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수(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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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체육행정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 김씨.
1926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났다. 한일합섬 창업주 수당 김한수의 친동생이다. 경남고등학교(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건설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김종필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선 개헌 추진 초반에 반대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났다. 결국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영병에 밀려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같은 해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1978년까지 재임하였다.
1977년 12월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한국인으로는 이기붕(1955~1960), 이상백(1964~1966), 장기영(1967~1977)에 이어 네번째였는데, 마침 1977년 4월에 장기영씨가 현직 IOC 위원으로 세상을 떠난 관계로 한국으로서는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도 6년만에 세상을 떴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중선거구제였는데 선거 유세에서 자신을 주연배우에, 나머지 후보를 조연배우에 비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하지만 IOC 위원으로 계속 활동하였으며,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볼 수 있었다. 1983년 폐암으로 별세하였다.[2]
공화당 원내총무 시절 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를 고교 후배인 김영삼이 맡았다. 김택수는 김영삼보다 경남중학 입학이 1년 빠르고,졸업은 3년 빠르며 졸업기수로는 2회 빠르다. 이는 중학과정 4년이 중고등 6년과정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3]
2. 기타[편집]
- 40대부터 백발이라 6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실제론 환갑까지도 살지 못했다.
- 서울대학교 법학도서관 건물을 지어서 기증하였다. 도서관 건물의 명칭이 국산법학도서관인데, 국산이 바로 김택수의 아호.
3.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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