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맥 (문단 편집) == 개요 == '''예맥([[濊]][[貊]])''', 혹은 '''예맥족'''이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살던 고대 부족 집단으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삼한|삼한족]]과 함께 [[한민족]]의 조상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현대에 우리의 민족인 [[한민족]]은 모든 예맥과 삼한이 통합된 [[단일민족]]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 한민족이 단일민족인 이유는 근연종들이 절멸했기 때문이다. 민족이란 언어, 문화, 역사를 공유하는 최상위 집단/개념이다. 단일민족이란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면, [[유럽]]의 [[민족]]들을 보면 이해하기 편하다. 가령 우리가 [[슬라브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에는 [[루스족]], [[폴란드인|폴족]], [[체코인|체크족]], [[세르비아인|세르비족]] 등 이 있는데, 이렇게 같은 근본을 공유하는 다른 민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단일민족이 아닌 것이다.]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하는 존재이다.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맥은 종족 명칭이고, 예는 지역 또는 강의 이름이라고 보아, 예맥은 맥족의 아홉 갈래(九貊) 중의 하나를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능순성(凌純聲)도 예는 예수(濊水)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하였다. 미지나(三品彰英)는 선진(先秦)문헌에 보이는 맥은 북방족에 대한 범칭이며, 예는 진대(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한대(漢代)에 범칭되는 예는 고구려·부여·동예를 포괄하는 민족명이라고 보았다. 예맥이라는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과 고전적인 북방족에 대한 범칭인 맥을 결합시킨 편의적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고구려를 지칭한 맥은 민족명인 예족 내의 특정한 부족명이라 하였다. 곧 한대 이후의 맥은 예와 동일한 계통의 실체라 하였다. 윤무병(尹武炳)은 예맥이라는 명칭은『사기(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한대 이후의 예와 (예)맥은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어졌던 실체였다고 보았다. 한편, 예일부(芮逸夫)는 한민족을 예맥과 한(韓)의 양계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예맥족 중 예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눈강(嫩江)지역 등에 살았고, 맥족은 산동·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해,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동일계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의 차이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이종설(異種說)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미카미(三上次男)인데, 그는 예족은 유문토기문화(有文土器文化)를 영위했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중이 컸던 고아시아족(古Asia族)계통이고, 맥족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족계통으로 파악하였다. 미카미의 주장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후하는 문화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되어졌다. 한편, 이옥(李玉)은 맥족과 예족은 원래 중국의 산시성·허베이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왔는데, 서기전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예족은 이어 이동해온 맥족에게 밀려 남으로 왔다가 고조선에 쫓겨 요동군(遼東郡)에 예속하게 된 것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집단이었고,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서기전 2세기경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했으니 이것이 고구려족(高句麗族)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백가쟁명 식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더라도 다른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909|#]] 고대 '''한민족의 조상'''들인 예맥은 [[요하강]] 유역에서 처음 시작[* 단군조선의 시작이 요하강 유역이었다. 예맥은 본래 요하강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산동]] 동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권역을 가지고 있었다. [[한족]]에게 밀리는 과정에서 산둥지방을 뺏기고 단군조선(청동기문화)이 시작된다.]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북쪽으로는 [[만주]], 남쪽으로는 [[한반도]]까지 뻗어나가 번영하고 있던 민족이다. 예맥은 크게 예(濊)족, 맥(貊)족, 한(韓)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언어가 통하는[* 예족인 [[부여]]와 맥족인 [[고구려]] 사이에 언어가 통했다는 기록이 있고, 맥족인 [[고구려]], [[백제]]와 한족인 신라 사이에 언어가 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를 근본으로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같은 민족[* 같은 민족의 기준은 언어가 통하는지다. 언어가 분화되면 근본이 같은 다른민족으로 친다. 현대 폴란드어와 러시아어가 통하지 않으나, 같은 슬라브어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같은 슬라브권 민족으로 취급하지만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이었으나, 향유하는 문화가 명백하게 달라서 서로 다른 취급을 했다. 일반적으로 '''예(濊)족'''은 [[반농반목]]을 하던 세력[* 대표적으로 부여가 반농반목을 했다.]이었고, '''맥(貊)족'''은 고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목축과 사냥 그리고 채집 생활을 하다가 고조선시기부터 고구려 초까지 [[밭|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로 변경했다. 반면 예맥에서 가장 늦게 출현[* [[고조선]] 남부에 존재하던 [[진국(국가)|진(辰)]]의 세력권이 한(韓)족의 세력권과 일치한다. 고조선이 중앙집권을 형성하는 동안 진은 중앙집권형성에 실패했고 훗날 조선유민이 진의 땅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삼한]]으로 갈렸다. 훗날 [[마한]]이 맥족인 십제(고구려계)와 섞여서 맥(貊)족과 한(韓)족의 문화를 융합한 [[백제]]가 출연한다.]으나 예맥 중 우리의 명백한 직계조상이 되는 '''한(韓)족'''은 애초부터 농경문화를 했으며, 특히 [[벼]]를 재배하여 [[쌀]] 중심의 농경문화를 만들었다. 한(韓)족이 가장 늦게 출현했고, 한(韓)족의 최초국가인 [[진국(국가)|진(辰)]]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찾기가 힘든고로 고대 조선민족계 민족들의 이름은 '예맥(濊貊)족'이 되었다. 예(濊)족과 맥(貊)족 사이에 문화적 경계가 워낙 애매해서[*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예맥의 문화인 [[온돌]]문화라던지 [[고려양|의복문화]]이라던지 하는 것을 한을 제외한 예맥은 서로 공유했다. 예(濊)족과 맥(貊)족을 나누는 기준은 사실 매우 애매하다. 맥(貊)족으로 구분하는 [[고구려]]가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이야기나 사실 맥(貊)족처럼 살던 [[동예]]나 [[옥저]]를 예(濊)족으로 분류한 다든지 말이다. 반면 한(韓)은 풍토가 너무 이질적이라 예맥과는 문화적으로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예맥(濊貊)족' 자체가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 고대기록에서도 예(濊)와 맥(貊)으로 기록했지 예(濊)족이나 맥(貊)족으로 기록하지 않았음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예맥족이라 부른 기록은 있어서 '예(濊)족'과 '맥(貊)족' 두 민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설 또한 있는데, 뭐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처피 예맥은 [[고구려]]에 의하여 통합되어서 고구려 중기만 가도 예(濊)족과 맥(貊)족은 완전히 융합하여 다른 민족으로 볼 수 없게 된다.[[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krcn&contentsId=GC05311885|참고]] 현대에 예(濊)족과 맥(貊)족으로 나누지 않고 예맥족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서구]]의 [[노르만족]][* 다른 민족들이 분화하는 역할을 했을 뿐, 사실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민족으로 봐야한다.], [[슬라브족]], [[게르만족]], [[라틴족]] 등의 여러 민족들이 짜잘한 여러 민족들로 나뉜 것과 다르게 고대 조선민족은 오히려 나눠져 있던 것이 통합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역사가 이렇게 흘러가게 된 당연한 이유는 우리민족이 다른 민족[* [[한족]]이나 북방 [[유목민족]]들, 대체로 한족들이 우리민족을 괴롭혔다.]들에게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해[* [[한나라]]의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해 멸망시킨 일이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등] 뺏기면서 우리민족의 영역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예맥한으로 나뉘어 있던 조선민족계가 처음으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맥(貊)족 인구가 대거 한(韓)족의 영역인 [[진국(국가)|진(辰)]]으로 내려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서에서는 [[준왕]]이 한(韓)왕을 자처했고, [[진국(국가)|진(辰)]]은 [[삼한]]이 되어 사라진다. 이 때부터 맥(貊)족과 한(韓)족 사이에 문화가 확실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이후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대규모 조선유민들이 남쪽의 [[삼한]]에 유입되는데, 이로인하여 삼한도 확연한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등, 맥(貊)족과 한(韓)족이 섞이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맥(貊)계인 [[백제]]는 한(韓)족의 농경문화를 받아들여서 [[논|벼농사]]를 지었다.백제 말이 되면 백제가 맥(貊)계인지 한(韓)족계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만주|북부]]에서는 맥(貊)족 국가인 고구려가 예(濊)족국가들[* 부여, 동예, 옥저 등]을 정복하여 예맥을 통합 융합시켰다. 한(漢)족에게 정복당하여 그들의 영향을 받아온 맥(貊)족들인 [[낙랑]]까지 정복해 예맥족을 깔끔하게 통일했다. 현대 한민족 문화의 틀이 완성된 것은 순수한 한(韓)족인 [[신라]]가 맥(貊)+한(韓)족 국가인 [[백제]]와 맥(貊)+예(濊)족 국가인 [[고구려]]의 남부를 정복하여 [[통일신라]]를 형성하면서 부터이다. 이때 북부에서는 예맥의 문화를 온존했던 [[발해]]가 형성되었고, 남쪽에서는 예(濊), 맥(貊), 한(韓)의 문화를 모두 가진 [[통일신라|대신라]]가 형성되었다. 이 덕에 예맥한의 모든 문화가 차등없이 혼합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렇게 통합의 근간이 완성된 이후, 훗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분열되어 [[고려]]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현대 한민족이 완성된다. [[발해]] 유민 중 일부는 [[돌궐]] • [[중원]] • [[거란]] • [[여진]] 일부로 동화[*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부터 대륙세력의 [[한민족]] 흡수시도는 계속 있어 왔다. 이러한 흡수시도가 계속 실패[* 대표적으로 [[낙랑]]의 조선계들은 한나라에게 오랜시간 지배당했지만 정체성을 유지했다.]하자 물리적으로 절멸하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한 이후에 그 유민들을 대거 대륙이나 다른 지방으로 끌고가서 흩뿌려 놓거나 죽게 만든 것이다. 유목민족은 더욱 극단적으로 행동해서 [[학살]], [[약탈]], [[강간]]같은 공격적인 행태로써 한민족계를 줄여나갔는데, 특히 [[발해]]유민들이 이러한 공격적 행태를 못 버티고 한반도로 대거 도망쳐 왔다. 하지만 덕분에 한민족의 문화가 일체 그들에게 넘어가지 았았고 이는 햔대에 중국역사와 중국문화에 고대 한민족의 문화가 일체 계승되지 않았음의 근거가 되었다.]되었지만 순수한 예맥계의 인구가 가장 많았던 [[대동강]] 유역은 결국 고려가 가져갔고 무엇보다 북방유목민족의 강압적이고 적대적인 동화시도[* 북방 유목민족의 한민족계 동화는 거의 병적인 집착처럼 이뤄졌다. 특히 만주를 향유하고 싶던 [[거란]]의 한민족계 박해는 심각했고, [[고려]]가 동포에 대한 박해를 참지 못하여 [[거란]]을 역사 내내 적대한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 발해유민들이 대규모로 남쪽의 고려로 넘어와 고려로 통합되었다.[* 남부의 한민족의 정통 국가인 [[고려]]가 성립한 이후에도 만주지역에는 동족들이 남아 있었다. 이러한 증거로는 [[원나라]]가 만주를 정복하고 고려를 굴복시킨 다음에 고려 [[심왕]]을 임명하여 만주지역의 [[한민족]]계 백성들을 관리시키게 한 것이 있다. 이후 조선 초중기까지 만주에는 한민족계가 어느정도 남아있었으나, 박씨 등 만주의 조선민족계가 광해군 시기에 망명을 오는 등 [[광해군]] 시기까지는 고대 예맥의 얼을 이어받은 한민족계가 존재했으나 [[여진족]]이 후금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멸수준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곧 청나라가 세워지면서 만주지역이 후방이되고 조선이 책봉국이 되면서 조선에서 간도로 넘어가는 인구가 생겨 한민족계가 만주지역에서 단절되는 일은 없다. 다만 고조선 때부터 이어져온 만주계 한국인의 역사는 계승되지 않는 것으로 봐야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예맥족이 우리 민족의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현대에서 새로 만든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났을 때, [[삼한]]지역에 내려가 저항없이 정착하여 한왕을 선언한 일이나, [[마한]]의 [[목지국]][* 한(韓)족계 도시국가였다.]이 자신과는 다른 분파인 맥(貊)계의 십제가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한강]] 유역에 정착할 때, 아무런 박해없이 지원하고 공동으로 한(漢)족의 지배를 받는 [[낙랑]]과 싸우려 했다거나 신라의 [[삼한일통]] 당시, 신라가 제시한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였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할 당시, 발해령 [[대동강]] 유역이 자발적으로 [[고려]]로 귀속한 사실들, [[발해]] 유민들이 거란의 박해를 피하여 고려로 피난을 온 사실들, 그리고 고려가 그들을 동족으로 인식하고 발해인들을 박해한 거란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한 사실 등은 [[한민족]]이 고대에 이미 존재했고, 이러한 의식이 계승되어 발전해 왔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근대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한민족]]이 수용하기 전까지 민족관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근본과 그들과는 이질적인 [[역사]]를 지녔음도 알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을 부르는 명칭인 한민족은 예맥([[濊]][[貊]])족의 시초인 [[고조선]]을 이은 것은 물론 예(濊)족의 대표적인 국가이자 한국에 전해지는 예((濊)족 문화의 원류로 여겨지는 [[부여]][* 예족의 핵심으로 여겨지고 있고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고조선 유민들을 일부 흡수했다.]와 맥(貊)족 계통이자 이들 부여의 정신적 후예인 [[고구려]][* 고조선계 유민들이 부여와 한사군에 흡수되었는데, 고구려가 부여계와 한사군의 조선계를 흡수했다.][* 후삼국 통일을 전후로 하여 [[평안도]], [[강원도]], [[경기도]] 북부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려]]를 건국해 같은 고구려계인 발해 유민들을 상당수 흡수한 뒤 신라를 합병흡수병하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신라가 혼합하지 못한 백제 유민들을 흡수으로써 [[한민족]]을 완성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백제]][* [[부여]]계(고구려로 넘어갔으나 고구려에 동화되지 못한 집단)와 고구려계, 그리고 정체성을 유지하던 고조선계 유민들이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정착하여 발전했으며, 한(韓)계인 마한의 안에 들어가 십제를 세웠으며, 남쪽에 내려온 예족과 맥족계를 전부 흡수하고 [[백제]]를 완성한 뒤, 마한을 역 흡수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절대 다수의 백제인들은 [[통일신라]]에 편입되어 그 삶을 이어갔다. 편협한 신라가 백제인들을 통합하는데 실패해 유민의식이 잔존해 [[후백제]]를 건국했으나, 결국 고려에 흡수된 뒤에는 [[고려]]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덕분에 백제인들도 고구려인과 신라인과 함께 한민족에 문화를 많이 남겨서 원류(源類)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한반도 북서부의 [[옥저]]와 [[동예]]를 모두 빠짐없이 계승했다.[* 이는 문화 뿐만이 아니라 혈통도 계승한 것이 확실하다.] 반면 [[유목민족|북방민족]]들과 중국의 [[한족]]은 예맥의 문화를 일체 계승하지 않았다..[* 예맥계 주민들을 혈연적으로 동화시켜 흡수한 경우는 있을지언정, 역사귀속 의식이나 문화계승이 이뤄진 사례는 전혀 없다. 애초에 그들이 예맥계를 흡수하기 보다는 탄압하여 숫자를 줄이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로 인하여 당연히 문화적 계승성이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예맥을 중국사나 만주사로 편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부흥운동]]이나 [[발해부흥운동]] 등 만주지역에서의 한민족계의 부흥운동이 실패할 때 마다, 해당 부흥운동의 중심이 된 집단이나 주민들이 중국이나 북방의 다른민족에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한반도]]의 한민족계 동포들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현대 한민족은 예맥의 직계이자 계승자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고, 북방 동포들에 대한 계승의식이 자리잡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과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인 흐름속에서 5000년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났으며, 현대 단일민족인 한민족이 존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맥족과 삼한족이 마치 종족조차 다른 듯 구분해서 말하는 일각의 습관은 엄밀히 잘못 된 것이다. 애초에 한(韓)도 예맥(濊貊)이 주류이다. 고조선 유민들이 부여와 마한, 변한, 진한([[진국(국가)|진국]])으로 상당수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나 유전적으로 보아 고조선에서 파생한 민족들이니 결국은 모두 한민족계라고 할 수 있고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