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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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문헌기록
2.1. 《구삼국사》(舊三國史)
2.2. 《삼국사기》(三國史記)
2.3. 《삼국유사》(三國遺事)
2.4. 《제왕운기》(帝王韻紀)
2.5. <조연수(趙延壽) 묘지명>
2.6. 《설암잡저》(雪巖雜著) <묘향산지>(妙香山誌)
2.7. 《응제시주》(應濟詩註)
2.10. 《금오신화》(金鰲新話)
2.11. 《청학집》(靑鶴集)
2.12.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3. 구전문학
3.1. 향산제
3.2. 환인, 환웅과 연결이 없는 단군 신화
3.3. 구빈마을 전설
3.4. 구미호 관련 전설
4. 관련 유적
4.1.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
4.2. 마니산(摩利山) 참성단(塹星壇)
4.3. 전등산(傳燈山) 삼랑성(三郞城)
5. 신화소
5.2. 박달나무(檀樹)
6. 단군신화의 지리



1. 개요[편집]


단군신화는 단군에 대한 신화를 줄여 말한 것이다. 신화이니,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유라시아 유목민족들의 텡그리 신앙과 근연관계에 놓여 있다.

흔히 알려진 단군신화 내용은 1281년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나온다. 하지만 기록마다 신화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당장 삼국유사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은 1287년 쓰인 제왕운기에서는 호랑이마늘을 먹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아서, 당시 신화의 내용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 문헌기록[편집]



2.1. 《구삼국사》(舊三國史)[편집]


삼국사기》가 주로 참고한 《구삼국사》 <동명왕편>에는 단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비류국왕 송양에 의해 언급되어 있다. 이때 송양은 주몽과 서로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자존심 싸움을 하는 중이었는데 송양은 선인의 후손임을, 주몽은 천제의 손자임을 자부했다. 만일, 이가 사실이라면 송양왕의 비류부가 고조선과 모종의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함의할 지 모르는 바이나, 오늘날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구삼국사의 저자가 그러한 역사의식을 지닌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讓曰. "予是仙人之後. 累世爲王."

송양이 말하기를 “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인데 여러 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다."(양왈 여시선인지후, 누세위왕)


2.2. 《삼국사기》(三國史記)[편집]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동천왕 때 수도를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하는데, 여기에 덧붙여서 아래와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낙랑군이 건재하였을 시기이므로 이 기록의 평양성은 현재 북한 지역의 평양이 아닌 환도성 인근 지역에서 임시 수도로 삼은 선인왕검(仙人王儉)의 땅이라는 별개의 평양성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다른 한사군이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것과는 달리 고구려가 속했던 현도군만이 왕검성이 함락된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으며 현재의 북한 평양 지역을 비롯한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2세기대 철기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낙후되어 있고[1] 길림성 통화(通化) 지역에서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만발발자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적이 위치상 졸본천의 상류에 있었다는 송양의 비류국(소노부)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어 고조선과 초기 고구려의 연관성이 시사된 바 있다.#

즉, 위의 근거들과 더불어 《구삼국사》 기록에서 졸본 인근 지역을 차지하던 송양이 선인(仙人)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삼국사기》의 환도성 인근 지역 평양의 선인왕검(仙人王儉)과도 대응되는 것으로 보아 이 같은 점들을 정리해보면 초기 고구려 중심지 인근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위치해 있었고 이에 따라 주몽 신화는 압록강 유역으로 남하한 고구려 세력이 해당 지역의 원 고조선 세력을 흡수한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일 수 있으며 송양이 후손을 자처하던 선인(仙人) 역시 그 일대를 지배하면 원 고조선 세력의 선인왕검(仙人王儉)을 뜻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2]

또 뒷부분의 '왕험에 가 도읍하였다'는 문구의 주체가 단군왕검인지 동천왕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사실 그 실체는 《사기》 <조선 열전>의 위만이 '왕이 되어(王之) 왕험에 도읍하였다(都王險)'는 것을 잘못 기재한 것이다. 신채호도 이 점을 지적하며 김부식을 비판했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勘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2.3. 《삼국유사》(三國遺事)[편집]


  • 일연(一然), 1281년 ~ 1283년.

가장 대표적인 형태의 단군 신화. <기이>편의 가장 첫머리인 고조선(왕검 조선)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일연은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하였다고 설명했다. 현전하는 《위서》로는 《삼국지》의 일부로 조위(曹魏)의 역사가 기록된 《위서》[3]가 있고, 북위(北魏)의 역사가 기록된 《위서》가 있지만 여기에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대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인용한 책에 《위서》가 있기 때문에 전국시대 위나라에 대한 책으로 추정하거나[4] 서진 시대 왕침의 《위서》가 아닌가 여기기도 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단군에 관한 내용이 중국 사서들에서는 전혀 내용이 보이지 않고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위만(衛滿)의 성을 《잠부론》(潛夫論)과 동일하게 《한서》의 위(衛) 자와 달리 위(魏) 자로 명시해 모두 위만(魏滿)이라고 표기한 점과 위만조선 시기(기원전 2세기)를 기준으로 놓고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한 지 2천 년 전이라는 기사의 내용을 적용해 보면 전설상의 요(堯) 임금 시기(기원전 24세기)와 근접한 점 때문에 위만조선의 전승이 한반도 내에서 자체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와서 기록한 고조선에 관한 자체 사서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고기》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단군고기》(檀君古記)라는 책의 존재가 보이지만 이 또한 현재는 실전되었다.

古朝鮮【王儉朝鮮】

고조선【왕검조선】

魏書云 "乃徃二千載 有壇君王倹, 立都阿斯逹【経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或 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 與髙同時."

《위서》(魏書)에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逹)[원주1]

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고(高: 요 임금)[5]와 같은 때였다."라고 하였다.[6]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庻子桓雄 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徃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고기》(古記)에는 "옛날에 환인(桓因)[원주2]

[7]의 서자[8] 환웅(桓雄)이 있어서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탐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웅은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伯山頂)[원주3]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그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부른다.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니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여 세상에 있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軰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 而婚之孕 生子號曰 壇君王倹.

이때 한 범과 한 곰이 있어서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신웅(神雄)[9]

에게 기도하기를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때 신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10] 20매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이 받아서 이를 먹고 삼칠일(三七日: 21일) 동안 삼갔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지만 범은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을 맺지 못하므로 매양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바라며 빌었다. 웅이 이에 가화(假化)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배니 아들을 낳으므로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以唐髙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 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都平壤城【今西亰】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亰 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당고(唐高) 즉위 50년 경인(庚寅)[원주4]

[11]평양성(平壤城)[원주5]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弓忽山)[원주6]이나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림이 1,500년이었다. 주(周) 호왕(虎王: 주무왕)[12] 즉위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다.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 조선)-


<기이>편의 -고구려조-에서 주몽신화를 설명하면서도 주석으로 또 단군에 관한 기록이 조금 나온다. 여기서 단군과 해모수를 등치시키는데 이에 따라 식민사학자들 중 단군을 고구려만의 지역설화로 비정한 경우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단군을 지역설화로 만들어서 최초의 통합 건국 설화로 기자동래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동명성왕 고주몽과 단군을 관련시키는 것 자체는 《삼국유사》의 저술연대를 통해 알 수 있다시피 대략 고려 중후기부터 나오기 시작한 트렌드로 보이는데 이런 생각이 반영되어서인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팔전에서 동명성왕은 기자가 아닌 단군과 같이 배향되었다.

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 夫婁.' 今拠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 夫婁.', 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단군기》(檀君記)에는 '군(君;단군)이 서하(西河) 하백(河伯)의 딸과 더불어 혼인하니,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하였다.'고 했다. 지금 이 기록[13]

에 따르면 해모수(解慕漱)가 하백의 딸과 사통해서 뒤에 주몽(朱蒙)이 났다고 하고,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고 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



2.4. 《제왕운기》(帝王韻紀)[편집]


  • 이승휴(李承休), 1287년.

初誰開國啓風雲 /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시작했나?

釋帝之孫名檀君 / 제석(帝釋)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

本紀曰 "上帝桓因有庶子曰 雄. 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 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 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 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爲神, 不死故也."

본기(本紀)》에는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어 웅(雄)이라 하였다. 운운. 이르길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습니다.'라 하므로, 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귀(鬼)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정(太白山頂)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라고 부른다. 운운. 손녀에게 약을 마시게 하여 사람의 몸으로 만들고, 단수신(檀樹神)과 더불어 혼인시켜서 남자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朝鮮)의 영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고로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 모두가 단군의 후손이다. 다스린 것이 1,038년이고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니, 죽지 않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竝與帝高興戊辰 / 고(高: 요임금)와 함께 나란히 무진(戊辰)에 흥하여,

經虞歷夏居中宸 / 우(虞: 순임금)를 지나 하(夏)를 거쳐 대궐에 살다가

於殷虎丁八乙未 / 은(殷) 호정(虎丁: 무정) 8년 을미(乙未)[14]

入阿斯達山爲神 /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네.[15]

亨國一千二十八 / 나라를 향유함이 1,028년인데

無奈變化傳桓因 / 어쩔 수 없이 변화하여 환인(桓因)에 전했으나

却後一百六十四 / 도리어 164년이 지난 뒤에

仁人聊復開君臣 / 어지신 분(기자)[16]

이 군신(君臣)을 다시 열었도다.[17]

《제왕운기》 하권


《제왕운기》의 기록은 대체로 《삼국유사》와 비슷하지만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환웅의 이름을 단웅으로도 기록하고 있으며, 호랑이와 곰의 설화는 없고, 단웅의 손녀[18]가 약을 먹어 사람으로 변한 뒤 단수신[19]과 소통하여 낳은 것이 단군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천손이 모계로 이어진 특이한 사례이다.

또한 뒤이어 부여비류국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전략)신(臣)이 일찍이 상국(上國)에 사자로 갔을 때 요하 가에 있는 노변(路邊)에 무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부여 부마(駙馬)대왕의 무덤이다'라고 하였다. 또 가탐(賈耽)[20]

은 "큰 평원의 남쪽의 압록(鴨綠)은 모두가 부여의 옛 땅이니 북부여란 것은 마땅히 요하 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 개국(開國)은 대개 후조선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동명 본기》에서 적기를,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길 '나는 선인의 후예로 대대로 왕이 되었다. 금일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이 되는 게 어떠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이 또한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比流王松壤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라고 하였다.

《제왕운기》문화콘텐츠닷컴 사이트, 김경수 역 .


여기서는 단군과 부여, 고구려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관계로 보았다.


2.5. <조연수(趙延壽) 묘지명>[편집]


  • 이숙기(李叔琪), 1325년 작성.

平壤之先 仙人王儉 /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仙人王儉)으로

至今遺民 堂堂司空 / 오늘에 이르러 남은 백성이 당당한 사공(司空)[21]

이시네.

平壤君子 在三韓前 / 평양의 군자는 삼한(三韓)에 앞서 있으면서

壽過一千 胡考且仙 / 나이 1천이 넘도록 장수하여 신선이 되었어라.

<조연수 묘지명>


<조연수 묘지명>을 들어 고려 시대까지 단군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지역 설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2.6. 《설암잡저》(雪巖雜著) <묘향산지>(妙香山誌)[편집]


第代朝記云 桓仁之子桓熊 降于太白山神檀下居焉 熊一日與白虎交通生子 是謂檀君

《제대조기》(第代朝記)에 이르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 아래에 내려와 거처하였다. 환웅이 하루는 백호와 교통하여 (백호가)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이다" 하였다.


숙종 때 설암 스님이 지은 <묘향산지>에는 또 내용이 조금 다른 단군신화가 있다. 여기에서는 환웅과 백호가 교통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이라 되어 있다. 또한 여기서는 환웅의 웅을 '곰 웅' 자를 쓰고 있어, 환웅의 신체를 으로 보기도 한다.[22]


2.7. 《응제시주》(應濟詩註)[편집]


始古開闢東夷主自註 昔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王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增註 古記云 上帝桓因 有庶子曰雄 意欲下 化人間 受天三印 率徒三千 降於太白山神檀樹下 是爲桓雄天王也 桓或云檀 山卽今平安道熙川郡妙香山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雄願化爲人 雄遺靈艾一炷二十校 曰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食之 虎不能忌 而熊忌三七日得女 身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爲人 孕生子曰檀君 與唐堯同日 以立國號朝鮮 初都平壤後都白岳 聚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爲東夫餘王 至禹 會諸侯塗山 檀君遣子夫婁 朝焉檀君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化爲神 今黃海道文化縣九月山也 廟至今存焉 亨年千四十八年 厥後一百六十四年 己卯箕子來封

옛날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인하여 그를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당요 원년 무진년이다. 《고기》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웅이라 하였다. 인간세상을 탐내어 인간이 되어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桓)은 혹은 단(檀)이라고도 한다. 산은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 묘향산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명, 병,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되 햇빛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하였다. 범과 곰은 그것을 먹고 금기하였는데,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지만 곰은 금기를 잘 지켜 21일 만에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깐 사람으로 변신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군이다.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처음 도읍지는 평양이었고 뒤의 도읍지는 백악산이었다.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들어 부루를 낳았는데 이분이 동부여왕이다. 하나라 우왕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를 보내었다. 단군은 하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이었다. 그 뒤 164년 후에 기자가 와서 분봉받았다.

응제시주[23]

. 근데 곰은 잡식성이고 범은 육식성이잖아?


삼국유사》에서 언급했던 해부루와 동부여로 이어지는 설을 채용하고 있으며, 기자 조선과의 연결도 있다. 여러 부분에서 드러나는 자주적 모습과 유학자적 면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조선 초기 학풍을 잘 보여준다.

요 임금과 한날 한시에 즉위했다고 하므로 단군을 와 동일시하려 한 듯하지만 결국 통합되지 않았다.


2.8.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편집]


변계량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문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 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000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1416) 6월 1일자 기사



2.9.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편집]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濊)와 (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中 《단군고기


내용은 대체로 《응제시주》와 《제왕운기》의 혼합.


2.10. 《금오신화》(金鰲新話) [편집]


  • 《금오신화》(金鰲新話)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홍생(洪生)이라는 개성 부상(富商)의 아들이 고조선의 옛 땅인 평양에서 놀다가, 대동강 가에 있는 부벽루(浮碧樓)에서 신녀(神女)와 만나게 된다. 홍생은 그녀로부터 선계의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그녀가 지은 시를 감상하다가 돌아온 뒤에 상사병에 걸려 앓게 된다. 그러던 중 꿈에 신녀로부터 선관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죽었는데, 그의 시체가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시해(屍解)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녀의 내력이 흥미롭다. 그녀는 기자의 후예로 본래 고조선의 왕족이었다. 위만에게 나라가 망해 준왕이 도망갔을 때 자신도 매우 어려워졌는데 한 신인(神人)을 만나 신녀가 됐다고 하면서 그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홀연이 어떤 신인(神人)이 나를 위로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나라를 다스린 후 바다의 섬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어 죽지 않은 지 수천 년이 됐다. 네가 나를 따라 자부(紫府) 현도(玄都)로 가 즐겁게 사는 것이 어떠하냐?" 내가 승낙을 하니 나를 이끌고 살고 계신 곳으로 가 별당을 지어 대우해 주셨다. 나에게 현주(玄州)의 불사약을 먹이니 복용한 지 며칠 만에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나서 뼈 마디마디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신인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라를 세우고, 신선이 되어 죽지 않은지 수천 년이나 되었다는 내력을 보면 단군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구절 이전에 나오는 홍생의 시문에도 단군이 언급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부(紫府)'라는 지명은 《포박자 》중에서 황제(黃帝)가 동방 청구(靑丘) 땅에 가서 자부선생(자부선인, 紫府先生)을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어갔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11. 《청학집》(靑鶴集)[편집]


조여적(1588년 전후)의 《청학집》에서 도인인 금선자(金蟬子)는 변지(卞沚)의 《기수사문록》(記壽四聞錄)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선자가 말했다. 변지의 《기수사문록》이라는 책은 우리 동방 동방 도인들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환인진인(桓仁眞人)은 명유(明由)로부터 도를 배웠고 명유는 광성자(廣成子)[24]

로부터 도를 배웠는데 광성자는 옛날의 선인이다. 환인은 동방 선파의 시조가 되었는데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환인의 아들로서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실천함과 아울러 풍우(風雨)와 오곡 등 360가지 일을 주관하여 동방의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단군이 그 일을 잇고 교화를 행한 지 10년, 구이(九夷)가 모두 받들어 천왕(天王)으로 세웠다. 단군은 쑥대풀로 엮은 정자와 버드나무로 지은 궁궐에서 살며 머리를 땋고 소를 타고 다니면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상을 주관하기 1,048년에 아사산(阿斯山)에 들어가 선거(仙去)하였다.

그 후에 문박씨(文朴氏)가 아사산에 살았는데 환한 얼굴에 모난 눈동자로 능히 단군의 도를 터득하였다. 영랑(永郞)이란 사람은 향미산(向彌山) 사람이다. 나이 90에도 어린애의 얼굴빛이었으며 해오라비 깃의 관을 쓰고 철죽(鐵竹) 지팡이로 산과 호수를 소요하였는데 마침내 문박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마한(馬韓) 시절에는 신녀 보덕(普德)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람을 타고 다녔고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불렀는데 용모가 마치 가을 물의 부용꽃과 같았다. 그녀는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군신화가 도교와 결합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이후 홍만종이 저술한 《해동이적》에서는 한국 단학(丹學)의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있다.


2.12.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편집]


《오계일지집》은 이의백(1711년 ~ ?)이 지은 신선 설화집이다. 여기에서 단군을 신선 / 임금으로 취급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구월산(九月山)에 팔대(八臺)가 있는데 산꼭대기의 비서갑비(匪西岬妃)가 여기에 와서 노닐 제 상서로운 기운이 무지개와 같았다고 한다. 단제(檀帝)가 비서갑비를 맞아 왕비로 삼고 성자(聖子) 3인을 낳았는데 장자는 부소(扶蘇), 차자는 부루우(扶婁虞), 삼자는 부여(扶餘)라 하였다. 중국의 요 임금 25년, 무진년에 왕검(王劍)이 임금이 되어 아사달(阿斯達)을 서울로 삼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는데 이분이 최초의 단군이었다. 제위한 지 93년, 경자년에 신으로 모셔졌고 태자 부루가 임금이 되었다. 아사달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은 나라 무정 임금 8년, 갑자년에 금린(金麟)을 타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

하루는 한휴휴(韓休休) 선생을 따라 백년산(白寧山)을 지나다가 백학(白鶴) 두 쌍이 봉우리 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여쭙기를 "이 산에 학이 삽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것들은 학이 아니라 옥판(玉版)의 정(精)이니라. 저 봉우리 바위 틈에 돌 궤짝을 숨겨 놓았는데 궤짝 속에는 옥판이 4개가 있다. 옥판 위에는 금자(金字)로 글을 써 놓았으니 단군 시절 문박(文朴), 대왕(大往), 신지(神誌) 등의 성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모두 변화, 장생의 비결들이다."라고 하셨다.


문박은 《청학집》에도 등장했던 옛 신선이며, 신지는 고려 때 유행하던 참서 《신지비사》의 작자로서 이름이 전해져오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그 외에 《오계일지집》에는 환웅성선(桓雄聖仙)이 창작하고 해모수(解慕漱) 선인이 정리했다는 <현묘결>(玄妙訣) 등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3. 구전문학[편집]



3.1. 향산제[편집]


'향산제'는 함경도 지역에서 음력 10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 지내는 가택제사로 과거 고대 국가에서 10월에 제사를 지내던 풍습이 내려오는 것인데, 함경남도 단천시, 함경북도 무산군에서는 이 향산제를 '단군제'라 부르며 단군에게 제사지내며, 함경북도 명천군은 이름은 '상산제' 혹은 '향산제'라 부르지만 제사의 대상은 단군이다.



3.2. 환인, 환웅과 연결이 없는 단군 신화[편집]


降於樹邊而生, 今之三聖, 固不可信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문화현 출신의 우의정 유관(柳寬)의 상소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하면 흥미로운 생각도 할 수 있다.

유관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부분으로, 그가 말한 "어떤 사람"은 "지금의 삼성설(今之三聖)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단군 스스로 나무 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유관은 이를 아주 오래 전인 태고 시대에 기(氣)가 뭉쳐서 인간이 되었다는 설과 연결하여(旣有天地, 則氣化而人生焉),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其樹邊之生, 固爲荒怪)라고 덧붙였다.

즉, 그가 전해 들었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나무가 있고 단군은 그 바로 곁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삼성설(환웅, 환인이 포함된 단군 신화)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은 온전히 기록되지 못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사라진 구월산 지역에서만 전해지던 또 다른 단군 신화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 나름대로 구전 내력을 가진 전설이 아니라면 굳이 널리 퍼진 삼성설을 부정하면서 내세울 리가 없지 않을까?

다만 상세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다.

이후 환인과 환웅 없이 단군만 등장하는 유형은 단군이 직접 강림하는 형태가 되어서 《동국통감》으로 이어졌다.


3.3. 구빈마을 전설[편집]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빈(九賓)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고개라고 한다.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의 전설(이하 구빈마을 전설)



3.4. 구미호 관련 전설[편집]


임석재 선생이 전국의 설화를 수집, 집필해 펴낸 《한국구전설화전집》(전12권)에 실린 마이너 버전 단군신화에는 이런 내용이 있는데 간단히 옮기면 이렇다.

"옛날 옛적 밥도, 옷도 나무에서 따서 구하던 때 하늘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졌는데 그 거시기가 예순 댓발이나 해서 모든 동물들이 기겁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곰이 그를 굴 속에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후 여우가 맞이하여 기자(箕子)를 낳았다.[25] - 신문 칼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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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유적[편집]



4.1.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편집]


삼성사의 모습.

삼성사(三聖祠)가 구월산(九月山)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있으며...【단인(檀因)·단웅(檀雄)·단군(檀君)의 사당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삼성사는 단군의 유적 중 가장 확실하고 오래된 유적으로 고려, 조선시대에 있던 신사(무교)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부터 나오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나온다[26].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고려 7대 목종 시기에 만든 의주(儀注)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즉 최소 7대 목종 시기부터 삼성사가 있었다. 삼성사 옆엔 장장평 혹 장당경이라 부르는 터가 있는데 이곳이 단군의 도읍지였다고 전한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 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합니다.

신(臣)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 묘와 합치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 6월 14일자 기사. / 황해도 문화현 출신의 우의정 유관(柳寬)의 상소 중


아사달산으로 여겨지는 구월산에는 북쪽 벽에 단웅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 단인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신 삼성사(三聖祠)가 있었다. 이 삼성사는 세종 때 평양으로 단군사당을 옮기면서[27] 폐쇄했는데, 단종 때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당을 옮긴 것 때문에 변괴가 발생하고 역병이 돈다는 원망의 목소리가 있었다.

신(臣)이 황해도 백성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文化縣) 단군(檀君)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癘氣)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 · 장연 · 재령 · 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중략) 대저 단군이 평양을 떠난 지 400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가 40대(代)를 전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왕검성에 도읍하여 2세(世)를 전하였고, 고구려는 705년을 전하였으며, 신라가 (이 지역을) 병합한 것이 200여 년이고, 고려 왕씨는 400여 년을 전하였으니, 단군이 평양을 떠난 것은 아득하게 먼데, 평양을 돌아보고 연연하겠습니까? 또 산신이 되어 토인(土人)의 높이고 제사하는 것을 받았으니 어찌 평양에 즐겁게 옮기어 동명왕(東明王)과 사당을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국유사》의 주(註)에서 이른, 환인천제(桓因天帝)는 곧 유관(柳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檀因)이고, 환웅(桓雄)은 천제의 서자(庶子)이니, 곧 이른바 단웅(檀雄)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寺宇)를 창립하고 환(桓)을 고쳐 단(檀)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을 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二聖)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1452) 6월 28일자 기사 / 황해도 지역에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한 경창부윤 이선제의 상서문


이런 소문은 성종 시대까지 돌았다.

또한 성종 때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이 삼성단의 사적을 조사한 문서에 의하면, 삼성단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사자(四直使者)가 있어 그 위판이 남향을 하고 있었다 한다.


4.2. 마니산(摩利山) 참성단(塹星壇)[편집]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


고려사》 및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화도 마니산의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도에는 의외로 단군에 관한 유적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또한 참성단 자체가 최소 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기록이 허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파일:external/www.bucheontimes.com/23374_67279_5629.jpg
마니산 참성단에서 채화하는 모습.*


4.3. 전등산(傳燈山) 삼랑성(三郞城)[편집]


전등산(傳燈山)【일명(一名)은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화도 전등산의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라 한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삼국시대의 성으로 본다.

파일:external/www.cha.go.kr/1625201.jpg
강화 삼랑성의 모습.*


5. 신화소[편집]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단군 신화를 어느 정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환인서자: 여기서 서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자, 서자 개념이 아니라 고대 문헌 기록에는 "아들","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 등의 의미로 고대 사서에 사용한 예가 있다.
  • 환웅: 천손강림의 모티브를 반영하고 있다. 반고 신화를 비롯하여 중국에서는 땅에서 신이 등장하지만 단군 신화에서는 천상의 환웅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고대 한국과 중국의 계통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천손 강림 신화는 한민족 뿐 아니라 주로 동북아시아 유목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화 유형이며 고대 한반도인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건국 신화까지 이어진다.
  • 삼위 태백: '3개의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이라는 해석도 있고, '삼위산과 태백산'이라는 해석도 있다. 오늘날의 평안북도요동 반도 사이에 있는 으로 추측.
  • 천부인 세 개: 천부인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청동기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는 정권을 상징하는 (비파형) 동검, 제사를 상징하는 거울, 풍요를 상징하는 방울 등으로 추정한다. 최남선이 일본 신화의 삼신기(세가지의 신기)와 엮기 위해 만든 가설이다.
  • 태백산: 일연은 묘향산으로 비정했는데, 이는 대동강을 대동맥으로 삼는 평양 중심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고조선이 요동에서 출범했으며 단군 신화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입장에서는 요동 ~ 압록강 일대의 여타 산을 지목한다.하지만 현대 한국인의 일반적 인식에서는 보통 백두산으로 비정된다.
  • 신단수(단수): 이그드라실과 같은,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의 모티프를 상징한다. 일연은 '제단 단(壇)'을 사용했으나, 후대의 기록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을 사용하여 해석이 나뉜다.
  • 풍백, 운사, 우사: 각각 바람, 구름, 비를 상징하며, 농경 사회의 관념을 반영한다. 참고로 한국 고유의 신 명칭이 아니라 일연 대에 중국의 신 이름을 끌어온 것으로, 후대에 윤색되거나 단순히 그 뜻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어가 선택된 것이다.
  • 범 한마리: 환웅 집단과 교화를 이루지 못한 집단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 거주하는 토착민일 가능성이 높다. 호랑이를 숭상하는 기록이 있어 '동예'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현재도 한반도 동쪽 러시아 극동지역 연해주에는 호랑이를 숭배하는 소수민족 우데게이족[28]아무르강 근처에는 곰을 숭배하는 소수민족 니브흐족이 살고있어 그 흔적이 유지되고 있다.
  • 곰 한 마리: 곰을 숭상하는 집단으로 비정되며,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서 거주하는 토착민일 가능성이 높다. 이주민에 순응한 집단으로 상정된다. 함경도 지방 전설에 나오는 토착 민족인 마고할미 세력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민족 기원설 중 가장 유력한 남북 이중 형성설[29]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 단군 왕검: 이주민인 환웅 집단과 '곰을 숭상하는 집단' 부족이 결합한 결과물로 비정되며, 환웅 집단에서 추대된 통치자. '단군'을 제사와 관련된 권위로, '왕검'을 정치 지도자로 추정하여 제정일치 사회라고 보는 해석이 주류이다.
  • 당고(중국 임금)가 즉위한 지 50년: 당시 중국의 달력으로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의 청동기 문명과 중국 청동기 문명의 발흥 사이에는 천 년 이상 차이가 있으므로, 후대에 한국사와 중국사의 연대를 맞추기 위해 끌어올린 연대라고 추정한다.
  • 평양성: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고려의 서경(지금의 평양)이 단군신화의 평양과 동일한 곳이라고 해서 그렇다. 하지만 고조선 건국시의 최초 중심지는 요서나 요동으로 추정되므로 평양성이 지금의 북한의 평양일 가능성은 없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단군신화도 평양중심설화로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또는 이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은 맞고, 단군신화가 평양 지역의 어떤 집단에 대한 신화였던 것이 고조선 건국신화로 덮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단군조선은 부정된다.
  • 백악산 아사달: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백악산이 아니라 요동 근처의 어느 산이다.[30]
  • 1500년 동안 다스렸다: 당연히 실제 통치자의 수명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통치자의 위대함을 주장하기 위한 후대의 윤색이다. 관련 기록들을 볼 때 신선 사상이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는 왕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기자: 현재 기원전 4세기경부터 존재했음이 확인되는 기자조선 전승을 반영한 것이나, 한국 학계에서는 고고학적 문제점 등을 이유로 수용하고 있지 않다.
  • 장당경: 황해도 유주에 관련 전승이 남아 있다. 개마고원이라는 설도 있다.
  • 산신이 되었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5.1. 환인[편집]


환인(桓因), 환인(桓仁), 혹은 단인(檀因).

제석천, 혹은 상제(上帝)로 여겨진다. 제석천 또한 상제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제석천과 동일시 되는 환인을 상제로 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가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단 제석천의 원래 이름인 인드라를 한역하여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도 하는데, '석가(釋迦)'는 '능(能)'이라는 의미[31], '제환(提桓)'은 '천(天)'의 뜻, '인다라(因陀羅)'는 '제(帝)'의 의미를 가진다. 이 '석가제환인다라'를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 하며, 이 중에서 '환인(桓因)'을 떼어낸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최초 기록자인 《삼국유사》의 책임자가 승려 일연이었기 때문에, 단군을 불교와 섞어버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 윤내현은 유학자였던 이승휴가 불교적 개념으로 《제왕운기》를 서술했을리 없고, 인용한 책도 《본기》로 《삼국유사》와 다르기 때문에 불교적 윤색론을 부정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석가 제환 인다라'에서 단어 첫 자 '제'가 아닌 중간자 '환'을 연결해서 환인이라는 이름을 지어냈다고 보는 것은 억지라는 반론도 있다. 실제 일연 스님은 '제석환인'이라 쓰지 않고, '환인이 있는데 제석이라고도 한다'고 분리해서 적었다.

'하늘님'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교적 의미를 덧붙혔을 것이라는 설이 있고, 빛, 태양 숭배 사상에서 '환한 님'이 음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환웅은 신라의 차차웅이라는 이름과 연계하여 하늘님보다는 낮은, 땅의 무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2. 박달나무(檀樹)[편집]


박달나무는 흔히 못 보고 넘기기 쉬우며 그다지 눈길을 끌지 않지만 단군 신화에서 중요한 상징물이다.

환웅이 내려온 곳이 신성한 박달나무(神檀樹)이며, 단군이 태어난 곳은 박달나무 아래이다. 우리 나라에는 신목(神木)이나 목신(木神) 신앙이 널리 퍼져 있는데, 신(神)이 나무에 내려오거나 나무에서 신인(神人)이 태어나는 것은 이러한 목신 신앙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단군의 이름부터가, 단(檀)은 곧 '박달나무 단'이며 따라서 단군을 "박달나무의 임금"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무의 일종으로 시베리아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에서 많이 자라며 한민족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 유목 민족들도 신성시하는 나무이다.

다만 여러 문헌에서 박달나무 단 대신에 '제단 단(壇)'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6. 단군신화의 지리[편집]


지금은 모두 북한 지역에 있기 때문에 언뜻 대한민국 사람들은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일대의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다.

환웅이 내려왔다는 태백산(太白山)은 현대 한국인들은 당연히 한반도 최고봉인 백두산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백두산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았고,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으로 비정된다. 묘향산은 평안북도평안남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이 나라를 일으킨 곳은 평양(平壤)이며, 그 다음에 아사달(阿斯達),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옮겨진다. 구월산은 황해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서로 상당히 거리가 있어서 왜 이렇게 신화적 지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동강을 고려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동강은 이 세 지역을 묶는 고리가 되는데, 묘향산은 대동강 상류에 인접해 있고, 평양은 대동강 중류를 끼고 있다. 그리고 구월산은 대동강 하류와 아주 가깝기 때문이다. 도로가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강이 수운으로서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군 신화의 주요 지점이 대동강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삼국유사》에서 '삼위태백'을 묘향산으로 선정한 것은 명백히 불교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비정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 비정과도 연결된다.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보는 입장은 당연히 평양을 강조하는 것이고, 태백산이 백두산이라고 보는 입장은 요령 중심설에 가깝다. 현재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 이동설이 주류이기 때문에, 태백산 = 묘향산은 이후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 된 이후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동명성왕 관련 설화의 평양 지역 토착화를 들 수 있다.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는 평양이 아니라 훨씬 더 북쪽인 국내성 일대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평양에서는 고구려 초대군주인 동명성왕과 관련된 구전이 다수 존재한다. 이 역시 고구려의 중심지가 평양으로 이동함에 따라 토착화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 김남중, 「위만조선의 멸망 원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왕검성의 소멸과 조선현의 中心地化와 관련하여-, 고조선단군학」, 2021[2] 만약 왕검성이 현재의 북한 평양 지역이 아닌 고구려 초기 중심지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왕검성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 후대의 기록 대부분이 현 북한 평양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 정보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한반도 왕조들 내에서 고조선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 및 자체적인 전승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법종,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2006[3] 다만 《삼국지》 <위서>는 본래 <위지>(魏志)라고 불렸다.[4] 요와 단군을 2,000년 전이라고 하니 시기상으로 이쪽이 가깝다.[원주1] 경전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고 하였다.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 지역에 있으니 개성 동쪽에 있는 오늘날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라고 한다.[5] 고려 제3대 정종의 이름이 왕요(王堯)이므로 이를 피휘한 것이다.[6] 여담으로 단군은 아니지만 고조선이 중국 요 임금 때에 있었다는 내용은 1698년 중국 청나라에 가톨릭 포교를 위해서 왔던 프랑스 예수회 소속 신부인 장 밥티스트 레지(1663~1738년)가 남긴 기록인 《한국의 역사에 대한 요약》(Histoire abregee de la coree)에도 언급된다. 더 자세한 사항은 고조선의 단군조선 항목을 참조할 것.[원주2] 제석(帝釋)을 이른다.[7] 판본에 따라 환인이 환국(桓囯)으로도 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인(因)이 조선 초 판본에서 이체자인 𡆮('囗' 안에 '士'가 들어 있는 글자)으로 옮겨지고, 그것이 다시 국(囯)으로 잘못 옮겨진 데서 비롯한 오자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 이외에도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까지의 다른 문서에서 '桓因'이 쓰인 예는 여럿 확인되므로 원본이 '桓因'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전근대의 안정복부터 오자임을 인지하고 교정하였다. 링크 참조.[8] 흔히 생각나는 첩 소생의 자녀가 아닌 장남을 제외한 아들들을 통칭한다.[원주3] 곧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9] 단군(檀君)의 아버지 환웅(桓雄)을 달리 이르는 말. "桓雄"을 참고. 출처-네이버 한자사전.[10] 조선 제4대 세종 1443년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에 의하면 '호(葫)라고 하는 것은 대산(大蒜=마늘)이며, 산(蒜)이라 하는 것은 소산(小蒜=달래)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산(蒜)이 마늘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매운맛 식물을 산(蒜)으로 표현했는데 나중에 들어온 마늘이 대세를 장악하면서 산(蒜)하면 마늘로 굳어져 생긴 오류라는 주장도 있다.[원주4] 당요(唐堯)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이니, 50년은 정사(丁巳)이지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된다.[11] 요(堯)의 즉위 원년이 무진년이 맞는다면, 경인년은 즉위 23년 또는 83년이다. 한편 《죽서기년》에서는 요 임금 원년이 병자년이라고 하는데, 이에 따르면 경인년은 즉위 15년 또는 75년이다.[원주5] 지금의 서경(西京)이다.[원주6]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다.[12] 고려 제2대 혜종의 이름이 왕무(王武)이므로 이를 피휘한 것이다.[13] 인용된 《단군기》 이전에 언급한 《고기》(古記)의 기록을 의미한다.[14] 기원전 1243년. 그러나 60갑자가 맞지 않으며, 이로부터 가장 가까운 을미년은 기원전 1225년이다.[15] 지금의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弓忽)이라고 하고 또는 삼위(三危)라고 한다. 사당이 아직 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 ─ 원주[16] 기원전 1049년경 책봉받음. 위에서 언급한 기원전 1243년과는 194년, 기원전 1225년과는 176년 차이가 난다.[17] 다른 기록에는 이후 164년은 비록 부자(父子)는 있었으되 군신은 없었다고 한다.(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 ─ 원주[18]삼국유사》에 나오는 웅녀와 동일한 인격체로 추정된다.[19]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단수가 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20] 당나라의 정치가이자 지리학자. 정치가로서의 치적도 훌륭했지만 30년간 중국과 주변국의 자료를 모아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와 《고금군국도현사이술》(古今郡國道懸四夷述) 40권을 지었는데, 해당 문헌들은 신뢰도가 높았으나 현재는 유실되었다.[21] 묘지명의 주인인 조연수를 가리킨다.[22] 출처 - 고구려 연구 재단, 《고조선 단군 부여》[23] 조선 초기 권근이 지은 책이다.[24] 장자 재유(在宥) 편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신선이다.[25] 이 설화의 여우는 좋은 의미가 크겠지만 메타적으로 볼때 "기자(箕子)조선"은 현 사학계에서 허구로 보고 있으니 "속임수"를 잘 쓰는 여우의 상징으로도 읽힌단 점이 재미있다. 이런식의 단군신화 마이너 버전 중에는 곰이 아닌 호랑이가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26] 삼국사기 잡지 지리에선 안 나온다.[27] 평양으로 옮긴 단군사당이 바로 평양의 숭령전이다.[28] 시조 설화가 단군 신화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차이점이 확실하다. 큰 틀은 고아가 된 남녀를 각각 호랑이(남자아이)와 곰(여자아이)이 길러 성장후 혼인하여 우데게이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29] 중앙 몽골, 바이칼 호에서 이주한 세력과, 한반도 또는 만주 어딘가에 존재하던 토착세력이 혼혈을 해서 생겨난 민족이라는 설.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30] 백악이라는 말은 흰 언덕이라는 뜻으로 바위가 드러난 산을 말한다[31] '석가'는 샤카무니(석가모니불)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의미까지 부여한 것이다. 다른 북아시아 천손 신화소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석가불(샤키아무니)이 등장하곤 하는데, 하늘신과 동일시 되거나 내세의 미륵불 정도의 의미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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