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국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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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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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0px-GoldenHorde1300.png
주치인 울루스
اولوس جوجي
Ulūs-i Jūchī [1]
Улус Джучи [2]

파일:킵차크 칸국 국기.svg

국기
1237년 ~ 1502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쿠만
모스크바 대공국
크림 칸국
몽골 제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이흐 칸국
카자흐 칸국
위치
북아시아, 동유럽 일대
수도
사라이 바투
정치체제
군주제
지도자

주요 칸
바투 칸
토크타미쉬 칸
언어
중세 몽골어, 킵차크어[3], 러시아어
종교
텡그리, 이슬람, 기독교
종족
몽골인, 킵차크인, 쿠만인, 루스인
통화
풀(Pūl), 솜(Som)

1. 개요
2. 구성 칸국
3. 역사
4. 한국
4.1. 건국
4.2. 통치
4.3. 쇠퇴와 멸망
5. 역대 칸 목록
6. 멸망 이후
7. 역사보기 틀 모음




1. 개요[편집]


킵차크 칸국은 몽골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설립된 4대 칸국 가운데 하나이다. 표제어인 킵차크 칸국은 몽골이 튀르크와 함께 이 곳에 오기 전 이전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세 튀르크계 민족인 킵차크인에서 따온 것이다. 킵차크인들이 살게 된 이후 이 지역을 킵차크 초원이라고 불렀으므로 몽골인들이 세운 왕국 역시 킵차크 칸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해외 학계에서는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 金帳汗國, Золотая Орда)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데, 이는 킵차크 칸국이 망하고 난 후인 16세기에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황금 천막에 붙인 별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킵차크 칸국이나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이란 명칭은 당시 몽골인들이 사용한 명칭이 아닌 외부 세계의 호칭인 것이다.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들의 몽골인 지배층들은 킵차크 칸국이 주치가 분봉 받은 영지에서 시작된 국가였기 때문에 주치인 울루스(주치 씨족의 영지)라고 불렀다. 2015 개정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울루스에 대한 표현을 강화하면서 주치 울루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2. 구성 칸국[편집]


파일:킵차크 칸국.jpg
서방 학자들의 견해에 따른 위치설정, 실제론 서부가 백장 칸국, 동부가 청장 칸국

킵차크 칸국은 크게 동부의 청장 칸국과 서부의 백장 칸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청장 칸국은 주치의 장남인 오르다 칸이 주치가 최초로 분봉받았던 지역에서 건국한 칸국이다. 백장 칸국은 주치의 차남이자 오르다 칸의 동생인 바투 칸이 러시아등 서방을 원정해 점령한 지역을 바탕으로 건국한 칸국이다. 즉 주치가의 본가는 청장 칸국이고 분가가 백장 칸국인데 정작 킵차크 칸국 즉 주치인 울루스의 대칸은 백장 칸국의 칸이 대체로 겸직했다.[4] 이렇게 된 이유는 주치 사후 주치의 여러 아들들 중 가장 능력있고 세력이 강한 바투가 주치인 울루스의 통치권을 계승했기 때문이다.[5] 이때 주치의 장남이던 오르다 역시 자신의 몸이 원래 약한 이유를 들어 바투가 계승하는 것을 지지했다. 러시아 등 서방 원정도 오르다가 몸이 약해서 바투가 주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칭기즈칸의 장남이던 주치가 몽골 초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킵차크에 자리를 잡았을까? 그 이유는 원래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장자는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땅을 물려받는 것이기 때문이다.[6]따라서 칭기즈 칸의 장자인 주치가 러시아 초원 일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원래는 장자인 오르다가 자기 땅을 가지기 위해서 서방 원정을 해야하지만 몸이 약한 관계로 오르다는 아버지 주치의 원래 분봉지에 남고 차남인 바투가 서방 원정을 단행해 자기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주의할 점은 금장 칸국처럼 청장 칸국 백장 칸국의 명칭도 몽골의 러시아 지배 시에는 사용되지 않고 정작 킵차크 칸국이 멸망한 16세기 이후에나 사용된 용어란 점이다. 킵차크 칸국이나 다른 칸국등 몽골인들은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과 오르다 칸의 지배 영역을 주치인 울루스라고 호칭했다. 즉 청장 칸국이든 백장 칸국이든 모두 주치인 울루스이고 울루스 내부에서 주치가의 서열에 따라 영지가 분봉된 것뿐이다.

문제는 위의 지도에는 청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위치가 앞의 설명과는 다르게 청장 칸국이 서부이고 백장 칸국이 동부에 위치해 있다는점이다. 러시아 연대기 등 러시아 측에서는 자신들을 지배하고 타타르의 멍에를 씌운 바투의 칸국 즉 서부 지역을 백장 칸국이라 칭하고 그 동부를 청장 칸국으로 칭했다는 점이다. 반면에 서방 학자들은 러시아의 기록들과는 반대로 서부를 청장 칸국. 동부는 백장 칸국으로 명명했다. 보통 알려진 청장 칸국, 백장 칸국의 위치는 서방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기술되고 있다.

서방 학자들이 서부를 청장 칸국, 동부를 백장 칸국으로 오해한 것은 러시아 연대기에서 청장 칸국을 왼쪽 날개. 백장 칸국을 오른 쪽 날개로, 몽골(일 칸국)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 자료에서는 청장 칸국을 왼손으로,백장 칸국을 오른손으로 호칭한 것을 서양의 방위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즉 서양에서는 왼쪽이 서쪽, 오른쪽이 동쪽이다. 하지만 몽골인의 관점에서는 왼쪽 날개.왼손 즉 왼쪽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으로 동쪽을, 오른 날개.오른손 즉 오른쪽은 서쪽을 의미한다. 따라서 왼쪽 날개.왼손으로 표현된 청장 칸국은 동부에 위치하고, 오른쪽 날개.오른손으로 표현된 백장 칸국은 서부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연대기나 페르시아 자료는 모두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저술된 자료라서 몽골인의 지리개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몽골인들이 북쪽에서 남쪽을 보는 기준으로 동서를 구분하는 것은 몽골인들의 시선이 언제나 풍요로운 정주문명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몽골 북쪽은 항상 황량하고 지독하리 만치 추운 시베리아다. 당연히 몽골인들의 시선은 언제나 남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들의 지리개념도 이에 따른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 정주문명권에서도 중국의 오방색의 개념으로 왼쪽을 동쪽, 오른쪽을 서쪽으로 보았다. 오방색에 따르면 동쪽은 푸른색, 서쪽은 흰색인데 이는 청장과 백장의 구분이 오방색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이유는 다르지만 몽골 등 유목민족이나 중국등 정주 문명 모두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다. 튀르크인들도 이에 영향을 받아 방위개념이 동일하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조선은 수도 한양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기준으로 좌 우를 나누었다. 조선 수군전라좌수영이 경상도옆에 붙어 있고, 전라우수영은 서해 지역 수역을 관할했던 것이 이 때문이다.


3. 역사[편집]




4. 한국[편집]


부여족(백제왕족)의 후예설
부여(扶餘) 녹산(아사달)왕조(鹿山王朝)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 진무천황(神武天皇)이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 후손이고,또한 부여족(扶餘族)=서이족(徐夷族)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고추불가제국(현재,타타르 자치공화국) ,1차 불가리아제국을 세웠다.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 융과 여동생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余(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余(餘)氏)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扶余(餘)氏)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余(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https://open.kakao.com/o/gBQB1q6c



4.1. 건국[편집]


칭기즈 칸의 장남인 주치가 칭기즈 칸에게 분봉 받은 영지가 모태가 되며, 주치의 아들 바투우구데이 칸 제위 시기 유라시아 서부 초원 지대를 휩쓸고 다니면서 사실상 킵차크 칸국의 기틀을 닦았다. 전성기 영토는 서쪽으로 현재의 몰도바, 벨라루스우크라이나,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북쪽으로는 현재의 러시아, 남쪽으로는 흑해 연안까지 이르렀던 국가다.

바투 사후 제위에 오른 동생 베르케는 본격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기틀을 닦았다. 무슬림으로 개종해 킵차크 칸국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고, 뭉케 칸의 명령을 받들어 인구 조사를 실시해 원활한 징수를 가능케 했다.

킵차크 칸국이 러시아 남부 스텝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루스인[7]들이 그동안 몇 세기에 걸쳐 터전을 닦아 놓은 가장 좋은 토지의 대부분을 뺏겼다는 뜻이었다. 이후 루스의 인구와 경제 활동, 정치적 중심은 모스크바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러시아 북동부로 이동하게 된다.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가 끝난 후 각 대공들간의 소모전으로 인해 쇠락한 경제가 미처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몽골인들이 무거운 징수를 일삼자 루스인들은 큰 부담을 안고 말았다.


4.2. 통치[편집]


몽골인들이 왕족으로 최고 계급이었고 튀르크계들이 관료나 상인 등의 중간계급으로 나머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하였다. 14세기 초 우즈베크 칸이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 이후 몽골인들도 이슬람화하였다.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국가들의 전신이 된 나라이다. 오늘날 볼가 타타르인의 직계 기원은 킵차크 칸국의 몽골계·튀르크계 지배층 남성이 슬라브계 피지배층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얻으면서 세대를 거듭함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점차 슬라브화된 경우 및 아예 슬라브계 백인 피지배층 남성이 출세를 노리거나 지즈야를 내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 그리고 킵차크 칸국의 후계 국가들이 러시아에 정복당한 후 킵차크 칸국 몽골계·튀르크계 지배층의 후손들이 러시아 치하에서 종교만 빼고 슬라브화된 경우다.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이룬 주치와 바투의 군대는 몽골인이 적고 튀르크인 지배자들이 많았다. 특히 타타르인들의 조상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이 킵차크 칸국과 그 후계 국가를 타타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획득한 영지도 원래 킵차크인의 거주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초기부터 튀르크족의 영향을 짙게 받아 몽골과 튀르크의 문화가 섞였다. 국가 초기부터 지배자였던 튀르크들이 믿고 있던 이슬람을 몽골인들이 받아들이고, 우즈베크 칸이 즉위한 이후로는 사실상 튀르크족의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칸의 후예답게 기존 가톨릭동방정교회에 매우 관대하였다. 심지어 우즈베크 칸은 교황으로부터 관대한 기독교 정책에 대한 감사편지를 받았고 우즈베크 칸 또한 교황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의 아들 자니베크 칸이 정교회의 모스크바 대주교를 불러 자기 아내의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킵차크 칸국은 루스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국들을 칸국의 속국으로 편입하였다. 루스인들은 일정 부분 자치를 인정 받은 대가로 종주국인 킵차크 칸국에게 의무적으로 공물을 납부해야 했으며, 칸이 요구하면 군대까지 지원해야 했다. 이렇게 1240년부터 1480년까지 칸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을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몽골-타타르의 멍에(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라고 부른다. 원나라를 비롯한 다른 칸국들과 달리 킵차크 칸국은 루스인들과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지도 않고 동화되지도 않았기에 정복 이후에도 루스인과 몽골인은 문화적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킵차크 칸국이 제대로 정착한 이후 베르케 칸의 시기부터 남쪽의 일 칸국과 티격태격해댔다. 일 칸국이 들어선 영역이 몽골의 전통으로는 칭기스 칸의 장자 주치의 땅, 곧 '주치인 울루스'로 여겨졌으며, 또한 훌라구가 페르시아 지역을 점령한 후 킵차크 칸국에서 차출된 지휘관들을 숙청하고 병력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칸들이 오고타이 칸국을 지원하면서 원나라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카이두 사후 그럭저럭 원의 권위를 인정하고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크림 반도제노바인과 제휴하여 크림 반도에서 볼가강 하류,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교역 루트를 장악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는데, 당시 융성한 모습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 베르케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묘사에 잘 드러나 있다.

몽케 칸을 찾아간 뤼브룩의 기욤이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특사 카르피니도 이 루트를 통해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킵차크의 칸들은 루스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루스 도시 지배자들을 이용하였다. 이 중 가장 충실한 심복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이반 1세부터 본격적인 대공의 지위를 받아 징세관 역할을 수행하였다.[8] 때로 모스크바 대공들은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도시들이 칸을 섬기지 않는다며 칸에게 밀고했고 그때마다 킵차크 칸들은 징벌 원정을 통해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종주권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모스크바 대공이 칸에게 호출당했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4.3. 쇠퇴와 멸망[편집]


킵차크 칸국은 흑사병의 유행과 더불어 우즈베크 칸의 후계자 자니베크 칸이 1357년 암살당하면서 삐끗하기 시작했으며, 1360년 이후 20년에 걸쳐 '대혼란'이라고 부르는 계승분쟁 시기를 겪였다. 이 시기 권신 마마이가 등장해 여러 칸들을 갈아치우면서도 나름대로 킵차크 칸국의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국이 점차 성장하면서 킵차크 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시도했으며, 1380년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러시아 제후 연합군에게 마마이가 패전하면서 체면을 구겼다.[9]

한편, 킵차크 칸국의 동부에서는 티무르의 지원을 받은 토크타미쉬가 우루스 칸을 몰아내고 청장 칸국을 장악했다. 나아가 토크타미쉬는 1381년에 세력이 약해진 마마이를 몰아내고 킵차크 칸국 전역을 통일해 '대혼란' 시기를 어느 정도 수습했다. 또한 1382년에는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모스크바를 털면서 러시아에 대한 종주권은 다시 인정받았지만, 과거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동맹 관계에 있던 티무르 제국이 손에 넣은 페르시아를 탐내 타브리즈를 약탈한 것을 계기로 동맹은 결렬됐고, 여기저기에서 티무르에게 갈리다가 1395년에는 결국 수도 사라이 베르케까지 털렸다. 이때 사라이, 아스트라한 등 킵차크 칸국의 주요 도시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티무르 제국으로 끌려간 것을 계기로 킵차크 칸국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킵차크 칸국이 전통적으로 일 칸국의 영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인간흉기 티무르에게 도전한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킵차크 칸국의 권위는 와해되고 영내 여러 부족과 토후들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칸위에서 쫒겨난 토크타미쉬는 예전부터 킵차크 칸국과 우크라이나 일대를 놓고 경쟁해오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망명해서,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과 함께 킵차크 칸국을 공격했다. 리투아니아의 팽창은 1399년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티무르가 임명한 테무르 쿠틀룩 칸과 에미르 에디구가 리투아니아군을 궤멸하면서 멈췄다. 하지만 이미 킵차크 칸국은 리투아니아에게 우크라이나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의 흑해 진출을 허용했다.

킵차크 칸국의 말년에는 여러 칸들이 번갈아 즉위하며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군벌이자 킹메이커, 망기트 부[10]의 수장 에디구가 부상했다. 에디구는 전술했듯이 리투아니아의 침공을 격퇴하고, 1408년에는 조공을 거부하던 모스크바 등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고 불태워 킵차크 칸국의 위신을 세우려 했다. 에디구는 과거의 마마이와 유사하게 혼란기 킵차크 칸국에서 나름대로 중심을 지킨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마이가 사후 결국 1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카잔 칸국,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노가이 칸국, 우즈베크 칸국[11], 카자흐 칸국[12] 등으로 분리되면서 킵차크 칸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 칸국들이 떨어져가고 남은 킵차크 칸국을 이흐 칸국이라고도 한다.

마침내 아흐메트 칸 재위시절인 1476년 러시아 제후국들을 하나씩 통합하고 있던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크림 칸국과 제휴하여 킵차크 칸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480년 아흐메트 칸은 군사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응징하러 출전했지만, 양군은 우그라 강에서 대치만 하다 철군하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이를 240년에 달하는 몽골-타타르의 지배가 종료되었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본다. 이흐 칸국은 이후 모스크바와 크림 칸국의 공세에 밀리게 되어 결국 1502년 크림 칸국과 모스크바 공국에게 정복당한다.


5. 역대 칸 목록[편집]


  • 바투 칸(Батый) (1237-1255)
  • 사르타크 칸 (1255-1256)
  • 울락치 칸 (1256?)
  • 베르케 칸(Берке) (1256?-1266)
  • 멩구티무르 칸(Менгу-Тимур) (1266-1282)
  • 투다멩구 칸(Туда-Менгу) (1282-1287)
  • 탈라부가 칸(Талабуга) (1287-1291)
  • 토흐타 칸(Тохта) (1291-1312)
  • 우즈베크 칸(Узбек) (1312-1341)
  • 티니베크 칸 (1341-1342)
  • 자니베크 칸(Джанибек) (1342-1357)
  • 베르디베크 칸(Бердибек) (1357-1359)
  • 이후 약 20년간 킵차크 칸국은 약 20명의 칸들이 쟁탈전을 벌인다.
  • 토크타미쉬 칸(Тохтамыш) (1380-1395)
  • 테무르 쿠틀룩 칸(1395-1401)
  • 샤디 베그 칸(Shadi Beg) (1401-1407)
  • 푸라드 칸(Pulad) (1407-1410)
  • 테무르 칸(Temür) (1410-1412)
  • 잘랄 앗딘 칸(Jalal ad-Din) (1412)
  • 카림 베르디 칸(Karim Berdi) (1412-1414)
  • 케베크 칸(Kebek) (1414-1417)
  • 자바르 베르디 칸(Jabbar Berdi) (1417-1419)
  • 울루그 무한마드 칸(Ulugh Muhammad) (1419–1421, 1428–1433) 카잔 칸국 시조
  • 데브레 베르디 칸(Dawlat Berdi) (1421–1422)
  • 바라크 칸(Baraq) (1422-1428)
  • 셰이드 마흐메드 칸 (1433-1435)
  • 쿠춤 무한마드 칸(Küchük Muhammad) (1435–1459)
  • 마흐무드 칸(1459-1465)
  • 아흐메트 (1465년~1481년) 모스크바 독립
  • 샤이크 아흐메트 (1481년~1498년, 1499년~1502년)
  • 무르타다 (1498년~1499년)


6. 멸망 이후[편집]




7. 역사보기 틀 모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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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시드 앗딘의 집사(集史) 표기[2] 러시아어 표기. 참고로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정식명칭은 Золотая Орда(금장 칸국)이지만 이칭으로 이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3] 타타르어, 카자흐어, 노가이어 등의 조상어뻘이 된다.[4] 단 예외적으로 청장 칸국의 칸이 킵차크 칸국의 대칸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티무르의 라이벌로 유명했던 토크타미쉬 칸이 이에 해당된다[5] 장자 우선이 없는 유목민족의 특성 중 하나이다. 이후 만주족이 후금을 세웠을 때도 같은 이유로 홍타이지가 만주의 칸이 되었다.[6] 유목민들의 말자 상속제에 관한 자료들을 참고하면 좋다.[7] 동슬라브족.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8] 사실상 모스크바가 하나의 도시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이 시대에 본격적으로 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9] 평소대로라면 모스크바가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짓밟아 이 지역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킵차크 칸국의 기본적인 전략이었지만, 1360년대의 내분이 이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고 이후에는 모스크바가 지나치게 강성해져버린다.[10] 훗날 노가이 칸국으로 발전한다.[11] 티무르 왕조를 중앙아시아에서 쫓아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모태.[12] 우즈베크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다. 현재 카자흐스탄의 모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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