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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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와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는 문서이다. 정치인 목록은 가나다 순으로 서술한다.

2. 국내 정치인[편집]



2.1. 김대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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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낙선하다가, 자유당 소속 전형산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로 인해 자격이 박탈됨에 따라 1961년 인제군 선거구에서 치뤄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드디어 당선되었으나... 이틀 뒤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이 신민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결국 둘 다 현실이 된다. 이 선거에서 중앙정보부 등 관권의 개입이 노골적으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겨우 95만 표(8%) 차이로 박정희를 따라붙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이라는 초강수를 두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72년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 망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 10개월간 일본미국 각지에서 기자 회견과 연설을 통해 반(反)유신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듬해 1973년 이후락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한다.

가택연금 속에서도 김대중의 반유신 투쟁은 계속되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삼일절 57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하여 윤보선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일으켰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병원에 수감당했다가 박정희가 9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다시 가택 연금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다. 당시 김대중은 "민주주의쿠데타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서울의 봄 시기인 1980년 4월 26일 관훈클럽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지난 정권의 공과 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박정희 정권의 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잘한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들이 "우리도 하면 된다. 하니까 되더라"는 자기가능성을 발견토록 한 것이다. 물론 우리 국민의 높은 능력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쨋든 이점은 지난 정권의 공이다. 앞으로 나올 정권도 이를 더욱 발전시킬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현 정국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우려가 된다.", "평화적으로 불행한 사태없이 민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90% 이상의 목표이다."는 등의 발언도 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지 약 20년 후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용서와 포용'을 강조하며 김종필DJP연합의 상징적 조건으로 내걸었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 208억 원의 예산을 책정해 지원한다. 1999년에는 대구광역시를 방문하여 "나는 맹세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했지만 사람 박정희를 미워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를 이룬 것도 있지만 국민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확신감을 갖게 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공이 크다.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라며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

김대중은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대해 “당시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핍박당한 당사자이기에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말했으며, 직접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당시 참여연대·민주노총 등이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라는 단체를 결성해 반대하는 등 저항도 컸지만 임기중인 2002년 1월 착공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의 과(過)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뒤엎고, 인권과 생명을 유린하는 과오를 범했다”는 비판도 했다. #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했을 때부터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간 서로 대립하고 갈등했던 두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만남의 순간은 딱 한 차례 있었다. 1968년 새해를 맞아 당시 국회의원 김대중은 7살 많은 박정희 대통령과 인사차 만난 적이 있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7대 총선에서 내건 목포 지역 공약 이행을 부탁했고, 박정희는 시원하게 "그래야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5분여 동안 나누었던 대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훗날 김대중은 당시를 회고하며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얼굴 어떤 얼굴인가 한번 본다고 갔어.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엄격한 인상 아니야, 냉철하고. 그런데 가니까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더라고."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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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직접 찾아와 "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고초에 대해 사과드린다”며 박정희 정부받았던 탄압에 대해 용서를 구한 적이 있다. 김대중의 반응은 "죽은 박정희가 살아 돌아와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만 같았다."였다고. #


2.2. 김영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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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박정희 대통령-김영삼 신민당 총재 영수회담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집권하자, 당시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은 반(反)군부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남산 멧돼지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할 뻔했다. 다만, 배후에 박정희 정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다.[1]

김영삼의 회고록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1975년 영수회담에서 김영삼과 박정희가 단독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은 권력에 미련이 없고 곧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김영삼에게 약속했지만, 바로 아래 단락에 서술된 박정희의 행보를 봤을 때 그 약속에 진심이 담겨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1979년 YH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뒤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고,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으며, 결과적으로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어 유신 체제를 붕괴시켰다. 10.26 사건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를 조문하면서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라고 했으나... 200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에 "총 맞아도 싸다" 고 생각했다고 밝힌 걸 보면 그냥 겉치레일 가능성이 높다.7분 20초부터 사실 이게 본심이었단다

2009년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

2012년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박근혜칠푼이다."라고 혹평할 정도로 김영삼의 박정희 일가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17년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대표가 당사에 대한민국 보수정당을 상징하는 인물들인 이승만·박정희·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을 걸기로 하면서 김영삼은 공교롭게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 박정희와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민정계, 박정희·김종필 등 구군부의 공화계, 그리고 김영삼의 민주계3당 합당을 통해 창당한 민주자유당이 자유한국당(現 국민의힘)의 실질적인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주자유당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TK 군부세력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PK 민주세력의 물리적 결합이었던 셈이다.[2] 이승만은 4.19 혁명 이후 자유당이 공중분해 되어버렸기 때문에 현재의 보수정당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초대 대통령이기도 하고 어쨌든 보수주의 대통령이었던 것은 맞기 때문에 같이 걸어둔 듯.

2.3. 김종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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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보병 소위로 임관해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배속되어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육사 2기로 임관하여 현역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재직 중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을 이유로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으로 파면당한 후 백선엽의 도움을 받아 문관 신분으로 직제에도 없던 정보국 상황실장 직을 맡고 있었다. 정보국으로 배치된 육사 8기생들에게 전투정보과장 이후락이 상황실장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했는데 박정희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나한테는 인사할 필요 없다"라며 자리를 피해 버렸지만, 이후 박정희와 육사 8기생들은 서로 죽이 맞아 어울려 다녔다. 일명 대한음주당이란 주당들 모임을 결성하여 틈만 나면 모여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친목을 다질 정도였다나.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정희의 중매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와 처삼촌-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묶이게 되었고 이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 입장에서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거의 항상 임자라고 불렀다.[3]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선 시절에, 김종필은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쿠데타 실행을 김종필 자신이 계획해 먼저 박정희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 후 김종필은 군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후신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기간 동안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자리잡았다. 정보기관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내며 훗날 주요 권력기관으로 부상하는 중앙정보부의 기틀을 다졌다. 의회정치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와는 달리,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 시절 민주공화당 창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물러나고 잠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나게 된다. 이 때 남긴 표현이 그 유명한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이후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하여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초기에는 반대하였으나, 설득과 압박에 눌려서 결국 찬성으로 전향하였다.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된 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다음 차례에는 대통령이 되어보나 했는데...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해버렸다. 유신 이후에도 박정희에게 적극 협조하며 국무총리직을 장기간 유지했고, "통일, 외교, 국방, 중화학공업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가 알아서 하라"는 박정희의 신임으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보기 드문 실세 총리로 역임했다.

물론 실세 총리라도 결국 절대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아래 서열인,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75년,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다.[4]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되고 김영삼, 김대중과 "빠른 시일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민주공화당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른 후임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지만, 김종필 본인이 직선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박지원김종필이 사석에서 박정희에 대해 한번도 좋은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정권시절 36살에 중앙정보부장, 45살에 총리를 역임하며 최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해왔지만, 박정희의 행태에 원한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고 평가한다. 특히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를 중앙정보부에 조사하게 하여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박정희가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딸한테 약점이 잡혀 아무 소리도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2.4. 노태우[편집]


둘이 처음 만난 것은 노태우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로, 당시 박정희는 5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전두환친구인 노태우에 대해 박정희는 전두환이 밟았던 대로 그대로 보직을 따라가게 만들어줬다. 또한 박정희는 노태우가 전두환의 절친이라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에 버금가게 대우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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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전두환이 작전차장보를 할 때 노태우를 행정차장보로 삼아줬고 그 이후 계속해서 전두환이 갔던 길을 노태우가 그대로 밟게 해줬다. 그리고 박정희 본인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노태우가 사단장에 도달했을 때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박정희가 사망하고 정확히 42년 후인 2021년 10월 26일에 노태우가 오랜 투병생활 끝에 숨을 거둠으로써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기일이 같게 되었다.

2.5. 윤보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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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4.19 혁명 이후 들어선 대한민국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을 역임했다. 하지만 의원내각제 체제였기에 실질적인 권한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있는 상징적 국가원수였다. 그마저도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버렸다.

쿠데타 직후 박정희가 계엄령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윤보선을 만나러 청와대에 왔는데, 윤보선의 반응은 "올 것이 왔구나..."였다고. 장면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신파를 증오하던 윤보선은 쿠데타로 장면 내각이 축출된다는 사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계엄령을 승인하고 반란군 진압을 포기해버린다. 반란군을 무력 진압할 것을 촉구했던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각하의 이런 결정으로, 앞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군부 통치가 계속될 겁니다." 라고 경고했다.

대통령 사임 이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맞붙었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전력을 들춰냈고, 이에 박정희는 매카시즘으로 몰아가지 말라며 반격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빨갱이 사냥' 때문에 수많은 피해자가 생겼던 경상도(거창 양민 학살사건), 전라도(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도(제주 4·3 사건)에선 이런 종북몰이 수법을 쓰는 윤보선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박정희가 우세하게 되었다. 게다가 윤보선 진영에서 "부산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영남권이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덧붙여 귀족적 성향의 윤보선보다는 서민 출신인 박정희가 농촌이 많았던 영호남 지역에서 지지를 얻기에 더 유리한 것도 있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진 다음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후로 정신적 지주 등 '정신적'이라는 말이 꽤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2번째 대선에서도 낙선하며 체면을 구기게 된다. 대선에서 2연속 낙선하긴 했지만, 유신시대에도 김대중 등과 함께 사회 원로로서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윤보선은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어쨌거나 대통령을 역임했기 때문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도 있었지만, 그가 죽기 전 이미 이승만, 박정희 두 명의 독재자가 현충원에 안장됐다는 이유만으로 현충원 안장을 거부했기 때문에 유해는 현충원이 아닌 충남 아산에 위치한 가족 묘지에 안장됐다.


2.6. 이승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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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는 박정희 당시 5사단장
현대에는 두 사람의 지지층이 겹치는 경향이 있지만, 정작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박정희 본인의 집권에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장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5]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아울러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 평가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등을 이승만 집권기에 겪은 바 있다.[6]

박정희는 발췌 개헌 당시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상관인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두 번째 계획이었다. 본래 5.16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계획되었다. 시행날짜는 3월 15일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8일이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그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 대통령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평가는 영결식 당시 연설과 전혀 다르다. 내용 일부 발췌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의) 그게 독립운동이냐, 그따위 경력으로 정치에 나서 당파싸움이나 유발했다. 그 경력 자체가 엉터리다.'라고 평가했는데, 이것은 아직도 기록에 남아있다.''' #[7]

2.7. 전두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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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입장에서 박정희는 반평생을 섬겼던 그의 상관이었다. 박정희가 소장이던 시절에 전두환은 대위에 불과했으니 계급 차이가 상당했었다.[8] 나이 차이도 14살이니, 당연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찍소리 못했을 수밖에 없다.#

5.16 군사정변 직후 전두환은 지지시위를 벌임으로써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두환에게 있어 박정희는 주군이자 은인인 셈.

박정희는 전두환을 위해서 불법 조직인 하나회를 만들어 주고 이후 꼭 하나회 출신들 위주로 진급시켜주었다. 대위까지는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느렸던 전두환이었지만 박정희의 도움 덕분에 소령은 그 계급을 달고 있는 척만 하고 사실상 생략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짧게 달고 있었으며 중령부터는 되려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빨랐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잘해야 중령 정도에서 제대했을 전두환은 순전히 박정희 덕분에 장성급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박정희 덕분에 당시 장성급들도 못 건드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이게 어찌나 심했던지 12.12 군사반란 당시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이 3명의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의 부하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둘 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 독재자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둘에 대한 평가의 차이는 아주 극명하다. 박정희는 독재를 했음에도 농업 국가였던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및 국가 인프라 구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공이 있다. 문제는 1972년 이후 체육관 선거를 했다는 것.[9] 전두환 정부 시기에도 3저 호황 덕분에 경제는 좋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저호황의 원동력이었던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가 전두환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 이상 전두환의 공이라고 보기도 힘들뿐더러 전두환은 집권 과정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체육관 선거에 근거한,[10] 민주주의에 완전히 어긋나는 독재자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다.[11] 박정희는 보수정당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부 민주당계 정치인들도 산업화에 대한 공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으나, 전두환은 극우 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좋아한다고 봐야 한다. 또한 이후의 행적 역시 두 사람의 평가를 가르는데 물론 박정희는 측근인 김재규에게 암살 당하면서 생을 마쳐서 이후 행적이 없긴 하지만 전두환은 퇴임 이후 광주 폭동 발언이나 추징금 미납, 손녀 전수현의 한국 비하 발언 등으로 사망한 이후까지 비판을 받고 있다. 단순히 호남 지역에 대한 반감으로 옹호하거나, 1980년대 경제 황금기에 대한 향수 때문이지 전두환 개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12]

2.8. 박근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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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딸인만큼 당연히 국내 정치인들 중 박정희와 가장 연관이 깊다. 사실 박근혜는 (육영수와의) 세 자녀들 중에서도 좀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 죽은 육영수를 대신하여 5년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며 아버지 박정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정치인이 되고, 대통령까지 당선되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박근혜의 성향이나 정책도 대부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 사후에 박정희의 재평가를 위한 많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박근혜의 외모는 박정희도 많이 닮았지만, 본인이 여성인만큼 기성세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인지 주로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박근혜의 정치성향이나 통치기법 등 여러 부분이 박정희를 따라한 부분이 많았다. 사실 박근혜에게 박정희는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였다.

3. 해외 정치인[편집]



3.1. 페르디난드 마르코스[편집]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는 1917년생 동갑내기, 비슷한 시기에 집권(박정희는 1961년, 마르코스는 1965년), 서로 닮은 외모[13] 등 공통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다. 1966년 2월 박정희는 동남아시아 순방을 계획하면서 필리핀에 초청 의사를 타진했으나 마르코스는 "시간이 없다"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박정희는 이를 갈면서 "건방진 사람, 두고보라지. 앞으로 우리가 몇 년 내 필리핀을 앞설테니. 그리고 10년 후 우린 선진국이 되고 필리핀은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테니 두고봐….."라며 반드시 필리핀을 추월해버릴 것을 다짐했다.[14] 결국 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세계적 선진국이 되면서 박정희 역시 독재자이기는 해도 그 공을 인정받으나, 마르코스의 필리핀은 그 기간동안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본인 역시 부정부패와 사치로 욕을 먹었으며 미화된 현재까지도 박정희에 비해 세계적으로는 비판 여론이 우세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마르코스는 당시 한국이 주최하려던 월남전 참전국 정상회의의 주최국을 대미 외교력을 동원해 필리핀으로 변경시켜 박정희를 분노케하기도 했다. 이 때 박정희는 '마르코스, 이 나쁜 자식. 윤리도 도의도 없는 놈.'이라고 했었다고. 회담을 위해 박정희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에도 정상들 중에서 가장 작은 방을 배정해 줬고, 다른 외국 정상들과는 잘만 얘기하다가도 박정희와 마주치면 입을 꾹 다물고 지나쳐버렸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당시 필리핀 언론들은 한국의 월남파병을 비난하며 박정희를 "매파의 우두머리",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으로 묘사했다. 회담 이후 박정희는 다시는 필리핀을 방문하지 않았다.

먼 훗날 마르코스의 아들이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면서 두 사람 다 대통령 자녀를 둔 대통령이 되었다.

3.2. 선통제[편집]


만주국 육군대학 시절 수석으로 졸업하여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 푸이에게 금시계와 은사품을 하사받았다. 아돌프 히틀러와 대면했던 손기정과 더불어 한국인으로서는 실로 드물게 추축국 지도자와 대면한 경우이기도 하다.

4. 측근[편집]



4.1. 김계원[편집]


1969년 중앙정보부장, 1971년 중화민국 주재 대사, 1978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고 10.26 사건 당시 현장에 함께했으며 이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된 후 1982년에 집행정지로 석방, 1988년에 특별사면 및 복권되었다.

4.2. 김재규[편집]


같은 구미 출신이었고 해방 직후 육사 2기 동기였다. 5.16 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간주되어 감금되었다가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보안사령관, 제3군단장 등 1973년까지 군인으로 남았다가 그해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9대 국회에 입문했다. 1974년 건설부장관, 1976년에 중앙정보부장에 선임되며 의원직에서 물러났고 1979년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 자리에서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본인은 고인 채 썩어있던 해당 정권을 끝내고 후퇴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진술했다.

4.3. 이후락[편집]


5.16 정변 직후 미국에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보고했다가 이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구제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민정 이양 뒤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3선 개헌 직후 김형욱과 더불어 경질되었으나 불만을 내보인 그와는 반대로 처신했다. 이후 주일본 대사, 1970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신임을 잃고 또 퍼포먼스를 보이려 했는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묵인 하에 지시했지만 그해 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직후 출국해서 잠적했다가 이듬해 2개월여 만에 귀국하고 은둔 생활을 하다 1978년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공화당에 입당했지만 10.26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4.4. 차지철[편집]


5.16 정변에 가담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전속부관, 의장경호실 차장을 지내다 전역하고 민정 이양 뒤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10월 유신 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1974년에는 문세광 사건으로 사퇴한 박종규의 후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으나 10.26 사건 당시 박정희와 더불어 김재규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1] 김대중 납치 사건도 현재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이후락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누가 납치를 지시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아낼 길이 없다. 그나마 김종필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범행을 지시해놓고 박정희한테 갑작스럽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납치 사건을 매우 비판했다. 나중에 김대중과 결별한 후에도 "이 사건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노린 테러"라고 언급했다. [2] 훗날 김영삼이 집권함에 따라 민주계가 주류가 되면서 김종필과 결별하고,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고, 당명까지 신한국당으로 바꾸면서 민정·공화계는 보수정당에서 완전히 청산되는 듯 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라는 문민정부 최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정계에 입문하면서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후 15대 대선, 16대 대선에서 이회창이 민정·공화계와 민주계 양쪽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두 세력간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봉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대 대선한나라당 경선에서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 YS키즈 이명박이 대립하면서 보수정당의 계파갈등은 더욱 깊어져 갔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자,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계에 대한 공천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레임덕을 겪고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르던 때인 2012년 19대 총선에선 반대로 친이계가 공천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도 대통령이 되었으나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탄핵, 구속되어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이로써 구심점을 잃은 친박계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친이계도 수장 이명박이 다스 실소유주 논란 등으로 인해 구속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음에 따라 와해되었다. 현재 국민의힘은 당내 가장 큰 두 세력이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셈었지만 지금 2022년 현재 친박 친이를 이어 친윤이 구심점을 유지하고 있다 애초에 친박+친이=친윤이기 때문에 계파갈등이 크게 없다 지금 바른정당계인 친유 친오친홍 친안이 있지만 그들은 예전 친박, 친이 및 현재의 친윤보다 너무 세력이 작기 때문이다 그중 친유는 이준석 징계로 인해 크게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3] 사실 박정희는 대부분의 측근들을 임자라는 호칭으로 불렀다.[4] 박정희의 조카와 결혼을 한 조카사위인데도 감시받는 상황에서 당내 견제에도 시달려야 했다.[5] 이승만도 조선왕족들의 귀국을 불허했으니 어찌보면 전정부 탄압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6] 다른 야사로는 6.25 전쟁 당시에 박정희가 군대에 머물면서 자신은 죽어라하고 싸우고 있는 와중에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자 길길히 날뛰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서로의 사이는 많이 안 좋은 듯 하다. 1차적으로는 여순사건이 박정희와 이승만의 앙금을 만드는데 기여했고, 2차적으로는 전후 진급심사에서 곽영주가 자신의 남로당 행적때문에 진급을 누락시키려하자 백선엽이 말려 겨우 진급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7] 실제로 박정희의 가족 중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된 형 박상희가 있었는데, 비록 자신이 만주군에 있었긴 했으나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고 냅뒀으며 오히려 임시정부의 실체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도 박정희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일제에게서 독립시키고자 정부를 열었으나 정작 독립군을 이끌고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당파 싸움으로 여러 번 무산 되었으며 결국에는 중일전쟁으로 여러 번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 이승만 본인도 미국한테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받으려했지만 윌슨은 만나주지 않았으며 독립 결의안도 미국 의회에서 부결당했다.[8] 그야 전두환은 최초의 정기육사 세대인 육사 11기이고, 박정희는 육사가 막 생기던 시절 육사 2기였으니 나이 차이에 비해 계급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 박정희 시절엔 육사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았던 터라 초고속 진급이 가능했다. [9]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전까지는 역대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 항시 1위였고, 대중적으로도 긍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인 편이었다. 박정희 향수를 통해 산업화 세대의 지지를 얻어 박근혜가 정치 입문을 하고 결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점이 그 증거이다.[10] 간선제 자체는 독재를 의미하지 않고,(당장 미국 대통령 선거가 간선제다) 오히려 대통령중심제+직선제의 조합이 독재에 악용될 위험을 앉고 있다. 실제로 박정희, 장제스&장징궈 부자, 수하르토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보여주기식 선거 방식으로 택한 것도 직선제였다. 전두환의 민주적 정당성이 가진 진짜 문제는 '간선제'라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간선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11]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3선) 때까지는 국민들의 직접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됐었고, 전두환과 달리 학살을 저지른 적은 없다. 이것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12]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 인터넷상에서 전두환이 그립다는 글을 쓰고 전두환이 죽었을 당시 추모하는 글이 올라오는 등 아예 없는건 아니다.[13] 1966년에 박정희가 필리핀을 방문할 당시 동행했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공항에서 두 사람이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 “저렇게 닮았을 수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목구비 하나하나까지 복사판은 아니었으나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 아담한 체구, 카랑카랑한 목소리, 특히 도도하고 당당하게 걷는 걸음걸이는 뒷모습이라면 누구든 쌍둥이라 할 정도였다고. 다만 마르코스는 170cm 로 동년배 필리핀인에 비해 되려 장신이었으나, 박정희는 동년배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에 비해서도 다소 작은 키였다.[14] 당시 한국은 필리핀에 비해 후진국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당시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69달러였으나 한국은 130달러로 필리핀의 딱 절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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