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 (r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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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만주 종족 계보
1. 개요[편집]
예맥(濊貊)이란 한반도 중북부, 만주 중남부[1] , 연해주 남부 등지에서 거주하던 민족이며, 한반도 중남부에서 거주하던 한(韓)족[2] 과 함께 현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이 되는 고대 민족이다.
'예맥(濊貊)족' 자체가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과, '예(濊)족'과 '맥(貊)족' 두 민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설이 있다. 만약 후자의 설을 지지할 경우에도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두 민족을 융합시킨게 되니 결론적으로는 두 가지 설이 다 맞을수도 있다. 참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예맥족 일부는 중원 세력이나 만주 세력으로 동화되기도 했지만[3] 대부분은 한반도 세력이 되어[4][5] 지금의 한민족 계보로 이어졌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우세를 차지한 예맥족이 원삼국시대~삼국시대부터 자칭·타칭 삼한(三韓)이라 불린 것으로 보아 크게 보면 서로의 정체성은 하나의 세력권으로 점차 동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인을 이루는 한민족은 예맥족 중심 국가였던 고조선과 부여[6] , 그리고 이들의 후손인 고구려[7][8] 와 백제[9][10] 와 신라[11] , 또한 옥저와 동예를 모두 계승했지만 한족과 만주족은 해당 국가들을 계승하지 않았다.[12][13]
2. 예맥[편집]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실상 예맥이라는 명칭은 고대 사서에서 매우 넓은 범위로 제시되는 일반적인 종족명이다. 위의 <동이전>이라는 하나의 사료 내에서도 예맥은 고구려와 동옥저의 남쪽, 즉 한반도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동예) 혹은 부여와 같은 송화강 일대에 있던 고대 국가와도 연관을 가진다.
삼국지에서 종족 명칭이 아니라 국가 명칭으로서의 “예맥”은 동예를 지칭한다. 항목 참고. 한편으로 예맥은 예+맥 이라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이는 아래 항목들을 참고할 것.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예족(동예를 의미한다)은 호랑이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곽박의 《이아》(爾雅), 《일본서기》 등을 근거[14] 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고 있다.[15] #[16] 삼한인들이 곰을 토템으로 했다는 설도 있다.
3. 예(濊): 부여, 옥저, 동예[편집]
일단 아래의 모든 항목은 학문적으로 현재 완전히 정립된 관점은 아니다. 예는 다양한 형태로 사서에 제시되는데, 동예라고 흔히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알려진 영동 지역의 예(濊)가 예족의 대표적인 일파이다.
또 다른 하나의 예와 관련해서는 예[17] 세력을 말한다. 이 예 세력은 위만조선의 북부, 한사군 중 현도군, 부여 등의 고대 국가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전한 세종 무제 시기에 있었던 창해군 복속 사업과 당시의 군주였던 예군 남려와 관련된 기록으로 인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위만조선과 느슨한 형태의 연맹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무제에 의한 별도의 창해군 복속사업은 실패했고, 이후 위만조선 멸망 당시 현도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등의 기반 지역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명확한 구분 기준은 아직 알 수 없다. 고조선 멸망 이후 기록된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동예의 역사 파트는 《사기》와 《한서》의 <조선열전>을 복붙해놓았다.당나라 가탐(賈耽)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강릉)는 예(濊)의 고국’이라고 썼다.
4. 맥(貊): (고조선), 고구려[편집]
맥이라는 민족에 관해서는 조선 시대 실학자들 이후 다양한 가설들이 나왔으나 근래의 가설은 맥을 주로 고구려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고구려를 맥과 관련하여 '무쿠리(Mucuri)'라고 불렀는데 이는 '맥+고려'라는 의미이다. 돌궐 역시 맥고려라는 의미의 '뵈클리(Bökli)'라고 고구려를 칭하였다[18]
여호규, 송호정, 김현숙 등 고대사 사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가설은 '예맥'으로 분류되는 지린성과 랴오닝성 일대의 집단 중에서 기원전 3세기 이후 구별되어 구려, 고구려 등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주변의 '예'와 구별되는 '맥'의 정체성을 발현시켰다는 것이다.
맥계는 이와 같이 고구려 건국 및 확장시에 보다 확실하게 대두된다. 물론 고구려 세력이 유일한 맥계 공동체는 아니었고, 고구려 통합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이 편입된 것이다. 중원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세력이었기 때문인지, '맥'을 고구려 세력의 비칭으로 사용한 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북송 시대에 고려 사신의 행패를 소동파가 비난할 때 비칭으로 쓰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사학자들의 경우 과거 《맹자》 등의 중국 고서에 나오는 '맥적' 내지 '맥'을 예맥과 연관시켜 왔지만 《맹자》나 《한서》가 저술되던 시대에 이민족의 족보를 따져 가면서 종족 명칭을 기술하지는 않아 역사학계에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대체로 선진시대 문헌의 '맥'은 북방민족의 범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9] . 게다가 '맥'이라는 명칭은 예맥 외에도 '호맥, 만맥' 등 매우 많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맥은 이민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고 인지해야지 아무 맥이나 다 예맥에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현대적 관점이다. 이 “일반적인 이민족을 뜻하는 호칭”으로서 쓰인 것 때문에 위말갈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中.
《삼국유사》의 지역 인식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한다. 여기에 나오는 명주는 영동이며, 삭주는 영서 지방을 의미하는데, 현대의 영동 지방은 '예'로 불렸으며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세력과 평양성[20] 등 고구려계 세력을 주로 '맥'으로 칭하고 있는 현실을 잘 알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21]
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의 '양맥'은 '두 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예맥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시점에서는 단순히 예와 맥을 영동/영서로 구분하지 않기도 하며, 이러한 인식은 예맥이 예+맥으로서 , 또는 예맥이라는 삼한 일통 이후의 단일민족적 관점에서도 동시에 인지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바이다.
이후에도 맥은 예와 함께 고구려 세력을 의미했다. 고유 풍습과 관련된 말로 '맥궁'(貊弓)이나 '맥적'(貊炙) 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맥적은 한국 요리인 너비아니와 맥적구이의 기반으로 추측되고 있다. 참고로 백제 기록에서도 '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책계왕 때 낙랑이 주동이 되어 맥인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가서 책계왕이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낙랑이 주동이 되어 고구려계 용병과 함께 백제(한성백제)와 대결했다고 하면 해석이 매우 부드럽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멸칭으로 '박적'(狛賊)이라고 칭했는데, 외관에서 알수 있듯이, '박(狛)= 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도 고조선처럼 곰을 숭상했음을 알수 있는 대목인데, 고조선과의 친연성을 풀수 있는 열쇠인 셈.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어 훈독은 koma이며, 안장왕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그들의 성씨도 狛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백제의 경우, 웅진을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5. 토착민과 혼재된 경우: 백제, 신라, 가야, 탐라국[편집]
예맥(濊貊)은 고대 만주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종족명으로, 삼한계 민족들과 함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들 중 하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동안 예족과 맥족을 사실상 동질적인 민족들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에 관한 다양한 이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 令備洒掃言教如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한예'(韓穢)를 '한'과 '예'가 섞인 별도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한과 예를 연칭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는 동예, 옥저와 같이 고구려 이외의 한반도 북부인을 지칭하는 언급이며, '한'은 당연히 '삼한' 즉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제 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이 매우 타당하다.
북쪽의 한민족과 남쪽의 한민족, 즉 예인(穢人)과 한인(韓人)들의 차이에 대해서는 백제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간의 언어 차이를 하나의 단서로 들 수 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 의하면
고 하여 부여계 언어와 한계(韓系) 토착 언어와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어라하'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자어로 왕(王)과 같다. 처는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한자로 비(妃)가 된다."
물론 이것은 지배층 언어와 일반민의 용어 차이로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나[22] 동시대 신라 사회나 고구려 사회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왕을 서로 달리 부른 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히 '백제만의 특징적인 차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의혹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백제어 문서의 '이중언어체계' 문단과 반도 일본어설을 참고. 다만 특기할 점은 ~지 계통의 존칭접미사는 고구려(막리지 등)부터 가야(한기 등)까지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반도 일본어설과는 다소 궤를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23]
신라, 가야, 탐라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도 일본어설과 관련해 미국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에 의한 비슷한 지적이 있다. 위처럼 명시적으로 차이가 있는 단어가 있었다고 기록된 건 아니지만 각국의 인명, 지명 등으로 파편처럼 남아있는 각종 단어의 연대에 따른 변천을 근거로 정체불명의 토착어를 예맥계로 보이는 고대 한국어가 대체해나간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했다. 다만 보빈의 경우 일본어족이 상당히 늦게까지 한반도 남부에 잔류해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여러모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대응관계가 발견되지 않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보빈은 이에 대해 터키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언어적 변동과 고고학적 물적 변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방어하나, 이는 따지자면 물적 증거를 언어학적 추정을 통해 일방적으로 기각하는 접근이므로 보빈의 시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맥=고구려'라는 관점을 보강해서 설명하자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저 비문만으로 고구려가 같은 예맥계인 예족들도 아예 다른 민족으로 인식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애초에 고대에는 같은 민족끼리도 부족별로 나뉘어서 싸우거나 각각 다른 나라들로 나뉘어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 탓에 서로를 별개의 집단으로 구별해서 인식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다. 비유하자면 6.25 전쟁 때 북한이 대한민국의 국군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당시 고구려 또한 전쟁 포로들을 활용했다고 해서 같은 부여계인 예족과 맥족이 서로 아예 다른 별개의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맥인'인 광개토대왕이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굳이 '한인'과 '예인'만을 골라 언급한 점으로 보았을 때, "예, 맥, 한을 고구려 천하관으로 포함해서 생각한 사례가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진시황이 당시의 중원 천하관에 해당하는 나라들만 통일 대상으로 삼고 이와 관련 없는 이민족 국가[24] 인 고조선은 제외한 것 처럼 말이다.
애초에 전근대에는 혈통과 언어가 비슷한 같은 민족들을 부족이 서로 다르고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침략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가 매우 흔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시대 당시 여진족들만 해도 서로 부족별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었고, 정복한 타 부족민들을 전부 노예로 만든 경우가 많았었다. 극단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부족들을 아예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즈텍 제국이 있다.
또한 앞서 명기했듯이 예맥이 항시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나타날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인류유전학적 관점이나 고고학과 반드시 조응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 왜곡되며 이를 후대에 압축해서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편향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근대사학이나 현대의 재야사학의 대표적 오류이다.
예맥의 뿌리는 같으나 시대에 따라 예와 맥으로 분류되어 호칭되기도 했으며, 다만 그 기준이 과학적이고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 동예/옥저 등 영동계열, 후대 백제 등으로 이주한 북방계 한반도 남부인, 부여인 등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6. 표기 문제[편집]
이들 세력이나 종족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헌상으로 예와 맥은 '예(濊)', '맥(貊)'으로만 존재할 뿐 '예족', '맥족'이라 기록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대로 예맥을 예와 맥이라는 특정 혈연 민족으로 보는 경우 이들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헌상에는 羌(강), 氐(저), 凶奴(흉노)라고 나타나는 민족을 강족, 저족, 흉노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극 초반에 등장하여 충돌하는 영서, 영동의 말갈 세력을 활동 영역과 기록 시기로 보아, 한반도 중남부에서 활동하던 이질적인 예맥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말갈 항목 참조.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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