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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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특징
2.3. 국가주의[A]
2.4. 근대적 보수주의[1][B]
2.4.1. 반공과 국가안보
2.4.2. 경제발전
2.5. 반자유주의[B]
2.5.1. 냉전자유주의와 민족의 자유
2.5.2. 박정희의 인권 담론
2.6. 한국적 민주주의[C]
3.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사상적 측면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박정희주의 문서와는 엄연히 구분되는데, 박정희주의는 '박정희 향수를 배경으로 하는 베이비 붐 세대의 박정희 숭배 및 공경 현상'을 일컫는 말이지만, 본 문서에서는 박정희 개인의 사상적 측면에 대해서만 다룬다.

정치적 스펙트럼은 보통 우익(유신 이전)에서 극우(유신 이후)로 분류된다.[2]

2. 특징[편집]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는 이후 현실정치의 구체적 상황,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 유세나 연두 기자회견 등에서 야당 정치인, 재야 인사 및 학생들을 비난하거나, 제헌절이나 대통령 취임식 등의 연설에서 공식행사의 취지에 맞게 민주주의나 정치에 관한 규범적 언명을 한 적도 많지만, 연설문이나 저작에서 자신의 정치관을 일반적인 명제의 형태로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1978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다음 연설에서는 박정희 본인의 정치관을 총체적이고 압축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의 목적과 제도의 참다운 가치는 그 나라의 당면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원대한 국가 목표를 착실히 실현해 나가기 위해 국민의 슬기와 역량을 한데 모아 생산적인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어떤 명분과 이유에서든 (중략) 국민총화와 사회안정을 저해하고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조장하는 그러한 형태의 정치 방식은 우리가 당면한 냉엄한 현실이 도저히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1978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諭示) 中

이 연설에서 박정희는 정치의 목적과 제도의 가치를 '국가의 목표에 봉사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즉, 박정희에게 '국가 의식'은 '정치 이전에 요구되는 것'이었다. 국가가 정치에 선행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이러한 사고는, 개인의 생명과 자유 및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부차적으로 정치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상정하는 사회계약론을 기반으로 한 서구의 자유주의적 사고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따라서 다분히 국가주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의 당면 과제는 물론 원대한 국가 목표를 민주적인 합의에 입각해서 설정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데, 박정희에게 당면 과제와 원대한 국가 목표는 위기를 수반하는 '냉엄한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없이 부과하는 무언가 '긴급하고 자명한 것’으로 상정되고, 정치는 이러한 과제와 목표를 실현해 나가도록 뒷받침해 주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목표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정치의 과제라 할 수 있지만, 당면 과제와 원대한 목표의 설정 역시 민주적 정치 본연의 과제이다. 그러나 긴급한 위기에 직면하여 그러한 과제와 목표 설정이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될 때, 그 정치는 '행정'의 차원을 강하게 지향하게 되고, 과제와 목표 설정은 민주적인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 최고 통치자의 결단과 예지의 산물로 귀결되며, 그 결과 유신정권 시절 박정희의 통치가 보여준 것처럼, 정치는 초월적 영도자에 의한 행정적 독재의 모습을 띠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3]

위 발언에 뒤이어 박정희는

총력안보, 국력배양만이 우리가 나라를 지키고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평화와 번영을 다져 나가는 유일한 길이요, 그것만이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언명하면서 국정의 목표와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국가와 민족의 수호', '평화와 번영' 및 '평화통일' 등 국정 목표를 제시하면서, 오직 자신의 판단과 해석에 입각한 '총력안보'와 '국력배양'만이 그 유일한 실현수단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준 바와 같이 실행수단으로서의 총력안보와 국력배양은 곧 서구적 민주주의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사대주의라고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력안보와 국력배양을 추진하면서, 여야의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을 통해 권력의 전횡을 방지하고자 하는 민주정치, 특히 정당과 의회 및 선거 정치는 고비용과 저효율의 낭비 또는 사치로 치부되게 된다. 이 점에서 박정희의 정치관이 서구의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임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장제스의 영향도 받았다.

2.1. 아시아적 가치[편집]


박정희의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아시아적 가치에 기반을 두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아시아적 가치란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 현대 서구의 주류 사상과 대비되는 아시아 특유의 정치·사회적 가치와 정신을 일컫는 말로, 주된 특징으로는 공동체주의 또는 집단주의 강조,[4] 개발독재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 선호, 쾌락주의에 반대하는 도덕주의적 사회보수주의 등이 있다. 이는 서구 학계에서 대한민국, 일본, 중국,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의 근간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독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2.2. 반공주의[편집]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5.16 혁명 공약 中

여순사건 전후의 진상조사에 따르면 박정희남로당의 군책을 맡았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후 공식적으로 전향한 뒤에도 박정희에게는 늘 좌익 콤플렉스가 따라다녔다.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은 박정희를 불신했고 북한은 내심 큰 기대를 했었다.[5]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 윤보선에게 매카시즘 공세를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박정희에게 있어 좌익 콤플렉스는 미국의 신임을 얻고 야당의 공세를 무력화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그야말로 일생의 콤플렉스와도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는 반공주의국시로 삼고, 강력한 반공 정책을 실시하며 좌익 사범에 대해 통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강경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이승만 정부장면 내각도 반공 성향이 강했으나, 이를 공식적으로 국시로 삼은 것은 박정희가 처음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 대표적인 반공 정책으론 반공법 제정, 중앙정보부 조직 등이 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희생자 이승복 어린이를 반공 영웅화하기도 했으며, 여러 반공 영화가 만들어졌다. 다만 이러한 반공 정책은 동백림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등 간첩 조작 사건을 통해 공안정국을 조성해 박정희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악용되기도 하였다.

2.3. 국가주의[A][편집]


우리의 반만 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성을 개조하는 것만이 강력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길이라고 본다.

박정희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中

박정희는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추구했던 일본 제국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일본 제국의 군대에서 복무한 탓인지 강한 국가주의 성향을 띠었다.

5.16 직후 박정희는 자신의 신념인 국가주의를 관철하자니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는데,[6] 자신의 저서 《우리민족의 나갈 길》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닌, 외세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직 자각과 자율성이 모자르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본다. 우리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우리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실행해야 하는데,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노예근성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을 계몽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집권기간 동안 자신의 국가주의를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게 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국민들에게 충성이라는 메시지를 주입하려 했고, 이때 박정희는 유독 이순신의 일사봉공(一死奉公) 정신을 강조했다.[7] 또한 1968년 12월에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박정희의 이름으로 반포했다. 이는 학교 교과과정에 포함되었고 학생들은 무조건 이를 달달 외워야 했으며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박정희의 이러한 국가주의는 그가 경험한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를 고스란히 닮았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예시가 상당히 많다. 앞서 언급한 국민교육헌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의 이름으로 내려진 교육칙어와 유사하며, 1971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 또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의 황국신민서사와 너무도 비슷하며, 학교에서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하는 애국조회는 아예 명칭까지 똑같았다. 국기하강식을 하는 오후 6시가 되면 거리에서 부동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영화관에서 영화 상영 직전에 관객들이 전원 기립하여 애국가를 제창하는 것 역시 일제의 잔재였다. 일제의 황국신민체조는 국민체조로 이름을 달리하여 부활했으며, 일제의 교련 수업도 1971년부터 다시 부활하여 학교를 병영화하였다.

여기에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한 10월 유신의 유신(維新)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쇼와 유신에서 따온 것이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분들(이토 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나의 멘토다. 또 1930년대 쇼와 유신 때처럼 우리도 군부가 나서서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고 봤다. 고로 유신이란, 메이지/쇼와 유신 때처럼 우리도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하자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고 밝혔다.

이렇게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사고관은 '민족적 민주주의(또는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20년 가까이 한국을 지배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2.4. 근대적 보수주의[8][B][편집]


이 논문[A]의 필자는 민주화 이전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를 '집권 우익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하고 국가안보(반공)와 경제발전(또는 근대화)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 정치질서를 옹호하기 위해 제시한 이념'으로 정의했다. 본 문단에서는 이러한 개념 규정에 기초해 박정희의 보수주의를 국가안보(반공)와 경제발전에 대한 옹호로 나누어 분석하고, 이어서 비서구사회에서 후발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수행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박정희식 보수주의의 특징을 '근대화 보수주의'라는 개념으로 서술하겠다.


2.4.1. 반공과 국가안보[편집]




2.4.2. 경제발전[편집]



2.5. 반자유주의[B][편집]


박정희가 5.15 사건, 2.26 사건을 언급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박정희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4.19 혁명 이후 이병주(국제일보 주필, 소설가), 황용주(부산일보 주필), 조증출(대구사범 동기)과의 술자리에서


2.5.1. 냉전자유주의와 민족의 자유[편집]



2.5.2. 박정희의 인권 담론[편집]



2.6. 한국적 민주주의[C][편집]




3.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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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C 박정희시대의 국가주의 — 국가주의의 세 차원 —.[1] 현재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복지나 기타 진보적 의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보수를 말하지만 원론적인 의미에서 진보적 보수주의는 전통적 보수주의이 대비되어 근대적 가치와 근대화에 긍정적인 보수주의를 뜻한다. [B] A B C D 박정희의 정치사상: 반자유주의적 근대화 보수주의.[C] A B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주의 담론 분석: “행정적”․“민족적”․“한국적”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민족적 민주주의(民族的 民主主義) 문서.[2] 다만 좌익적인 면모도 있다고 포함된다.[3] 실제로 박정희 역시 사석에서 "나는 행정가이지 정치가가 아니야"라며 스스로를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로 자처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4]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고,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절제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충성, 효도, 성실, 교육열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유교와 관련이 깊다.[5] 그래서 김일성은 박정희와 어린 시절 인연이 있는 황태성을 박정희에게 밀사로 보냈으나, 박정희는 미국에게 반공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황태성을 간첩으로 간주하여 처형하였다.[6] 나중에 10월 유신 때는 한국식 민주주의로 개칭한다.[7] 사실 이 사자성어는 1939년 박정희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에 썼던 표현이다.[8] 현재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복지나 기타 진보적 의제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보수를 말하지만 원론적인 의미에서 진보적 보수주의는 전통적 보수주의이 대비되어 근대적 가치와 근대화에 긍정적인 보수주의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