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경 (문단 편집) === 사기의 다른 기록들과의 충돌 === 우경이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그런지 열전에 서술된 사건들의 시간 서순이 개판이다. 우경 열전에는 앞부분에 장평대전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고 위제가 자살한 이후 우경은 대량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고달프게 지냈다고 서술하며 끝맺는다. 그런데 범수 열전이나 본기 등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위제 사건이 있던 해는 소양왕 42년(기원전 265년)이고 장평대전이 소양왕 47년(기원전 260년)이라 순서가 반대다. 애초에 우경 열전의 순서대로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신릉군은 장평대전 이후 한단이 포위되었을 당시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자국 장수인 진비를 죽여서 인수를 강제로 빼앗는 바람에 10년 동안 위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나라에 머물렀다. 즉, 우경 열전대로면 조나라에 있는 신릉군을 찾아가기 위해 조나라를 탈출해 위나라 대량으로 갔다는 소리가 된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평원군 열전을 보면 한단의 포위가 풀린 이후 논공행상을 할 당시 우경이 등장해서 평원군에게 식읍을 늘려주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종합해보면 위제가 자살한 이후 우경은 대량에서 얼마간 저술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조나라에 다시 등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높다. 이외에도 사기에는 이런식의 충돌이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관고의 유방 암살모의가 장이, 진여 열전에는 진희의 반란 진압 직후라고 나오지만 고조본기에는 백등산 전투 직후로 나온다. [[분류:동음이의어]][[분류:한자어]][[분류:춘추전국시대/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