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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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양산시 CI(1977-2001).svg 경상남도 양산군수
관선
관선
해방

초대
지영진


2대
오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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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榮璡, Yeong-jin, Ji
1898년 12월 8일 ~ 1972년 2월 22일 (향년 73세)

1. 개요
2. 생애
2.1. 정치 활동
3. 여담
4.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1]. 창씨명은 이케하라 세이이치(池原誠一)[2].

박봉식서울대학교 총장이 그의 조카사위이다.


2. 생애[편집]


1898년 12월 8일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북부동(現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경성부 보성고등보통학교(現 서울 보성고등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무역상으로서 경상남도 부산부 본정4정목(現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4가)에서 일광상회(一光商會)를 경영했고, 1919년 4월에는 윤현진과 함께 의춘상행(宜春商行)이라는 무역회사를 창립했다. 이를 통해 광복 직전까지 수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3] 1919년 8월 당시 안희제가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에 50주를 갖고 있던 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 1920년 1월 14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발기인총회에 주주 겸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8년 이후 김철수(金喆壽) 등이 신간회 양산군지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자,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해 1929년 2월 20일 신간회 양산군지부 임시집행부 부회장을 맡는 등 공헌했다. 또한 1929년 3월 양산협동조합 발기인 위원에 선임되었고, 1930년 4월에는 창립위원장이 되어 양산협동조합 설립에도 공헌했다. 그러나 이후 전병건(全秉健) 등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신간회와 양산협동조합을 장악하게 되면서 당시 농지 800여 마지기를 소유한 지주 계층이었던 지영진은 신간회와 양산협동조합의 임원을 맡지 못했고, 결국 1930년 5월 두 조직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1933년 9월 양산수리조합 대표로서 경상남도청에 풍수해 대책을 요구했고, 1936년 4월 25일 경상남도 양산군 물금면(現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132번지에 가촌토지주식회사가 설립되자 이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부산심리원 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1938년 6월 1일 부산세무서 소득조사위원에도 임명되었다. 1941년 3월 31일 池原誠一(이케하라 세이이치)로 창씨개명했다. 1943년 3월 16일부터 1945년 3월 31일까지 양산면장을 역임했다.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해 양산군지부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미군정기에는 1945년 10월 24일부터 1946년 4월 20일까지 초대 양산군수를 지냈고, 경상남도청 고문에 위촉되기도 했다. 이후 양산금융조합 조합장을 지냈다.


2.1. 정치 활동[편집]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남도 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정진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자 전국의 채석장, 공장, 광산을 사들이면서 일약 재벌로 도약했다. 1949년 10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지부 간부 선거에 부위원장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30일에는 경상남도 부산시 영선동(現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1821번지에 있던 일본경질도기 주식회사를 4억 5,000만 환에 불하받아 대한도기주식회사로 개칭했고, 취체역 사장에 취임했다. 이 밖에 동국수산회사 이사도 겸임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 및 양산군당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그러나 상대 후보의 등록을 방해한 뒤 치러진 부정선거라는 이유로 선거 소송이 제기되어 결국 당선무효 판결을 받았다. 이후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당 서순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제4대 국회에서 상공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60년 전직 대한도기주식회사 상무이사이자 부산내화공업 대표였던 최유상으로부터 횡령 혐의로 고소당했고, 소송에서 패소해 최유상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1961년에는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허정신정당에 몸담았다.

1972년 2월 22일 오전 9시 30분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계동 96-12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군[4])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9,052표 (40.61%)
낙선 (2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군[5])

[[무소속|
무소속
]]

9,064표 (43.22%)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군[6])


무투표 당선
재선
1959년 재보궐선거 (경남 양산군[7])
17,736 (71.38%)
당선 (1위)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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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지털양산문화대전[2] 1941년 4월 8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4260호[3]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구포동(現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구포역 인근에 있던 근산병원을 중간 집결지로 이용했다고 한다.[4] 제13선거구[5] 제14선거구[6] 제22선거구[7] 제22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