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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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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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배우자, 동생 및 직계 가족 일람
조부
박영규
부친
박성빈
(모친 백남의)
박정희
(처 김호남육영수)

박상희
장녀
박재옥
차녀
박근혜
3녀
박근령
독자
박지만
상위 문서: 틀:박정희




파일:external/news.chosun.com/199802080260_00.jpg

아래가 김호남. 위의 여성은 박정희의 어머니인 백남의이며, 오른쪽이 젊은 시절의 박정희. 참조.
김호남
金好南

이름
김호남(金好南)
출생
1920년
사망
1990년 / 1991년[1] (향년 70세 / 71세)
배우자
박정희 (1936년 결혼 / 1950년 이혼)
자녀
박재옥 (1937년 출생 ~ 2020년 사망, 향년 83세)
1. 개요
2. 생애
3. 그 외
4. 미디어에서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36년부터 1950년까지 박정희의 부인이었으며, 박재옥에게는 친어머니다. "박정희의 부인"을 육영수로 아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박정희는 육영수와 재혼한 몸이다. 즉, 첫 부인 김호남과 갈라섰다는 얘기다. 이런 내력을 알고도 이경령, 육영수 모녀는 결혼을 밀어붙였다.


2. 생애[편집]


그녀의 부친은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19세, 김호남은 16세가 되던 해에 결혼했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10대 후반에 결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박정희가 김호남과의 결혼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시골 빈농 출신으로 대구사범학교[2]에 진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던[3] 박정희로선,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자신과 맞는 여성과 혼인하길 원했다. 부모와 집안 어른들이 정해 준 여성이 아니라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과 결혼하고 싶었고, 자신처럼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 박성빈은 47세에 낳은 막내의 결혼을 꼭 보고 싶어서, "내가 죽기 전에 막내가 장가가는 건 보고 가야겠다"며 사실상 반강제로 혼인시켰다. 박성빈은 박정희가 김호남과 결혼하고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성빈은 1871년 6월 6일(음력 4월 19일)에 태어나 1938년 양력 9월 4일에 죽었는데 사망 당시의 나이가 67세, 그 당시 박정희의 나이가 21세였다. 박정희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임 교사로 발령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박정희는 경북 문경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는데, 물에 빠진 학생을 구출해 내기도 하고 이웃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격의없이 지내 학부형들도 흡족하게 여겼다. 이때 나이가 찬 딸을 둔 학부형이 있었는데, 박정희를 미덥게 여겨 혼담이 나왔다. 박정희도 좋아하는 눈치였으나, 술자리에서 반 농담조로 "그럽시다"하며 웃고 넘길 뿐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들이 없을 때, 고향에 아내가 있음을 넌지시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혼담이 나오기 전까지 박정희는 결혼 사실조차 말하지 않을 만큼, 반강제로 했던 결혼에 불편함을 갖고 있었다.

김호남은 딸 박재옥을 키우며 시가에서 지냈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시절 여성답게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착한 며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한 박정희는 타지에서 홀로 교직생활을 하며 월급을 김호남에게 준 적이 없었고, 방학이 되어 어쩌다 고향에 내려와도 김호남과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방학 때조차 김호남과 마주치기 싫어, 고향에 거의 내려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시절 박정희의 제자들은 "가끔씩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박 선생님을 찾아오곤 했다"고 증언했는데, 바로 박정희의 어머니인 백남의였다. 아들이 내려오질 않으니, 어머니가 대신 올라갔던 셈. 이게 해도 해도 너무 심했던지 박정희가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을 때, 화가 난 셋째 형 박상희가 박정희를 거의 패다시피하며 김호남의 방에 집어넣기도 했다고 한다. 근데 바로 방에서 나와버려서 의미없다.

이후 심상소학교를 사직한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에서 복무할 때에도, 박정희는 새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김호남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광복 이후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평진지대 중대장을 맡다, 귀국한 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한다.

박정희는 1948년부터 총각 행세를 하며 이현란과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는 한편, 김호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호남은 박정희가 찾아올 때마다 도망치며 거부했다. 이현란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현란은 생전인 1988년에 자유기고가 강인옥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그 때 애 낳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애가 있으면 붙잡혀 못 나왔을 거야."라고 했다. 이후 군부 숙군 사업으로 박정희가 투옥된 뒤, 이현란은 박정희를 떠났다. 박정희가 남로당 활동을 한 것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현란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했다. 그런 마당에 '빨갱이 마누라'가 된 셈이라서 질색해버린 것이다. 6.25 전쟁 때문에 북한이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을 때, 당연히 북한군에 붙었을 줄 알았던 박정희가 국군에 현직으로 복귀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에게 아내와 딸까지 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육군 소령으로 복직한 박정희는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 혼인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2달 전, 박정희는 6.25 전쟁 때문에 친척들이 도망치기 바쁘다는 것을 알고 아무도 자신의 이혼을 방해할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해서 김호남을 찾아가 다시금 이혼을 요구했다. 김호남도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이혼을 승낙했고,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 봉사하는 보살이 되었다. 박정희육영수는 1950년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확인이 안 된다.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 출연한 김호남의 사위 한병기의 인터뷰에 따르면, 박정희와 이혼 후 재혼해 아들 1명을 두었으나 얼마 안 가 갈라섰고 이후 에서 공양주로 있었다고 한다.[4]

불교 관련 인사들이 나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 교단을 지원해준 연유에서 기인한다. 김호남이 출가한 사실을 알게 된 육영수는 그녀가 머무는 사찰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이를 부담스러워 했던 김호남이 타 지역 다른 사찰로 옮기면 육영수가 다시 행방을 쫓아 그 사찰을 지원해주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일례로 상무대광주광역시에 있을 무렵 김호남이 상무대 내의 진중 사찰 무각사로 옮겨 머물렀는데, 이를 안 육영수가 지원해 줘서, 무각사가 상무대 이전 후에도 지역의 대찰로 남을 만큼 세가 커졌다.

딸 박재옥이 한병기와 결혼하고, 그 뒤 1990년에 뇌출혈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5]

3. 그 외[편집]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위치한 연호사에서 공양주[6]로 생활한 적이 있다.관련 기사 동네 주민들은 김호남이 박정희의 전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미디어에서[편집]


3공화국: 오연수 완전 순둥이로 싸늘한 남편의 이혼 요구를 울며불며 거부했지만 결국 이혼에 합의해준 후에는 출연이 없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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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1년에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다.[2]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3] 박정희가 사범학교에 진학한 1932년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3곳의 사범학교가 있었다. 월사금을 받지 않으며, 격려금까지 받는데다 직업도 보장되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지역 임금근로자에 미치지 못하는 박봉으로 인기가 적어 13개에 달하던 공립사범학교가 1931년에 통폐합되어 3개로 축소되었다. 이후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문해율을 증대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초등교원의 임금이 대폭 상승하면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16개의 사범학교가 운영되게 된다.[4] 박정희가 생전에 비구니를 강간해서 아기까지 낳았다는 악성 루머가 있었는데 이는 김호남과의 관계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또한, 문병옥 씨(법명 영선스님)도 '박정희와의 사이에서 3명의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밝히자 추적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려 결국 불교에 귀의해 비구니가 됐다.#, 이경미 씨(법명 보현스님)도 궁정동에 끌려가 '노리개나 장난감 같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불교에 귀의했을 뿐 임신이나 자식은 없었다.#[5] 1974년 육영수 사망 16년 후, 1979년 전남편 사망 11년 후.[6] 절에서 승려와 일반인들이 먹을 죽과 밥을 짓는 책임을 맡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