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중빈 (문단 편집) == 제자 == [[파일:external/www.won.or.kr/img_con_0109060300_2m.gif]] 대종사를 초기에 모셨던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 정산 [[송규]], 이렇게 9명을 구인제자라 부른다. 정산 송규를 제외하면 모두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대체로 대종사보다 나이가 많았다.[* 심지어 박동국은 친동생, 유건은 외삼촌이다. 과거의 성인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포교활동을 했음과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새로운 땅에 구세주처럼 짠 나타나지 않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에게 스승으로 인정받았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파일:external/www.wbsi.kr/15224467_1_1487343012765.jpg|width=500]] 모두 남자인 구인제자와 별도로 여성 구인제자가 있다. 남성 구인제자처럼 극초창기 제자들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원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데 있어서 남성들을 능가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일타원(一陀圓) 박사시화[* (1867~1946) 전북 남원에서 출생. 일찍이 부군을 사별한후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1924년에 서울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동생 박공명선 (朴孔明善)과 함께 귀의하였다. 이후로 전국 각처로 돌아다니며 방물장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고 교단 창립에 헌신하였다.], 이타원 장적조[* (1878∼1960) 경남 통영에서 출생. 일찍이 강증산교의 신자가 되었다가 1921년에 소태산 대종사에 귀의하였다. 나중에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으며 교단 초기에 박사시화, 최도화와 함께 교직없는 교역자로서 교화에 큰 활동을 하였다.], 삼타원 최도화[* (1883~1954) 전북 진안에서 출생.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동학사·화엄사 등에서 화주 노릇을 하였다가 1922년에 진안 만덕산에서 송규를 만나 입교했다.], 사타원 이원화[* (1884~1964) 전남 영광에서 출생. 소태산 대종사가 22세경부터 26세에 대각을 이루기까지 정성을 다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는 영산에 주재하면서 영산교당 창설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나중에는 영광지방의 교세 발전과 교도 관리에도 힘썼다.], 오타원 이청춘[* (1886~1955) 본명은 화춘(化春)이며 전북 전주에서 출생. 1924년에 최도화의 인도로 입교하여 교단 창립에 전 재산을 바쳤으며 나중에 전주교당의 창립주로 수행하였다. 1934년부터 20여년간 봉직하였다], 육타원 이동진화[* (1893~1968) 본명은 경수(慶洙)이며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24년 3월에 박사시화의 인도로 서울에서 입교한후에 같은 해 5월에는 만덕산 초선회에 참석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만났다. 신앙심이 투철하여 서울 창신동에 가옥을 매입하여 가옥·가산·대지를 모두 서울교당 창설에 희사하였다. 그후 1933년에 본격적으로 출가하여 전라북도 익산 총부 금강원에서 거주하면서 교단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칠타원 정세월[* (1896∼1977).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23년에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뵙고 귀의하였다. 1932년부터 출가하여 대종사에 대해서 지극한 심성을 가졌으며 익산 총부건설과 교단 창립 발전에 헌신하였다.], 팔타원 [[황정신행]][* (1900~2004) 전쟁고아 907명을 피난시킨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한국보육원의 설립자로, 속명인 [[황온순]]으로 더 유명하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에 원불교에 귀의하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전문교육을 받은 신지식여성으로 사회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한 때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도 전개한바 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대호법 제1호가 되었고 교육사업에 까지 투신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전개하여서 8·15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구타원 이공주[* (1896~1991) 본명은 경자(慶子)이며 서울 출생. 1924년에 박공명선의 인도로 입교하고 1930년에 출가하였다. 교단 초창기에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가장 많이 기록하여 법낭(法囊)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림에도 정통하여 초창기 교단의 그의 손길이 미쳐 만화보살 (萬化菩薩)이라고도 불리었다. 초기 원불교의 교서의 대부분이 그의 물질적 후원으로 출판되었고 나중에는 원광대학교의 설립에 크기 기여하기도 하였다. 공부면에 있어서도 교단 최초의 특신급 6인 중의 한사람이며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을 잘 계승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가 이에 해당한다.[* 대종사의 아내인 양하운은 십타원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때문에 십타원 양하운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십타원 양하운(1890~1973)은 전남 영광에서 출생하여 소태산 대종사와 결혼하여 교단에서 대사모(大師母)라 존칭하고 있으며 교단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내조하고 교단 창립에 공헌하여 정토원훈(淨土元勳)으로 존경을 받고있다.] 시골 촌부들이었던 남성 구인제자들과 달리 여성 구인제자들은 당시 부잣집 부인이거나 잘나가는 신여성들이 많았다. 대종사 사후 법통은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로 이어졌으며, 이후 3대 대산 [[김대거]] 종사, 4대 좌산 [[이광정]] 종사, 5대 경산 [[장응철]] 종사 등으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