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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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는 시루가 아니라 솥이오. 솥에서 산 사람이란 말이오.[2]
소태산 평전
원불교의 창시자이자 대종사. 호는 소태산이다.
2. 생애[편집]
원불교에서는 대종사의 일생을 10가지 장면(십상)으로 나누어 정리하는데 그 내용 대략은 아래와 같다.
2.1. 어린 시절[편집]
1891년 오늘날의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태어났으며, 특별한 탄생설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가난한 마을의 흔한 평민 출신.
어린 시절에 조금 특이한 쪽으로 비범하기는 했다. 10살 때 서당 훈장이 "나는 담력이 강해서 하늘이 무너져도 안 놀란다."라고 허세를 부리자 "내가 놀라게 해드리겠다."라고 장담하더니 훈장 아들에게 불장난을 가르쳐서 마당 솔잎더미에 불을 붙였다. 훈장이 옷을 오줌통에 적셔가며 투혼을 발휘한 끝에 별 피해 없이 불길을 잡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서당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실제로 한문을 공부한 기간이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어른이 되어 경전을 집필할 때에도 제자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4살 때 "동학군이 쳐들어온다."하고 거짓으로 소리 질러서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2.2. 구도 과정[편집]
7살 즈음에 '하늘은 얼마나 높을까', '바람과 구름은 어디서 왔을까' 등 자연현상에 의문을 품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를 대종사 구도생활의 시초로 본다. 9살, 10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른 의문들이 이어지고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고 한다.[3]
그 시절 그 시골에서 꼬마아이가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11살 즈음에는 친척들이 조상에게 제사하기 전에 산신에게 먼저 제사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산신이 크게 신령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신이 지금껏 궁금한 점을 산신을 만나 물어보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 매일 동네 뒷산에 올라 5년을 산신에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산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는 16살 때 고대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도사를 만나서 소원을 이루는 것을 보고 존재 여부도 알 수 없는 산신 대신 도사를 찾아다니기로 했다. 그 후 길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이나 걸인이 보이면 혹시나 도사인가 싶어서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어디에 비범한 인물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찾아가서 같이 지내기도 하며 그렇게 6년 정도를 도사를 찾아 다녔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20살이 되던 191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22살 때 부터는 도사를 만날 생각도 점차 접게되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생각에 잠기고 근심에 가득차게 되었다. 이후 혼자서 수행을 계속 하였으나 25세부터는 말해도 말하는 줄 모르고 먹어도 먹는 줄 몰랐다. 몸은 쇠약해져서 온 몸에 종기가 나고 밥도 제대로 못먹는 등 거의 폐인처럼 지내서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도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던 1916년 음력 3월 26일(양력 4월 28일) 새벽, 조용히 묵상하던 중 큰 깨달음을 얻으며 그 동안의 의심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며 기운을 차렸다. 원불교에서 '원불교 열린날'이자 '우리 모두의 공동생일'로 경축하는 대각개교절이 바로 이 날이다.
2.3. 석가모니 연원[편집]
세계의 모든 종교도 그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나, 교문을 별립하여 오랫동안 제도와 방편을 달리하여 온 만큼 교파들 사이에 서로 융통을 보지 못한 일이 없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다 모든 종교와 종파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는 소치라 이 어찌 제불제성의 본의시리요.
과거의 불교는 그 제도가 출세간(出世間)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하여 조직이 되었는지라,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므로, 누구나 불교의 참다운 신자가 되기로 하면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 까지라도 불고하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되고 보면 아무리 불법이 좋다 할지라도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이 다 불은(佛恩)을 입기 어려울지라, 이 어찌 원만한 대도라 하리요.
정전, 교법의 총설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이웃에게 부탁하여 불교와 동학, 유교, 도교, 기독교의 경전들을 구해서 열람하였는데 그 후 "내가 깨달은 바는 옛 성인들이 먼저 깨달았구나"라고 하면서 그 중에서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제일이며 석가모니는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였다.
그리고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 본다면 모든 일이 은연 중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라고 하며 불법을 주체로 삼아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법을 바탕으로 새 종교를 건설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원불교는 그래서 불교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4]
원불교의 '원'은 진리를, '불'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불교와 같은 '불'자를 쓰지만, 진리를 깨닫는 종교라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연원을 대고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불법이라는 훌륭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법을 공부하려면 세상 일을 모두 그만 두고 산에 들어가야만 했고, 승려가 아닌 불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돈을 시주하고 불상 앞에 기도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기존에 어렵고 세상과 동떨어진 듯 보이는 불법을 생활 속에서 쉽게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원불교라고 보면 된다.
2.4. 원불교 창시[편집]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 위주로 40명 정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5] 이들 중 상당수는 단순 허영심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으므로 대종사는 몇개월 후 그 중에서 신실한 사람 8명을 선발하여 첫 제자로 삼았다.
불법의 생활화를 표방하는 종교답게, 대종사와 제자들이 맨 처음 모여서 한 일은 경제적 자립기반을 갖추는 것이었다. 원불교라는 명칭은 대종사의 사후에 정해진 이름이고 최초의 이름은 '저축조합'이었다. 대종사는 저축조합을 창설한 후 '우리가 앞으로 세상을 위해서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는 공부할 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허례허식 폐지, 금연, 금주를 하여 그 남은 돈을 저축하게 하였다.
그렇게 모은 돈과 대종사의 사재를 처분한 돈, 이웃 마을 부자에게 빌린 돈을 합쳐서 숯을 샀다. 이때가 1917년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숯 가격이 폭등하여 불과 1여년만에 큰 이윤을 남겼다.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큰 공사를 벌이는데, 바닷물을 둑으로 막아 물을 퍼내고 논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하려고 생각해도 보통 스케일이 아닌 일인데, 시골 촌사람 9명이서 일을 벌렸으니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미쳤다'라는 것이었다. 그 간척사업의 결과가 정관평이다.
공사가 끝날 때쯤 경북 성주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송도군(정산 송규 종사)이 9번째 제자로 합류한다. 이렇게 9명을 원불교에서는 구인제자라 부른다.
1919년 7월 대종사는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라고 물었고 구인 제자들은 그러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약속한 날 한 명도 빠짐 없이 모여 단도를 꺼내놓고 결심을 담아 종이에 사무여한이라는 글을 쓰고 인주 없이 지장을 찍었는데 조금 있자 핏빛으로 지장 9개가 드러났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일이 거의 없는 원불교 경전에서 드물게 초자연적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다.
그러자 대종사는 자결하러 기도 장소로 가던 제자들을 불러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아무리 힘들어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온갖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제자들에게 법명을 주며 그대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원불교에서 쓰는 법명의 시작이다.
1919년 10월에 대종사는 모임의 이름을 저축조합에서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으로 바꿨다. 이후 대종사는 변산으로 거처를 옮겨 새 종교의 교리를 짜기 시작한다.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라미 일원상을 처음으로 그림도 이 때다.[6]
1924년에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에서 기성조합을 빼고 그냥 '불법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원불교 중앙총부는 지금도 익산에 있다.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
, 대종사를 만나서. #
이후 1943년 열반에 이르기까지 익산 총부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금강산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새로운 제자들을 만나고 포교활동에 힘썼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시기이다보니 이런 단체나 모임은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고 압박과 탄압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안창호의 방문 이후로 더 심해졌다고 한다. 실제로 도산 안창호가 대종사를 방문하고 간 이후에 익산 관내 3번째 주재소인 북일주재소가 원불교 중앙총부 구내에 설치되어 일제 순사가 총부에 상주했다. #
2.5. 사망[편집]
대종사는 식사 후 복통을 호소하며 투병하였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윽고 1943년 6월 1일에 5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미리 직감하고 말년에 정전 편수를 서두르며 제자들에게 "먼 길 떠날 것이다." 하며 여러 번 언질을 주었지만 다들 진짜 멀리 수양하러 간다고만 생각했지 이 세상을 떠난다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로 갈수록 일제의 압박이 심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종교단체들은 친일종교(불교계열의 경우 황도불교화)가 되든지 아니면 탄압속에서 사멸되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불법연구회라고 별 수가 없던 상황에서[8] 대종사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순식간에 일제의 관심이 불법연구회에서 떠나게 되었다.[9] 그 후 소태산 대종사를 이어 정산 송규가 2대 종법사가 되었는데 1944년 말, 1945년 초에 들어서는 불법연구회를 완전히 황도불교화 시키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여왔다. 그러자 송규는 1945년 6월 지방 교당 시찰을 명분으로 익산 총부를 떠나 부산으로 갔고, 일제는 황도불교화 서류 수속을 끝내고 송규의 마지막 인준을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예 총부에 새로 달 간판까지 만들어 가지고 나타나 송규의 익산 복귀를 독촉했다. 그러나 송규는 이래저래 시간을 끌며 복귀를 계속 늦췄고 8월 15일에 다행히 광복을 맞으면서 불법연구회는 위험에서 벗어났다.
1947년 불법연구회에서 현재도 쓰고 있는 원불교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바꿨다.
3. 가르침[편집]
3.1. 핵심 교리[편집]
3.1.1. 법신불 일원상[편집]
원불교를 상징하는 동그라미는 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이라 부른다. 절에 있는 불상이 부처님의 형상을 모신 것이라면 원불교 교당에 모셔진 법신불 일원상은 우주 만유의 본원과 공통된 진리를 상징한다. 종교의 각 파들이 방편은 다르고 이름이 다르지만 근본되는 원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원불교의 '원'이 바로 이 '원'이다.
3.1.2. 교리도[편집]
정전에 수록된 원불교 교리도. 원불교의 교리를 축약한 것으로 대종사 생전에 만들었다.
3.1.3. 삼학 팔조 사은 사요[편집]
교리도의 핵심은 삼학, 팔조, 사은, 사요로 축약할 수 있다.
삼학(三學): 정신수양(精神修養), 사리연구(事理硏究), 작업취사(作業取捨)로 구성되어있다. 여러 종교들이나 불교 내 종단들끼리도 각자 선수행이나 경전공부 등 어느 한쪽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원만한 인격을 이루려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팔조(八條): 삼학수행의 원동력이 되는 진행사조(進行四條)인 신(信), 분(忿), 의(疑), 성(誠)과 방해가 되는 사연사조(捨捐四條)인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
사은(四恩):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네 가지 은혜. 천지은(天地恩), 부모은(父母恩), 동포은(同胞恩), 법률은(法律恩)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요(四要): 인류사회 발전을 위해 함께 실천해가야 할 네 가지 덕목. 자력양성(自力養成), 지자본위(智者本位),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로 구성된다.
3.2. 표어[편집]
개교 표어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교리 표어
- 처처불상 사사불공 (곳곳이 부처, 일마다 불공)
- 무시선 무처선 (언제, 어디를 가리지 않는 수행)
- 동정일여 영육쌍전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같은 마음으로. 정신과 육신을 조화있게 발전시키자)
-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불법으로 현실 생활을 발전시키고, 현실 생활에서 진리를 깨쳐가자)
3.3. 법문[편집]
대종사가 직접 만든 교리는 95쪽 분량이며 정전이란 이름으로 편찬되어 있다. 대종사의 평상시 법문들은 대종사 사후에 제자들이 엮어 대종경으로 출간했으며, 총 15품 547장이다. 정전과 대종경을 합쳐서 원불교 교전이라고 하며, 여기에 불조요경과 정산종사법어, 성가, 예전 등 원불교의 모든 교서를 합친 것을 원불교 전서라고 한다.
교전은 원불교 교당에서 구할 수도 있고 앱스토어에서 누구나 무료어플로 다운받을 수도 있다.
아래는 대종경 법문들 중 일부. 선택기준은 개인 취향.
그대들은 하늘 사람을 보았는가. 하늘 사람이 하늘 나라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저 어린이들이 바로 하늘 사람이니 저들은 마음 가운데 일호의 사심이 없으므로 어머니를 통하여 천록(天祿)이 나오나니라. 그러나, 차차 사심이 생기면 천록도 따라서 그치게 되나니, 수도인들도 사심만 없고 보면 한량 없는 천록이 따르지마는 사심이 일어나면 천록 길이 따라서 막히게 되나니라.
- 대종경 수행품 35장
부모 자녀와 같이 무간한 사이라도 자기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지도하면 그 지도를 잘 받지 아니하고, 부부와 같이 친절한 사이라도 내가 실행하지 못하는 조건으로 권면하면 그 권면을 잘 받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 내가 실행하는 데 있나니라.
- 대종경 인도품 22장
한 제자 어떤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리라. 그러하면, 그 업이 쉬어지려니와 네가 지금 갚고 보면 저 사람이 다시 갚을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갚기를 쉬지 아니하면 그 상극의 업이 끊일 날이 없으리라."
- 대종경 인과품 10장
작은 재주로 작은 권리를 남용하는 자들이여! 대중을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지 말라.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하늘 마음이 되며, 대중의 눈을 모으면 하늘 눈이 되며, 대중의 귀를 모으면 하늘 귀가 되며, 대중의 입을 모으면 하늘 입이 되나니, 대중을 어찌 어리석다고 속이고 해하리요.
- 대종경 인과품 23장
(부처님을 어디에 봉안해두었냐는 질문에) 산업부원 일동이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거늘 대종사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니라." 그 사람들이 더욱 그 뜻을 알지 못하니라.
- 대종경 성리품 29장
4. 제자[편집]
대종사를 초기에 모셨던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 정산 송규, 이렇게 9명을 구인제자라 부른다. 정산 송규를 제외하면 모두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대체로 대종사보다 나이가 많았다.[10]
모두 남자인 구인제자와 별도로 여성 구인제자가 있다. 남성 구인제자처럼 극초창기 제자들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원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데 있어서 남성들을 능가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일타원(一陀圓) 박사시화[11] , 이타원 장적조[12] , 삼타원 최도화[13] , 사타원 이원화[14] , 오타원 이청춘[15] , 육타원 이동진화[16] , 칠타원 정세월[17] , 팔타원 황정신행[18] , 구타원 이공주[19] 가 이에 해당한다.[20] 시골 촌부들이었던 남성 구인제자들과 달리 여성 구인제자들은 당시 부잣집 부인이거나 잘나가는 신여성들이 많았다.
대종사 사후 법통은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로 이어졌으며, 이후 3대 대산 김대거 종사, 4대 좌산 이광정 종사, 5대 경산 장응철 종사 등으로 이어졌다.
5. 여담[편집]
- 대종사가 이끌던 불법연구회(원불교)는 회계 처리나 사생활 등이 깔끔하기로 유명했다. 일제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여러 번 불시에 털었는데 금전 출납이나 남녀 관계 등 문제 삼을 구석을 하나도 찾지 못해 혀를 내둘렀다. 지금도 원불교는 종교계에서 가장 신뢰가는 교단으로 인정받는 편이다.
- 일제에서 불법연구회를 감시하라고 투입한 이리경찰서의 조선인 순사 황가봉은 대종사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21] 물론 일제 순사였던만큼 시킨대로 불법연구회를 감시하는 일을 계속하긴 했으나 불법연구회를 지키는 것에도 역할을 했다. 그는 광복 후에도 원불교 교도로 있었으며 자녀 중에는 출가하여 교무가 된 사람도 있다.
내가 진묵이라면 어쩌겠소?
- 박중빈 자신은 진묵대사의 환생이라고 여긴 듯하다. 봉서사의 진묵대사 부도가 희어지면 진묵대사가 세상에 다시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부도가 희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공자님도 태어나실 때 이가 나 있었다고 하여 다시 공자님 같은 분 못 태어나시게 하였고, 부처님도 옆구리로 태어나셨다 하여 길을 막았다. 위대한 분들이 모두 기적으로 옆구리로 낳고 동정녀가 낳았다 하여 다음 성자가 못 나오도록 길을 막으셨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어린이)이 어머니께 "나 낳을 때 꿈 어떻던가요?" 물을 때 '아니, 너는 별 꿈 없이 낳았다'고 하면 '나는 공자님과 같이도 못 되고, 부처님과 같이도 못 되겠네'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과거 성자들이 한 것은 말할 것이 없고, 내 역사를 쓸 때에는 평범하게 쓰라.
- 오랜 수도를 해온 만큼 대종사 살아 생전에 신비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구전되나[22] 신통한 바람은 새 시대의 종교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 기록을 후대에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23] 과거 종교의 성자나 성녀들과 비교할 때 대종사의 일생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는데, 근대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