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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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박병호



1. 아마추어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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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중학교 시절부터 타고난 파워 만큼이나 타구가 강력하다는 평가가 있었다.[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구단에서도 입단 제의가 왔었다.[2]

성남고등학교에서 고교야구 최초로 4연타석 홈런을 쳐냈으며 홈런타자에 걸맞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해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아 데뷔하였다.



성남고등학교 시절 박병호의 경기 영상. 이 영상은 KBS에서 당시 중계했던 2004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화순고와의 1회전 경기 영상인데 이 날 박병호는 3연타석 홈런을 쳐냈다. 홈런 코스도 좌중우를 골고루 넘겼는데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시절임을 감안[3]해도 엄청난 파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병호는 휘문고와의 2회전 경기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쳐내 고교야구 최초 4연타석 홈런을 달성한다.

2. LG 트윈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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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LG 트윈스]] 시절

LG 트윈스의 영원한 숙제이자 염원인 부족한 우타 거포의 해결책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2005년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억 3천만원을 받고 LG와 사인했다. LG 팬들의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프로에 와서는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이라도 하는 듯, 1~2할대 초반을 쳤다. 그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으로 인해 병신이라는 별명을 붙인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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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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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도
타율
출장경기
타수
안타
홈런
타점
볼넷
삼진
2005
0.190
79
163
31
3
21
12
48
2006
0.162
48
130
21
5
13
9
42
2007 ~ 2008 상무(군복무)
2009
0.218
68
188
41
9
25
20
70

박병호의 데뷔 초창기 3년 성적.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타율과 타점, 볼넷/삼진 비율로 수많은 LG 팬들을 뒷목 잡게 했다. 심지어 동기였던 정의윤보다도 타율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제대로 된 출장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2006 시즌 후 상무에 입대해서 2군에서는 상당히 활약했지만, 군 복무를 마친 첫 시즌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2.1. 2010 시즌[편집]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연속 홈런과 호수비로 주간 MVP까지 선정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일주일이었지만 딱 일주일짜리였다.(...) 성적은 그 뒤에도 제자리를 맴돌며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최강의 2군 멤버로 군림했다. 2010 시즌 막바지에는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나주환과 정면 충돌했고, 이 사고로 결국 왼쪽 팔꿈치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게 되어 시즌을 마감했다. 그 와중에 2010년에는 서용빈 코치에게서 대놓고 따귀를 맞기도 했다는 얘기가 후일 캐스터안아프리카TV 방송에서 폭로되었다. 동영상 윤세호 기자가 직접 확인사살.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박병호가 매우 난감해했다고. 아무래도 야구계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편이다 보니 그런듯 한데, 이후 서용빈에게는 맞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를 받았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LG 시절 박병호가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알 수 있는 레그킥 타격폼. 상무 시절 이 타격폼을 만들고 좋은 성적을 기록해서 1군에서도 그대로 써먹어봤으나 처참히 실패하고[6] 다시 타격폼을 고쳤다.

이 시기 LG 팬들은 박병호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했다.

2군에서 대활약 → 1군 콜업 → 1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홈런 → 감독이 기회를 주겠다고 함 → 삽질 → 타순이 7~8번까지 내려감 → 다시 2군행

넥센 히어로즈 이적 전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2군 본즈. 2군을 씹어먹는데 정작 1군에 오면 그 기대를 저버리는 게 매년 연례행사였다. 또한 1루 자리에 최동수, 로베르토 페타지니, 이택근이 있던 상황이라 제대로 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도 LG에서 실패한 원인이었다. 어떻게든 비밀번호를 끊고 성적내는데에 혈안이 되어있어 유망주에게 기회를 허락할 여유가 없었다. 외야가 포화상태인데도 굳이 국가대표 외야수 이택근을 데려와 1루수로 기용하며 페타지니와 최동수가 떠난 1루수 빈자리를 꿰찰 기회를 말살했다.


3. 넥센 히어로즈 1기[편집]



3.1. 201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0타석 삼진을 먹더라도 내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너는 4번타자다.

넥센 히어로즈 김시진 前 감독


시즌 도중 넥센으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직후의 소감 인터뷰 심재학 코치의 트레이드 당시 회상

LG 시절 줄곧 써왔던 25번을 뒤집은 52번을 쓰기 시작했다. 25번은 송지만 선수가 이미 쓰고 있었기도 했고, LG 시절처럼 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알 수 있는 부분. 그리고...


3.2.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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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한국 프로야구 홈런, 타점, 장타율 1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처음으로 풀 타임 시즌을 맞이한 박병호는 넥센의 막강한 중심 타선의 한 축을 이루며 크게 활약했다. 2011년에 비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였으며,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선두권을 달리며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선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데뷔 후 처음으로 전 경기에 나와 20-20클럽에 가입했고 2012년 홈런과 타점, 장타율 1위에 오르면서 데뷔 첫 타이틀 홀더로 타자 3관왕에 등극, 2012년 프로야구 MVP에 올랐으며, 데뷔 첫 KBO 골든글러브(1루수 부문)를 수상했다. 넥센이 타격의 팀으로 팀 컬러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넥센의 선수 트레이드 논란은 이로써 끝.


3.3. 2013 시즌[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3 한국 프로야구 홈런, 타점, 득점, 장타율 1위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홈런왕과 골든 글러브를 차지하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2014 시즌[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4 한국 프로야구 홈런, 타점 1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병호도 50홈런 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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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2014년/9~10월#s-14.1|2014년 10월 14일 사직 롯데전]]에서
시즌 50호 홈런을 치는 모습.


10월 14일에 사직 롯데전에서 역대 3번째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가 되었다. 박병호52홈런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 4위에 랭크되었다.

하지만 데뷔 후 첫 출전하였던 한국시리즈에서는 크게 부진하였다.

3.5. 2015 시즌[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5 KBO 리그 홈런, 타점 1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1. 메이저리그 진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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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네소타 트윈스[편집]



4.1. 2016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맞는 첫 시즌. 4월까지는 좋은 성적을 보였으나 5월부터 주춤하기 시작하더니, 6월 들어서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들 중 타율 최하위가 돼버리는 바람에 많은 팬들을 걱정하게 했고 결국 한국시간 기준 7월 2일에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었고, 여기에 손목 부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게 되며 8월 26일 시즌 아웃이 확정되고 말았다.

최종적으론 메이저에선 1할 타율, 마이너에선 2할초반 타율이라는 최악의 낙제점 수준 성적을 기록했다.

4.2. 2017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7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키움 히어로즈 2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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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의 쓴맛을 맛본 박병호는 결국 2017년 11월 27일 미네소타 트윈스와 잔여 계약 해지에 최종 합의하면서 미국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연봉 15억원을 받고 넥센에 컴백하여 2년만에 KBO 무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

2017년 한해 넥센 구단이 이장석 문제도 있고 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유독 짠돌이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다. 특히 내부 FA인 채태인을 안 잡고[7] 2차 드래프트도 포기하며 9억을 얻어냈는데[8] 이것이 박병호의 복귀를 위한 포석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도 있다.

윤석민, 황재균 등을 예로 들며 메이저에서 실패한 선수들이 돌아와서 돈만 받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박병호가 메이저리그에 그냥 남을 경우 2018, 2019년 연봉은 연 300만 달러, 얼추 30억이다. 그걸 감안하면 연봉을 반으로 깎아가면서까지 연 15억에 넥센으로 돌아와 준 건 혜자나 다름없는 셈.

KBO에서 7시즌을 채우고 포스팅 시스템으로 외국 팀에 갔던 박병호는 FA 규정에 따라 앞으로 국내에서 풀타임으로 4시즌을 더 뛰어야 FA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FA 권리를 한번 행사하면 4시즌을 더 뛰어야 다시 행사할 수 있는데, 포스팅을 통한 해외 진출도일종의 FA 권리 행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네소타에서 2년간 600만 달러(한국돈 대략 66억)를 받은 박병호가 앞으로 4년간 연봉 15억을 유지할 경우 결과적으로 6년간 126억이라는 FA 계약을 맺은 것과 비슷해지는 셈이다. 다만, 성적이 부진하거나 부상을 당할 경우 연봉이 삭감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금액이 완전 보장되는 FA에 비해서는 손해가 크다. 역시 포스팅을 통해 외국 팀으로 간 류현진, 강정호도 국내로 복귀할 경우 4시즌을 뛰어야 FA 자격을 얻을 수 있다.


5.1. 2018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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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KBO 리그 출루율, 장타율 1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8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내 복귀 첫 시즌. 14, 15시즌의 커리어하이 이상의 비율기록을 찍었으나, 부상으로 30경기를 결장하며 김재환에게 MVP를 넘겨줘야만 했다.

5.2. 201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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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KBO 리그 홈런 1위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1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체적으로 투고타저가 극심해진 리그 환경에서도 30홈런을 넘기면서 건재함을 보였다.


5.3. 2020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20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상대적으로 에이징 커브가 완연해진 시즌.


5.4. 202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2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FA[편집]


2년 연속 2할 2푼대를 기록하면서 에이징 커브가 확실시 되고 있어서 FA에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년 시즌 박동원한현희가 A등급으로 가기 위해서는 박병호의 FA 신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구단도 FA신청을 하는 것이 낫다고 볼 가능성이 높다. 팬들 사이에서는 금액과 계약기간으로 논쟁이 일어나고 있고, 왜 그 성적으로 FA 신청을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팬들도 존재한다.[9]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은 오버페이하지 않는 선에서 잡기를 바란다.

11월 22일 박병호의 에이전시 측에서 언플을 하는 듯한 느낌의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20홈런을 기록하긴 했으나 타율 전체 꼴지를 기록했고 특히 보상금만 22.5억원이다. 나이도 적지 않다. 이러한 조건에서 '블루칩'이라고 언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투의 말이었다.# 당연히 호언장담할 수는 없지만 박병호의 FA 신청은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1월 23일 FA를 신청하였다.#

12월 9일 고형욱 단장과 첫 만남을 가졌으나, 간단한 안부인사만 나눴을 뿐 박병호 측에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협상이 1월달로 연기됐다. 한편 양석환을 보내고 1루가 비어 있는 친정 팀 LG에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보상금 규모도 크고 상징성도 있어서 사인 앤 트레이드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알려졌으나 소문에 의하면 kt wiz나 LG 등에서 적극적으로 사트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아무리 몰락중이라고 해도 박병호는 상징성 면에서 채태인, 김민성과는 비교도 안 된다. 팬들은 돈 싸움에서 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인 앤 트레이드로 호구짓을 자처하는 상황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

12월 28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kt wiz가 박병호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상태라는 것이 알려졌다. # 당연히 키움 팬덤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거기에 절묘한 타이밍에 이정후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의미심장한 말[10]을 하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 감지되고 있다. 같은 날 공중파 방송인 SBS[11]에서까지 키움과의 결별을 사실상 확정짓고 KT 행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손아섭NC 다이노스행도 느닷없이 계약 임박 기사가 나오고 얼마 안 가 오피셜이 떴던 만큼 박병호의 KT 행도 기정사실화됐다는 분위기인데, 키움팬들은 구단 역사상 첫 영구결번이 될지도 모를 왕년의 스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게 되었다. KT가 준비한 금액이 보상금 포함 45억~50억 정도라고 알려졌는데 팬들은 사실상 30억도 안되는 금액에 프랜차이즈를 뺏겨야 한다는 사실에 구단을 성토 중이다.[12] 공식 인스타그램은 물론이고 실명인증을 해야 글을 쓸 수 있는 공식 홈페이지의 영웅게시판 역시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28일 새벽 박병호의 배우자 이지윤 전 아나운서가 인스타 계정에서 키움을 언팔로우한 소식이 전해지고 아침엔 이정후 등 지인들의 인스타에 이별을 암시하는 포스팅 들이 나오는 데다, 저녁엔 머니투데이나 SBS 등의 복수 언론에서 결별임박 보도를 낸 것으로 볼 때 키움 프런트가 특단의 오퍼를 넣지 않는 이상, KT 행은 기정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화가 잔뜩 난 일부 팬들은 사비를 털어 키움증권 본사에 29일 오전부터 트럭을 보냈다.[13] 여러모로 서건창은 그러려니 해도 박병호 만큼은 떠나보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대다수.[14] 이적 발표 후 예상대로 모든 키움 커뮤니티가 대폭발했다.

계약 이후 그 외에도 KIA 타이거즈가 관심을 가졌었다는 후속보도가 이어졌다.

KT 행이 확정되어 키움과의 동행이 끝난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키움은 유일하게 은퇴식을 해 줄 수 있었던 전설적인 선수인 박병호마저 몇십억 내외에 갖다 파는 거지팀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을 제외하면, 박병호를 공짜로 잘 쓴 모양새가 되었다. 2011년 여름 LG와의 2대2 트레이드로 송신영, 김성현 + 15억 원과 맞트레이드되면서 넥센은 트레이드 머니로 LG에게서 15억을 받아 왔는데, 박병호가 이적 직후부터 대폭발하며 2015년까지 185홈런과 4년연속 홈런왕, 리그 MVP까지 차지하면서 주가가 폭등해 포스팅 시스템으로 MLB에 진출했고 이 때 미네소타 트윈스가 이적료로 1,285만 달러(한화 약 140억 원)을 넥센에 지불했다. 2015년까지 박병호가 받은 총 연봉 액수는 14억 8천만 원으로 넥센은 리그 최고의 거포이자 메이저리거를 공짜로 쓴 셈이 되었고 미국으로 보낼 때 150억 원이라는 거액의 이적료를 받았다. 사실상 돈 받고 쓴 셈. 그 후 박병호가 MLB 도전을 마치고 2018년 초 넥센으로 돌아왔는데 2021년까지 4년 동안 65억 원을 연봉으로 받았다. 2021년 시즌을 마치고 FA가 되어 KT로 이적했는데, 이 때 박병호의 FA 등급은 C등급이었다. C등급 선수를 영입한 팀은 보상 선수 없이 연봉의 150%를 전 소속 구단에 지불해야 하는데 2021년 박병호의 연봉은 15억 원으로, 즉 KT는 키움에 보상금으로 22억 5천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키움은 박병호로 인해 15억 원+140억 원+22.5억 원=177억 5천만 원을 벌어들였고, 14억 8천만 원+65억 원=79억 8천만 원을 박병호에게 투자했다. 단순 금액만 따져도 키움이 약 100억 원 가량의 이익을 남긴 것이며, 유니폼 판매량과 박병호로 인해 유입된 팬덤, 또한 박병호가 남긴 대기록 등등의 가치까지 포함하면 실로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7. kt wiz[편집]



파일:2022 kt 박병호.jpg

2021년 12월 29일 11시 10분, 3년 30억 원[15]kt wiz 행을 확정지었다. 보상금을 포함하면 KT는 박병호를 영입하는 데 52억 5천만 원을 사용했다.

키움에서 KT로의 이적은 FA로는 2015 시즌 후 유한준의 이적 후 6년만이고, 이적 자체로만 따지면 2017 시즌 중 윤석민의 트레이드 이적 후 4년만이다.

KT는 이번 영입으로 은퇴한 유한준의 지명타자 자리를 박병호 영입으로 해결했으며, 강백호와 1루수-지명타자 로테이션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16] 한편 키움과 박병호는 협상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해 키움 팬들은 프런트가 도대체 얼마를 제시했기에 저 금액에[17] 영구결번 1순위를 떠나보낸 거냐며 성토하고 있다.

등번호 52번은 박병호 영입 전까지 정주후가 사용 중이어서 양보받는 형식으로 52번을 달 것으로 보였으나, 정주후가 박병호 영입 전부터 구단측에 이미 등번호 교체 의사를 밝히면서 박병호는 52번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키움 입장에서는 왜 안잡냐는 말이 충분히 나올 만하지만, 반대로 KT 입장에서는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 만한 투자다. 최형우처럼 언제든 성적이 갑자기 떨어질 수도 있는 나이인데, 박병호는 이미 하락세가 뚜렷하기 때문에 돈값을 할 수 있겠냐는 의문.[18] 다만 KT는 이미 시장에 나올 때 박병호와 비슷한 나이였던 넥센 출신 우타자인 유한준으로 재미를 본 전적이 있었지만[19],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고 이적한 유한준과 달리 박병호는 2시즌 연속으로 성적 하락을 겪은 상태로 시장에 나왔다는 차이가 있다. 현장에서 장타력을 생각하고 전력보강을 요청하였다는 말이 나오고 있고, KT의 타선이 강백호와 이번 시즌이 끝나고 은퇴한 유한준 정도를 빼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때문에 잠재적인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적 후 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키움 프런트 측에서 박병호가 KT의 오퍼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금액 제시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박병호를 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잡는다 해도 다른 팀에서 오퍼가 없을 때에 한해서 싼 값에 잡으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7.1. 202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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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KBO 리그 홈런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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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2022)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적 후 홈런왕을 차지하고,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7.2. 202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병호/선수 경력/202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준수한 시즌 활약. 그러나 포스트시즌에서 희대의 부진으로 또 반지를 얻지 못했다

8. 국가대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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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이후 포텐셜을 만개하며 KBO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거포로 도약한 뒤, 무려 10년 동안 5번의 대회에 걸쳐 대한민국의 중심 타자로서 타석에 섰다.

그러나 골든 글러브와 홈런왕을 수 차례 석권하며 맹위를 떨친 KBO에서의 활약상에 비해 국제대회에서의 모습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 편이라는 평가가 대세다. 국제대회에서는 리그에서 엄청나게 양산했던 시원한 홈런을 보여준 적이 별로 없는 건 물론이고 타율 조차도 매우 낮아서 팬들의 기대를 실망시켰던 적이 더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박병호가 국가대표로 뛰었던 시기는 하필이면 06 WBC로부터 시작된 황금 세대가 15년의 프리미어 12 우승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운 뒤 기나긴 암흑기가 시작된 시점이었던 것도 컸다. 특히 19년 프리미어 12에서 양의지, 김재환과 더불어 역대 최악의 국대 클린업 의지박약을 결성하며 대회를 말아먹은 가장 큰 원흉 중 하나로 추락한 모습은 그야말로 박병호의 국가대표 경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물론 리그에서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데다 처음 보는 투수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야구 국제대회에서는 타자가 투수에 비해 훨씬 불리하다는 점은 감안 해야겠지만, 하필이면 대한민국 국대의 전임 4번 타자들이 무려 이승엽, 이대호였던 지라 비교 당하는 건 필연적이고, 중요한 순간마다 맹활약하며 국가대표를 승리로 이끈 저들에 비해 이 쪽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더더욱 초라해보이는 건 사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네이버 스포츠 기사의 댓글란이 사라질 때까지 박병호에게 수없이 악플을 달았던 악질 악플러인 국민거품 박병호는 야구 국가대표 경기 때마다 더더욱 살판나며 박병호에 대한 악플을 신나게 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거박이 박병호를 비난할 때 사용하는 주장들은 목동 드립 등 억지에 불과한 논리 들이 과반수지만, 국가대표에서의 부진 만큼은 변명할 수 없는 팩트이기에 국가대표 경기 때 만큼은 국거박에게 동조하는 네티즌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양현종, 양의지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대 암흑기를 상징하는 선수 중 하나로 꼽는 극단적인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8.1. 2014 인천 아시안 게임[편집]


이전까지 박병호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 연이 없는 선수였다. 2012시즌 맹활약으로 국대 승선이 유력했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국가대표 경험 부족을 이유로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에 밀려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5년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승선하여 커리어 첫 국제대회를 경험하게 되었다.

박병호는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선출되어 9월 15일 열린 기자회견에 류중일 감독, 김광현과 함께 참석했다. 류중일 감독은 주장으로 박병호를 선출한 배경에 대해 "베테랑 임창용봉중근도 있지만 투수는 주장 안 시킨다. 타자 중에 누가 좋은가 생각해봤는데, 박병호가 야구를 너무너무 잘한다. 50홈런 등극도 눈앞이다. 그 기를 받아서 선수들 모두 잘할 거라는 믿음으로 박병호를 선택했다"고 말했다.[20]

9월 18일 열린 LG 트윈스와의 연습경기에서는 5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9월 22일 태국과의 B조 1차전에서는 한국이 스코어 0:1로 앞선 1회말 무사 2, 3루 상황에서 삼진을 당했다. 한국이 스코어 0:7로 앞선 1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도 3루수 실책으로 겨우 출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후 두타석에서 모두 안타를 처내어 결과적으로는 4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며 밥값은 했다. 이 경기 한국은 15:0으로 5회 콜드게임 승을 거뒀다.

9월 24일 B조 8강 경기 대만전에서는 1회 첫타석에서 수비 실책으로 간신히 출루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7:0으로 크게 이기고 있는 2회말의 두 번째 타석에서 비거리 130미터의 솔로포를 터뜨려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9월 27일 준결승 중국전에서는 안타에 도루까지 보여주며 좋은 컨디션을 뽐냈다. 게다가 6회말 낮은 볼을 퍼올리며 좌측담장을 넘기는 쓰리런 홈런까지 처내며 팀을 결승행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팀 동료들의 활약에 힘입어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커리어 첫 국제경기 금메달이다.

최종 성적은 22타석 19타수 6안타 2홈런 5타점 9득점 사사구3 1도루, 타율 0.316 출루율 0.409 장타율 0.684 OPS 1.093을 기록했다.


8.2. 2015 WBSC 프리미어 12[편집]



파일:2015 WBSC 박병호.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8
7
29
6
1
1
2
4
4
0.207
0.324
0.517
0.841
1
10
4
##
2015 WBSC 프리미어 12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사실상 박병호의 커리어 첫 세계대회 출전이다.

대회내내 팀의 중심타자 겸 1루수로 출전했지만 지독한 타격 슬럼프를 겪었다. 이 대회에서 33타석 동안 안타 6개만을 때려내며 타율 0.207, 출루율 0.324에 그첬다. 볼넷을 4개 얻는 동안 삼진은 무려 10개나 당했다.

하지만 박병호가 이 대회 무용한 클린업이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박병호는 6개의 안타중 무려 4개[21]를 장타로 때려내며 0.841의 OPS를 기록했다. 다만 클러치 상황에서 번번히 범타로 물러난 것은 사실이다.

특히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22]과의 결승전 4회 때 3점짜리 초대형 홈런을 때려내며 조국을 프리미어 12 초대 우승국으로 이끌었다.

최종 성적은 8경기 33타석 29타수 6안타, 0.207/0.324/0.517, 2홈런 4타점, 4득점, 4사사구, 1도루 OPS 0.841을 기록했다.


8.3.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편집]



파일:2018 AG 박병호.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6
24
9
0
0
4
7
7
0.375
0.464
0.875
1.339
0
3
4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로써 개인 커리어 3번째 국가대표팀 합류이자, 2번째 아시안 게임 출전이다.

이번 대회 역시 박병호는 대회내내 팀의 주전 1루수 겸 4번타자로 활약했다. 대만전인도네시아전에서는 1안타씩만 기록하며 부진했지만 홍콩전 멀티히트에 이어 9회초 드디어 홈런포를 쏘아올렸다.

슈퍼라운드로 들어가서는 공수 모두 맹활약을 했는데 슈퍼라운드 일본전[23]에서는 2회말 위기를 무실점으로 넘기는 호수비를 한 이후 3회초에 홈런포를 가동시켰다.

중국전에서는 5회말 GBK 구장 백스크린을 크게 넘기는 초대형 3점 홈런을 폭발시키며 괴력을 과시했다.

일본과의 결승전 역시 맹타를 휘둘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박병호는 2:0으로 앞선 3회말 중앙 백스크린을 맞추는 솔로포를 작렬시키며 대표팀에게 추가 득점을 안겨주었다. 이 홈런으로 4경기 연속 홈런을 몰아치며 두 대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종성적은 6경기 28타석 24타수 9안타, 0.375/0.464/0.875, 4홈런, 7타점, 7득점, 4사사구, OPS 1.339

8.4. 2019 WBSC 프리미어 12[편집]



파일:2019 WBSC 박병호.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8
8
28
5
0
0
0
2
3
0.179
0.324
0.179
0.503
0
9
6
##

한국 국가대표팀의 4번 타자로 낙점 되었다. 김경문 감독은 박민우-김하성-이정후 신인 3인방이 상위 타선에서 뒤흔들고 박병호김재환, 양의지, 김현수가 이들을 불러들이는 작전을 구상했으나...오히려 이정후김하성이 출루했음에도 뒤에서 불러 들이지 못했다. 오죽하면 의지이라는 조롱이 나올 정도.

예선 라운드 1차전 호주전은 5타수 무안타, 2차전 캐나다전은 볼넷 1개로 출루했지만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특히 호주전 3~5번째 타석, 캐나다전 1~2번째 타석까지 5연타석 삼진을 당했다. 심지어 캐나다는 8회 1사 2루에서 이정후고의사구로 거르고 박병호를 골라 아웃을 잡아버리며 박병호에게 제대로 굴욕을 맛보였다.

3차전 쿠바전에서는 드디어 침묵을 끊고 4타수 2안타에 타점도 1개 기록하며 경기 MVP로 선정되었다.

슈퍼라운드 내내 부진에 시달렸던 박병호는 결승전에서 까지 끝까지 부진하였다. 28타석으로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타석을 소화했음에도 단타 5개 만을 기록하며, 이승엽-이대호의 뒤를 잇는 대한민국의 4번 타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김경문 감독은 부진에도 믿음을 주어 베이징 올림픽때 경기 내내 부진하다 준결승, 결승전에서 팀을 승리로 이끈 홈런을 기록한 이승엽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결국 마지막 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물론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2020 도쿄 올림픽 본선 티켓이라는 목표를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대회 준우승이라는 호성적까지 기록했지만 박병호의 기여는 0이라 봐도 무방한 대회였다.

사실 박병호는 2019년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 문승원에게 손목을 맞고 장타가 실종된 상태였다. 안 그래도 손목 부상에 시달리는 선수인데 손목을 맞은 것도 모자라 장타가 실종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병호의 이름값만 보고 나믿박믿을 시전했기 때문에 박병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8.5.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 2.svg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4
7
3
1
0
0
3
4
0.429
0.636
0.571
1.208
0
1
3
1사구
당초 2022년 11월 18일 발표했던 50인 관심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았으나, 2023년 1월 4일 발표한 최종 30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본선 조별리그 1차전 호주전에서 4번 1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6회 펜스 상단을 맞추는 2루타로 타점을 올렸고, 8회에는 밀어내기 볼넷으로 타점을 추가하고 제 몫을 해주고 대주자 박해민과 교체되었다. 그러나 팀은 졸전 끝에 8-7로 패배했다.

조별리그 2차전 일본전에서도 4번 1루수로 선발 출전하였고 2타수 무안타 1사구를 기록하였다. 3-4로 끌려가던 5회초 최정의 안타와 이정후의 2루타가 터지며 2사 2,3루 찬스를 맞이하였지만 뜬공으로 물러나 아쉬움을 삼켰다.

조별리그 3차전 체코전에서는 4번 지명타자로 출전하여 안타 2개를 기록하고 2회에 대주자 나성범으로 교체되었다. 밝혀진 바로는 지난 시즌 다쳤던 발목 상태가 조금 안 좋은 듯 하다.

조별리그 4차전 중국전에서는 선발 출전하지 않았으나, 근육에 불편함을 느낀 이정후의 대주자로 투입되었고, 이후 2타석에서 모두 볼넷으로 걸어나갔다.

박병호에게 기대하는 시원한 홈런포는 터지지 않았지만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충분히 제 몫은 해줬다. 양의지와 더불어 그간 국가대표에서 그리 큰 활약을 보여주진 못 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내수용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는데 성공하였다.[24][25] 특히 출루율은 이번 대표팀 타자 중 가장 높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체코, 중국전에서 기록을 올린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경기였던 호주와 일본전 두 경기 OPS가 박병호보다 높은건 양의지, 이정후, 박건우 뿐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일본전에서 기회를 무산시킨 장면이었지만 사실 거기서 기회를 살렸어도 우리나라 투수가 워낙에 무너졌기 때문에 이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현수와 김광현, 양의지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며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박병호 또한 국가대표 은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진 않았다.

9.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9.1. KBO[편집]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박병호의 역대 KBO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05
LG
79
163
.190
31
11
0
3
21
22
1
18
.265
.313
.578
2006
48
130
.162
21
2
0
5
13
7
1
11
.227
.292
.519
2007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8
2009
68
188
.218
41
7
0
9
25
28
2
24
.305
.399
.704
2010
78
160
.188
30
4
0
7
22
25
5
28
.305
.344
.649
2011
15
16
.125
2
1
0
1
3
3
0
1
.176
.375
.55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11
넥센-키움
51
185
.265
49
10
2
12
28
28
2
27
.357
.535
.892
2012
133
469
.290
136
34
(1위)
0
31
(1위)
105
(1위)
76
20
84
(3위)
.393
.561
(1위)
.954
(4위)
2013
128
450
.318
143
(4위)
17
0
37
(1위)
117
(1위)
91
(1위)
10
100
(1위)
.437
(2위)
.602
(1위)
1.039
(1위)
2014
128
459
.303
139
16
2
52
(1위)
124
(1위)
126
(2위)
8
108
(1위)
.433
(5위)
.686
(3위)
1.119
(2위)
2015
140
528
.343
(5위)
181
(3위)
35
(5위)
1
53
(1위)
146
(1위)
129
(2위)
10
90
.436
(5위)
.714
(2위)
1.150
(2위)
2018
113
400
.345
(4위)
138
20
0
43
(2위)
112
88
0
85
(1위)
.457
(1위)
.718
(1위)
1.175
(1위)
2019
122
432
.280
121
22
0
33
(1위)
98
92
(3위)
0
91
(2위)
.399
.560
(2위)
.959
(2위)
2020
93
309
.223
69
7
0
21
66
56
0
66
.353
.450
.802
2021
118
409
.227
93
23
0
20
76
48
0
61
.323
.430
.75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22
KT
124
429
.275
118
17
0
35
(1위)
98
72
5
52
.349
.559
(3위)
.909
(4위)
2023
132
431
.283
122
15
0
18
87
53
2
54
.357
.443
.800
KBO 통산
(16시즌)
1570
5158
.278
1434
241
5
380
(3위)
1141
944
66
900
.381
.548
(2위)
.929

9.2. MLB[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fWAR
bWAR
2016
MIN
62
215
.191
41
9
1
12
24
28
1
26
.275
.409
.684
0.1
-0.3
MLB 통산
(1시즌)
62
215
.191
41
9
1
12
24
28
1
26
.275
.409
,684
0.1
-0.3

9.3. MiLB[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OPS
2016
로체스터 레드윙스(AAA)
31
116
.224
26
5
0
10
19
18
0
12
.297
.526
.823
2017
111
419
.253
106
22
2
14
60
48
0
34
.308
.415
.723
MiLB 통산
(2시즌)
142
535
.247
132
27
2
24
79
66
0
46
.305
.439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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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술하겠지만, 영남중학교 야구장 쪽에 철조망이 쳐져있는 이유는 바로 박병호 때문이었다고 한다. 곧잘 강한 타구를 날려, 학교의 창문을 깨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특히, 교무실 창문을 많이 깼다고 한다.[2] 훗날 인터뷰하길, 보스턴 레드삭스미네소타 트윈스였다고 한다. 훗날 미네소타 트윈스에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입단하게 된다.[3] 그 뒤에 열린 2004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부터 고교야구도 나무배트를 쓰기 시작했다.[4] 여담이지만 박병호의 친형 이름이 박병갑이다.[5] 후술되어있듯 야구선수들 중에도 표현이나 맞춤법, 띄어쓰기가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6] 자세히 보면 최대한 고정해서 지탱하고 있어야할 오른쪽 발이 스윙할 때 굉장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스윙의 라인이 일정하지 않았다.[7] 이후 채태인은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8] 지명을 모두 패스하고, 투수 김건태금민철을 각각 NC 다이노스kt wiz로, 외야수 강지광과 내야수 장시윤을 각각 SK와 LG로 보내며 9억을 벌었다.[9] 그렇다고 돈을 제대로 안 준 것도 아니고, 15+20+15+15로 4년간 65억을 챙겨갔다.[10] 박병호, 김하성과 함께 덕아웃에서 장난치는 영상 밑에 'memory'라고 적었다. memory는 추억, 기억이라는 뜻으로 박병호와의 일이 이제 추억이자 과거로 남을 수 있다고도 해석이 가능하여 박병호가 이적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11] 이미 양의지, 나성범, 박건우 등이 이적 직전 SBS에 관련 뉴스가 보도된 전적이 있다.[12] 박병호와의 계약 규모가 그렇다는 소리지 박병호를 팔면 따로 보상금을 챙길 수 있으므로 키움 입장에서는 결국 50억 차이다. 다른 팀은 몰라도 키움은 22.5억이면 만족하고도 남을 입장임을 이미 다 고려했을 것이다.[13] 물론 스폰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히어로즈 구단에 대한 계약을 끝내라는 것.[14] 서건창은 꾸준히 하락세였던 데다가 수비에 이어 타격까지 부진했다. 이와는 달리 박병호는 수비는 건재한 데다가 장타력도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2010년대 키움의 반박 할수 없는 프랜차이즈 스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서건창의 경우에는 한현희, 안우진의 뻘짓으로 인해 당장에 구멍이 난 투수자리를 메우기 위해 트레이드를 진행한 경우이기도 해서 배경상으로도 납득이 되는 상황이었다.[15] 계약금 7억, 연봉 총액 20억, 옵션 3억.[16] 공식 계약 발표 전 박병호 영입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나오면서 강백호의 외야 이동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이강철 감독은 강백호를 다시 외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17] 키움이 작년에 최주환에게 오퍼를 넣었다는 소문도 돌았음을 감안하면 3년 30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액 계약은 전혀 아니다.[18] 이미 박병호는 18, 19년 15억, 20년 20억, 21년 15억으로 4년간 65억을 받았다.[19] 물론 당시 유한준은 시장에 나올 당시 최고의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비록 2015년에 유네스키 마야에게 마지막 삼진을 당하며 노히트노런을 본의 아니게 장식했지만, 다음번에 마야를 만나서는 그랜드슬램 포함 혼자 7타점을 올리면서 작정하고 탈탈탈 털어먹었었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타율 2위, 최다안타, OPS 1.0에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리그 탑급 타자의 성적을 기록했다.[20] 그러나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탈락했고 박병호를 왜 데려가지 않았냐는 비난이 류중일에게 꽂혔던 것도 있어서 이번에 진득하니 한 번 믿어보기로 했던 듯. 그리고 박병호는 그 믿음에 보답했다.[21] 홈런 2개, 3루타 1개, 2루타 1개[22]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은 팀이다. 마이너리그 트리플A 올스타 선수들 위주로 팀이 구성되었다.[23] 프로선수들이 제외되고 실업야구+대학야구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팀이다. 하지만, 일본 사회인야구에서도 보듯이, 게다가 일본프로야구의 프로야구단들이 로스터를 아끼기 위해 자신들의 팀에 1,2년 후에 영입되는 것을 전체로 심어둔 사실상 프로선수들에 불과하다. 이유는 2군에 외국인 용병을 무제한으로 보유할 수 있는 반면에, 보유한 만큼 국내 선수의 로스터 보유 한도도 줄기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비교하면 안 된다. 세상 어느 사회인야구 선수가 마의 기록이라 불리는 140대 공을 던지겠는가. 참고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때도 2명을 제외한 내야수 전원이 NPB로 진출해서 논란이였는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때도 몇 몇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주니치 드래곤즈와 가계약을 했다는 점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24] 공교롭게도 양의지와 박병호는 직전에 참가한 대회들에서 크게 부진했었다가 이번 대회에서 살아났다.[25] 반면 국가대표 대회에서 계속 부진했던 최정나성범은 이번 대회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내수용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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