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중빈 (문단 편집) == 여담 == [[파일:external/www.wonnews.co.kr/100065_16246_3920.jpg]] * 대종사는 당시 [[조선인]]으로써는 [[이대호]]급 피지컬이었다. [[키]]는 175~180cm, [[몸무게]]는 90~110kg 정도라고 전하는데 조선 말기 남성 평균 키가 161cm였다. * 대종사가 이끌던 불법연구회([[원불교]])는 회계 처리나 사생활 등이 깔끔하기로 유명했다. [[일본 제국|일제]]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여러 번 불시에 털었는데 금전 출납이나 남녀 관계 등 문제 삼을 구석을 하나도 찾지 못해 혀를 내둘렀다. 지금도 원불교는 [[종교]]계에서 가장 신뢰가는 교단으로 인정받는 편이다. * 일제에서 불법연구회를 감시하라고 투입한 이리경찰서의 조선인 순사 황가봉은 대종사에게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법명은 황이천] 물론 일제 순사였던만큼 시킨대로 불법연구회를 감시하는 일을 계속하긴 했으나 불법연구회를 지키는 것에도 역할을 했다. 그는 광복 후에도 원불교 교도로 있었으며 자녀 중에는 출가하여 교무가 된 사람도 있다. *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는데 장남이 [[원광대학교]] 박길진(광전) 초대 [[총장]]이다. 차남 박광령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장녀 박길선은 송규의 동생인 송도성과 [[혼인]]하였다. >내가 진묵이라면 어쩌겠소? * [[http://www.w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660|박중빈 자신은 진묵대사의 환생이라고 여긴 듯하다.]] 봉서사의 [[일옥|진묵대사]] 부도가 희어지면 진묵대사가 세상에 다시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부도가 희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공자|공자님]]도 태어나실 때 [[치아|이]]가 나 있었다고 하여 다시 공자님 같은 분 못 태어나시게 하였고, [[싯다르타|부처님]]도 옆구리로 태어나셨다 하여 길을 막았다. 위대한 분들이 모두 기적으로 [[석가모니|옆구리로 낳고]] [[예수|동정녀가 낳았다]] 하여 다음 [[성자]]가 못 나오도록 길을 막으셨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어린이)이 어머니께 "나 낳을 때 꿈 어떻던가요?" 물을 때 '아니, 너는 별 꿈 없이 낳았다'고 하면 '나는 공자님과 같이도 못 되고, 부처님과 같이도 못 되겠네'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그러니 과거 성자들이 한 것은 말할 것이 없고, 내 역사를 쓸 때에는 평범하게 쓰라. * 오랜 수도를 해온 만큼 대종사 살아 생전에 신비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구전되나[* 대종사의 열반이 1943년이기 때문에 현재도 대종사를 직접 받들었던 [[제자]]들이 원불교의 [[원로]]로 남아있다.] 신통한 바람은 새 시대의 종교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 기록을 후대에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예외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원기 4년(1919)의 백지혈인이다.] 과거 종교의 [[성자]]나 [[성녀]]들과 비교할 때 대종사의 일생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는데, 근대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 원불교 창시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서울]] [[동작구]] [[흑석동(서울)|흑석동]]에 [[원불교 소태산기념관|소태산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분류:189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영광군 출신 인물]][[분류:밀양 박씨]][[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종교 창시자]][[분류:종법사]][[분류:대각여래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