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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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이자 정치인.
독립유공자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근현대사 인물이다. 광복 후 김구와 염동진의 백색테러 단체인 백의사[19] 와 신익희, 유진산,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주요 간부를 맡은 대한민주청년동맹에서 감찰부장으로 활동하며 백색테러를 자행한 테러리스트, 정치깡패로 이름을 알렸다. 6.25 전쟁 이후에는 제3대 민의원 선거 및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거물급 정치인은 되지 못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까지 이어졌던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즉,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인 셈이었으며 김두한은 본인의 이익, 감정, 정의감에 따라 여러 활동을 했다. 그는 독립군이나 투사만큼 특출나지는 못했고 한편으로는 잘못된 행동도 많이 한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의 한을 풀어주고 통쾌함을 준 적도 있는 인물이다. 이승만, 김구 등 거물 정치인들이 시대의 흐름을 주도한 사람이라면 김두한은 그들이 주도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갔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흐름에 언제나 예스맨처럼 따라가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국회의원 재임 중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에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반대 의사를 표현해[20] 4.19 혁명에 참여한 것과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여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벌여 내각 총사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등 반독재의 모습과 사망 직전까지 꼬박꼬박 기부를 행한 선행이 세간에 유명해져서 여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박문영 작사 · 작곡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다른 인물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김두한은 정치깡패 시절 여러 차례의 백색테러, 살인, 학살[21] 등 각종 중범죄를 저지르고 과거에 친구였던 정진룡을 살해한 사건으로 법정에 서서 그간의 행적들로 인해 사형까지 선고받는 등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는 인물이다. 확실한 것은 김두한은 공과 과가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점,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온갖 역사적인 인물과 극히 밀접한 관계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점이다. 관계가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지만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승만이 군직을 주거나 자유당[22] 이나 민주당[23] 에서 우리와 함께 하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의 관계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 때문에 역사적 인물 중에서 극단적으로 미화, 과대평가[24] 되거나 극단적으로 헐뜯어서 과소평가[25] 되기 쉬운 인물이다.
또한 정치인이 아닌 싸움꾼으로써 평가할 때, 그가 당대의 압도적 최강자라는 주장이 있으나, 공식적인 매치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불분명한 증언들에만 의존해야 하는 영역이고 김두한 본인의 발언은 워낙 허풍이 강하기 때문에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다만 조직 보스임에도 싸움 실력이 영 별로였다는 증언이 많이 나왔던 이정재에 비하면 김두한은 잇뽕[26] 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방에 사람을 기절시켰다는 무용담 증언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만큼, 허풍만 떠는 빈강정 수준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27]
사실 김두한에 대한 극단적인 미화나 과소평가는 어디까지나 김두한 자기 스스로 부려댔던 허풍과 엮인 사건들로 인해 실제보다 더 거물급 인물로 보는 데서 시작된 것일 뿐이다. 그는 자기 말마따나 정의감에 불타는 협객이 아닌 그저 시정잡배 양아치에 불과했고, 당시 사람치고는 싸움 좀 하고 말빨이 좋아 운 좋게 정치인 자리를 얻었을 뿐이었다. 막말로 혼란스러웠던 근현대사에 영합해 정계에 목숨줄이라도 붙였던 것이지, 현대 같았으면 정치인 자리는커녕 어디 뒷골목에서 허세나 부려대다 소리없이 살해당했을 졸부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정치 말년에 일으킨 국회 오물 투척 사건 정도를 제외하면[28] 한국 역사 및 정치사에서 김두한이 남긴 족적은 그냥 완전히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별볼일없는 일일 뿐이며, 근현대사를 논할 때 김두한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연구대상이 될 위인들은 무수히 많다.
3.1. 긍정적 평가[편집]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30]
"뭐랄까, 유교적으로 좋다는 가치, 예의라든가 성실이라든가 그런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죠. 한자로 표현하자면 '조잡하다' 할 때의 粗(거칠 조)자 이미지,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일단 강했죠. 野(들 야)자가 갖는 이미지도 있었고. 사람들이 흔히 '깡패'하면 떠올리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야비하다' 할 때의 그 卑(낮출 비)자일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건 없었어요. 粗(조)하고 野(야)하지만 卑(비)하지는 않았다고 할까요. 원래 제대로 된 큰 깡패는 야비하지 않은 법이거든요. 간단치는 않았어요. 왜 설명할 때 그냥 한 문장으로 하면 안되고, '그러나' 하면서 주석이 붙어야 되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따를 만한 표상이냐 하면 그건 아니지요. 협객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웅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꼭 한 명쯤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길거리 보통 깡패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죠. 다양한 지점에서 복잡한 의미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입 바른 소리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죽어 안타깝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4. 논란[편집]
4.1. 김좌진 친자 논란[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김좌진 친자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 여부 관련 논란[편집]
김두한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 측에 붙어서 부역을 한 적이 있다.또한 독립투사 여운형을 습격한 적도 있다.다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한 목록에도 김두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친일인명사전도 일제 부역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즉, 강제적인 징역이나 징병, 그리고 이를 피해 대체부역한 사람들이 제외되었다. 그래서 김두한을 친일파 목록에 삽입하면 친일파 기준이 급격히 내려가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는 몇 배로 두꺼워진다. 이 점은 김인호의 《태평양전쟁과 조선사회》(2014)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데 일제 부역자로 분류될 민중들이 많다.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숭실사학 2015, vol., no.34, 통권 34호 pp. 255-294 (40 pages))에선 김두한도 그런 인물로 보이는데, 일제의 부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해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B,C급 전범 판정을 받은 조선인도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 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한다. 2차대전 조선인 전범은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당연히 위의 사전이나 보고서에서 제외되었다. 김두한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면 형평성에 심각한 결함이 생기는 것이 문제다.
5. 기타[편집]
- 김두한은 학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머리는 매우 좋았다. 실제 증언 심영을 저격할 때 미행했는데 머리를 교묘하게 써서 종로구와 중구의 정확하게 경계선인 광교에서 저격을 해 중부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중 어디의 담당 구역인지 애매하게 만들어 놓았다. 권모술수에도 매우 능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깡패들을 죄다 잡아죽였는데 김두한은 이정재, 임화수 등이 잡혀 죽는 와중에도 자기 조직을 반공청년단으로 바꿔버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협조하는 등 놀라운 처세술을 보여 살아남았다. 물론 이 때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이었기는 했으나 명백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생각이 다른 쪽이였으며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프락치까지 심어 잡아넣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 때 죽지 않은 것은 처세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33] YS도 김두한을 "머리, 언변은 좋은데 글을 잘 못 읽는 사람[34] "이라고 평가했다. 노변야화 출연 당시에도 그 화려한 언변 덕분에 청취자의 반응이 매우 좋아서 동아방송에서 당초 기획보다 방송기간을 늘린 게스트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머리가 좋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정치운은 그리 잘 풀린건 아니었다.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는 했다만 정작 자유당에 있었을 때는 일방적인 거수기 노릇을 거부하고 스스로 박차고 나왔으며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도 했다가 결국 거부당하고 이후로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된 뒤, 마지막엔 국회 오물 투척 사건[35] 에 나서면서 반독재 투쟁에 나선 인물로 조명받으면서 거물급으로 성장하나 싶었는데, 신민당에 영입되기까지 하고도 3선에 실패[36] 하며 재기하기도 전에 사망[37] 했기 때문에 거물급 인사로 성장하지 못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는 성공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반공을 하면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저항한 양심적인 야당 인물로 명예롭게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끝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반대로 아버지 김좌진은 태어날때 기준으로 흙수저였던 김두한과 다르게 은수저로서 시작했으나, 말년에는 재만동포들에게 독립자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학살하여 동포들의 증오를 받았고 결국엔 자기 부하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는 빼도박도 못하는 김좌진의 흑역사로 남았다.
- 그의 행적과 별개로 가족에게 정말로 소홀했던 건 사실이어서 김을동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할아버지 김좌진 명의로 나오던 국가유공자 연금을 기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제서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하고, 이후 김을동은 자신의 아들인 송일국에게 할아버지 김두한은 훌륭한 분이셨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송일국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지만[38]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할아버지를 동경했으며 배우로 데뷔한 후에는 김두한을 연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야인시대 기획 당시 송일국에게 청년기 김두한 역 제의가 들어왔지만[39] 어머니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청년기 김두한 역은 안재모에게 돌아갔다.[40]
-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 자국이 심했다.
- 현역 시절 별명은 '잇뽕(한방)'이었는데, 노변야화 출연 당시 김두한 스스로의 증언에 따르면 누구든 자신에게 한 대만 맞으면 뻗었기 때문이라고 한다.[41] 발차기 또한 상당히 잘 썼다고 하는데 특기가 어깨 짚고 양발차기. 발차기도 잘 썼지만 실제 김두한이 1대1로 싸움을 할 때 많이 썼던 건 바로 태클을 걸고 마운트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박치기를 하거나 파운딩을 해서 끝냈다고 한다. 김두한 본인이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남긴 증언을 들어보면 그가 몸무게를 이용한 양발차기(드롭킥)과 태클에 이은 마운트 모두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사람이 체격적 우위를 이용하기 좋은 기술들이다. 반면 구마적 같은 경우 김두한이 주장한 자신의 몸무게 25관(약 93.75kg)[42] 보다도 월등히 큰 30관(약 112.5kg)이었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잡히면 다룽다룽 메달렸다 죽을 정도"였기 때문에 "휙 뜨면서 두 발로 안면을 내질러" 거꾸러졌다 일어나는 것을 눈과 코 사이 급소를 쳐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구마적이 자신보다 크고 힘이 셌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하지 않고 몸무게를 실은 드롭킥을 날린 다음 헤롱거리는 상대의 안면을 가격해 쓰러뜨린 것. 본인의 묘사대로라면 덩치가 큰 장사 체형임에도 굉장히 민첩하고 격투 감각이 뛰어난 사람인 듯 보인다. 실제로 김두한이 살아 생전 저지른 악행들은 모두 폭행 사건들이라는 점에서 '인성이 어땠냐,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냐'와는 별개로 싸움을 매우 잘 하는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 위에 언급한대로 그의 주력기는 발차기지만, 실제로는 주먹도 핵주먹급이였고 박치기도 잘썼다. 게다가 잘 언급되진 않았을 뿐, 구마적이나 신마적, 김관철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괴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구마적의 부하 뭉치[43] 와 대결했을때, 뭉치는 씨름에 능했고 구마적도 인정할만큼 힘이 장사였는데 김두한은 뭉치와 맞붙었을때 뭉치와 힘을 겨루어도 뒤지지 않을정도였다고 한다.[44] 젊었을 때는 국회의원 시절 100kg에 육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80킬로 이상은 나갔던 근육질의 거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두한이 가장 뛰어났던 점은 상대와 맞붙었을때 심리전과 함께 상대의 공격 스타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약점을 간파하여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는 등 상당히 두뇌회전이 빨랐다.[45]
- 김두한은 회고록이나 라디오 방송 등에서 자신이 역사적으로 굵직한 인물들과 밀접하게 엮였다며 사실 여부를 따질 수 없는 이야기로 온갖 양념을 쳤다.[46] 얄궃게도 김두한 본인은 사망한 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이 이름을 팔아먹는 유명인이 되었는데 김두한보다 한참 어리면서 자신이 김두한의 보스였다던 거지왕 김춘삼이 대표적인 예. 김두한과 비슷한 연배인 김동회나 종로꼬마 이상욱 역시 이런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47]
- 김두한의 구술과 회고록은 당대 그의 인기 만큼 그 분량이 풍부하나 질이 매우 떨어져 사료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다. 이는 그의 언행이 거칠어서가 아니라, 최고위급 정치인들과 죄다 인연이 있었다는 피상적인 허풍과 역사적으로 있으나 없으나 그만인 자잘한 사건들을 자랑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부 사실이라 치더라도 역사적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논쟁에 붙이는 연구자도 없으며, 그런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쓸 시간에 허풍의 당사자인 고위 정치인을 직접 연구하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역시나 꽤나 재미가 있기 때문에 그를 바탕으로 수많은 창작물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 일본,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해외에서는 전두환과 종종 오기되기도 한다. 金이 全과 비슷하기도 하고, 둘다 두(斗)를 쓰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 발음으로도 성씨를 떼고 이름만 놓고보면 매우 비슷하기에 간혹 김두환, 전두한 등으로 잘못 얘기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편이다. 이런 것 때문인지 윤민혁의 홈페이지 화이트 데스 소설게시판에 한제국건국사 2차 창작물에서는 전두환이 김좌진의 양자로 들어가 부자지간이지만 원수지간이 된 김두한에 대적하는 카운터 파트가 되었다는 신문기사 형식의 창작도 있다.
- 증언에 따르면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만나자마자 욕지거리를 퍼부었고 휘하의 부하들을 보내 전력을 탐색한다. 하지만 거구의 부하가 시라소니의 주먹 두 방에 뻗어버리고 만다. 증언자는 김두한이 시라소니와 한 판 붙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지만 김두한은 시라소니를 "형님'으로 부르며 사과를 한다. 시라소니와 김두한 세기의 격돌은 어땠나?
- 음성 기록이 남아있다. 개중엔 그 유명한 심영 저격 사건을 진술한 인터뷰도 있다. 유튜브에 꽤 올라와 있으니 궁금하면 직접 찾아서 들어보자.
6.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