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수(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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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width=20%> 제11대
현오봉 ||
||<width=20%> 제12대
김용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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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흥

제41대

이기흥





대한민국 제6·7·10대 국회의원
김택수
金澤壽 | Kim Taek-su


파일:김택수 원내총무.png

출생
1926년 9월 10일
경상남도 김해군
사망
1983년 7월 17일 (향년 56세)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본관
김해 김씨
배우자
최숙희
자녀
4남 2녀
학력
경남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불교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6, 7, 10
경력
제6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 김해군)
제6대 국회 건설위원장
제7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 김해군)
대한체육회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 김해군 - 양산군)

1. 개요
2. 기타
3. 선거이력
4. 둘러보기



파일:external/opds.joins.com/htm_2008102801220930003600-001.JPG.tn_350.jpg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직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축배를 드는 모습[1]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체육행정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 김씨.

1926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났다. 한일합섬 창업주 수당 김한수의 친동생이다. 경남고등학교(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건설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김종필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선 개헌 추진 초반에 반대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결국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영병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같은 해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1978년까지 재임하였다.

1977년 12월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한국인으로는 이기붕(1955~1960), 이상백(1964~1966), 장기영(1967~1977)에 이어 네번째였는데, 마침 1977년 4월에 장기영씨가 현직 IOC 위원으로 세상을 떠난 관계로 한국으로서는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도 6년만에 세상을 떴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중선거구제였는데 선거 유세에서 자신을 주연배우에, 나머지 후보를 조연배우에 비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하지만 IOC 위원으로 계속 활동하였으며,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볼 수 있었다. 1983년 폐암으로 별세하였다.[2]

공화당 원내총무 시절 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를 고교 후배인 김영삼이 맡았다. 김택수는 김영삼보다 경남중학 입학이 1년 빠르고,졸업은 3년 빠르며 졸업기수로는 2회 빠르다. 이는 중학과정 4년이 중고등 6년과정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3]

2. 기타[편집]


  • 40대부터 백발이라 6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실제론 환갑까지도 살지 못했다.
  • 서울대학교 법학도서관 건물을 지어서 기증하였다. 도서관 건물의 명칭이 국산법학도서관인데, 국산이 바로 김택수의 아호.

3.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39,713 (59.53%)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
62,591 (72.09%)
재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김해군-양산군)
68,324 (52.42%)
3선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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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가 사망 2년전의 모습인데, 얼핏 보면 옆에있는 왕회장보다 더 늙어보인다(...)[2] 그가 죽은 후 IOC 위원은 1984년 '피스톨 박' 박종규가 선임되었으나 다음해 바로 별세하였고, 1986년에는 김운용이 선출되어 2005년까지 장장 20년을 재임하였다.[3] 이는 김무성(24회, 여당) - 문재인(25회, 야당)이 후에 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