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태(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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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무임소장관 (1975~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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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신경식
제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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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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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제1무임소장관
김용태
金龍泰 | Kim Yong-tae


파일:김용태 1926.jpg

출생
1926년 12월 9일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
(현 대전광역시 서구 산직동)
사망
2005년 4월 2일 (향년 78세)
본관
김해 김씨
재임기간
제4대 제1무임소장관
1978년 12월 23일 ~ 1980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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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이영규
자녀
2남 2녀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기독교 (개신교)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6, 7, 8, 9, 10
경력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초대 비서실장
충무공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제1무임소 장관
동서문화교류협회 회장
신민주공화당 상임고문
신민주공화당 선거대책위원장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겸 최고위원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 호는 대덕(大德), 별칭은 YT 이고 별명은 공화당 사무총장직 등 굵직한 직책을 맡아 두목이라 불렸다.


2. 생애[편집]


1926년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현 대전광역시 서구 산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다. 김종필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동창으로 인연을 맺었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했다.

1950년 6.25 전쟁 때는 김종필을 통해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다.[1] 이러한 인연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재정을 지원하여 참여하였다.[2]

쿠데타 이후 김용태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고문, 중앙정보부고문 등을 역임하며 구속된 기업인들의 석방, 울산공업센터 건설, 전경련 창설 등에 수완을 발휘 하여 이병철 회장으로 부터 '경제재건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덕군-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4년 동안 민주공화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65~1966년까지 초대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까지 맡았다. JP와는 막역한 사이로 민주공화당 중진 의원이었다. 여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당에 대해서 쓴소리와 직언을 많이 했다. 박정희도 김용태를 크게 신임하였다.[3]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김종필과 친하다는 이유로 정권 내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성곤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등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1968년에는 국민복지회라는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가 그 모임이 박정희의 후계자로 김종필을 옹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복당 후에도 3선 개헌 때도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박정희의 요청으로 찬성으로 돌아섰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에 복당하여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통일당 박병배 후보[4]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 초까지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임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말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부정축재 의혹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치규제를 당했다. 1987년 정치규제에서 풀리면서 김종필의 권유로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상임고문과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2005년 4월 2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3. 매체에서[편집]


MBC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정한헌이, 제4공화국에서는 노주현이 그를 연기했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대덕군-연기군)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30,017 (43.13%)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대덕군-연기군)
53,659 (65.87%)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대전시 을)
39,933 (55.86%)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대전시)
54,208 (37.57%)
당선 (1위)[5]
4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대전시)
62,924 (28.90%)
당선 (2위)[6]
5선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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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는 박상희의 차녀 박계옥과 결혼했다고 기재되어 있었지만, 그 김용태(金龍泰)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 이 김용태와는 이름과 한자만 똑같은 동명이인이다.[2] 박정희가 40만환, 김종필이 90만환을 내 쿠데타 자금을 대었는데 김용태는 무려 150만환을 내었다.[3] 박정희는 김용태가 보스기질이 있다며 “두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4] 재검표로 당선.[5] 민주통일당 박병배 후보와 동반 당선.[6] 무소속 임호 후보와 동반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