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을 뜻하나,
말과 같이 가축을 이용해 농사 짓는 것을 통칭하기도 한다. 정확히 언제 우경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기 농기구가 보편화 된
철기 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늦어도
춘추시대 말기에 보편화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신라 지증왕 3년(502년)에 우경을 장려한다는 기록이 보이며, 실제로도 삼국시대
논 유구에서 소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해서 철기가 보편화 된
원삼국시대에 행해져 늦어도
삼국시대에 보편화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지나 현대에도
새마을 운동 이전까지는 농사에 소가 거의 전국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쓰였다.
현대에 와서는 웬만한
선진국들은 가축 대신 농기계를 사용하고, 한국 또한 농기계가
새마을 운동 이후 대부분의 농가에 보급되었다. 하지만 먼 지방의
오지나
개도국은 아직도 소나 짐말을 애용하는 경우가 많다. 유지비와 수리에 필요한 기술이 부족해서 농기계를 가져다놔도 이용이 힘드니 우경을 애용하는 편. 물론 한국에서도 다른 이유지만
아직도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많이 남아 있기는 하다.
좌익/우익으로 나뉘는 정치 성향 중
우익 쪽으로 기운다는 뜻의 단어. 진행중인 상황에는 화(化)를 덧붙인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정치적 보수화 경향을
이르는 말로 많이 쓰인다.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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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 후기
조(趙)나라의 인물. 짚신을 신고 우산을 든 채 조나라로 가서
효성왕에게
유세를 하고
황금 100일(鎰, 1일은 20 또는 24냥)과 백옥 한 쌍을 얻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효성왕은 그를 상경에 임명했는데, 여기서 우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위나라 재상 위제에게 원한을 가진 진나라 제상
범수가 위제를 내놓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는 협박에 위나라 왕은 위제를 잡아 진나라에 바치려다가 위제가 도망쳐 평원군에게 의탁하고 평원군이 진나라의 초대를 받고 소양왕에게서 위제를 내놓지 않으면 함곡관에 나갈수 없다는 협박을 하지만 평원군은 거절한다. 소양왕은 효성왕에게 위제의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평원군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위제는 우경에게 의지한다. 우경은 위제를 재상직에서 구하기 어렵다며 재상의 인수를 반납 위나라의 신릉군에게 의탁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겨 위제는 신릉군이 자길 구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살한다.
3.1. 사기의 다른 기록들과의 충돌[편집]
우경이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그런지 열전에 서술된 사건들의 시간 서순이 개판이다. 우경 열전에는 앞부분에 장평대전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고 위제가 자살한 이후 우경은 대량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고달프게 지냈다고 서술하며 끝맺는다. 그런데 범수 열전이나 본기 등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위제 사건이 있던 해는 소양왕 42년(기원전 265년)이고 장평대전이 소양왕 47년(기원전 260년)이라 순서가 반대다. 애초에 우경 열전의 순서대로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신릉군은 장평대전 이후 한단이 포위되었을 당시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자국 장수인 진비를 죽여서 인수를 강제로 빼앗는 바람에 10년 동안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머물렀다. 즉, 우경 열전대로면 조나라에 있는 신릉군을 찾아가기 위해 조나라를 탈출해 위나라 대량으로 갔다는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평원군 열전을 보면 한단의 포위가 풀린 이후 논공행상을 할 당시 우경이 등장해서 평원군에게 식읍을 늘려주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종합해보면 위제가 자살한 이후 우경은 대량에서 얼마간 저술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조나라에 다시 등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높다. 이외에도 사기에는 이런식의 충돌이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관고의 유방 암살모의가 장이, 진여 열전에는 진희의 반란 진압 직후라고 나오지만 고조본기에는 백등산 전투 직후로 나온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1 00:31:03에 나무위키
우경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