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진(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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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윤현진.jpg


명구(明九), 의백(義伯)

우산(右山), 석산(石山)
본관
파평 윤씨(坡平)
출생
1892년(고종 29) 9월 20일
경상도 양산군 상북면 소노동
(현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사망
1921년 9월 16일[1] (향년 28세[A])
중화민국 상해현 보창로 보강리 54
(현 중국 상하이시 징안구 바오창로)
학력
사립 구명학교[2] (졸업)
메이지대학 (법학 / 중퇴)
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장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4호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92년 9월 20일 경상도 양산군 상북면 소노동(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의 만석꾼 집안에서 아버지 윤필은(尹弼殷, 1861 ~ 1903)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윤홍석(尹洪錫, 1843 ~ 1902)[3]은 경상도 동래도호부 출신으로 1892년 8월 8일 사천현감(泗川縣監, 종6품)에 제수되어 1893년 3월 10일 신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아버지 윤필은은 1886년(고종 23)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19위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권지 성균관 학유(學諭, 종9품),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 중추원 참상(參上) 원외랑(員外郞), 장례원 우장례(右掌禮), 비서원 승(秘書院丞), 시종원 분주사(侍從院分主事), 동래감리 겸 동래부윤(東萊監理兼東萊府尹), 중추원 의관(議官) 등을 역임했던 관료 출신이며, 첫째 작은아버지 윤명은(尹命殷) 또한 대한제국중추원 주사(主事), 경상남도 관찰부 주사(慶尙南道觀察府主事), 고성군수(固城郡守), 울산군수 겸 공립 울산보통학교장 등을 역임했던 관료였다.

아버지 윤필은 대까지는 경상도 동래도호부에 거주했으나, 윤필은이 바닷가에 살면 벼슬을 할 수 없다는 당시의 평판으로 인해 1886년 자신이 문과에 급제하자마자 그 길로 양산군 상북면 소노동으로 이주하여 새롭게 정착했다. 윤필은은 그곳에 대저택을 짓고 양산군에서 동래도호부 좌이면 구포리까지 매일 마부를 보내 장을 보게 하여 식사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기에, 윤현진은 이런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

그는 7살 되던 1899년 고향 소토리의 글방 만성재(晩惺齋)에 입학해 한문을 배웠고, 10세 때 사서삼경제자백가의 서적에 정통하게 되었다. 15세 되던 1907년에는 둘째 작은아버지 윤상은(尹相殷)과 셋째 작은아버지 윤영은(尹永殷) 등이 설립한 사립 구명학교(龜明學校)에 입학해 이듬해인 1908년 9월 1회로 졸업했다. 이후 작은아버지 윤상은과 함께 구포저축주식회사(龜浦貯蓄株式會社)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1912년 6월 구포은행으로 정식 출범했다.

1909년이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해외의 여러 인사들을 만나며 견문을 넓혔고, 1914년 봄 일본 도쿄로 유학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1915년 봄 김철수(金錣洙), 장덕수, 김철수(金喆壽), 전익지(全翼之), 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도쿄 인근의 다마가와(多摩川)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심으로써 열지동맹(裂指同盟)을 맺었다. 이들은 이 동맹을 통해 장차 상하이,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서로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1915년 10월부터 1916년 2월까지 제5기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를 역임하면서 『학지광』 잡지 간행에 관여했다.

1916년 봄에는 열지동맹원들을 비롯해 조선인 유학생 김명식(金明植)·김양수(金良洙)·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정노식(鄭魯湜), 중국인 유학생 황각(黃覺)·나활(羅豁)·등결민(鄧潔民)·사부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팽화영(彭華榮) 등 40여 명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자'는 목적 아래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고,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던 같은 처지의 인도 및 베트남 출신 유학생들을 가입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집회 연설, 각종 단체 조직, 독립운동 자금 모금 및 『한국통사』 등 반일서적 배포 등의 활동을 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대학을 중퇴한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뒤 경상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동청년단에 가담했으며, 백산 안희제가 세운 백산상회의 경영에도 참여했다. 또한 고향 양산군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1919년 11월 백산 안희제 중심으로 전도유망한 조선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돕던 기미(己未)육영회의 발기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교육활동에도 힘썼다.

그 뒤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으로 근무하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일어나자 은행을 그만두고 같은 달 21일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에 도착한 뒤 독립임시사무소 직원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내무위원이 되었고, 9월 18일에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경상도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다.

파일:임시정부 국무원 - 신익희, 안창호, 현순 (앞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뒷줄)1.jpg
(사진 설명: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이밖에도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에서 대한적십자회 회원을 모집하자 31대 대원으로 입대했고, 1920년 1월 김구·손정도·김철(金澈)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비밀결사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 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20년 2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위해 독립신문사의 주식을 모집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주로 경제 쪽 일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1919년 9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공포하고 재무총장에 이시영을 임명할 때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1921년 2월 22일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 고향에 있던 재산들을[4] 임시정부에 기증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던 임시정부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한편, 윤현진은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1920년 5월 14일 국무원 연석회의에서 비서장 김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차장들과 함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런 의지를 보여야 불신임안이 관철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국 총판으로 있던 안창호는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관계를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차장내각책임제를 제안했다.

그러나 윤현진과 당시 내무차장 이규홍(李圭洪)을 비롯한 차장들은 이를 거절했고, 그해 6월 7일 국무회의에서 다시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 및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끝내 반려되었다. 그 뒤 1921년 2월 이후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해 개조파와 창조파가 대립하자, 안창호·여운형·김규식 등이 결성한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원으로서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에 속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21년 9월 16일 중화민국 상하이시 보창로(寶昌路)[5] 보강리(寶康里) 54에서 과로로 별세했다. 향년 29세.[A]


3. 사후[편집]


사후 1923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받고 공소불가 처분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8.15 광복 후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중화민국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5년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고, 그해 6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2022년 1월, 양산시에서 그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윤현진도서관을 개관[6]했으며, 2023년 8월 15일 양산시립독립기념관을 개관해 입구부터 의자에 앉아있는 피규어를 만들어 두며 그를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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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8월 15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8월 16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A] A B 29세 생일을 4일 앞두고 별세했다.[2] 현재 구포초등학교.[3] 이명 윤홍(尹洪), 윤석홍(尹錫洪). 장남 윤필은의 문과방목에는 尹洪으로 등재되어 있다.[4] 그는 망명 중이었으므로, 미국 선교사를 통해 재산들을 상하이로 옮겨왔다고 한다.[5]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징안구(靜安區) 바오창로(寶昌路).[6] 기존 양산도서관을 리모델링 한 뒤 명칭을 바꾸어 재개관한 것으로, 이후 양산도서관 명칭을 가진 도서관은 물금신도시 일대에 신축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