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왕 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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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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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e5b6 진(秦) 제7대 국왕
자영 | 子嬰}}}'''

영(嬴)

조(趙)

자영(子嬰)
출생지
진나라 함양
사망 장소
진나라 함양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242년[1] ~ 기원전 206년 1월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207년 10월 1일 ~ 기원전 207년 11월 17일

1. 개요
2. 출신
3. 생애
3.1. 왕위에 오르다
3.2. 진나라의 멸망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중국 진(秦)나라의 마지막 국군이자 마지막 왕. 왕호로는 '항왕'(降王).[2] 진나라 황제 칭호를 포기하긴 했지만 후대인들이 '삼세황제(三世皇帝)'로 부르기도 한다.


2. 출신[편집]


자영은 기록상 그 출생이 확실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기준으로 영자영이 진나라 왕위에 올라도 손색없는 영성 조씨 혈통이었던 건 분명한데, 정확하게 기록이 남지 않아 구체적인 가족관계를 알 수 없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호해(胡亥)의 의 아들(즉 진시황의 손자)로 적혀 있으며, <이사 열전>에서는 진시황의 동생, 《사기》 <육국연표>에서는 자영이 호해의 '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동진(東晉) 시대의 학자 서광(徐廣)은 진시황의 조카[3]라는 설을 주장했다. 흔히 소설 《초한지》의 영향으로 진시황의 아들인 부소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자영이 부소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없다.#

《사기》의 내용을 따르면 자영에게 함께 조고(趙高)를 죽일 모의를 꾸밀 수 있는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손자는 아닐 확률이 높다. 진시황은 50세에 죽었고, 자영이 조고를 죽인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이기에, 아무리 일찍 자식을 낳았다고 해도 손자에게 장성한 아들, 다시 말해 진시황에겐 증손자가 있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호해의 형이라기에는 호해가 즉위하자마자 모든 형들을 죽였다는 기록과 실제 유골들이 있어 배다른 형이라는 설도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

이처럼 자영의 가족관계는 매우 모호하지만, 확실한 점은 대체로 견제 안당할 정도의 진나라의 방계 황족이었을 것이라는 건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3. 생애[편집]


호해몽염을 숙청하려고 했을 때, 자영은 과거 조유목왕이 명장 이목을 처형한 후, 조나라가 망한 고사를 들어서 반대했으나 호해는 듣지 않았다.[4][5]


3.1. 왕위에 오르다[편집]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유방항우 등 반진 반란이 곳곳에서 터져나와 해결이 불가능해질 무렵, 승상 조고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호해는 자살하고 말았다. 조고가 본래 생각했던 것은 유방에게 진나라를 팔아먹는 것이었지만 유방은 무덤덤하게 무시하면서 진군하기에 대신 인망이 두터운 자영을 옹립시키려고 했다.[6] 헌데 자영은 즉위식 당일에 병이라고 칭하고 결석한 후 거듭해서 조고가 보낸 사자의 설득을 거부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조고는 스스로 자영의 집으로 찾아와 침소에 들어와서 설득을 하려 했는데, 자영은 자신의 아들과 심복 부하들을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마침내 자영은 성공적으로 역적 조고를 살해하고 그 일족도 모두 제거함으로, 시황제와 이세황제의 복수를 끝마치고 뒤에야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천하는 이미 각지의 군벌이 차지하고 있어 진나라의 영토는 함곡관 서쪽으로 축소된 상태였으므로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진왕(秦王)으로 낮추었다.


3.2. 진나라의 멸망[편집]


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간신 조고를 죽인 정도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미 유방의 군대는 함양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자영은 장수들에게 몇 차례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자영의 자질이 엄청나게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옆에 제대로 된 보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유방과 장량에게 농락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자영은 장례식을 상징하는 백마가 끄는 흰 마차, 흰 소복을 입고, 목에는 전국옥새를 걸고서 유방에게 항복하게 되는데 즉위한 지 45일 만이었다. 중국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시황제의 후계자가 집에서 갈굼받던 촌동네 백수 건달이었던 유방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유방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자영과 그 일족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뒤늦게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진시황이 각국을 멸망시킨 죄 등을 물어서 죄없는 진왕 자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결국 항우의 함양대학살로 영자영 본인과 영성 조씨 진나라 황족의 대는 완전히 멸족, 진나라 백성들은 학살되고 함양은 불바다가 되어 진나라는 멸망한다.[7]

이런 자비없는 대처로 인해 민심은 항우에서 유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전국시대 진나라 영역이었던 관중 및 서천 지역은 유방을 지지하게 되었는데, 진나라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던 옛 진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왕을 죽이고 수백년간 이어진 진나라를 결딴낸 자를 따르고 싶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8] 고작 1개월 재위한 자영이 개인적으로 그 폭정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거기다 수많은 진군 포로들을 생매장시킨 신안대학살을 저질렀으니 그 포로들의 동향이고 가족이었을 진나라 사람들은 유방의 든든한 후방 보급처가 되어주었고, 이때부터 항우는 내리막길로 치닫기 시작한다.[9]


4. 대중매체에서[편집]


보통 《초한지》의 영향으로 진시황의 장남 부소의 아들로 등장한다. 나라를 망쳐오던 간신 조고를 죽이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미 진나라는 망한 거나 다름 없는 상태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 비운의 왕으로 등장하며, 항우가 자신에게 항복하지 않고 유방에게 항복한 것에 대한 질투심, 진나라에 대한 증오 등 감정적인 이유로 자영을 죽였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

영화 초한지 : 영웅의 부활(2013)에서는 유방에게 항복 후 항우가 와서 자신을 죽일 것을 다 예상을 하였다. 그래서 유방을 호적이 기록된 기록실로 데려가서 유방의 족보를 보여준다. 그의 의도는 유방으로 하여금 항우를 대적하게 만들고, 아무런 욕심이 없었던 유방에게 황제가 되고자하는 욕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 항우에게 심하게 고문을 당한 후 요참형을 당하고 사망. 그런데 위에 언급되었듯이 자영은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으니 왕이 되었을 때 최소한 중년에 가까웠을 텐데 이 영화에서는 너무 어리게 나온다.

초한전기에서는 조고의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정신병자 연기를 하는 인물로 등장했다. 호해가 자영을 불러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자영은 끝까지 바보연기를 했다. 조고는 치밀하고 간교한 인물이었지만, 자영의 바보 연기에 완전히 속아넘어가 방심을 하였고, 이 틈을 노려 자영은 조고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진을 부흥시키기에는 때가 늦었고, 결국 진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유방에게 투항하고 유방이 떠난 뒤 항우가 함양에 입성하자 딸에게 작별을 고한 후 항우에게 자결을 권유받아 자결한다.[10]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자신을 꼭두각시로 삼으려는 간신 조고를 한담, 이필 장군과 모의하여 참살한 뒤 3세 황제로 즉위한다. 하지만 이미 조정 내에는 조고의 숙청 때문에 충신은 없고 무기력한 이들 뿐이었다. 급히 유방이 공략하는 무관으로 지원군 10만을 보내지만 무관은 장량의 계책으로 허무하게 함락되고, 패배를 피할 길이 없어지자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어 선조들을 볼 명목이 없으나, 자기 자신이 더 버티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며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한다. 이 때 대소신료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면류관을 벗으며 자영 또한 눈물을 흘린다.

유방은 회왕께 아뢰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게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방을 밀어내고 패자가 된 항우는 항복을 요구했다. 항우는 처음부터 자영을 죽일 생각이었고 자영은 '백성들은 죄가 없으니 용서해달라'고 빌다가 죽었다. 그런데 자영의 죽음을 목격한 진나라 백성들은 '패공(유방)은 어질었는데 노공(항우)은 너무나 잔혹하다.'고[11] 한탄하고 분노하며 항우에게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저주했고,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약속도 어기고 진나라 백성들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려서 함양성 내의 백성들까지 학살하려 들지만 범증이 죽이려면 차라리 자기부터 먼저 죽이라고 말려서 관두었다.


5. 둘러보기(계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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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경우는 진시황의 아들이거나 조카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진다.[2] 항복한 왕이란 뜻으로 《사기》 <고조 본기>의 기록.[3] 정확히는 진시황의 이복 동생 영성교(嬴成蟜)의 아들. 성교 역시 시황제의 이복동생이라는 기록과 달리 정통성 문제나 기록의 오기 등으로 시황제보다 나이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영같은 장성한 아들을 두는게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4] 사실 이목이 처형된지 20년도 채 안된 시점이다. 심지어 이목을 죽게 하여 조나라를 망하게 한건 다름아닌 진나라다.[5] 헌데 이렇게 조고에게 거슬리는 소리를 하고도 살아남은 것은 꽤나 특이하다. 지록위마 일화에서 보듯 조고는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다 제거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 심지어 호해 역시도 자기 형제자매들과 서모들을 학살할 정도로 잔인했다.[6] <고조본기>와 《한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사열전>에선 지진에 지레 겁을 먹어서라는 더 찌질한 일화로 나온다.[7] 영성 조씨의 씨가 진시황 시절만 해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호해가 황제에 오르자 자영을 제외한 모든 영성 조씨, 즉 황족들의 씨를 아예 말려버린다. 자영의 경우 초한지에선 미친 척을 해서, 정사에선 조고와 이세황제였던 호해에게 동조하여 살아남았다고 되어있지만 자영 이외의 황족들은 호해에 의해 모조리 주살당하거나 순장당했다(정확히 말해서 공자 고는 먼저 죽음을 자청하는 대신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호해가 이를 들어줬다고 했기에 그의 가족들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있긴 한데 그래봐야 어차피 함양대학살에서 다 죽었을 것이다). 즉 진나라의 왕실의 유일한 씨앗은 자영밖에 없는 상태에서 자영마저 항우에게 참살당하고 그 자식들마저 모조리 사형당해버리니 진나라 조씨 일족들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다. 호해가 종친들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현대까지 진나라 조씨 일파들은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다. 족보상 먼 친척 관계인 조나라 왕실의 영성 조씨 일족들은 후대에도 이어져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약 1000년뒤에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 역시 영성 조씨 조나라 왕실의 후손이다.[8] 무엇보다 6국이 부활했다고는 하나, 진나라는 이미 전국시대부터 7국 중 가장 세력이 강했고, 인구도 초나라와 비견될 정도로 많은 대국이었다. 유방은 이 관중의 민심을 얻어 그 힘으로 항우를 찍어누를 수 있었으며 통일 후에는 함양 바로 옆의 장안으로 수도를 정했을 정도니 당시 구 진나라 지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항우가 앞뒤 안보고 그냥 마구잡이로 일을 저지르는 성격이었음을 감안하면 자영과 영성 조씨 일족을 몰살시킨 것도 그냥 별 생각 없이 본인이 진나라에 원한이 크니까 지르고 봤을 가능성이 크다.[9] 장한의 진압군의 주축은 여산에서 노역하던 죄수들이었는데, 진나라 출신 뿐만 아니라 6국 출신들도 적지 않았고 더욱이 죄질이 나쁜 자들은 거의 다 사형에 극악범들은 연좌해서 가족들까지 오지로 쫓아낼 정도로 혹독했던 진나라 법을 생각하면 대부분 진나라 법으로도 사형시키기 뭐해서 노역을 시킨 잡범들이었다. 즉 범죄를 저질렀다고 쳐도 가족 및 사회과의 관계가 끊어질 정도로 큰 잘못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소리인데, 이들을 학살했으니 그 주변 사람들을 원수로 돌리는 건 당연한 일.[10] 자영의 딸은 이후 궁을 떠나고 어느 헛간에서 쓰러졌다가 우미인에게 발견된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우미인과 친해졌다가 항우의 권유로 영포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후 영포를 떠나 항우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자신을 죽일 기회를 준 항우를 죽이진 못하고 대담을 나누는데, 이때 나눈 대담이 자영에게 항우가 물은 질문인 '진시황은 어떤 인물이며 자신(항우)는 어떤 인물인가'였다. 자영과 자영의 딸 모두 진시황은 영웅이며, 항우에 대해선 후에 평가를 받을 것이란 말을 남긴다. 이후 항우는 그녀를 그냥 보내줌으로서 극중에서 퇴장한다.[11] 헌데 사실 이는 고증오류다. 노공은 항우 사후 유방이 봉한 것이기 때문이다. 항우 자신은 18 제후왕 봉분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서초패왕을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