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중빈 (문단 편집) === 원불교 창시 ===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 위주로 40명 정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중에는 증산 [[강일순]] 계열인 [[보천교]]를 신앙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보천교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종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면 보천교를 거쳐가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 이를 빌미로 [[증산도]] 등에서는 원불교가 증산 계열 종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단순 허영심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으므로 대종사는 몇개월 후 그 중에서 신실한 사람 8명을 선발하여 첫 제자로 삼았다. 불법의 생활화를 표방하는 종교답게, 대종사와 제자들이 맨 처음 모여서 한 일은 경제적 자립기반을 갖추는 것이었다. 원불교라는 명칭은 대종사의 사후에 정해진 이름이고 최초의 이름은 '저축조합'이었다. 대종사는 저축조합을 창설한 후 '우리가 앞으로 세상을 위해서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는 공부할 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허례허식 폐지, [[금연]], [[금주]]를 하여 그 남은 돈을 저축하게 하였다. 그렇게 모은 돈과 대종사의 사재를 처분한 돈, 이웃 마을 부자에게 빌린 돈을 합쳐서 [[숯]]을 샀다. 이때가 1917년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숯 가격이 폭등하여 불과 1여년만에 큰 이윤을 남겼다.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큰 공사를 벌이는데, 바닷물을 둑으로 막아 물을 퍼내고 논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하려고 생각해도 보통 스케일이 아닌 일인데, 시골 촌사람 9명이서 일을 벌렸으니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미쳤다'라는 것이었다. 그 간척사업의 결과가 [[http://www2.won.or.kr/servlet/wontis.com.root.OpenChannelServlet?tc=wontis.dic.command.RtrvDicRmrkCmd&search_cls=&search_string=&dic_no=3601|정관평]]이다. 공사가 끝날 때쯤 경북 성주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송도군(정산 [[송규]] 종사)이 9번째 제자로 합류한다. 이렇게 9명을 원불교에서는 구인제자라 부른다. 1919년 7월 대종사는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라고 물었고 구인 제자들은 그러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약속한 날 한 명도 빠짐 없이 모여 단도를 꺼내놓고 결심을 담아 종이에 사무여한이라는 글을 쓰고 인주 없이 지장을 찍었는데 조금 있자 핏빛으로 지장 9개가 드러났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일이 거의 없는 원불교 경전에서 드물게 초자연적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다. 그러자 대종사는 자결하러 기도 장소로 가던 제자들을 불러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아무리 힘들어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온갖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제자들에게 법명을 주며 그대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원불교에서 쓰는 [[법명]]의 시작이다. 1919년 10월에 대종사는 모임의 이름을 저축조합에서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으로 바꿨다. 이후 대종사는 변산으로 거처를 옮겨 새 종교의 교리를 짜기 시작한다.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라미 일원상을 처음으로 그림도 이 때다.[* 대종사가 벽지에 처음으로 그린 일원상 원본은 [[6.25 전쟁]] 당시 유실되었다고 한다.] 1924년에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에서 기성조합을 빼고 그냥 '불법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원불교 중앙총부]]는 지금도 익산에 있다.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 >---- >[[도산 안창호]][* 안창호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35년 2월 위장병으로 가출옥, 그 뒤로 2년 동안 전국 각지를 순회하였는데, 호남에 온 것은 1936년 2월의 일이었다.], 대종사를 만나서. [[http://www.culturecityiksan.or.kr/2020n/inner.php?sMenu=Z4000|#]] 이후 1943년 열반에 이르기까지 익산 총부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금강산]]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새로운 제자들을 만나고 포교활동에 힘썼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시기이다보니 이런 단체나 모임은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고 압박과 탄압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안창호의 방문 이후로 더 심해졌다고 한다. 실제로 도산 안창호가 대종사를 방문하고 간 이후에 익산 관내 3번째 주재소인 북일주재소가 원불교 중앙총부 구내에 설치되어 일제 순사가 총부에 상주했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