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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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정산종사 게송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수제자이자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초기 및 6.25 전쟁 시기 원불교를 이끌며 초석을 다진 원불교의 두 번째 종법사.[2]
2. 일생[편집]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구성리(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박실마을)에서 아버지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와 어머니 연안 이씨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 송도군(宋道君). 8세부터 족손(族孫) 송준필의 문하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인류를 구제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마땅한 인연을 찾지 못하고 전라도까지 건너오게 되었다.[3]
1917년에 정읍 화해리에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처음으로 만났고, 이듬해 대종사가 있는 영광으로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었다. 당시 제자들 중 나이는 가장 어렸으나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대종사는 송규를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라고 칭찬했다.
이후 대종사를 보필하여 원불교의 교리를 제정하고 기반을 닦는 데 공헌을 하였으며, 1943년 대종사 사망 후 뒤를 이어 2대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국에서 원불교를 지켜내었으며[4] , 해방 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였다.[5]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펼쳤고, 6.25 전쟁 등 험난한 시기를 이끌었다. 1961년 4월에 삼동윤리를 발표한 뒤 이듬해 사망했다.
정산종사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 법어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집인 대종경과 더불어 원불교 교서로 쓰인다.
그 외 시자 박정훈이 기록한 법문집 <한울안 한이치에>, <원각가>, <불법연구회 창건사>, <건국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정산종사 종법사 추대식
3. 삼동윤리[편집]
- 동원도리: 세계 모든 종교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근본적 진리는 모두 같다는 의미
- 동기연계: 모든 인류와 생령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라는 의미.
- 동척사업: 각종 사업과 주장이 서로 다르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더 좋은 세상의 개척으로 동일하다는 의미.
정산종사의 대표 사상으로, 이렇게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4. 여담[편집]
-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이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정전 편찬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산종사가 초안을 준비하면 대종사가 감수하는 식. [6]
- 대종사 사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고 대종사의 언행을 모은 '대종경'을 발행함을 비롯하여, 원불교 기도식에 쓰이는 '영주'를 짓는 등, 현재 원불교의 기본 틀은 정산종사 시기에 대부분 갖추었다.
- 정산 종사의 아버지인 구산 송벽조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을 꾸짖는 투서를 조선총독부에 익명으로 보냈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일제에서 그 지역에 백일장을 주최하고 필체를 대조해서 적발했다고 한다.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 역시 경찰서에 가서 고초를 겪었다.
- 동생인 주산 송도성 종사[7] 와 더불어 원불교 최고법위인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 역대 대각여래위는 소태산 대종사를 포함해서 총 6명으로, 형제로서는 유일한 사례.
- 상기 이유로, 성주군 초전면 정산종사 탄생가(원불교 성주성지는 '여래 2명을 배출한' 원불교 성지다. 원불교 5대 성지 중 소태산 대종사와 관련되지 않은 유일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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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후에 분열되거나 멸망했음을 생각하면, 역사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3] 이 과정에서 증산 계통의 종교 중 하나인 보천교의 교조 차경석을 만나기도 했으나, 올바른 도인이 아니라 판단하고 떠났다. 또한 강일순의 외동딸 강순임을 만나 정심요결(正心要訣)이라는 도교의 내단수련서를 전해 받았다고도 한다. 강순임은 훗날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창시하였다.[4] 대종사 사망 당시 일제에서는 "불법연구회(원불교)는 이제 끝" 이라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망 후 망하거나 제자들의 갈등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정산 종사 취임 후 대종사 사망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되는 불법연구회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5] 대종사 당시의 공식 명칭은 '불법연구회'였다.[6] 유학자 집안 출신인 정산 종사와 달리, 대종사는 어릴 때 서당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글에 밝지 못했다.[7] 소태산 대종사의 사위이자 정산종사의 동생으로, 대종사의 법문을 기록하여 남기는 등 원불교 초창기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을 많이 하였다. 해방후 전재동포 구호사업의 총책임자였는데 이때 병을 얻어 40세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