정책에 반발하여 외무장관직을 사퇴한 게 아니라 체임벌린이 독단적으로 외교정책을 펼쳐서 이에 삐쳐서 사퇴한 것이라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5] 이 시점까지만 해도 아직 독일과 평화협상에 나서야한다는 유화파의 수가 적지 않았다. 네덜란드, 벨기에에 이어 믿었던 프랑스까지 무너질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영국 원정군이 됭케르크에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6] 애틀리 내각 이후로 복지국가를 선언한 영국은 이 시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산업과 기구가 국유화됐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펼치니 경제가 얼어붙을 수 밖에...[7] 동성애자였고 독신으로 살았다.[8] 유틀란트 해전의 지휘관 비티 제독의 아들. 이쪽도 3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데 두번째 이혼이 이든의 작품으로 결혼한지 4년만에 이혼했다.[9] Clarissa Eden(1920 ~ 2021). 이든과 결혼 전의 이름은 Anne Clarissa Spencer-Churchill이며 2021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무솔리니는 당장 저 에티오피아전에서도 개전 초기 예상 외로 고전하자 제네바 의정서를 어기고 독가스까지 썼고, 적잖은 소모 끝에 이겼다.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탈리아군이 사실 비밀 연합군 아니냐?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졸전을 펼치고 해임, 유폐됐다가 끝내 분노한 국민들에 의해 사살당해 거꾸로 내걸렸다. 현대에는 분명 주요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함께 밈 소재로까지 전락했다.[11] 한편 흐루쇼프는 실각 후 기록이 지워지며 조촐한 연금 생활을 지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의 평은 대체로 좋은 편이며 러시아에서조차 의견 대립이 비슷한 편이다. 스탈린 사후 그의 자취를 지워나가며 공포 정치를 해소했고, 실각 전에는 정치 구조 개혁을 통해 인민들의 참여까지 계획하기도 했다. 비록 이게 당 내 쿠테타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그 밖에도 스푸트니크 쇼크차르 봄바로 미국에게 동구권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사회 분위기를 개방하고 냉전을 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12] 지금도 프랑스어는 UN 공식 언어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언어이지만, 이든이 활동한 20세기 초중반 유럽 외교가에서는 특히 더 중요한 국제 언어였다.[13] 소련 해체 몇 달 전에 죽었다.[14] 대표적으로 A. J. P. 테일러의 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참조.[15]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는 처칠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로 그려지기 때문에 두 작품을 이어서 보면 정치판의 무상함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잘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