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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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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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2005년
이름
임창용
분야
스포츠
사유
체육발전유공
체육훈장거상장(3등급)

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8
386 세이브[1]
2014년
최초의 세이브 기록 가입자

임창용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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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2.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4.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6
1997
2002
2006
2014
2017


파일: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로고.svg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1998


파일:2000 시드니 올림픽 로고.svg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
2000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은메달
2009


파일:2014 인천 아시안게임 로고.svg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14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9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4, 2015 KBO 리그 세이브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8 KBO 리그 구원왕



보유 기록(KBO)
최연소 구원왕
만 22세 115일[1]
최연소 100세이브
만 23세 10개월 10일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전
만 41세 4개월 25일[2]
최고령 세이브
만 42세 3일[3]


임창용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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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7번
서정필
(1990~1993)

임창용
(1995)


정영철
(1996)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정현발
(1995)

임창용
(1996~1998)


곽채진
(1999~200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9번
김형석
(1998)

임창용
(1999~2001)


김덕윤
(2003~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
강영식
(2001)

임창용
(2002~2006)


김문수
(2007~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5번
이여상
(2006)

임창용
(2006~2007)


오버뮬러
(2008)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번호 12번
다카기 히로미츠
(2006~2007)

임창용
(2008~2012)


이시야마 타이치
(2013~)
시카고 컵스 등번호 12번
알폰소 소리아노
(2007~2013)

임창용
(2013)


존 베이커
(201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
허승민
(2013)

임창용
(2014~2015)


박민규
(2016~2017)
KIA 타이거즈 등번호 037번
결번

임창용
(2016~2016.6.30.)


강민수
(2020)
KIA 타이거즈 등번호 12번
배힘찬
(2016~2016.6.30.)

임창용
(2016.7.1.~2018)


백용환
(2019~2021.7.2.)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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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tigers.co.kr/img_PlayerView_big_%7B%EC%9E%84%EC%B0%BD%EC%9A%A9%7D.png

임창용
林昌勇 | Lim Chang-Yong

출생
1976년 6월 30일 (47세)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백운동 까치마을[1]
(現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대성초 - 광주진흥중 - 광주진흥고
신체
182cm, 82kg, O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사우타[2]
프로입단
1995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5~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8~2012)
시카고 컵스 (2013)
삼성 라이온즈 (2014~2015)
KIA 타이거즈 (2016~2018)
해설위원
스포카도 야구 해설위원 (2020)
병역
예술체육요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상훈
체육훈장 거상장
본관
나주 임씨[3]
1. 개요
3. 피칭 스타일
4. 평가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4]

[5]

KIA 타이거즈 출신 우완 사이드암 투수.

현역 시절 해태-기아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시카고 컵스에서 활약하면서 세이브 기록으로 성구회에 가입한 최초의 투수이다.[6] 또한 1996년 한국시리즈를 시작으로 2017년 한국시리즈까지 엔트리에 있어 20대, 30대, 40대에 모두 우승을 차지한 선수이다.[7]

대표적인 별명은 창드[8] '창용불패'와 '애니콜'[9]이였다. 또한 한국인 투수 중에서 24년 연속으로 1군 리그에서 투구한 것은 임창용이 유일하다.

다만 사생활면에서는 잡음이 많았고, 말년에 삼성과 기아에서 모두 방출되면서 은퇴식도 갖지 못한 채 은퇴했다.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선정되었으나, 이 역시 마찬가지로 시상식이 열리지 않았다.


2. 선수 경력[편집]




3. 피칭 스타일[편집]


임창용의 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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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임창용포심.gif
파일:임창용투심.gif
153km/h 포심 패스트볼
146km/h 투심 패스트볼
파일:임창용슬라.gif
파일:임창용포크.gif
126km/h 슬라이더
137km/h 포크볼

전매특허 ‘뱀직구’로 탈삼진을 양산해내는 옆구리 파이어볼러로,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패스트볼를 던진 선수 중 한 명이다.[10] 구위가 정점이었던 야쿠르트 시절엔 평균 구속 150km/h대 초반, 최고 구속 160km/h를 무려 사이드암[11]으로 던졌으며, 특유의 무브먼트로 인하여 그의 패스트볼은 일명 "뱀직구"로 불렸다. 게다가 나이가 40세를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최고 152km/h의 패스트볼을 던졌는데, 이는 KBO에서 유일무이한 퍼포먼스이다.[12] 심지어 구속 상향평준화가 심한 2020년대에 와서도 전성기 평균구속이 임창용 이상인 선수는 없다.[13]

언더나 사이드로 따지자면 겨루어 볼만한 선수는 김병현 정도 일듯.그러나 그 김병현도 언더핸드로 최고구속 158을 던지는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임창용은 최고구속이 160이 나왔다.[14]

임창용이 던지는 150km/h 중반대 패스트볼의 팔이 로우 쓰리쿼터 높이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60km/h대를 던지는 선수들에 비해 팔 각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며, 이 투구폼의 궤적과 빠른 강속구가 합쳐져 만들어진 일명 '뱀직구'는 임창용의 대표적인 전매특허 구질이다. 이 공을 처음 본 일본, 특히 2ch 사람들은 '이건 뭐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15]냐?'라고 말할 정도. 사실 일본이나 미국야구에서 오버핸드/높은 스리쿼터 투수가 포심 그립을 잡고 노골적인 테일링(tailing)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가 드물다. 애초에 이런 무브먼트가 있어도 잘못된 것이라고 교정하는 경우가 많다.[16]

다만 전성기 때 임창용 투구폼은 공이 언더핸드 경계선에서 릴리즈될 정도로 낮았는데[17], 그럼에도 140~150km/h의 속구가 나왔다. 그러나 2003년 즈음부터 그간 혹사의 대가였는지 기존 폼에서의 구속이 감퇴하기 시작, 시즌 초 고전하다가 우연히 팔각도를 올려 던진 게 주효하여 이후 팔각도를 좀 더 들어올려 던지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임창용은 구속 증가의 효과를 보았지만[18], 공의 변화가 그만큼 약해지면서 2004년 이후 일본 진출 전까지 부진했던 하나의 원인이 되고 만다.

파일:임창용포심.gif

임창용의 전매특허 뱀직구. 패스트볼인데 궤적이 휘는 것이 포인트. 사실, 사이드암 투수의 경우, 투수가 던지는 팔 기준으로 백스핀을 넣을경우, 던지는 손 방향으로 양력이 발생하며, 거기에 오버핸드랑 달리 양력 반대방향으로 중력이 억제하는것도 아니기에 양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면서, 공기 흐름상 던지는 손 방향으로 테일링이 발생하기에 테일링 패스트볼을 던지는게 전혀 놀라운 게 아니다. 단, 임창용의 경우, 월등한 수직회전 효율(회전축)과, 회전수, 그리고 구속이라는 삼위일체를 통해 사이드암 투수중에도 유독 위력적인 테일링 패스트볼을 던지기에 뱀직구라는 별칭이 붙는 것. 야구의 구질 항목에 나오듯 원래 패스트볼이라도 회전축이 조금은 틀어질수 있는 만큼, 완전히 똑바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지금도 사이드암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갔다.

패스트볼이 주력인 거의 원피치형 투수로, 그 외로 던지는 변화구는 슬라이더를 주로 던진다. 그 외에도 싱커나 스플리터[19], 커브 등 있을 건 있다. 슬라이더는 좋은 편이지만 최고 반열에 올려놓을 정도까지는 아니고, 싱커나 스플리터는 괜찮은 편이며 커브의 경우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국내 복귀 이후로는 나이가 많아져서 생기는 구속 감소 때문인지 변화구 구사율이 갈수록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주력 구종은 패스트볼이다. 뱀직구 때문인지 몇몇 이들은 투심도 구사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2018 시즌을 앞두고는 아예 오랜만에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커브와 투심, 체인지업까지 장착했다고 밝혔다. 커브의 경우 두 가지 폼을 사용하면서 존 안으로 넣어 루킹 삼진을, 바깥으로 보내 헛스윙 카운트를 버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투심과 체인지업까지 연습하는 것으로 보아 구속 저하를 대비해 범타 처리를 늘리려는 듯 하다.

한물 갔다고 평가받았는데 일본에 가서 이처럼 화려하게 부활한 이유로
  • 혹사가 없어짐
  • 동기부여
이렇게 둘을 들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뛰었기 때문에 공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한 프런트나 감독과의 불화설도 종종 보도되었고, 개인 사생활 측면에서도 물의를 빚는 등 야구 내외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일본 진출 직후 '모든 것을 잊고 야구에만 전념하겠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그 말 속에 일본에서의 호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농담으로 도는 얘기로 2005년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실은 이게 부상 치료용 수술이 아니라 신체 강화 수술이 아니였냐는 소리도 있다. 이 당시에 배영수의 10km/h를 훔쳐갔다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배영수는 같은 수술을 받은 뒤 시속 150km/h에 육박하던 속구 구속이 10km/h 이상 떨어져 긴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배영수가 1년 늦게 수술했으므로 도둑질이란 건 농담이지만 배영수가 재활 뒤 복귀한 2008년에 좀 모자란 듯한 성적을 낸 반면 같은 해 임창용은 일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다시 태어나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2009년에는 배영수가 패스트볼 구속이 135도 못 넘을 정도로 아예 충격적으로 몰락한 반면 임창용은 160km/h를 찍는 등 날아다녀 대비되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전문가들은 임창용이 40대의 나이에도 150km/h를 육박하는 강속구를 뿌려대는 비결을 유연성으로 보고 있다. 투구 시 테이크 백, 스트라이드, 릴리즈까지의 동작이 매우 빠르고 역동적인데다가 유연성이 뛰어나 젊은 투수들 보다도 더 많이 뒤로 젖혀지고 스트라이드 동작의 폭이 크기 때문에 공이 많은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공에 가뜩이나 횡방향의 회전이 많이 실리는 사이드암 스로(Side-arm throw)인 것에 더해 더 많은 회전을 추가해 뱀처럼 휘어들어가는 뱀직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도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 대신 스트레칭과 런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웨이트를 하더라도 하체쪽에만 집중할뿐 상체쪽에는 크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웨이트로 인해 과도하게 근육이 붙어버리면 유연성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관련 기사 특히, 임창용은 오버핸드 투수도 아닌 옆구리의 사용비중이 높은 사이드암 스로기에 그 영향은 더욱 더 크다.

비범한 멘탈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신력 역시 강한편이다. 심지어는 주자있는 승부처에서도 신 구종테스트하는 기행도 종종 있었을 정도. 정신력이 강하기에 승부를 피하지 않고, 스트라이크존에 압도적인 포심을 쑤셔넣는 것에 가려져서 그렇지. 커맨드 자체는 커리어 대부분 동안 평균 이하 ~ 딱 평균 수준이었다. 최전성기 평가를 듣는 일본시절 4자범퇴 드립이 나왔던것도 압도적인 투구내용을 보여주는 중에도 심심하면 볼넷을 한두개씩 주거나, 가운데로 쑤셔박다가 단타를 얻어맞았기 때문. 특정 코스를 노리는 제구력을 지닌 투수하곤 거리가 멀었다. 대신, 엄청나게 강력한 정신력으로 어떤 때든 스트라이크존 근처에는 쑤셔넣을 수 있을 정도는 됐으며 그 포심이 대놓고 가운데로 들어온다는걸 알아도 그걸 공략하지 못하는 타자들이 수두룩했다. 이 때문에 과거 부상 여파, 노쇠화로 패스트볼 구위가 하락했을때 난타를 당하기도 했다. 기아에서 맞이한 말년이 되어서야 이 커맨드 능력이 좋아졌다.

단점으로는 스트라이드가 크고 사이드암 투구폼으로 인해 도루저지가 약한 편이며 데뷔한 지 오래된 투수답게 인터벌이 엄청나다. 거의 25초가 넘어가는 인터벌을 지니고 있어서 경기 진행이 느린 편. 투구 시간 제한이 없던 옛날 투수들, 한 구 한 구 집중이 필요한 불펜투수들이 인터벌이 느린 경향이 있는데 임창용은 둘 다 해당한다. 컵스 데뷔 전을 보면 5분 동안 공 3개 던지는 환장하는 인터벌을 보여줬다. 현역 중 인터벌 느린 투수로는 꼭 손꼽히는 투수. 이 때문에 도루 저지 및 견제에 불리한지라 한화와의 시범 경기에서 홈스틸을 허용하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다.

평균적으로 인터벌이 빠를수록 타자에게 수싸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적게 주기 때문에 투수에게 유리한 경향[20]이 있고, 야수들 또한 지치기 때문에 인터벌이 느리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저 성적을 낸 것이니 역설적으로 임창용의 엄청난 구위를 보여준 셈이다.

4. 평가[편집]


"나는 밖에 나오면 보잘것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사회생활은 잘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야구장에 있는 동안은 프로선수로서 부끄럽지 않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임창용 선수의 본인 평가 #


한국에서 구대성과 함께 유이하게 불패라는 수식어를 가진 투수이며, NPB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렸고, 40대 초반이 될 때까지 강속구를 뿌리며 프로에서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한국 야구계의 역대급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사생활 논란과 여러 구설수로 인하여 크게 저평가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쌓은 업적과 기록이 매우 높아 대체로 한국 야구를 통틀어 최고의 사이드암 투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96년~1999년까지 100이닝+를 소화해왔고, 마무리 투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97년 이래 세이브 순위에 늘 꾸준히 들어왔다. 오승환 등장 전까지 KBO 최연소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으며, 1998년에는 1점대 ERA도 찍었고[21] 1999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ERA 1위를 찍지 않나, 주전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향하더니 1선발로 등극하는 등... 아무튼 대단하고 놀라운 기록들을 많이 세우기도 했거니와, 일본 시절 전까지 전성기 대부분이 혹사로 점철됐고 토미 존 서저리도 받았지만 선수생활 후반부에 가서도 그 구속을 유지했다는 건 놀라움을 넘어 무섭기 그지없다.

의외로 마무리뿐만 아니라 선발 투수로의 능력도 대단한 투수다. 전성기 적이었던 2001년~2003년 잠깐 고정선발로 뛰었던 당시 삼성의 토종 1선발 자리를 꿰찼다는 것과, 선발 로테이션제가 확립된 2000년대 야구에서 달성하기 어려워진 200이닝+를 달성했다는 것, 선수 생활 말년에 선발로 떠밀렸는데도 버텨서 일정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선발 투수로서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커리어 대부분을 마무리 대신 고정선발로 뛰었어도 300세이브에 필적하는 대기록을 수립했을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의 투수. 어쩌면 고정선발은 혹사가 덜한 편이니 커리어 대부분이 고정선발이었다면 마무리 300세이브 이상의 대기록을 세웠을 수도 있다. 우완 역대 최다승이라든가...

선수 초중기 엄청난 혹사를 당하고도 오랫동안 활동 했었으며, 고무적인 것은 2016년 기준 커리어 22년차인 노장인데도 140~150Km을 넘나드는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30대 중반에 160Km의 강속구를 던지기도 했다. 타자에 비해 투수의 수명이 짧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놀랍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유연성을 중시하는 특이한 자기 트레이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2001년~2003년은 선발로도 뛰었었다.

실상 마무리로는 3년 연속 130이닝을, 선발로는 200이닝까지 던진 적이 있을 정도로 레전드급 혹사의 아이콘이다.

다만 커리어에 비해서는 상운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전성기 때 두 부문에서 경쟁을 하다가 한 부문 빼고 꼭 경쟁자에게 밀리거나,[22] 한 부문에서 경쟁하다 아예 밀려버리곤 했다.[23] 게다가 큰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여 포스트시즌 경력은 많은데 MVP 한 번 수상한 적이 없다.

그의 속구는 뱀직구라 불리며, 속구를 던지면 심한 테일링이 걸리면서 공이 뱀 같이 들어온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게다가 제구까지 되니 무시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덕에 전성기 때는 오승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90년대 후반, 당대 최고의 마무리라 불리던 진필중에 대적했던 유일한 마무리 투수였기도 하다. 다만 전성기 중무리 활동과 선발 전향으로 인해 세이브 수에서 꽤 손해를 보았다.

일본으로 진출하고는 단 4년만에 100세이브를 돌파했으며 야구르트에서 특급 불팬으로 활약을 펼쳤으며 30대 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없는 선수가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해서 메이저리그에 승격할 정도이면 그의 자신감과 실력 또한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발도 빨라 대주자로의 가치도 있는 선수이다. 예?

국내 투수들 사이에서는 사이드암의 전설로 통한다. 이는 많은 사이드암 투수들이 임창용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이 잘하면 제2, 제3의 임창용이라 불리지만 이들은 아직까지 원판 임창용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단점으로 지적되는 건 큰 경기에서 좋지 못하다는 점인데,[24] 분명 해태 시절까지만 해도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중 무려 3세이브를 거두는 등 제 몫 이상은 하는 선수였으나 1999년 삼성에 넘어간 이후부터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친 적이 별로 없었다. 특히 99년 플레이오프 당시 경기는 삼성 쪽으로 기울고에서 탈탈 털렸던 게 트라우마였는지 일본 진출 전까지 포스트시즌에서는 정규시즌 때보다도 못한다고 욕을 들어먹곤 했다.[25] 그러나 돌이켜 보면 큰경기에 약했다고 평가받은 삼성시절의 임창용은 역대급 혹사를 받았다는 것도 생각해야 된다. 단적으로 99시즌 임창용은 마무리 투수였음에도 규정 이닝을 채웠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혹사를 당했다. 별명이 애니콜이였던 만큼 제대로된 준비투구도 없이 등판한 적이 많았었고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혹사로 누적된 피로로 인해 구속과 구위저하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컸을 것이며, 위 플레이 스타일에서 언급된 구속과 구위, 멘탈에 비해 떨어지는 컨트롤 능력으로 통타를 맞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대차출은 많이 되었으나 활약상이 그리 크진 않다.

사실 임창용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애기했듯이 신인 때부터 사생활 관리에 약점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해태 2군 감독이던 김성근이 임창용의 사생활을 고치기 위해 한 달을 같이 먹고자며 훈련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임창용이 머리 염색을 했던 것을 직접 해결하지 못하고 당시 2군에 있던 이순철 등의 고참들에게 원상복구를 부탁하는 등, 사생활 문제를 고치진 못했다. 2003년 급기야 간통사건을 저질렀고, 2015년 큰 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은퇴한 뒤에도 세금 체납 및 상습 도박을 저질렀다.

의외로 행운아 기질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을 터뜨리고 쫓겨난 게 큰 행운이 되어 여론의 호전과 함께 고향팀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 2013년 미국 진출 당시 소속팀 시카고 컵스의 리빌딩에 힘입은 빠른 승격과, 최종적으로 자리가 나서 메이저리그에 콜업될 수 있었던 것을 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임창용의 피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노력을 보여주듯 임창용의 통산 WAR은 54.71로 2022년 기준 투수 중에서 5위이며 [KBO 40주년] 프로야구 레전드 40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임창용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지라 시상식은 열리지 않았다.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 참고.


5.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창용/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묘하게 이연걸하고 닮았다. 형제처럼 닮았다. 시카고 컵스로 이적한 임창용. 이젠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분과도 묘하게 닮았다. 이목구비만 놓고 보면 이 분과도 느낌이 비슷하다.
  • 투수이지만 발이 대단히 빠른 걸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부터 삼성 시절까지 드물지만 대주자로 나오곤 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편이다.#1#2 [26]


  • 삼성에 있을 때에 프런트나 감독과 불화설이 있었던 것과 달리 정현욱, 권오준,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 등의 삼성 시절 후배들은 임창용을 많이 따른다. 특히 이들 중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과는 비시즌 기간에 같이 여행을 가거나 당구치면서 밥값 내기를 한다고.

  • 자신의 전성기가 해태에서의 4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연도를 적자면 1995~1998년. 또 삼성으로 이적한 뒤 2~3년간도 페이스가 좋았다고 언급했다.[27] 해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8년을 포함해 1998, 1999, 2000년 동안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하기도 했었다. # 기사 말미 참조.


  • 일본 진출 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유는 임창용의 성인 '임'을 일본어로 イム라고 적는데, 이를 합치면 일본 한자로 부처{仏(佛)}를 의미하는 글자가 되기 때문. 2채널의 응원 스레드에는 임창용이 등판할 때 イムイム로 도배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통칭 미스터 제로로 통한다. 일본에서 무실점 경기를 오래 이어가서[28] 붙은 별명인데 이후 기록과 상관없이 한국에서도 쓰이기도 한다. 야쿠르트에서 미스터 제로라 불릴 수 있는 선수로는 2008년에 히어로즈에서 잠시 뛰었던 다카쓰 신고뿐이었다. 참고로 임창용(林昌勇)이라는 이름을 일본어 훈독으로 읽으면 '하야시 마사오'라는 평범한 일본식 이름이 되는데 일본시절 동료들이 매직으로 그의 모자에 ハヤシマサオ라고 카타카나로 써주면서 친해지는 계기도 되었다고 한다.

  •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락에 동그랑땡을 싸온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친구가 동그랑땡만 자꾸 뺏어먹어서 그만 먹으라고 했더니, 반찬에 침을 뱉고 도망치길래 화가 나서 포크수저를 던졌는데 그만 포크수저가 친구 머리에 꽂혀버렸다. 인생 초구 포크볼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올래 야구할래라고 물어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싫었던 임창용 어린이는 야구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니폼을 가져왔더니 부모님은 유니폼을 도로 무르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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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창용의 별명 중 하나로 "창드"가 있다. 그룹 빅뱅 소속 가수 권지용이 G-드래곤을 예명으로 사용하는데 이걸 본따 팬들이 진갑용을 갑드라고 불렀다. 그래서 임창용은 창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에 쓰인 한자는 龍이 아니라 勇이다. 2012년에 심창민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일부 삼성 팬들은 시속 150km대의 속구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라는 점과 이름에 창이 들어간다는 점 등을 임창용과 연관지어 "심창드"라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칭찬하는 뜻이다. 사실 한국프로야구 사이드암 투수 중에선 거의 전설적인 존재라서, 딱히 삼성 투수들 말고도 사이드암으로 누군가가 조금만 잘던지면 순식간에 그 선수는 XX의 임창용, X창용이 된다. 물론 그 중에 원판을 뛰어넘은 투수는 지금까지 없다.

  • 2003년에 이혼을 한 적이 있다. 이모씨와 2003년 1월에 혼인신고를 했고[29], 2월에 이혼 신청을 한 것이다. 이혼소송 관련 기사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카더라들이 있지만 적당히 걸러 듣자. 이후 재혼해서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 마구마구2 for kakao에서 2014년도 선수가 추가될 때, 2014 임창용은 처참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최고등급 8볼 플래티넘으로 나왔다. 마구마구 선수정보
    • 마찬가지로 마구마구에서도 2014 임창용이 레어로 추가되었다. 하지만 팀에게 너무 퍼주는게 아니냐고 유저들이 반발하였지만, 수정은 없었다.
    • 임창용이 이후 여러 사건사고로 인해 이미지가 손상되면서 마구마구에서는 임충열로, 마구마구 모바일에선 임춘영으로 개명당하고 말았다.(...)

  • 전성기였던 1999년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진필중과 비교된 적도 있었는데, 그해 중무리를 한 임창용은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역시 중무리로 돌던 진필중이 구원승을 더 따는 바람에 임창용은 세이브포인트 딱 1P 차로 구원왕을 놓쳤다. 그러나 서로 거의 비등비등했던 1999년 외에는 정확하게 비교가 불가능한데 1998년까지 진필중은 선발을 겸업했으며, 이후 2002년까지 진필중이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반면 2000년에는 임창용이 안식년을 가졌고, 2001년부터는 선발로 전향하였다. 그리고 임창용이 다시 마무리로 전향한 2004년 진필중은 먹튀가 되어있었다.

  • 2017년 2월 18일 일본 오키나와 전지훈련 중 갱신 기간이 지난 일본 운전면허로 무면허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벌금 30만엔(약 302만원)을 내기도 했다.

  • 커리어 내내 유독 이승엽과의 불화설이 많았다. 1999년 임창용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같은 팀 동료가 된 초반에는 동갑내기다 보니 서로 친했다고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임창용이 애니콜이라는 별명을 얻어가면서 팀을 위해 굴렀는데도 이승엽에 비해 푸대접을 받아서라느니,[30][31] 시드니 올림픽 도박파문 때 임창용이 현장에 있지도 않던 이승엽을 끌어들여서라느니...항상 흉흉한 소문이 도는 탓에 둘 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던 시절엔 언론에서 둘 간 라이벌리를 밀기도 했을 정도였다.[32] 다만 이승엽이 2003년 8월 9일 그 유명한 LG 서승화와의 벤치클리어링을 벌였을 당시 임창용이 가장 먼저 서승화에게 달려들어 옷이 다 찢어질 때까지 이승엽을 대신해 싸워준 적도 있는 걸 보면 아이러니.[33] 그래도 동갑내기에 같은 고졸신인 동기라는 공통점이 있고, 일본 진출 후 삼성 2기 때는 각자 투타 베테랑으로 후배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지 서로 나름 잘 지냈다고 한다.

  • 2017년 기준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선발등판 없이 규정이닝을 기록한 선수이다. 1999시즌에 138.2이닝을 선발등판 없이 기록했다.

  • 일본에서는 여전히 사이드암 + 파이어볼러 하면 임창용이 대명사 수준으로 불리우고 있다. 사이드암으로 강속구를 뿌리는 유망주 투수가 나오면 '제 2의 임창용' 또는 '○○의 임창용'이란 수식어가 종종 언급되며 니코동에서 프로야구 게임 관련 영상, 특히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선수 육성 과정을 사이드암 + 파이어볼러 테크로 타면 십중팔구 임창용이 언급된다.

  • 해태 타이거즈 시절 고작 4시즌 밖에 뛰지 않았지만 고향팀에 대한 애정은 그 이후로도 한결같았는데, 생애 첫 FA 요건을 갖춘 2004년에는 소속팀 삼성과의 불화도 아랑곳 않은 채 시즌 내내 KIA 타이거즈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았으며 시즌 후 협상 과정에서도 삼성과 2년 18억원의 계약을 맺은 뒤 KIA로의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돌출 행보로 구설수에 올랐다. 선수 본인도 고향팀에 가고 싶어했고, 부모님도 고향팀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결국 FA계약 하루만에 계약무효를 외치는게 말이 되냐며 삼성이 들고나와 임의탈퇴 위기까지 몰리고 KIA 또한 FA 시장 철수로 인해 임창용의 영입을 거부하면서 모양새가 꼬였지만 훗날 일본에 진출하여 화려하게 재기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인 셈. 2011년에는 "가능하다면 마지막 시즌을 KIA에서 보낸 뒤 은퇴하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고향팀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는데 그로부터 5년 후 드디어 고향 팀에 돌아왔다. 그러나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 도박하다 걸려서 삼성에서 방출당해서 KIA로 갔으니 임창용이나 KIA나 좋은 소리는 못들었다. 삼성 시절에 세이브든 승리든 담담한 표정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다르게 기아 시절에는 그런대로 경기 내용이 좋으면 표정을 밝게 짓는 편이다. 그리고 2017년 시즌 후 2번째 FA 기회가 왔지만 "나는 KIA에서 1년, 1년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면서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KIA에서 방출당하면서 임창용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 유망주 시절에는 타격 재능도 있었던 선수다. 광주일고와의 친선경기에서 김병현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냈고, 3학년 때는 충암고와의 화랑대기에서 홈런을 치기도 했다. 프로에서는 1998년 4월 27일 OB(현 두산)전에서 4-2로 앞선 9회초 2사 1·2루서 상대 마무리 진필중을 맞아 2타점 좌월 2루타를 기록한 뒤 세이브를 올렸다.

  • 프로 누적년도가 쌓이면서 다양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기록이 나올 때 던졌던 기념구를 잘 챙기지 않고, 그 대신 경기가 끝나고 해당 기념구를 관중들에게 나누어준다. 아마도 기념구 하나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 기록을 눈으로 본 관중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의미인 듯 하다.

  • 사실상 2018 시즌 끝으로 KBO 복귀가 힘들어진 가운데 2019년 1월 2일 대만언론 'SETN'은 "임창용이 2018 시즌을 마치고 KIA 타이거즈에서 방출된 뒤 에이전트를 통해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대만 구단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매체는 "임창용은 지명도가 있지만 이닝 이터 능력이 의심받고 있다. CPBL 구단들이 대부분 선발형 외국인 투수를 찾고 있어 임창용의 리그 진출은 쉽지 않다"며 임창용의 대만행을 회의적으로 봤다.



  • 야구를 하는 건 재밌지만 보는 건 재미없다고 한다.

  • 자신은 롤모델이 없다고 한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했을 당시에는 키가 176cm를 기록했는데, 23살 때까지 키가 계속 커서 182cm까지 성장했다고 한다.

  • 2021년 3월 24일부로 팬더TV에서 'BJ창드'라는 이름으로 BJ 활동을 하고 있다. # 유튜브나 아프리카 냅두고 벗방 전문인 하꼬 플랫폼에서 방송을 하는 이유는 팬더TV 사장과 친구라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썰이 있다.

  • 2021년 3월부터 사회인야구 4부 성남SB리그 소속의 팀인 도깨비 야구단에서 뛰고 있는 게 밝혀졌다. 4부리그라서 전력으로 던지지는 않고 일부러 110~120km/h대의 구속으로 던지고 있다고 한다.#

  • 가족들이 성남시 판교 쪽에 거주하고 있어 비시즌에는 판교에서 지내고, 시즌 중에는 임창용 혼자 가족들과 떨어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면서 경기가 없는 월요일이나 서울 원정을 올 때 가족들을 만난다고 한다.# KIA에서 방출된 뒤에도 광주 집을 정리하고 판교로 올라가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하며, 위에도 언급했듯이 성남시 사회인야구 리그에서 뛰는 걸 보면 은퇴 후에도 판교에 계속 거주하는 듯 하다.

  • 야구 레슨장을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 우승 보너스에 대해서 썰을 간략하게 풀었는데, 본인이 해태에 있던 시절 우승한 시즌인 1996년, 1997년과 삼성에 있던 시절 우승한 시즌인 2002년, 2006년, 2014년 5번의 시즌의 우승 보너스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해태에 있었을 당시 천만원대[34]였고, 삼성에 있었을 당시 억대였다고 밝혔다.[35]

  • 2022년 9월 19일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 중 <전천후 투수> 부문에 송진우, 구대성, 김용수와 함께 선정되었다. 통산 성적 및 임팩트만 보면 등재되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문제는 레전드 올스타 40인 명단이 발표되기 전 이미 상습도박 혐의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는 것. 이에 KBO는 소개 페이지에 해명문을 덧붙였는데, 임창용이 실형을 선고받기 전 이미 모든 부문에서 투표가 모두 완료된 상태였으며 선수의 굴곡 또한 야구 역사의 일부기 때문에 순위와 평가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시상식의 경우, 다른 선수들은 구단이 거절해도 KBO 주최로 포스트시즌에서 시상식을 열어주기로 했으나 임창용은 아예 시상식을 생략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후 2023년 9월 6일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서 40인 선정 소감을 전했다.#

  • 2023년 8월 16일 전설의 타이거즈에 진흥고 선배이기도 한 박진철과 함께 출연했다.# 2년 선배인 박진철의 요청에 따라 강제로 출연하게 됐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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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까치마을 유래비에는 마을의 상징인 까치고개의 역사와 함께 임창용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민의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진행된 비석 건립이 후원자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임창용이 건립비용 900만원을 후원했고, 주민협의회는 성금 300여만 원을 보태 2015년 10월 까치마을 유래비를 세웠다.[2] 기본적으로 사이드암이지만 경우에 따라 쓰리쿼터로도 던지는 경우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 그런데 KBO 리그 홈페이지에서는 우언우타로 나온다. KBO리그 사무국은 사이드와 언더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 다시말해 우사란 표기가 없고, 다 우언이다.[3] 정자공파 30세 택(澤) 순(淳) 항렬이나 형제자매 모두 항렬자를 쓰지 않았고 아버지 임영치(林榮治) 또한 족보에 일명으로 임종회(林鍾會)로 기록되어 있을 뿐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큰아버지 임종복(林鍾福), 숙부 임종현(林鍾鉉)은 29세 종(鍾) 항렬을 사용하였다.[4] 엄밀히 말하자면 속도는 방향을 포함한 벡터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이다. 굳이 고치자면 '속도'를 '속력'으로 바꾸면 오류가 없다. 아오 이과시치[5] 2013년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당시 했던 말. [매거진S] 임창용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다사다난했던 임창용의 선수 시절을 돌이켜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 되었다. 사실 이 말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했던 말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저서로도 알려져 있지만 원조는 괴테가 먼저이다.[6] 통산 386세이브로 한국인 투수 최다 세이브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오승환이 그의 기록을 넘어섰다.[7] 다른 선수는 은퇴한 진갑용 코치와 SSG 랜더스의 김강민.[8] 창드래곤(용)[9] 투수 분업 시스템이 명확하게 자리잡기 전인 2000년대 초반 시절 감독이 부르면 언제든지 올라온다고 해서 당시 삼성전자의 휴대폰 브랜드명을 딴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10] 스피드(Pitching Velocity) 기준으로 치면 한국 야구계에서 정상급 성적을 기록한 선수들 중 안우진, 박찬호 다음으로 빠르다. 구위까지 치면 김병현, 오승환 정도까지 비견될 만하다.[11] 현재 MLB에서도 사이드암으로 이 정도 구속을 던지는 선수는 거의 없다. KBO에선 정우영이 그나마 현재 사이드암으로 임창용 다음가는 구속을 보여주고 있긴 한데, 2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임창용의 구속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임창용이 2000년대 후반, 심지어 30대 중반에 저런 구속을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것이다.[12] 최고 156km/h를 던졌다고 알려진 '끝판대장' 오승환도 39세 시즌 최고구속은 150km 전후였다. 그만큼 노쇠화는 투수의 구위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는 임창용이 다른 투수들에 비해 노쇠화가 상대적으로 덜 왔다는 말이 된다.[13] 안우진 153km, 고우석 153km, 정우영 152km. 다만 안우진은 선발이다.[14] 통상적으로 팔꿈치각도가 낮을수록 구속이 느림으로 김병현이 단기임팩트만보면 훨씬좋다. 그러나 김병현은 발목부상이후 계속해서 폼이 하락했기에 야구생활 전체로 보면 어쩔 수 없이 임창용이 앞선다.[15] 그래서 과거 파워프로에서는 '슈트 회전(シュート回転)'이라는 페널티 어빌리티로만 구현돼 있었다가(효과는 구위에 마이너스 보정) 2022가 되어서야 슈트 회전의 정반대 기능인 '내추럴 슈트(ナチュラルシュート)' 어드벤티지 어빌리티가 추가되었다.[16] 적어도 과거에는 완전히 폼까지 뜯어 고칠정도로 교정을 했지만, 선수 코칭 방향이 단점을 교정하기보다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현대 야구에서는 포심에 한해서는 회전축을 변경하는 방식으로만 최소한의 교정을 하며. 그것도 안되는 것 같으면 제구에서 손해를 좀 보더라도 매커니즘상 회전 효율성, 즉 구위를 위해 아예 포심 대신 투심, 싱커계열의 그립을 잡게한다. 최근에 대두되는 조던 힉스, 호세 알바라도같은 하드 싱커볼러들이 바로 이 케이스. 가능하면 포심의 테일링 무브먼트를 교정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테일링 무브먼트를 살릴거면 오버핸드는 싱커/투심 그립 잡고 던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속도 이론과 제구를 생각하면 테일링을 줄이고, 체감구속을 더 끌어올리는게 베스트인데 테일링된 포심은 좋게 말하면 둘 다 가진 구종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구위도, 제구도 못잡고 이도 저도 아닌 구종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찬호는 포심의 테일링 때문에 LAD~TEX 선발투수시절 커브를 비롯한 제구가 어렵다는 변화구보다도 포심의 제구가 고질적인 문제였으며, 텍사스 시절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포심의 테일링을 과거보다 줄였고, 이후, 테일링 패스트볼을 활용할땐 투심 그립을 잡고 투구했다.[17] 대략 김병현 투구폼의 팔각도보다 약간 높거나 비슷했다.[18] 팔각도가 올라가기 전까지 임창용의 최고구속은 153~4km/h였다.[19] 일본 진출 시기쯤 장착. 애시당초에는 포크볼을 연마한다고 했지만 원래 포크볼이라는 구종이 사이드암 투수가 던지기엔 꽤나 어렵다 보니 결국은 스플리터로 선회했다.[20] 물론, 타이밍을 뺏는 기교파 투수들의 경우, 오히려 인터벌이 길면 타자 입장에서는 던질 타이밍을 예측하기 힘들고 오히려 생각이 많아져서 투수에게 유리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걸 가장 잘 활용했던게 톰 글래빈.[21] 정작 평균자책점 순위는 2위였다.[22] 1998년 구원&평균자책점 - 정명원에게 평자책 밀려서 2위, 1999년 구원&평균자책점 - 진필중에게 구원 밀려서 2위. 99년의 경우 세이브는 1위였으나 진필중이 구원승으로 커버치는 바람에 밀린 것이다.[23] 1997년 구원 - 이상훈에게 밀림, 2002년 투수 골든글러브 - 송진우에게 밀림.[24] 통산 포스트시즌에 37경기 출전하여 72.0이닝 1승 6패 9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13. 승패와 평균자책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규시즌 성적에 비해 좋지 않고, 특히 중요한 순간에 임팩트 있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서 체감상으로는 더 낮게 평가되는 감이 있다.[25]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상대팀의 조용준과 비교되며 과하게 까였다.[26] 투수 대주자라 하면 해괴망측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투수들이라고 항상 크게 몸을 불린 체형은 아니다. 게다가 투수 포지션은 선수단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항상 장거리 러닝 훈련을 소화하고, 심지어 순발력을 위해 스프린트를 하는 투수들도 상당수. 실제로 주력으로만 따지면, 야수보다 발이 빠른 투수들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임창용은 발 빠른 야수와 비슷한 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여담으로, 투수 대주자의 경우 다른 팀에서도 가끔 가다 볼 수 있다. 단적으로 602 대첩의 임정우이진영을 대신해 주루플레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 다만 투수가 주루 도중 부상을 당하면 골치가 아파서 어지간하면 투수를 대주자로 잘 쓰지는 않는다.[27] 기록상으로 임창용의 전성기는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한 1996년부터 선발 200이닝+를 찍은 2002년까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넓히자면 2004년까지.[28] 2009년 시즌 개막이후 20경기 연속 무실점 기록.[29] 실제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던 듯.[30] 지금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고주의가 더 심했을 때라, 둘의 활약이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 대구경북에서 나고 자란 로컬보이 프랜차이즈 이승엽 VS 타팀 출신 이적생 임창용의 구도라면 절대 임창용이 이승엽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임창용은 일본에서 뛰던 시절 삼성에 서운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31] 실제로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연봉 협상 과정에서 삼성은 이승엽의 연봉을 3억으로 동결시켜준 반면 임창용의 연봉은 2000만원이 삭감된 1억 8000만원을 제안하는 바람에 임창용이 스프링캠프 도중 훈련을 중단하고 돌연 귀국해버리기까지 했다. 임창용 본인에 의하면 2000년 시즌 자신도 팀 마무리로 활약했기 때문에 이듬해 연봉 협상 때 1억 인상을 희망했는데 오히려 삼성 구단은 전년도(1999년)보다 떨어진 성적을 기록한 이승엽의 연봉은 동결시켜줬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연봉은 깎으려고 했다고...#[32] 일본 진출 첫 해 임창용이 이승엽을 삼진으로 잡자 한국에서 있을 때의 푸대접에 설욕했다는 투의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다만 임창용이 일본에 진출한 2008년 이후부터 이승엽이 본격 하락세를 탄 반면 임창용은 커리어 최절정기를 보냈으니 이 때는 임창용이 더 주목받으며 우위를 보였다.[33] 이 때 벤치클리어링 영상을 보면 임창용이 서승화에게 달려들어 싸워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싸우느라 옷이 다 찢어진 걸 볼 수 있다.동영상 33초부터 참고로 이 때 임창용은 선발투수로 뛰고 있었고, 사건이 발생한 8월 9일 경기에서도 선발투수로 등판해 6.2이닝 4실점으로 투구하고 들어갔다. 보통 선발투수들은 팔 보호 또는 컨디션이나 멘탈 관리를 위해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져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셈이다.[34] 당시 해태가 어려워졌던 시기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해태 선수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해태가 구단 재정 사정이 넉넉치 않아 보너스가 많지 않았고 삼성은 우승만 하면 큰 돈을 풀 준비가 되어있는데 우승을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삼성 선수들은 '이번 한 번만 져주시오', 해태 선수들은 '그래 이번에 너네가 우승하면 보너스는 나랑 나눠갖자'고 할 정도였다.[35] 전 삼성 소속이자 현재 NC 소속인 심창민도 살짝 언급을 했었던 사실인데, 심창민과 임창용 두 명이 같이 우승했던 시기가 2014년이었고, 스톡킹에서 언급한 바로는 심창민도 당시 억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2010년대에 우승보너스가 억대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