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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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화국
Россійская Республика[1] | Russian Republic
파일:러시아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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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ussian_Provisional_Government_of_1917.png
1917년 3월 8일 ~ 1918년 1월 19일 [2]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러시아 제국
러시아국
러시아 SFSR
핀란드 왕국
국가
노동자 마르세예즈(공식)
자유 러시아 국가[3](비공식)
위치
동유럽, 북아시아, 캅카스, 중앙아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언어
러시아어
정치체제
공화제
총리
게오르기 리보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주요 사건
1917년 2월 혁명, 건국
1917년 10월 혁명
1917년 제헌의회 선거
1918년 제헌의회 해산, 멸망

1. 개요
2. 역사
2.1. 제1차 연립정부
2.2. 제2차 연립정부
2.3. 총재정부와 제3차 연립정부
2.4. 10월 혁명 이후
2.4.1. 에필로그: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3. 러시아 공화국 국가
3.1. 1917년 가사
3.2. 1926년 가사
4. 역대 총리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러시아 공화국은 1917년 3월에 2월 혁명으로 인한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동년 11월에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러시아가 성립되기 이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던 정부이다.

편의상 러시아 공화국이라는 국호가 붙었지만 러시아 공화국이라는 국호가 제안된 것은 9월이었고, 이마저도 정치적인 반대에 직면하여 법령으로 확정되지 못한채 10월 혁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결국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정식 국호는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러시아 정치체제를 일컬어 '임시정부(временное правительство)'로 일컫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2. 역사[편집]


여기에서의 날짜는 모두 구력(= 율리우스력)으로 기록하되, 신력(= 그레고리력)을 함께 병기한다.


2.1. 제1차 연립정부[편집]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무너졌지만 부르주아들은 차르 전제정 못지않게 사회주의를 혐오했고, 사회주의자[4]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아직 부르주아 정치도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던 러시아가 바로 사회주의로 넘어가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 등을 대표하던 두마 임시위원회와, 2월 혁명으로 각지에서 구성된 노동자 의회인 소비에트는 협정을 맺었고, 이에 따라 3월 2일(3월 15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입헌민주주의자로서 젬스트보(земство)[5]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리보프가 총리가 되었으며 후에 입헌민주당10월 17일 연합이 임시정부의 세력을 잡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유일하게 개인자격으로 입각했다.

이리하여 신생 러시아 공화국에는 임시정부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의 소위 이중 권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들은 '2단계 혁명론'에 따라 부르주아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했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곧바로 갈등을 벌였다. 소비에트가 즉각적인 1차 대전 중단을 요구하는 데 비해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월 혁명 과정에서 소비에트는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수 없었고, 결국 이에 따라 전쟁 지속을 주장했던 파벨 밀류코프(Павел Милюков) 외무장관(입헌민주당 소속)이 사임함으로써 임시정부 내각은 무너진다. 이를 4월 위기(Апрельский кризис)라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과의 협상에 따라 6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추가로 입각하게 된다.

그러나 내각은 일치된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분열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에 복속된 각지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여 독립을 선포하도록 했는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도 이에 동참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세웠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미하일 테레셴코(Михаил Терещенко)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했고, 이는 보수적이었던 입헌민주당의 거센 반발을 샀다.

또한 새로운 내각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방침을 굽히지 않았기에 이 역시 노동자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노동자들은 참지 못했고, 볼셰비키가 주장했던 전쟁 종결에 동조하여 7월 초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다.(= 7월 위기, 7월 시위) 정작 볼셰비키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봉기를 자제할 것을 요청했지만 노동자들은 스스로 봉기했고, 볼셰비키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겹쳐 봉기는 쉽게 진압된다.


2.2. 제2차 연립정부[편집]


7월 위기는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1차 연립정부는 정책 수행 동력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총리인 게오르기 리보프는 사퇴했고 입헌민주당은 내각에서 이탈했다. 사퇴한 리보프를 대신해 사회혁명당 소속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총리로 선출되었고, 좀 더 많은 멘셰비키계 인사가 내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 역시 러시아 민중들의 바람과는 달리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1917년 7월에는 1차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케렌스키 공세라고 알려진 대규모 공세를 지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하였다. 종전을 염원하는 병사들과 민중들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강행한 이 공세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케렌스키에게 위기가 닥쳐오기 시작한다. 케렌스키는 프랑스영국에 대한 외교적 책무를 위해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6][7] 이미 일선의 병사들과 후방의 민중들은 전쟁을 수행할 의지를 상실했고, 의지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능력도 떨어져 있었다. 1917년 가을이 되면 비공식적으로 200만 명 이상의 러시아군 병사가 탈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볼셰비키는 7월 위기로 인해 블라디미르 레닌이 잠적[8]하고 레프 트로츠키가 체포되어 수감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 타격은 금세 회복되었다. 8월에 들어가면 당원이 위기 이전의 3배가 될 정도였다. 볼셰비키는 민중과 병사들에게 '토지, 평화, 빵'을 약속했고, 반대로 민중의 의지를 거슬러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만다.

공세의 실패로 케렌스키의 지도력은 크게 상실되었고, 특히 군부에서는 케렌스키에게 크게 실망했다. 1917년 8월에는 보수파였던 육군 참모총장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사칭해 반동 쿠데타를 일으켰다. 케렌스키는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군부의 신망을 잃어 쿠데타를 진압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비에트에 손을 내밀었다. 케렌스키는 트로츠키 등을 석방하고 레닌의 수배령을 철회했다. 또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눠주어 도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임시정부나 케렌스키가 아닌 노동자 스스로를 위하여 코르닐로프를 막아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쿠데타는 막을 수 있었지만 쿠데타 진압의 공로자는 누가 봐도 케렌스키나 임시정부가 아닌 일반 노동자들였다. 비록 이후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직을 케렌스키가 겸직했지만 군대가 자기들 찍어누른 케렌스키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들은 무기마저 가지고 있었다.


2.3. 총재정부와 제3차 연립정부[편집]


9월 1일에(9월 14일) 케렌스키는 정식 정부를 수립한다. 동시에 러시아 공화국을 선포했고[9] 외무장관 미하일 테레셴코, 육군장관 알렉산드르 베르홉스키(Александр Верховский), 해군장관 드미트리 베르데렙스키(Дмитрий Вердеревский), 우편전신장관 알렉세이 니키틴(Алексей Никитин)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케렌스키가 당원으로 있던 사회혁명당은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당의 방침과 달리 공화국을 선포한 데 대해 반감을 드러냈다.

총재정부는 정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 등 형식적으로 양보를 하는 한편 '반혁명 분쇄 투쟁위원회'의 해산, 군대 내의 정치투쟁 중지 등을 명령하며 고양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민중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민중의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 사회혁명당[10]멘셰비키는 민중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입헌민주당이 참가하는 3차 정부에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에게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좌파끼리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난 소비에트를 공격하고 소비에트를 대신하여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를 소집했다. 또한 부르주아와 지주의 조직인 젬스트보와 시 두마의 대표권을 늘리고 공장 위원회, 군 위원회, 노동조합의 의석수를 삭감했다.

9월 25일(10월 8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다시 입헌민주당과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제3차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를 선출하였다. 당연히 민중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졌고 민중들은 이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지금이 무장봉기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10월 말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와 확대중앙위는 레프 카메네프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재차 확인했다. 레닌은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파를 억눌렀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프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서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와 힘을 합쳤다.

케렌스키는 이에 대해 10월 23일(11월 5일) 사관학교 생도들을 동원해 볼셰비키 기관지 인쇄소를 습격했으나 트로츠키가 대비를 해두어 실패했고, 이를 기회로 10월 24일(11월 6일) 볼셰비키와 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제히 봉기한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25일 저녁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되었다. 10월 26일(11월 8일) 새벽 2시에는 러시아 공화국 정부청사로 쓰고 있던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고 러시아 공화국은 무너졌다.


2.4. 10월 혁명 이후[편집]


임시정부와 입법평의회가 해산된 뒤 행정권은 전러시아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이관되었다. 소비에트는 공화국이 러시아 인민에 약속한대로 제헌의회 선거를 준비했다.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평화적인 정권이양과 사회주의 헌법 제정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 사회혁명당 우파가 300석을 차지하며 180석의 볼셰비키를 크게 앞지르게 된다. 제헌의회 의장으로 사회혁명당 우파의 리더 빅토르 체르노프가 선출되었고 제헌 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제헌의회에서 선포한 헌법은 러시아의 공식 국명을 러시아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정하고 의원내각제다당제, 권력분립에 기초한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적위대는 의회가 개회한지 이틀만에 의사당인 트라우데 궁전을 점거한다. 그리고 1월 25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2.4.1. 에필로그: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편집]


그렇게 좌파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와의 연정으로 정권을 잡은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이 우세를 보이던 농민 소비에트 마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에 흡수시키며 정권을 안정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독일 제국에 밀린 외상값을 치러야 했다. 독일 제국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흑루테니아와 프리비슬린스키를 양도하며 평화조약을 마무리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무전쟁 무평화 선언을 하며 사실상 배째기를 시전하고... 빡친 독일군은 그대로 밀고들어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에스토니아까지 토해낼것을 요구하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채결한다. 이는 후일 독일이 받은 베르사유 조약만큼이나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에 좌파 사회혁명당에서는 독일 전권대사 빌헬름 폰 미르바흐를 암살하고 체카 주도권 경쟁과 제5차 공산당 회의를 사보타주하는 등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래도 이때까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같은 사회주의 진영으로써 동질감이 있었는데 러시아 공화국의 무능에 크게 일조했다고 여겨지는 입헌민주당과 볼셰비키가 딜을 보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지지를 철회하고 오히려 입헌민주당까지 러시아 공화국을 복원하자며 가세한다. 그러나 이들 연합은 제헌의회를 두고 갈라진다.[11] 결국 모든 정치세력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제헌의원들 역시 적군인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과 백군인 러시아국 중 선택을 하며 4년간의 내전을 맞이한다.


3. 러시아 공화국 국가[편집]






3.1. 1917년 가사[편집]


Да здравствуетъ Россі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і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Могучая держава, безбрежный океанъ!

Борцамъ за волю слава, развеявшимъ туманъ!

Да здравствуетъ Россі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Леса, поля, и нивы, и степи, и моря,

Мы вольны и счастливы, намъ всемъ горитъ заря!

Да здравствуетъ Россі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і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1.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강력한 힘이여, 드넓은 대양이여!

안개를 거두어내는 자유 전사들에게 영광이여!

2.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숲과 들판과 옥수수밭, 초원과 바다여,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젖은 모든 것들을 불태우는 새벽이여!

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3.2. 1926년 가사[편집]




1.Да здравствует Росси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Могучая держава, безбрежный океан!

Борцам за волю слава, развеявшим туман!

Да здравствует Росси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2.Да здравствует Росси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Добились теперь мы лучшей доли,

Свергнули мы царский гнёт!

Всем дали за войны земли и воли,

Не лезь, вертухай, вперёд!

Да здравствует Россия, свободная страна!

Свободная стихия великой суждена!

1.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강력한 힘이여, 드넓은 대양이여!

안개를 거두어내는 자유 전사들에게 영광이여!

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2.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우리는 보다 밝은 운명을 우리 손에 넣었고,

차르의 전제 정권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전장의 인민들에게 땅과 자유를 주었고,

도망치지 말고, 뒤돌아서서 전진한다!

오래도록 영원하라 러시아, 그대 자유로운 나라!

자유는 위대한 국가를 위한 운명이라!



4. 역대 총리[편집]




5. 같이보기[편집]


[1] 당시 정서법에 따른 표기. 현행 러시아어 표기는 'Россий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다.[2] 실질적으로는 1917년 10월 혁명으로 종말하였다.[3] Гимн Свободной России[4] 주로 멘셰비키[5] 제정 러시아에서, 1864년의 개혁으로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중앙 정부의 감독 아래 주(州), 군(郡) 단위로 구성되어 토목, 위생, 교육, 경제 등의 문제를 맡아보다가 러시아 혁명 후 없어졌다.[6] 이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우리가 여기서 전쟁을 포기하면 프랑스영국이 우리에게 지원물자를 보내지 않아서 안 그래도 무너진 경제가 더 무너진다!"라고 반협박에 가까운 호소까지 했지만, 지칠대로 지친 민중들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총 맞고 죽으나 굶어 죽으나[7] 더군다나 당시 각지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이라며 노동자들의 참전 거부와 혁명을 위한 조국의 패배를 호소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계열은 반대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호소하는 모습이 벌어졌다. 이러한 차이는 기존에도 있었던 공산주의 계열과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갈등이 격화된 주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된다.[8] 사실은 가발 쓰고 면도한 채 핀란드로 피신했음.[9] 그러나 러시아 상원의 반대로 법령으로 확정되지는 못했다[10] 케렌스키의 소속 정당이다.[11] 입헌민주당은 재선거를 사회혁명당-멘셰비키는 재소집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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