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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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58대 내무부 장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측근 인사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차남 최제완도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35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울산군 서생면 위양리 위곡마을(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위양리 위곡마을)에서 아버지 최위식(崔渭植, 1906. 4. 9 ~ 1993. 8. 3)과 어머니 영양 천씨(1900 ~ 1949. 1. 27)[3]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신암국민학교(現 서생초등학교)[4] , 부산원예중학교[5] , 부산공업고등학교(30회) 토목과,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 6.3 항쟁 등에 참여하며 야당에 투신하였으며 김영삼을 따르는 상도동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상도동계 내부에선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김동영과 함께 좌동영-우형우라고 불렸다.
2.1. 정치 활동[편집]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김녹영, 김한수, 김상현, 나석호, 김경인, 조윤형, 조연하, 이종남,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등과 같이 모 군부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원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이후락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6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신민당 당기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5.17 내란 직후 김동영 등과 함께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정치규제를 당했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태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심완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CIA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에게 미국을 질책하며 사태가 악화되면 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6] 까지 하겠다고 선언하여 놀란 지부장이 말릴 정도로 민주주의를 크게 열망했다.[7]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동래구 을(현재의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0년까지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가족들과 김영삼의 간곡한 부탁으로 철회, 결국 합당에 참여하게 된다. 그 해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동력자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김동영의 뒤를 이어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산악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아들의 경원전문대학 부정입학 건으로 바로 사퇴하였다. 같은 해 말부터 1994년 말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내무부 장관 임기 중인 94년 3월에는 경찰이 소유한 동교동 주택 3채의 매각을 지시했는데, 이 주택은 경찰(치안본부)이 김대중을 감시하기 위해서 매입한 주택이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한국당의 차기 대권주자인 9룡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될 정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대선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신한국당 대표로 내정되어 대선 후보 경선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앞둔 1997년 3월 11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것이 정치인 최형우의 마지막이었다.[8] 결국 당 대표는 이회창이 임명되었고, 최형우는 국회의원직을 유지했지만 건강이 워낙 안 좋았던 탓에 남은 국회의원 임기 3년동안 제대로 된 의정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민주계 내에서 가장 정치적 지분이 컸고 당내 세력도 확고했던 최형우가 사라지면서 신한국당 대선 경선 국면에서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고[9] , 결국 이회창이 대선 후보가 되었으나 본선에서 패배한다.
2.2. 정계 은퇴 후[편집]
거동과 의사소통조차 불편한 상태였기 때문에 2000년 16대 총선에 불출마하며 그대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의 고희연에서 잠시 언론에 노출되기도 했는데,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겨우 할 수 있는 정도. 본인의 의지 덕분인지 지팡이를 동반한 보행 및 짧은 대화가 될만큼 건강이 상당히 회복했다.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조문했는데, 정치적 인생을 나눈 동지였기에 크게 오열했다고 전해진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마자 곡을 하며 울었고 영정 앞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주저 앉았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빈소에 와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316명의 명단에 포함되었다.#
2023년 4월, 국가보훈처는 최형우를 4.19혁명공로자로 인정하였다. # 이로 인하여 그의 소원대로 사후에 4.19민주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 경주 최씨 집성촌이다.[2] 사성공파(司成公派)-낙선당공파(樂善堂公派) 20세 형(炯) 항렬. #[3] 천병석(千炳奭)의 딸이다.[4] 1964년 서생국민학교로 개칭됨.[5] 1947년 동래원예전수학교 → 부산원예중학교, 1953년 부산원예고등학교 병설중학교 → 1969년 부산원예고등학교와 분리, 부산내성중학교로 개칭됨.[6] 알다시피 광화문 앞에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있다.[7] 리더인 김영삼의 스타일을 닮은 것인지 상도동계는 말보다 행동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형우가 으뜸이었다. 그야말로 우직한 상도동의 행동대장이라고 할만했다.[8]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하여 당대표를 맡는 대신 대권을 포기하라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뇌졸중이 왔다는 등의 풍문이 있는데, 최형우 본인은 이를 부인했다.#[9] 최형우의 친동생 최형호는 이회창 후보의 탈YS 노선에 반발하여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이 일로 인해 잠시 형제 간에 관계가 멀어졌지만 대선 이후 관계를 회복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99년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10] 울산시, 울주군[11] 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12] 울산시, 울주군, 동래군[13] 민주공화당 김원규 후보와 동반 당선[14] 울산시, 울주군[15] 무소속 이후락 후보와 동반 당선[16] 울산시, 울주군[17]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3당합당)[18] 민주당과 신설 합당[19] 신한당과 신설 합당[20]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1]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